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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손등룡기13 동수(桐藪)계곡

작성자양승철문양공후|작성시간21.08.24|조회수49 목록 댓글 0

왕건이 궁예의 태봉제국을 무너뜨리고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리제국(高麗帝國)을 건국한지도 어언 9년이 지났다.

왕건은 지난 9년 동안 고리제국(高麗帝國)의 내치(內治)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부흥시키는데 주력하여 고리제국(高麗帝國)의 내실(內實)을 단단히 다져왔다.

그러나 한반도 통일을 놓고 숙명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남쪽의 견훤의 백제제국(百濟帝國)과 비교하면 아직도 인구는 1/3,경제력은 1/2에 불과하였다.

고리제국의 북쪽에서는 거란에서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라는 대영웅(大英雄)이 나타나 거란 전체를 통일하여 요(遼)제국을 건국하고 황제가 되었다. 기존에도 강력했던 거란의 무력은 힘을 한 곳에 모을 수 있게 되어서 몇 배 더 강력해졌다.

요(遼)제국 황제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는 작년에 드디어 발해제국(渤海帝國)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멸망한 발해제국의 황족 대광현, 대도수가 이끄는 발해유민 수십만이 고리제국(高麗帝國)으로 피난 왔다. 왕건은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고리제국(高麗帝國) 북쪽 지방에 정착시켰다.

이들 발해유민들은 기마술에 능했으므로 왕건은 이들을 중심으로 친위 기병부대 일만 명을 새로 양성했다.

호족들의 사병(私兵)이 아닌 강력한 친위 중앙군(親衛 中央軍) 기병부대가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왕건은 이 기병부대를 병법서에서나 보던 복합 기마군단으로 만들었다. ‘중무장 개마기병’ ‘창기병’ ‘궁기병’ 등이 포함되어 있어, 대규모 기병 접전에 적합한 체계화된 기마군단이었다. 장기적으로는 장차 벌어질 거란과의 본격적인 기마전에 대비한 것이기도 하고, 보병이 강한 견훤의 백제군을 효율적으로 격파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년여의 맹훈련을 거친 친위 기병부대는 훌륭한 정예기병부대로 재탄생하였다. 보면 볼수록 흐믓한 무적의 정예 기병군단이었다.

 

고리제국(高麗帝國)을 단결된 하나의 나라로 만들려면 각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유력 호족들과의 끈끈한 연대가 필수적이었다.

왕건은 혼인정책을 강화하여 이 목적을 이루려고 했다.

 

이웃 백제제국에서도 견훤이 백제 각지의 유력 호족들과 부지런히 혼맥을 쌓고 있었다. 유력 호족들의 딸들을 부인을 맞아들이는 것 말고도 견훤에게는 장성한 딸들도 여러 명 있었으므로 승주의 박영규 등에게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다.

견훤은 또한 자신이 살아있는 미륵임을 천명하고 미륵불을 모시는 김제의 금산사를 크게 중창했다. 궁예를 보며 종교의 중요성을 배웠던 것이다.

견훤도 나름대로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백제제국의 단결력과 황권(皇權)을 강화하려 노력 중이었다.

 

왕건은 제1황후-신혜황후 류씨(神惠皇后 柳氏) 정주 류천궁(柳天弓)의 딸, 제2황후-장화황후 오씨(莊和皇后 吳氏) 나주 오다련(吳多憐)의 딸, 제3황후-신명순성황후 류씨(神明順成皇后 劉氏) 충주(忠州,중원) 류긍달(劉兢達)의 딸에 이어 제4황후-신정황후 황보씨(神靜皇后 皇甫氏) 황보제공(皇甫悌恭)의 딸, 제5황후-신성황후 금씨(神成皇后 金氏) 금억렴(金億廉)의 딸, 제6황후-정덕황후 류씨(貞德皇后 柳氏) 류덕영(柳德英)의 딸을 연이어 황후로 맞이했다.

제6황후인 정덕황후 류씨(貞德皇后 柳氏)는 제1황후인 류천궁(柳天弓)의 딸의 사촌동생이었는데 제1황후가 자손을 생산하지 못하는 불임의 몸이었기 때문에 정주 류천궁(柳天弓) 집안과의 연대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 정주 류씨 집안에서 품행과 용모가 제일가는 처녀를 다시 제6황후로 들였다.

왕건은 이들 여섯 명을 고리제국(高麗帝國)의 황후로 선포했다. 이후에도 혼인정책은 계속되었는데 이후의 부인들은 후궁으로 들이기로 하였다. 황후가 너무 많아지는 것도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후 후궁들은 대부분 유력한 지방 호족들의 딸들이었으나 동양원부인 류씨(東陽院夫人 庾氏)는 류금필(庾黔弼)의 딸이었다. 고리제국(高麗帝國) 최고의 무신(武臣)이며 스승(弓사범)이기도 한 류금필(庾黔弼)에 대한 예우였다.

특이한 경우는 금행파(金行波)의 두 딸들인 대서원부인(大西院夫人) 금(金)씨와 소서원부인(小西院夫人) 금(金)씨였다.

이들은 동주(洞州,황해도 서흥)호족 행파(行波)의 딸들이다. 행파(行波)는 발해유민들을 추격해오는 거란군을 교묘한 계책과 뛰어난 용맹으로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왕건이 크게 상을 주려고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자신에게 용모가 뛰어난 두 딸이 있는데 폐하께 하룻밤씩 시침(侍寢,높은 사람에게 밤시중을 드는 것)을 들게 해달라고 하였다.

왕건은 행파(行波)에게 금(金)씨 성을 하사하고 흔쾌히 금행파(金行波)의 두 딸들에게 하룻밤씩 시침을 들게 하였다.

시침(侍寢)은 하룻밤을 모시는 것일 뿐이어서 따로 혼인을 맺거나 소실로라도 들일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금행파(金行波)의 딸들인 두 자매는 왕건과의 정절을 지키겠다고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후에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금행파(金行波)와 두 딸들을 불러서 위로하였다. 두 딸들의 마음을 높이 평가한 왕건은 자매를 부인으로 들이려고 하였으나 자매는 이미 비구니가 되었으니 수행하며 왕건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빌겠다고 하였다.

이에 왕건은 동주(洞州)에 대서원(大西院)과 소서원(小西院) 두 절을 짓도록 하고 각 절에 전민(田民,소작인)을 붙여 대서원부인(大西院夫人) 금(金)씨와 소서원부인(小西院夫人) 금(金)씨가 생계를 유지하며 절에서 살도록 하였다.

고리제국(高麗帝國)의 백성들에게 이 소문은 빠르게 돌아 모두들 황제의 후덕함을 찬양했다.

 

왕건은 개경의 궁궐에는 제1황후인 류긍달의 딸 신혜황후 류씨(神惠皇后 柳氏)만 살게 하고 나머지 황후들과 부인들은 궁궐 밖 개경시내 근처 경치 좋은 곳을 골라 각기 집을 짓고 살게 했다. 궁궐 안에 너무 많은 부인들이 살게 되면 일어날 각종 문제들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의도였다.

다만 각 호족들의 개경 집의 상주인원은 황후 집안은 사백 명, 부인 집안은 이백 명을 넘지 않게 조치하였다.

어차피 고리제국(高麗帝國)의 각 호족들은 개경에 거처를 마련해야했으므로 왕건과 통혼(通婚)한 유력호족들은 개경시내 근처의 좋은 곳을 찾아 각기 웅장하게 거처를 지었다.

 

개경으로 급보(急報)가 날아왔다.

신라의 중요한 요충지인 대야성(합천)을 점령하고 이어서 고울부(高鬱府,영천)를 공략하던 견훤의 백제군이 돌연 방향을 바꾸어 신라의 금성(金城,서라벌)을 점령했다는 급보였다.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은 견훤의 강요로 자진(自盡)했고 경애왕의 왕비도 견훤황제에게 겁간(劫姦) 당한 후 자결(自決)했다는 비보였다. 서라벌의 부녀자들도 백제군에게 대부분 강간을 당했으며 신라 조정의 대신들도 노예가 될 터이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하는 참상이 벌어졌다고 했다.

왕건은 조정 회의에서 신라를 구원하기로 결정하고 신속하게 서라벌로 가기위해 그동안 양성했던 친위 기병부대 일만 명 중 오천 명을 손수 인솔하여 출동했다.

출동 부대에는 고리제국(高麗帝國)의 명장인 신숭겸대장군을 위시하여 금락장군, 금철장군, 호원보장군, 손행장군, 전락장군 그리고 전이갑,전의갑 형제장군 등 고리제국군(高麗帝國軍)의 맹장(猛將)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왕건의 오천 명 친위 기병부대는 빠른 기동을 위하여 충주(忠州,원래 中原이었으나 왕건이 충성스러운 고장이라 하여 충주로 개칭했음)를 경유하여 죽령(竹嶺)을 넘어 진보(眞寶)와 의성(義城)을 거쳐 신라 금성(金城,서라벌)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진보(眞寶)와 의성(義城)에는 오년 전에 고리제국(高麗帝國)으로 귀부한 홍술(洪術)이 고리제국(高麗帝國)의 원윤(元尹) 벼슬을 받고 충성하고 있어서 빠른 기동이 가능했다.

왕건이 기병부대를 인솔하고 충주(忠州)에 도착하니 류긍달이 마중 나와 있었다.

“폐하께서 손수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구원하러 가시는 것은 천하의 인심을 살피시는 폐하의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소신은 알고 있습니다. 천년왕국 신라를 이토록 무도하게 짓밟은 견훤을 신라의 민심은 결코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폐하께서 손수 신라 서라벌을 구원하러 가셨다는 소문이 나면 천하의 인심은 폐하를 따를 것입니다. 다만 폐하께서 너무나 잘 알고계시겠지만 기병만 가지고 전쟁을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서라벌에 고리제국(高麗帝國)의 오천 기병부대의 위용만 보여주고 서둘러 안전한 충주까지는 돌아오셔야 합니다. 혹시 일이 예상보다 지체되면 부하장졸들만 남겨두고 폐하만이라도 충주까지는 돌아오셔야 합니다. 간곡히 말씀 올립니다.”

류긍달이 왕건에게 간곡하게 당부를 했다. 이십년 이상 견훤과 전쟁을 하면서 류긍달은 견훤의 용맹함과 지략을 수없이 목격해왔기 때문에 사위가 혹시나 낭패를 보지 않을까 해서 크게 근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속히 서라벌까지 신라를 구원하러 가는 왕건의 깊은 뜻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라벌 출진 그 자체를 만류할 수는 없었다.

 

왕건의 오천 기병부대가 충주를 출발하여 죽령(竹嶺)을 넘어 진보(眞寶)에 도착했다. 진보성주(眞寶城主) 홍술(洪術)이 지휘소에 큰 지도를 펼쳐놓고 황제일행을 맞이했다.

“견훤의 백제군은 이틀 후쯤 서라벌을 떠난다고 합니다. 견훤은 군사들의 강간과 약탈을 허용해서 서라벌은 지금 지옥도(地獄道)를 방불케 한다고 합니다. 약탈한 많은 금은보화를 수레 수십 대에 나눠싣고 포로로 잡은 수백 명의 신라 관료와 귀족들을 끌고 이동한다고 하니 백제군의 퇴각로(退却路)는 수레가 이동하기에 용이한 대로(大路)가 있는 고울부(高鬱府,영천)로 해서 근와성(近佤城,청통 와촌)을 경유하여 공산(公山)과 환성산 사이로 나있는 동수(桐藪)계곡의 대로를 이용할 것입니다. 이후 달구벌을 거쳐 대야성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홍술장군이 방금 얘기한데로입니다. 지금까지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백제군은 모레 저녁에 고울부(高鬱府,영천)에 도착하여 일박하고 그 다음날 동수(桐藪)계곡의 대로로 이동해서 달구벌로 들어갈 것이 예상됩니다.”

진보(眞寶)에 미리 와서 사방에 깔아놓은 첩보망을 지휘하고 있는 첩보대장이 말했다.

“동수(桐藪)계곡은 어떤 곳인가?”

왕건이 물었다.

“동수계곡은 삼십 리(약 12km)에 달하는 긴 계곡인데 공산과 환성산 사이에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계곡 폭이 아주 넓고 군데군데 넓은 공터가 있어 많은 인원이 기동하기에 적합합니다. 많은 인원이 고울부(高鬱府,영천)에서 달구벌을 가려면 반드시 이 대로(大路)를 경유해야합니다.”

첩보대장이 동수계곡의 지형이 그려진 큰 지도를 펼쳐 놨다.

“기병이 매복할 수 있는 지형은 흔하지 않은데 이곳은 오천 기병이 충분히 매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리 가서 지형을 살펴보고 매복이 가능하다면 백제군의 혼쭐을 내주고 포로들을 구출해서 서라벌로 가면 이번 출정이 좀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신숭겸 대장군이 의견을 내놓았다. 주위의 제장들이 동의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퇴각하는 백제군을 박살내고 포로와 재물들을 회수하여 서라벌로 들어간다면 서라벌에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감읍해할 것이다.

“그러면 전군은 신속히 달구벌로 이동하여 동수(桐藪)계곡을 살펴보고 기병부대의 매복이 가능하다면 매복 작전을 시행하도록 한다.”

왕건이 지시를 내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왕건도 이런 절호의 기회는 흔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동수(桐藪)계곡은 고울부(高鬱府,영천)쪽이 높고 달구벌 쪽으로 완만하게 하향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폭이 아주 넓었다. 개울 너머 넓은 숲속은 기병부대가 충분히 매복할 수 있었는데 계곡의 길이가 삼십 리에 달해서 오천 기병부대도 무리 없이 매복할 수 있었다.

“동수(桐藪)계곡에 매복하고 백제군을 기다린다. 기도비닉(企圖庇匿)을 기하기 위하여 말들은 달구벌 넓은 평야에 매어놓고 군사들만 매복하기로 한다. 신숭겸대장군과 금락 장군은 동수계곡의 달구벌 쪽 입구 바깥에 대기하고 있다가 적들이 패퇴하여 달구벌 쪽으로 도망 나오면 섬멸하도록 하라. 짐은 계곡 중간 높은 공터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작전을 지휘하도록 하겠다. 매복장소에 도착한 군사들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작전에 임하도록 하라.”

왕건이 명을 내렸다.

군사들은 각자의 말안장 밑에서 비상식량을 꺼내 휴대하고 지정된 매복지로 가서 매복을 시작했다. 기병들은 전장에서는 말안장 밑에 달아놓은 청국장과 육포로 끼니를 때우기 때문에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아 매복에 유리했다.

 

다음날 백제군이 고울부(高鬱府,영천)쪽에서 나타나 동수(桐藪)계곡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많은 포로들과 노략질한 많은 재물을 실은 수레들을 끌고 백제군은 천천히 동수(桐藪)계곡 중간으로 들어왔다.

이때 효시(嚆矢)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계곡 위로 날아오르고 매복해 있던 고리제국군(高麗帝國軍)이 백제군을 덮쳤다. 백제군은 변변한 대항도 못하고 포로들과 재물들을 놔둔 채 달구벌 쪽으로 도망갔다.

“성공입니다.”

고리제국군(高麗帝國軍) 지휘부의 장군이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며 기쁜 표정으로 왕건에게 아뢰었다.

 

이때 화살이 소낙비처럼 동수(桐藪)계곡의 대로에 있는 포로들과 고리제국군(高麗帝國軍)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려왔다.

“백제군의 매복이다.”

왕건이 아차 싶어서 주위를 둘러봤다. 수색대를 풀어서 계곡 주위를 샅샅이 수색해도 없던 백제군이 어느사이에 계곡 양쪽으로 빽빽이 나타났다. 왕건의 지휘부 뒤쪽 언덕에서도 백제군이 몰려와서 지휘부도 대로 쪽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계곡 중간 넓은 공터에 고립된 고리제국군(高麗帝國軍) 머리 위로는 계속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고 동수(桐藪)계곡의 고울부(高鬱府,영천)쪽과 달구벌 쪽에서는 매복했던 백제군의 장창병 군단이 대오를 정연히 갖추고 길이가 스무자(약 6미터)에 달하는 장창을 들고 고리제국군(高麗帝國軍)을 살해하며 양쪽에서 진격해왔다. 저멀리 고울부(高鬱府,영천)쪽의 높은 언덕에서는 연신 깃발이 오르고 북소리가 나는 것이 견훤의 지휘부가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 견훤군은 계곡 십리 바깥에 일주일 전부터 은밀하게 매복하고 고리제국군(高麗帝國軍)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님. 스승님께서 그토록 원하던 서라벌 점령도 이루고 도선비기에서 가르쳐주신 이 절묘한 지형을 이용하여 왕건도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승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견훤이 계곡을 내려다보며 감격에 차서 혼잣말을 하였다.

 

견훤은 왕건이 도선대사에게서 도선비기를 배우기 십여 년 전에 상주 선산 금오산 도선굴에서 수도하고 있던 도선대사에게서 도선비기를 전수받았다. 당시에는 도선대사가 아버지 장보고장군을 참살한 신라에 대해서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을 때라서 신라 내삼주(內三州,신라의 삼국통일 이전 원래 신라 영토인 상주,양주,강주의 3주)에 대한 상세한 공격로와 매복지점 등을 도선비기에 상세히 기록해놓았다.

견훤은 이때 도선비기를 배웠으므로 매복에 적합한 동수(桐藪)계곡의 절묘한 지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왕건이 도선대사에게서 도선비기를 배울 때에는 도선대사가 도통하여 신라에 대한 원한과 미움을 모두 내려놓은 후라서 도선비기에서 신라 내삼주(內三州)에 대한 상세한 공격로와 매복지점 등은 모두 뜯어내 불태워버린 후라서 왕건은 미처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고리제국군(高麗帝國軍)이 동수(桐藪)계곡 안에서 도륙당하고 있을 때 신숭겸과 금락이 말을 타고 구원병을 이끌고 혈로를 뚫으며 왕건에게 들어왔다.

그러나 구원병도 역시 동수(桐藪)계곡 안의 포위망에 갇혀 속수무책이었다.

 

“형님. 이 곳 지형은 정말 더럽습니다. 방법이 없으니 제가 형님의 갑옷을 입고 분전할 터이니 형님께서는 그사이에 군졸의 옷을 입고 산을 넘어 도망가십시오. 형님의 무술실력이면 혼자 탈출은 문제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이 원한을 반드시 갚아주십시오. 사정이 긴박합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신숭겸이 비장한 어조로 왕건에게 말했다.

 

도리가 없었다. 왕건은 군졸로 변복하고 계곡 옆의 가파른 산비탈을 기어서 올라갔다. 왕건의 양 팔 소매 안에는 삼십여 년 전 지금은 작고한 황해용왕이 준 단도들이 감추어져 있었다. 왕건의 양 손에는 무기는 아무것도 없어서 가파른 산비탈을 기어서 올라가기가 용이했다.

“어이. 이쪽으로 오너라. 일단 살려줄 터이니 오라를 받아라.”

백제군 군졸들 다섯 명이 가파른 비탈 위에 서 있다가 왕건을 불렀다. 백제 군졸들은 상대가 아무 무기도 없이 탈주하는 군졸이라 가볍게 생각하고 포박하려 하였다.

이때 왕건의 양 팔이 번득이더니 군졸 다섯 명이 모두 목을 잡고 쓰러졌다. 왕건이 한 번에 다섯 명의 목을 그었던 것이다. 목의 대동맥이 끊어진 백제 군졸들의 목에서는 피가 샘솟듯이 뿜어져 나왔다.

왕건은 산마루에 올라서 산언덕을 넘기 전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고리제국군(高麗帝國軍)은 이제 거의 다 쓰러져 있었고 금빛 갑옷을 입은 신숭겸이 적진을 향해 돌진하다가 수십 개의 화살을 맞고 쓰러지고 있었다.

처연(凄然)했다. 왕건의 양 눈에서 눈물이 샘솟듯 흘러나왔다.

 

어제 저녁 충주의 류긍달의 밀사가 동수(桐藪)계곡으로 왕건을 찾아와서 밀서를 전달했다.

‘폐하.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이 곳으로 오십시오. 저희 충주군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만사는 불여튼튼이라고 했으니 혹시 몰라서 만전을 기하는 것입니다.’

류긍달의 밀서에서 가리킨 곳은 동수(桐藪)계곡 이십 리(약 8km)밖에 있는 달구벌 평야의 작은 강 옆의 언덕이었다.

왕건은 서둘러 잰걸음으로 류긍달의 밀서에서 알려준 장소로 달려갔다.

언덕 옆에는 왕건의 얼굴을 아는 이십여 명의 충주군 친위대 장교들이 말을 가지고 왕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건은 충주군 장교들과 함께 말을 타고 충주로 서둘러 도주(逃走)했다.

 

그 후 달구벌 평야에 매어놓은 오천 필의 군마들은 류긍달의 충주군 마군(馬軍)들이 몰고 며칠 후에 충주로 무사히 돌아왔다.

류긍달의 충주군은 백제군이 동수계곡을 떠난 후에 고리제국군(高麗帝國軍) 오천 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화장하고 장수들의 시신은 충주로 옮기는 등 패전 후 전장정리도 깨끗이 처리했다.

류긍달은 치밀하고 철저하게 동수계곡전투 패전 후처리를 하여 패전 후유증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만일의 불상사를 미리 대비하는 이런 류긍달 특유의 치밀함과 철저함이 이십년 이상 견훤의 백제제국군과 한반도 중앙의 요충지를 다투면서도 류긍달을 죽지 않고 지금까지 생존하게 하였다.

 

“폐하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일승일패 병가지상사(一勝一敗 兵家之常事)입니다. 일단 개경으로 가셔서 후일을 도모하도록 하시지요.”

류긍달은 만에 하나 혹시 몰라서 준비해놓은 계책이 맞아서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혹했다.

전략전술의 이론에 있어서는 천하에 당할 자가 없는 왕건이 이리 쉽게 처절하게 당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십년 이상 백제군과 싸우면서 류긍달은 견훤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견훤은 육전(陸戰),실전(實戰)의 귀신(鬼神)인 것이다.

개경에 도착한 왕건은 궁궐의 내실에 들어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사흘간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담대하고 침착한 왕건도 이번 패전은 충격이 너무나도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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