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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손등룡기14 고창(古昌)대전과 화복의복(禍福倚伏)

작성자양승철문양공후|작성시간21.08.24|조회수80 목록 댓글 0

구월(九月)에 있었던 공산(公山) 패전(敗戰)의 후유증은 무척 컸다.

견훤 백제황제는 12월에 국서를 보내어 ‘아우야. 짐이 활을 평양의 다락 위에 걸고 내가 총애하는 말에게 패강(대동강)의 물을 먹이겠다.’며 왕건에게 항복할 것을 종용했다.

견훤은 승기를 잡은 이때 승부를 결정지으려고 본격적으로 정벌 전쟁을 개시했다. 대야성 아래쪽 초계지방을 점령한 후 이어서 강주(康州,진주)까지 차지하여 고리제국(高麗帝國)의 남해안 지역 해상활동을 차단하였다. 견훤은 둘째 아들 양검(良劍)을 강주도독으로 삼아 강주지방 통치를 강화하였다.

견훤이 승기를 잡은 이때에 견훤(甄萱)이 직접 군사를 몰아 친정(親征)하면 이에 맞서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다음 해 견훤(甄萱)은 정예군사 5천 명을 이끌고 의성, 진보 지역으로 몸소 쳐들어가 고리제국(高麗帝國)의 교두보 역할을 하던 의성, 진보 지역을 차지했다. 왕건이 나의 왼팔이라고 부르며 신뢰하던 진보성주(眞寶城主) 홍술(洪術)도 이때 죽었다.

지역민들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던 홍술(洪術)은 패전하여 사망했으나 지역민들은 그를 의성 성황신(義城 城隍神)으로 받들어 모셨다.

 

왕건은 동수계곡 전투에서 죽은 여덟 장수(八公) 신숭겸대장군, 금락장군, 금철장군, 호원보장군, 손행장군, 전락장군 그리고 전이갑, 전의갑 형제장군의 장사를 성대하게 치루고 유가족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었다.

특히 왕건을 대신하여 죽은 신숭겸대장군은 적들이 목을 잘라갔으므로 시신에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붙여서 도선대사가 천하의 명당으로 지목하여 왕건에게 사후 황릉(皇陵)으로 쓰라고 권유한 우곡(牛谷,춘천)의 혈처(穴處)에 모셨다.

달구벌의 공산(公山)은 여덟 명 충신들의 충절을 기리는 의미에서 팔공산(八公山)으로 산 이름을 바꿨다.

 

왕건과 고리제국(高麗帝國)에는 최대의 난국(亂國)이던 이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각지의 유력호족들이 왕건에게 다투어 귀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천년왕국 신라의 수도를 무도하게, 무참하게 짓밟은 견훤을 향한 분노와 목숨을 걸고서 망해가는 신라를 지켜주려 한 왕건에게 보내는 신뢰가 유력호족들을 고리제국(高麗帝國)으로 이끌었다.

 

함규(咸規)가 가신(家臣)들을 데리고 개경으로 와서 왕건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왕건의 고리제국(高麗帝國)을 위해서 쓰겠노라고 천명했다.

함규(咸規)는 한수(漢水,한강) 유역(流域)의 가장 중요한 지역인 한성(漢城,서울),광주(廣州),빈양(濱陽,양평)지방을 조상 대대로 다스리고 있는 거물 호족인데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고 학문하기를 좋아해서 소문난 대학자이기도 했다. 무예에는 소질이 없었는데 그러나 대대로 한수유역을 다스려온 집안이라 수하에는 뛰어난 무장들과 2만여 명의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었다.

신라의 세력이 한수 유역에서 약해진 조부 때부터는 주위에서 함왕(咸王)으로 불리며 한수(漢水,한강) 유역(流域)의 왕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강력한 호족이었다. 조부 때 미지산(彌智山,龍門山의 옛이름이다, 용문산은 조선태조 이성계가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자락인 중원산(中元山,양평에 위치)에 견고한 산성을 지어 근거지로 삼았는데 이 또한 함왕산성(咸王山城)이라 불리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동안 자신의 세력을 믿고 아무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는데 머리 좋은 함규(咸規)가 대세를 재빠르게 읽고서 왕건에게 무조건 복종을 맹세한 것이다.

왕건은 크게 기뻐하고 함규(咸規)에게 왕(王)씨 성을 하사하여(賜姓) 함규(咸規)는 왕규(王規)가 되었다. 이어서 왕건은 왕규(王規)의 두 딸을 연거푸 부인으로 맞아들여(제15비 광주원부인과 제16비 소광주원부인), 서로 피를 섞어 관계를 더욱 돈독히 했다.

 

청주지방을 모두 들고서 백제제국에 귀부했던 공직(龔直)이 고리제국(高麗帝國)으로 다시 귀부했다.

청주지방 전체를 졸지에 잃은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을 잡아다 잔혹하게 고문하고 다리의 힘줄을 불로 지져 앉은뱅이를 만들었다. 견훤을 배신하면 참담한 대가를 치른다는 본보기였다.

 

의성, 진보에서는 그동안 중립을 지키고 있던 재암성의 최선필이 봉기하여 견훤군을 모두 몰아내고 의성,진보를 왕건에게 바쳤다.

 

충주와 상주 사이에 있는 전략상 중요한 위치의 근암성(近巖城,문경)과 근품성(近品城,문경)도 귀부해 왔으며, 특히 신라의 마지막 충신들이 지키고 있는 대처(大處) 고창(古昌,안동)이 고리제국(高麗帝國)으로 귀부해 왔다.

 

명주(溟州,강릉)의 금순식(金順式)이 고리제국(高麗帝國) 내의 유력호족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왕건에게 귀부해 왔다. 금순식은 신라 태종무열왕계의 적손으로 신라조정에서 지명주제군사(知溟州諸軍事)의 직을 받고 명주(溟州)에서는 왕 같은 위치에 있는 거물이다. 왕건이 보낸 사신들을 번번이 참수하여 죽였기 때문에 고리제국(高麗帝國)의 신료들은 명주(溟州)에 사신으로 가라는 말을 가장 무섭게 느낄 지경이었다.

이때 왕건의 장인(丈人) 류긍달(劉兢達)이 자신의 조카 류권열(劉權說)을 명주(溟州) 사신으로 추천했다. 류권열(劉權說)은 류긍달(劉兢達) 집안에서 가장 사리 판단에 뛰어난 자로 명주(溟州) 사신으로 가서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왕건이 개경 궁궐 내원에 정중하게 모시고 있던 금순식(金順式)의 아비 허월(許越)대사와 같이 명주(溟州)로 가서 금순식(金順式)의 귀부를 이끌어냈던 것이다. 금순식(金順式)의 귀부라는 어려운 임무를 성공시킨 데에는 류긍달(劉兢達)의 물밑작업이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금순식(金順式)도 이웃 충주의 강력한 호족인 류긍달(劉兢達)의 말은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금순식(金順式)은 먼저 맏아들 금수원(金守元)을 보내서 귀부 의사를 밝혔다. 이에 왕건은 왕씨(王氏) 성을 내려주고, 왕씨(王氏)가 된 왕순식(王順式)에게 대광(大匡)벼슬을 내려주고 개경에 커다란 토지와 집도 주었다.

왕순식(王順式)은 가신(家臣)들을 데리고 개경으로 와서 왕건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왕건의 고리제국(高麗帝國)을 위해서 쓰겠노라고 천명했다.

유력 호족들에게 왕씨(王氏) 성(姓)을 내려주어 고리제국(高麗帝國) 황족의 일원이 되게 하니 향후의 외척의 발호 문제도 미연에 방지하고 충성도도 더욱 높일 수가 있어서 왕건은 혼인정책 만큼 효과가 좋은 이 방법(賜姓)을 이때부터 선호하게 되었다.

 

왕건의 정의로움과 후덕함이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서 신라 전체의 인심을 왕건에게 향하게 한 것이다.

왕건은 ‘결국에는 온유함이 강함을 이기고 포용력과 겸양의 덕을 갖춘 사람이 마지막에는 승리하여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다.’라는 도선비기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왕건은 일당백, 무적의 명장 류금필과 수백의 정예부대만 이끌고 귀부한 지역을 직접 일일이 찾아가 벼슬을 내리고 위무하였다.

서라벌에는 기병 수십 기만 거느리고 조촐하게 입성하여 신라의 경순왕과 서라벌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서라벌 백성들은 ‘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사나운 승냥이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오신 왕건 폐하를 뵈니 꼭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면서 왕건을 환영했다.

그야말로 화복의복(禍福倚伏,복은 화에서 생겨나고 화는 복 속에 숨어있다.)이었다.

 

왕건은 궁예의 태봉을 무너뜨리고 고리제국(高麗帝國)을 건국한지 이년 째 되는 해에 류금필(庾黔弼)을 북방으로 보내어 패강(대동강) 이북부터 발해의 옛 영토인 요동지방에 이르기까지 넓게 퍼져서 살고 있는 말갈족들을 정벌하고 포용하여 고리제국(高麗帝國)의 백성으로 만들게 했다. 장차 거란과의 대전(大戰)을 염두에 둔 장기 포석(長期 布石)이었다.

류금필(庾黔弼)은 자신의 고향인 토산(兎山,황해도 금천)의 용맹한 궁씨(弓氏)들을 데리고 지난 10여 년간 말갈족(靺鞨族)들을 때로는 힘으로 위협하고 때로는 포용하여 방대한 지역의 말갈족(靺鞨族)들을 완전히 자신의 사람들로 만들었다.

용맹이나 힘 그리고 인품에 이르기까지 류금필(庾黔弼)을 당할 자는 말갈족(靺鞨族)에는 없었으므로 말갈족(靺鞨族)들은 류금필(庾黔弼)을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하고 진심으로 존경하며 섬겼다.

말갈족(靺鞨族)을 완전히 평정하고 말갈족(靺鞨族)의 왕(王)으로 있던 류금필(庾黔弼)은 작년 왕건의 동수계곡 대패(大敗) 소식을 듣고 말갈기병 이만 명을 이끌고 왕건에게 돌아왔다.

말갈족(靺鞨族)의 왕이 되었지만 류금필(庾黔弼)의 왕건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다. 왕건도 류금필의 딸을 부인(東陽院夫人 庾氏)으로 맞이하여 관계를 더욱 돈독히 했다.

왕건은 경무장의 날렵한 말갈기병대에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중장기병인 개마기병대 5,000기를 류금필 직속으로 배속시켜 통합작전 능력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훈련시켰다. 개마기병은 크고 튼튼한 말들에 중장갑을 입혀 적진 돌파에 최적화되었다. 마상에서는 가려뽑은 장사들이 적을 발바닥으로 차서 제압하는 쇠침이 달린 군화를 신고, 쇠도리깨를 휘둘렀는데 적진을 짓밟고 돌파하는데에는 가히 적수가 없을 최강의 기병대로 날렵한 말갈기병대와 최강의 조합을 이루었다.  

 

죽령(竹嶺) 너머 대처(大處) 고창(古昌,안동)은 령남(嶺南,죽령의 남쪽)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신라 조정에서도 당연히 이곳을 중요시하여 신라의 진골귀족 금씨(金氏)들이 대대로 고창을 다스리고 있었다.

고창(古昌,안동)은 서라벌 신라왕조에만 충성을 바치고 있는 충절의 고장이었다.

이 고창(古昌,안동)을 다스리고 있는 신라의 진골귀족 금씨(金氏)들이 왕건에게 귀부해 왔다.

천년왕국 신라의 수도를 무도하게 무참하게 짓밟은 견훤을 향한 분노와 목숨을 걸고서 망해가는 신라를 지켜주려 한 왕건에게 보내는 신뢰가 이들 고창의 진골귀족 금씨(金氏)들을 왕건의 고리제국(高麗帝國)으로 이끌었다.

이 소식을 들은 견훤도 고창(古昌)을 잃는다면 상주((尙州),양주(良州)를 모두 잃을 수 있어 대야성에 오만 군사를 집결시켜 자신이 직접 고창(古昌)을 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충주(忠州)의 류긍달(劉兢達)을 통하여 왕건에게 들어왔다.

왕건은 류금필(庾黔弼)의 말갈 기병 이만 명과 고리제국(高麗帝國)의 중앙군 일만 명, 호족들의 사병(私兵)들인 보병(步兵) 이만 명을 이끌고 충주로 갔다. 호족들의 사병(私兵)들인 보병(步兵)들도 평시에 비용만 호족들이 부담할 뿐 중앙군과 연합훈련을 자주 하여 잘 훈련된 정예군들이었다. 충주에서 충주군사 이만 명이 원정군에 합류했다. 고창에 도착하면 고창과 인근 지역에서 오천 명의 지역 군사가 원정군에 합류할 예정으로 총병력은 칠만 오천 명의 대병력이었다.

 

왕건은 충주(忠州)에 도착해서 류금필(庾黔弼)과 같이 류긍달(劉兢達)을 만났다. 류긍달(劉兢達)은 오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맞이할 준비를 철저히 해놓고 있었다. 오만 명의 대군은 충주에서 편안히 쉬며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왕건의 제3황후가 된 류긍달(劉兢達)의 딸은 용모와 성격 모두 왕건의 황후들과 부인들 중 가장 뛰어났다. 또한 무예 실력은 무술 고수의 반열에 오를 정도이고 글공부 실력 또한 학자를 방불케 하는 수준이었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 왕건도 감탄할 때가 많았는데 현모양처의 자질 또한 갖추고 있어서 한 마디로 완벽했다. 왕건 또한 제3황후를 가장 사랑하여 제3황후에게서만 6남2녀의 자손을 봤는데 자손들도 모두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 강력한 힘을 가진 류긍달(劉兢達)의 딸이라는 배경까지 있어 왕건은 제3황후를 더욱 사랑했다.

류긍달(劉兢達)은 북쪽 패서지방의 강자인 황보(皇甫)씨 집안과도 겹사돈을 맺는 등 강력한 외척으로 부상하고 있었으나 왕건은 외척인 류긍달(劉兢達)을 견제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지금은 자신의 실력으로만 인정받고 살아남는 난세(亂世)인 것이다.

강력한 외척(外戚) 세력은 결국 황가(皇家)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 자명했으나 적어도 왕건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류긍달(劉兢達)은 왕건의 강력한 조력자일 뿐 문제가 될 수는 없었으므로 왕건은 류긍달(劉兢達)을 포함한 외척(外戚) 세력들의 성장을 전혀 견제할 생각이 없었다.

왕건은 오히려 류긍달(劉兢達)에게 최상의 예우와 배려를 지속적으로 하여 완전한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에 주력했다. 류긍달(劉兢達)도 왕건의 진심에 감복하여 왕건에게 뼈 속까지 충성하고 있었다.

 

“이번 고창(古昌)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상주성주(尙州城主) 아자개가 견훤의 편을 얼마나 들지 입니다. 부자간의 사이가 워낙 나쁘다고는 해도 친부 친자 관계인데 결국 아들 편에 서지 않겠습니까?”

왕건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견훤(甄萱)은 아자개의 친자식이 아니라고 합니다.”

류긍달(劉兢達)이 의외의 이야기를 하였다.

“아자개(阿慈介)는 아시다시피 량씨(梁氏)입니다. 남원의 호랭이아지발도까지 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무장(武將)인데 젊을 때에 무진주(武珍州,광주)의 유력 호족의 사병대장(私兵隊長)으로 잠시 근무했었습니다. 이때 아자개의 주인(主人)인 무진주 호족이 아자개에게 자신의 외동딸을 배필로 주었습니다. 외동딸은 임신 중이었는데 이 점을 불문에 붙이는 조건이었습니다.”

“외동딸을 임신시킨 남자는 질그릇을 굽는 질그릇장이였는데 멸망한 백제왕족의 후손으로 대대로 산 속에 숨어서 질그릇을 굽고 있는 집안이라고 합니다. 무진주 호족의 입장에서는 백제왕가의 후손과 혼맥이 연결된다면 자칫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겠지요.”

“견훤도 어릴 때에 이런 얘기를 제 어미에게서 들었는지 열다섯 살에 스스로 제 성(姓)을 질그릇장이 견(甄)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훤은 은근히 지랭이(교룡)의 자손이라고 소문을 내어 명망있는 천손량씨의 후광을 얻으려 하고 있습니다. 견훤은 역발산기개세의 항우 같은 용력과 주도면밀하고 영리한 머리도 가지고 있는 실로 당대의 인물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견훤이 아자개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소문은 저도 들었는데 장인어른의 설명을 들으니까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자개는 견훤 편을 들지는 않겠군요.”

왕건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견훤은 육전(陸戰)에 있어서는 귀신같은 자라 친히 전장에 나서서는 져본 일이 거의 없습니다. 나주에서 폐하께 참담하게 진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수전(水戰)이었습니다. 지난번 동수계곡 패전을 거울삼아 보다 더 철저하게 고창전투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류긍달(劉兢達)이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直說的)으로 말했다. 왕건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온유한 성품을 지적한 것인데 황제의 장인이니까 이정도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류금필이 얼른 분위기를 돌렸다.

“동사서독중금오(東邪西毒中金烏)라고 예전에 도선대사께서 탐라에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동사(東邪)는 동쪽의 사악한 자 폐주(廢主) 궁예이고 서독(西毒)은 서쪽의 독을 품은 놈 바로 견훤(甄萱)인데, 어찌 천손 량씨(天孫 梁氏)의 씨가 이렇게 악독한 성정을 가질 수 있는가 했더니 견훤(甄萱)은 역시 천손 량씨(天孫 梁氏)의 씨가 아니군요.”

왕건과 류금필은 서로 쳐다보며 껄껄 웃었다. 왕건과 류금필은 스승 도선대사에게서 들은 이 예언(豫言)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견훤(甄萱)의 본색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아주 잔인한 자입니다. 천손 량씨(天孫 梁氏)일 리가 없지요.”

류긍달(劉兢達)도 웃으며 말했다. 왕건도 류금필도 원래는 천손 량씨(天孫 梁氏)인 것을 류긍달(劉兢達)도 아는 것이다.

 

고창(古昌,안동)에 오만 오천 명에 달하는 고리제국(高麗帝國)의 군대가 넓게 포진했다.

견훤(甄萱)의 백제제국군 오만 명은 낙동강을 따라서 올라오고 있는데 선산 병정현(해평)에 이르러 전열을 정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 백제수군의 대선(大船)들도 마음 놓고 정박할 수 있었고, 특히 강 가운데에 커다란 섬이 있어 적군의 습격에도 대비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견훤 입장에서는 소년 시절까지 자란 곳이고 도선비기에서 상세히 지형을 배운 곳이라서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견훤에게 아주 유리한 전장(戰場) 환경이었다.

 

“견훤의 친정군(親征軍) 오만 명은 백제국에서 엄선한 정예부대입니다. 견훤의 말 한 마디에 불 속이라도 뛰어들 수 있는 자들이니 정면 승부는 피하고 계책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견훤의 군사(軍師)인 파진찬 최승우는 꾀가 많고 전략 수립에 뛰어난 자이니 경계하여야 합니다.”

류긍달(劉兢達)이 작전회의에서 상세한 고창지역의 지형도를 앞에 놓고 회의를 주관하고 있었다.

 

왕건은 충주군 이만 명은 충주를 지키는 예비대로 삼아 죽령 인근에서 주둔하게 했다. 혹시 죽령까지 후퇴하게 될 때를 대비한 것이다.

그리고 이곳 지형에 밝고 대세를 읽는 눈이 뛰어난 류긍달(劉兢達)을 군사(軍師)로 임명하여 이번 고창(古昌,안동)작전의 큰 그림을 그리고 상황에 맞는 계책을 조언하게 하였다. 류긍달(劉兢達)은 충주의 참모진을 데리고 치밀하게 계책을 짜며 고창대전(古昌大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백제군이 석산에 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왕건이 있는 중군(中軍) 지휘부로 급보가 날아왔다. 석산은 내성천을 뒤에 두고 고창평야 북쪽에 우뚝 솟은 산으로 양옆에 등암산과 떡매산을 거느리고 있어 길게 방벽을 이루고 있는 요새지이다.

뒤에 있는 내성천은 얕은 강이라 유사시에 물을 건너 후퇴하기도 용이한 지형이다.

 

예안진(禮安鎭)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있던 고리제국군(高麗帝國軍) 지휘부에는 일순 곤혹스러운 탄식이 터졌다. 류긍달(劉兢達)이 치밀하게 세운 작전계획은 고리군(高麗軍)이 고창평야의 북쪽에 있는 석산에서 진을 치고 적(百濟軍)을 맞이하려고 하였다.

유사시에 우군(友軍)이 있는 북쪽으로 퇴각하기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견훤이 발 빠르게 석산을 선점해버리는 바람에 모든 작전계획을 다시 짜야만하게 되었다.

견훤은 이 근처에서 몇 번의 실전을 겪어서 이 지역 지형을 잘 알고 있고 도선비기에서도 요충지인 이 곳을 특히 강조하여 놓았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이 있었다. 육전(陸戰)의 귀신(鬼神) 견훤은 이미 이길 수 있는 작전 그림을 머릿속에 넣어두고 고창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당황한 고리제국군(高麗帝國軍) 지휘부의 문답내용이 역사서에 남아 있다.

“戰若不利將如何(싸움이 만약 불리해지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황제(왕건)가 묻자,

“若不利不可從竹嶺還宜預修閒道(만약 불리해지면 죽령으로 돌아갈 수가 없으니 간도를 미리 만드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장군 공훤과 장군 홍유가 대답했고 군사(軍師) 류긍달도 이에 동의했다.

장군 공훤은 대호족으로서 호족사병연합군 이만 명을 이끌고 있는 사령관이었다. 간도는 숨겨진 길, 좁은 길을 의미하는데 여기선 퇴로를 의미한다. 즉 고창도 뺏기면 더 이상 죽령 쪽으로 도망갈 수 없으니 도주로를 다시 확보해두자는 것이다.

류금필(庾黔弼)만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臣聞兵凶器戰危事有死之心無生之計然後可以決勝(신이 듣기론 ‘병을 운용하는 것은 흉기를 다루는 것이요, 전쟁은 모든 것이 위험이다.’라고 했으니 죽을 마음을 가지고 살 계획을 버려야 승전을 할 수 있습니다.)”

“今臨敵不戰先慮折北何也若不及救以古昌嶺南衆拱手與敵豈不痛哉(오늘 적과 만나 싸우지 않고 먼저 패배를 걱정하는 건 무엇입니까? 만약 (고창을) 구하지 못하면 모든 령남지역이 넙죽 적에게 넘어갈 터인데,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

“臣願進軍急擊(신은 진군하여 빠르게 공격하길 바랍니다.)”

 

왕건은 류금필(庾黔弼)의 손을 들어 주었다. 지난 수십 년간 스승으로서 또한 수하 장수로서 겪어본 류금필(庾黔弼)은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승전을 이끌어 내고야마는 천하무적의 신장(神將)이었기 때문이다.

왕건은 고창평야의 남쪽에 있는 병산(屛山)에 진을 쳤다. 병산의 뒤쪽으로는 낙동강 본류가 시퍼렇게 흐르고 있어서 배수진(背水陣)이었다. 고창평야에서 밀리게 되면 모두 낙동강에 빠져 죽는 것이다.

병산의 본진에는 왕건의 중앙군 일만과 류금필(庾黔弼)의 말갈기병 이만 명이 포진했다.

배수진을 꺼리는 것이 역력한 호족연합군 이만 명은 지형에 익숙한 고창 현지군 오천과 함께 석산 뒤쪽으로 멀리 우회하여 석산 북쪽 요소요소에 복병으로 숨어 있기로 하였다.

 

“나는 고리제국(高麗帝國) 장군(將軍) 류금필(庾黔弼)이다. 백제군에 나와 싸워볼 용기 있는 장수가 있는가?”

류금필(庾黔弼)이 고창평야 가운데에서 크게 외쳤다. 정월의 매서운 바람이 고창평야를 훑고 지나갔다.

“허. 일기토(一騎討)라니... 용감한 자로다. 류금필(庾黔弼)이라니 저 자는 누구인가? 요즘 보기 드믄 일기토를 하자고 나서다니. 누가 나가서 저 자와 싸워보겠는가?”

백제군의 중군에서 견훤이 말했다. 이미 승기를 잡은 싸움인데다가 볼만한 구경꺼리까지 생겨서 천성이 싸움꾼인 견훤은 내심 흐믓했다.

“저 자는 적의 기마군 사령관입니다. 제가 나가서 저 자를 베어 아군의 사기를 올려보겠습니다.”

백제군의 기마군 돌격장 운길이 나섰다. 백제군에서는 알아주는 용맹과 무예가 뛰어난 장수이다.

“그래. 가라. 가서 공을 세우도록 하라.”

“존명(尊命)”

 

한 합 만에 운길이 목이 베어져 말에서 떨어졌다. 이어서 정호, 마길 등 백제군에서 알아주는 맹장들이 연거푸 나갔으나 역시 단 한 합 만에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무서운 놈이다.” 백제군 진영에 싸한 기운이 흐르고 갑자기 조용해졌다.

병산(屛山)쪽에 있던 말갈 기병들은 기뻐서 미쳐 날뛰었다. 말갈 기병들의 함성이 넓은 고창평야를 진동시켰다. 자신들의 왕이 마상에서 천하무적의 무용(武勇)을 천하에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류금필(庾黔弼)이 마상(馬上)에서 외쳤다.

“용맹한 말갈기병들은 돌격하라.”

말갈 기병들이 백 명씩 횡대를 이루어 차례차례 백제군에게 돌격했다.

백제군에서는 정예부대인 장창보병 집단군 이만 명이 각기 스무 자(약 6미터)가 넘는 장창을 들고 사각형의 방진을 이루어서 질서정연하게 전진해 나왔다. 장창보병 집단군의 취약점인 양 옆에서는 백제군의 기병대가 든든하게 엄호하고 있었다.

천오백여년 전 서양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창안한 장창집단전술(팔랑스)은 알렉산더에게 당시 세계 최대 제국을 건설하게 한 강력한 전술이다.

이 장창보병 집단전술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특히 보병이 강한 중국에서 체계적으로 발전되어 왔다.

누구라도 스무 자가 넘는 장창들을 질서정연하게 내밀며 진격하는 장창보병 집단군에게 넓은 평야에서 대적하기는 어려웠다. 잘 훈련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백제군의 장창보병 집단군은 지금까지 백제군의 대부분의 승리의 주역이었던 최정예부대였다.

넓은 고창평야는 백제의 장창보병 집단군에게는 최적의 전투 장소였다.

백 명씩 횡대를 이루어 차례차례 백제 장창보병 집단군에게 돌격하는 말갈기병대는 장창보병 집단군을 향해 돌진하다가 적진 오십 보 앞에서 화살을 날리고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 뒤의 열들도 차례차례 화살을 날리고 양쪽으로 갈라져서 백제 장창보병 집단군의 측면으로 달려 나갔다.

백제 장창보병 집단군의 선두대열이 화살에 맞아 쓰러져 여기저기 빈 곳이 생겼다.

 

왕건도 처음 보는 전술이었다.

“망구다이입니다. 탐라에서도 망구다이를 하지만 말갈의 망구다이는 실전을 수없이 겪어서 훨씬 발전된 형태입니다.”

본진으로 돌아온 류금필이 왕건의 옆에서 말했다.

 

백제 장창보병 집단군의 측면을 엄호하던 백제군의 기병대는 화살을 날리고 달아나는 말갈기병대를 추격했는데 말갈 기병들은 마상에서 갑자기 몸을 돌려 말 뒤쪽의 백제군 기병대에게 화살을 날렸다.

배사(背射)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말 등에 오른다는 기마민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이어서 후퇴하던 말갈 기병들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화살에 맞아 대오가 흐트러진 백제군 기병대를 향해 돌격했다. 기마 기술에서 이미 백제군 기병대는 말갈 기병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자신들의 왕 류금필의 무용(武勇)을 보고서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말갈 기병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어 백제 기병대를 순식간에 궤멸시켰다.

장창보병 집단군의 약점인 측면을 엄호하던 기마대가 궤멸되자 이어서 말갈 기병들은 장창보병대의 측면으로 돌진했다.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말갈인들은 원래 유목생활을 하는 야만인들이다. 말갈군은 백제군이 쓰러지면 목을 베어 목에서 샘솟는 피를 벌컥벌컥 마시고 온 몸에 발랐다. 그리고 백제군의 배를 갈라 생간을 꺼내 씹어 먹었다. 공포에 질린 백제군은 무기를 버리고 석산 쪽으로 달아났으나 추격하는 기마병의 속도를 이길 수는 없었다.

도주하는 백제군을 마상에서 베며 피투성이의 말갈 기병이 석산으로 돌진해오자 석산 기슭의 백제군은 공포에 질려 모두 석산 뒤 내성천을 건너 도주하기 시작했다.

황량하던 정월의 넓은 고창평야는 백제군의 시체로 가득 찼다.

내성천을 건너 도주하던 백제군은 매복하고 있던 고리제국군에게 차례로 쓰러져 갔다.

 

견훤은 이 와중에서도 육전(陸戰)의 귀신(鬼神)답게 군사 일만 명 가량을 수습하여 합강 쪽으로 달아났다. 금천과 내성천 그리고 낙동강의 세 강이 합류하는 합강 지점에는 미리 다리를 놓아두었고 낙동강을 거슬러온 백제 수군이 지키고 있었다. 합강만 건너면 선산 쪽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합강이 보이는 지점에 다다르니 수군의 큰 배들이 보이는데 다리는 불에 타서 없었다.

백제군의 선발대가 합강에 떠있는 수군의 배들에게 다가가니 배안에서 화살이 비 오듯 날아왔다.

고리제국의 수군대장군 량능길(梁能吉)이 이끄는 고리제국 수군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백제수군을 격멸하고 합강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화살의 비에 쫓긴 백제군은 낙동강 옆의 넓은 갈대밭으로 몸을 숨겼다. 이때 펑 펑 하면서 갈대밭의 여기저기서 불길이 오르고 갈대밭이 맹렬한 불길에 휩싸였다. 백제군사들이 불에 타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불길에 놀란 견훤의 말이 앞다리를 쳐들며 일어섰다. 견훤은 말에서 떨어져 혼절했다. 일당백의 용사들인 견훤의 친위대 수십 명이 혼절한 견훤을 업고서 간신히 합강을 건너 선산 쪽으로 도망쳤다.

 

대승을 거둔 왕건은 논공행상을 신속하게 공정하게 실시했다. 궁예에게서 유일하게 배운 좋은 점이었다.

고창(古昌)을 동쪽지방을 평안하게 하는 고장이라는 뜻인 안동(安東)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안동(安東)성주 금선평은 안동금씨로 성(姓)을 하사하고 고리제국의 이등벼슬인 대광으로 임명했다. 고창지방 호족으로 큰 공을 세운 금행과 금길에게도 금행에게는 권씨 성을 하사했으며(안동 권씨), 금길에게는 장씨 성을 하사하고(안동 장씨) 이 둘을 고리제국 사등벼슬인 대상으로 임명했다.

대광과 대상은 고리제국의 고위벼슬로 지방관들에게는 좀체 하사하지 않는 고위직이었다.

그리고 왕건은 직접 상주성주 아자개를 찾아갔다. 그리고 팔십이 넘은 연로한 아자개에게 백년 묵은 산삼과 여러 가지 진귀한 예물들을 선사했다. 견훤에게 협조하지 않은 것을 칭찬하고 만조백관의 위에 있는 명예직인 상보(尙父)벼슬을 내리고 앞으로 아버지와 같이 섬길 터이니 부디 개경으로 오시라고 권유했다. 아자개는 눈물을 흘리며 충성을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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