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른 장단평야에 커다란 잔치판이 벌어졌다.
안동(安東)전투에서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말갈기병대 이만 명을 위하여 왕건이 큰 잔치를 열어준 것이다.
왕건은 역성혁명에 성공하여 황위에 오른 후 고리제국 전체의 무역을 총괄하는 무역성(貿易省)을 만들었고, 송악상단이 중심이 되어 모든 대내외무역을 진행하게끔 일원화하였다. 송악상단 아래에 나주상단, 당진상단 등 기타 상단들이 소속되어 있게 해서 대내외무역의 주 된 이익은 고리제국 국고로 바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 조치로 고리제국 재정은 유력호족들에게 크게 의존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튼튼해졌다.
중앙집권국가로 가는 토대를 만든 것이다.
모든 상단의 배는 왕건이 직접 설계한 군선 겸용 선박으로 새로 건조(建造)하여 차례대로 낡은 배들을 교체하게 하였다.
자연스럽게 고리제국의 수군 조직과 상단조직이 융합되어 평상시에는 상업 활동에 종사하고 유사시에는 수군이 되는 효율적인 조직이 만들어졌다.
다만 상근하는 수군조직은 작아지는 문제점이 있어서 견훤의 백제국의 위협이 상존하는 현재는 다소 문제점이 있었다. 특히 예성강지역과 수도 개경은 그동안 한 번도 외침(外侵)을 받지 않아 마치 천하에 전쟁이 없는 것 같은 평화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예전에 왕건에게 배워서 군선 겸용 선박의 제작 기술이 있고, 고리제국 최대의 선소(船所,조선소)를 교하(交河)에 가지고 있는 정주(貞州,경기도 파주 교하와 개풍군)의 류천궁(柳天弓) 가문은 새로 건조하는 모든 상단 선박의 조선(造船)을 독점적으로 맡아 엄청난 돈을 벌었다.
정주(貞州)의 류천궁(柳天弓) 가문은 이번 승전 축하 잔치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내기로 자청하였다.
류금필이 왕으로 있는 북쪽의 말갈족들의 대추장과 추장들도 모두 잔치에 불러서 같이 즐기기로 하였기 때문에 북쪽에서도 수천 명의 말갈족들이 장단평야로 내려왔다.
류천궁(柳天弓) 가문은 말갈족들에게 그들이 유목하던 가축들을 몰고 내려오게 하여 좋은 값에 이들 가축들을 사들여 잔치에 풍성하게 썼기 때문에 잔치에는 고기와 술이 차고 넘쳤다.
열흘간에 걸쳐 벌어진 잔치에 왕건은 만조백관을 이끌고 가서 류금필과 말갈족들을 크게 치하했다.
그러나 왕건이 장단평야의 잔치판에 당도했을 때에 예상하지 못했던 민망한 일이 일어났다.
술과 고기를 즐기며 흥겹게 놀던 말갈족들은 자신들의 왕인 류금필을 무등 태우고 환호성을 올리며 장단평야를 돌았다. 고리제국 황제인 왕건은 안중에도 없었다. 말갈족들은 류금필을 둘러싸고 무릎을 꿇고 만세 만세 만만세를 불렀다. 만세는 황제 이외의 사람에게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류금필은 난처해서 어쩔 줄 몰라 했으나 무식한 말갈족들은 전혀 통제가 되지 않았다.
장단평야에서의 잔치가 잘 끝나고 한 달쯤 되었을 때 왕건 앞으로 상소문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대학자인 왕규(王規)가 논리정연하게 문장을 썼고 황주(黃州,황해도 황주)의 황보제공(皇甫悌恭), 평주(平州,황해도 평산)의 박지윤(朴智胤) 등 대호족들이 모두 가세하여 황제를 능멸한 류금필을 죄주라는 간언(諫言)들을 하였다.
조정에 자유로운 언로(言路)가 있어야 한다고 늘 주장해오던 왕건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이때 류금필이 은밀하게 독대를 신청해 왔다.
“소신의 모든 관작을 삭탈관직(削奪官職)하고 멀리 귀양을 보내주십시오. 이번 장단잔치판에서 벌어진 일은 아무리 무식한 말갈족들의 일이라 해도 크게 잘못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일을 단호하게 처리하지 못하신다면 앞으로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는 것이 심히 어려울 듯합니다. 용단을 내려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류금필대장군을 짐이 어떻게 벌준단 말이오. 그건 가당치 않은 일이오.”
왕건이 단호하게 그건 안 된다고 단언했다.
이어서 류금필이 간곡하게 말했다.
“지금 고리제국의 가장 취약한 곳은 수군입니다. 수전(水戰)의 군신(軍神)이신 폐하께서 그동안 모든 수전(水戰)을 손쉽게 승리하셨기 때문에 지금 고리제국 수군은 승리감에 도취해 안이해져 있습니다.
현재 견훤은 백제의 각 포구에서 대규모 수군을 조성하여 맹훈련을 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수전(水戰)을 통해서 승기를 다시 잡아보려는 것입니다.
견훤은 독한 자입니다. 백제의 모든 자원을 수군 조성에 집중하고 있으니 일 년쯤 지나면 백제수군의 침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소신을 곡도(백령도)로 귀양보내주십시오. 그리고 폐하께 긴히 주청드릴 일이 있습니다. 소신의 말갈족 부하들 중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이라는 부족이 있습니다. 먼 북쪽에 있는 흑수(黑水)라는 바다와 같이 큰 강 유역에서 살고 있는 부족입니다. 고기잡이와 수렵을 주로 하는 부족인데,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사람은 체구가 커지는지라 이자들은 힘이 세고 아주 건장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살고 있는 흑수 유역은 너무 추워서 일 년의 절반가량은 흑수(黑水)가 얼어붙어 고기잡이를 하지 못하므로 생활은 몹시 곤궁합니다.
허락해주신다면 소신은 이들의 절반 정도를 곡도(백령도) 등 우리 고리제국의 서해안의 섬들과 해안지방으로 이주시킬까 합니다. 이들은 물에 익숙하고 체구가 건장하니 훌륭한 수군자원이 됩니다.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외로운 섬들이라도 지금 살고 있는 흑수(黑水)보다는 월등 좋은 조건이니 이들은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통촉하여 살펴주시옵소서.”
류금필이 진지하게 말했다. 역시 류금필이었다. 천하제일의 무적(無敵)의 무장(武將)이면서도 오직 왕건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만고의 충신이었다.
“아쉽지만 그렇게 하지요. 당진(唐津) 일대를 지키고 있는 수군대장군 박술희를 곡도(백령도), 포을도(대청도), 대우도(대동강 하구)와 패서지방 서해안 일대를 지키는 서해수군통제사로 겸임 발령을 낼 터이니 박술희와 같이 한 번 큰일을 해보시지요. 살아 있는 뱀과 두꺼비 등 온갖 날고기를 즐겨 먹는 박술희라면 말갈족들과도 잘 융화가 될 것입니다. 박술희가 속으로는 학문도 뛰어나지만 겉만 본다면 꼭 삼국지의 장비와 같이 생긴 것이 말갈족들이 좋아하고 존경하게 생겼잖습니까?”
왕건은 류금필을 절해고도(絶海孤島) 곡도(백령도)로 삭탈관직하여 유배한다고 칙명을 내렸다.
류금필이 절해고도(絶海孤島) 곡도(백령도)로 유배된 지도 어느덧 일 년이 흘렀다.
왕건은 박술희를 통하여 류금필의 경과를 보고 받고 있는데 흑수말갈인들의 곡도(백령도) 등의 정착과 수군 전력화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박술희도 주로 곡도(백령도)쪽에 머물면서 류금필의 작업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류금필이 말갈족의 왕이라 고리제국 관직이 있고 없음은 류금필의 말갈족 관리에는 아무 영향이 없었으나 기타 수군 관련 업무에 있어서는 박술희의 협조가 중요했다.
박술희는 수군대장군임에도 불구하고 곡도(백령도)쪽에서는 평복을 입고 말갈족들과 어울렸는데 유배 신분이라 평복을 입고 있는 류금필과 격을 맞추기 위한 배려도 숨어 있었다. 평복을 입은 박술희는 누가 말갈족인지 모를 정도로 말갈족들과 호탕하게 어울렸다.
왕건은 청주(淸州) 호족 공직의 고리제국 재귀부(再歸附)를 계기로 백제국과의 서부전선에 확실한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안성 밑의 교통 요지인 도솔(兜率,천안)에 천안도독부를 신설했다.
천하를 평안하게 할 땅이라는 의미를 담아 왕건이 직접 명명한 천안(天安)은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한수 하류 유역이나 패서지방을 가려면 꼭 지나가야 하는 교통의 혈처(穴處)와 같은 중요한 곳이었다.
천안(天安)은 삼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왕건이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도선대사의 도선비기에도 ‘이곳은 다섯 마리 용이 여의주를 얻으려고 서로 다투는 오룡쟁주의 지세이니 이 땅에 만약 삼천호읍을 설치하고 군사를 훈련시켜 확실한 내 땅으로 만들면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서서 기다려도 될 만큼 속히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예언한 중요한 곳이었다.
왕건은 천안도독부의 수장인 도독(都督)에 정윤(正胤,황태자) 왕무(王武)를 임명했다.
왕건의 맏아들인 왕무(王武)는 이제 열아홉 살의 청년이 되었는데 왕건의 제2황후인 장화황후 오씨((莊和皇后 吳氏), 예전의 순이(順伊)의 아들이다.
왕무(王武)는 어려서 나주에 있을 때에 손님마마(천연두)를 앓아서 얼굴이 얽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흠잡을 데 없는 왕재(王才)였다.
힘이 장사라 열여섯 살 시절에는 동궁(황태자인 정윤의 거주 궁궐)의 왕무(王武) 침소에 침입한 자객을 자다가 일어나 한 주먹에 때려죽이고 다시 잠들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였다.
수십 번의 유력호족들과의 결혼으로 왕건에게는 수십 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왕무(王武)는 맏아들이기도 했지만 힘과 무예로도 단연 뛰어났다.
왕건은 왕무(王武)가 십대 초반일 때부터 전쟁터에 데리고 다녔는데 열아홉 살이 된 이제는 중요한 천안도독부의 초대 도독을 맡겨도 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왕건의 이 조치에는 정윤(正胤,황태자) 왕무(王武)를 좀 더 강하게 단련시키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수많은 유력호족들이 외척(外戚)으로 있는데 왕무(王武)의 외가(外家)인 오다련의 집안은 그중에서도 가장 한미해서 왕건이 다음 황제로 왕무(王武)를 지목하려면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왕건도 정보망을 통하여 왕무(王武)의 외가(外家)를 헐뜯는 이야기들을 많이 듣고 있었다.
심지어 왕건이 하룻밤 즐기려한 한미한 신분의 나주의 순이(順伊)가 임신하지 못하게 바닥의 돗자리에 정액을 쏟았는데 순이(順伊)가 정액을 자신의 옥문 안으로 주워 담아 왕무(王武)가 태어났다고 하는 심하게 헐뜯는 이야기까지 항간에 나돌았다. 그래서 왕무(王武)의 얼굴이 돗자리처럼 얽어 있다는 것이다.
천안도독부의 수장인 도독(都督)을 맡은 정윤(正胤,황태자) 왕무(王武)는 왕건이 세심하게 배려해서 붙여준 참모들의 도움 아래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여러 번의 전투에서 백제제국군을 격퇴하고 천안도독부의 인심을 훌륭하게 수습하여 서부전선 전반을 잘 안정시켜 놓았다.
중요한 지역의 도독(都督)을 맡겨놓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왕건은 한 숨 돌렸으며 차기 황제로 손색이 없다는 좋은 평들이 왕건의 의도대로 고리제국 조정에서 암암리에 나돌았다.
가을볕이 따뜻한 어느 늦가을 날에, 친정(親征)으로 견훤의 대야성(합천)을 점령하고 강주(진주) 일대를 확보하러 대군을 이끌고 나와 있던 왕건에게 급보가 날아왔다.
백제군 대총관(大總官) 수군대장군 상귀가 백제군 수군 백 오십여 척을 이끌고 조강(祖江,한강과 임진강의 합류지점부터 황해로 유입하기 직전까지의 물줄기를 말한다.)을 따라 예성강 하구를 급습하여 개경의 중요 방어시설인 발어참성 등을 함락시키고 예성강 하구에서 100리(약 40km)거리인 한포(汗浦)까지 진입하여 고리제국 수도 개경을 급습했다는 급보였다. 한포(汗浦)까지는 강물의 수심이 깊어 대선(大船)도 드나들 수 있는데, 한포(汗浦)는 개경보다 내륙이라 한포(汗浦)와 개경까지 사이에는 별다른 방어시설이 없었다. 또한 개경 서문 바로 옆에 있는 벽란도(碧瀾渡)로도 백제군이 들어왔는데 미리 개경 황도(皇都) 성 안에 들어와 있던 백제군 특공대가 성문을 열어주어서 바로 개경 궁궐 안까지 난입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개경은 지금 난리통인 것이다.
상귀의 동생이며 역시 백제군의 수군대장군인 상애도 백제군 수군 칠십여 척을 이끌고 염주(황해도 연안), 백주(황해도 배천)의 고리제국군 해군기지를 급습하여 고리제국 수군의 함선 백여 척을 불태우고 저산도(猪山島)의 목장을 급습하여 군마 삼백 필을 미리 준비한 대선(大船)들에 실어 백제 쪽으로 수송 중이라고 한다.
육전에서의 패배를 수전으로 설욕하여 한순간에 정세를 뒤집으려는 전쟁의 신(神) 견훤의 큰 작전이었다. 복잡한 한수 하류의 물길을 상세히 파악하고 적의 수도 개경을 대범하게 급습한 놀라운 작전이었다.
왕건 이하 강주에 있던 모든 장군들은 천리(약 400km) 바깥 개경의 급보에 망연자실했다. 왕건이 지금 조치를 취하기에는 개경은 너무 멀었다. 견훤도 왕건이 강주에 친정(親征)을 와 있는 것을 알고 이런 대담한 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지금 상황으로는 개경에 있던 황비들을 포함한 황족들이 포로로 잡혀 백제로 호송되는 황당한 비극을 피할 수 없어 보였다.
한수 하류와 혈구(穴口,강화도), 미추홀(인천)등의 방어책임을 맡고 있던 자는 수군대장군 왕만세(王萬笹)였는데 혈구(穴口,강화도), 미추홀(인천)을 대대로 지배하던 대호족 출신으로 왕건이 왕씨 성을 하사하고(賜姓) 2품 벼슬인 대광(大匡)으로 임명한 자였다. 대대로 바다 일을 해와 수군을 통솔하기에 적합한 자라 여겨 왕건이 수군대장군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황도 개경을 수비하던 병력은 2,500명 정도였는데 적의 특공대에 의해 성문이 뚫리자 순식간에 와해되었다고 한다. 개경은 적이 절대 침입할 수 없는 안전한 곳이라 여겨 방심한 것이 큰 화를 불러왔던 것이다.
아무런 조치도 할 수 없고 암담한 순간들이었다.
그런데 한나절이 지났을 무렵부터 상상할 수 없었던 낭보(朗報)들이 연신 강주의 왕건 진영(陣營)으로 날아들었다.
황도를 급습한 백제군들은 가장 중요한 목표인 왕건의 황비와 부인들을 체포하려고 궁궐로 난입했는데, 궁궐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력호족의 딸들인 황비와 부인들은 왕건의 칙명에 따라 궁궐이 아닌 개경 호족 저택에 살고 있었다.
왕건의 제1황후인 류천궁(柳天弓)의 딸인 신혜황후 류씨(神惠皇后 柳氏)만 궁궐에 있었는데, 제3황후인 류긍달(劉兢達)의 딸 신명순성황후 류씨(神明順成皇后 劉氏)가 재빠르게 개경의 충주 호족 저택으로 모셔가서 다행히 화를 면했다고 한다. 개경의 각 호족 저택에 상주하고 있던 호족 사병(私兵)들이 각 호족 저택들을 잘 방어하여 적군에게 사로잡힌 황후나 부인들은 아무도 없다는 낭보였다. 개경의 호족 저택에 있는 하인들도 모두 호족들이 자기 영지에서 골라서 올려 보낸 정예무사들인 것이다.
특히 제3황후인 류긍달(劉兢達)의 딸 신명순성황후 류씨(神明順成皇后 劉氏)는 무술의 달인답게 즉시 갑옷을 차려 입고 충주 호족 저택의 사백 명 군사들을 지휘하여 궁궐로 쳐들어가서 백제의 군사들을 물리쳤다. 이어서 각 호족들의 군사들도 각 저택에서 궁궐로 몰려나와 제3황후의 지휘 아래 개경 황도(皇都) 밖으로 백제군을 몰아냈다.
개경 인근 평주(平州)에 있던 평주 호족 박지윤의 아들들인 박수문, 박수경이 평주 사병(私兵)들을 이끌고 개경으로 들어와 왕건의 황후, 부인들의 군사들에게 쫓겨 개경 밖으로 물러나던 백제군들을 협공하여 섬멸했다. 육상으로 올라왔던 백제군 중에 살아서 백제 군선으로 돌아간 자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곡도(백령도)에 귀양 가 있던 류금필은 박술희에게 전서구로 전해진 개경 침탈 급보를 듣고 박술희와 함께 급히 첩보선들을 띄워 백제 수군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곡도(백령도)의 고리제국군 군선들이 진격하여 적진에 가까워지자 연안(沿岸)에 살고 있는 어부들이 작은 배를 타고 와서 적정을 연신 알려줬다. 연안이 모두 고리제국의 영토이고 고리제국 백성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곡도(백령도)의 고리제국군 군선 삼십여 척은 연평도와 주문도 사이에서 백제군 수군 선박 백여 척을 발견했다. 곡도(백령도)의 고리제국군 군선 삼십여 척은 즉시 백제군 수군을 공격했다.
고리제국군 군선에는 흑수말갈인들이 격군과 갑판병으로 타고 있었다. 힘이 좋은 흑수말갈인 격군(格軍,노 젓는 병사)들이 노를 젓는 군선들은 쾌속으로 백제군 수군의 선두 군선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백제군 군선에게 당파공격(撞破攻擊)을 가하였다. 당파공격(撞破攻擊)은 적의 배에 아군의 배를 충돌시켜 적선을 가라앉히는 전법은 아니다. 적선의 측면에 격군의 빠른 노질로 아군의 배를 붙여 적군의 배에 갈고리를 건 후에 갑판병들이 적선에 올라타 적군을 배위에서 제압하는 것을 당파공격(撞破攻擊)이라고 한다.
거구의 흑수말갈인들이 백제군의 함선 갑판 위로 난입하자 힘에서 상대가 안 되는 백제 수군들은 이내 제압당하여 항복했다.
곡도(백령도)의 고리제국군 군선에는 안시성(安市城) 량만춘 성주(梁萬春 城主)의 팔우노(八牛弩)를 모방한 커다란 석궁(石弓)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류금필이 양사부(楊師父,왕륭)와 함께 본 탐라 법화사에 있던 량만춘 성주(梁萬春 城主)의 팔우노(八牛弩)를 연구하여 제작한 것들이다. 갑판에 설치된 팔우노(八牛弩)는 여러 개의 도르레를 이용하도록 개조하여 군사 네 명이 조작 가능하도록 개량했다.
이 팔우노(八牛弩)는 커다란 불화살을 백장(百丈, 약 300m) 너머에 있는 적선에 정확하게 쏠 수 있었다. 예전에 배에서 화공을 위하여 사용하던 석화시(石火矢 , 즉 돌로 만든 불화살이라는 뜻이니 일종의 투석기와 비슷한 것으로 해전에서 돌에 기름을 먹여 불을 붙인 후 투석기로 적선을 때리고 불사르는 전법)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강력한 화공(火攻) 방법이었다.
당파공격(撞破攻擊)으로 선두에 있던 백제군 돌격선들을 제압한 곡도(백령도)의 고리제국군 군선들은 자신들보다 몇 배 더 많은 백제제국 수군의 군선들을 향하여 팔우노(八牛弩)로 불화살 공격을 했다. 수십 척의 백제 군선들이 이내 불길에 휩싸여 침몰하고 뒤따르던 백제군 수송선 대선(大船)들은 이내 전투를 포기하고 항복했다. 대승이었다. 견훤이 절치부심(切齒腐心),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길러낸 백제 수군의 주력이 일거에 무너졌다.
고리제국군 군선 위에서는 류금필을 향한 흑수말갈인들의 만세 만세 만만세 소리가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