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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손등룡기16 천손등룡(天孫登龍)

작성자양승철문양공후|작성시간21.08.24|조회수38 목록 댓글 0

개경으로 돌아온 왕건은 류금필을 귀양지 곡도(백령도)에서 불러들였다.

만조백관들이 도열한 가운데 왕건은 눈물을 흘리면서 류금필을 크게 치하했다.

고리제국의 누구라도 이제는 류금필을 뭐라 할 수 없었다. 왕건은 류금필을 고리제국의 제후국인 말갈국의 왕으로 정식으로 책봉했다. 또한 고리제국의 최고 벼슬인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임명했다.

또한 류금필 뿐만 아니라 류금필의 자손들도 혹시 죄를 범하더라도 영구히 죄를 사면해준다는 칙명을 내렸다. 류금필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모두 뛰어난 무장(武將)들이었다.

류금필은 이제 본인이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힘이 다할 때까지는 고리제국의 최전선에 서서 전투를 지휘하겠다고 왕건에게 주청했다.

 

이듬해 정월 견훤이 정국을 만회하려고 천안도독부를 향하여 대군을 동원하여 쳐들어 왔다. 류금필이 자청하여 참전하기를 원하여 왕건이 윤허하였다. 류금필은 천안도독부 도독 정윤(황태자) 왕무(王武)와 같이 고리제국군을 지휘하여 백제군을 크게 이기고 백제 운주(運州)까지 진격하여 백제의 고도(古都) 웅진(熊津)을 포함한 삼십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 견훤이 친정(親征)한 육전(陸戰)에서 안동(고창)전투에 이어서 또다시 대패(大敗)한 것이다.

견훤은 등창(등에 나는 큰 부스럼)이 심해져서 백제의 수도 전주로 돌아가서 앓아누웠다.

류금필은 왕건의 동수계곡 패전 이후에 백제에 다시 빼앗겼던 나주(羅州)를 수복하러 자청하여 수군대장군 량능길(梁能吉)과 같이 또다시 출정했다. 무패(無敗)의 명장(名將) 류금필은 이제는 누구도 부인 못할 고리제국의 수호신이었다.

류금필은 나주에 주둔해 있던 백제의 수군과 육군을 모두 격파하여 나주를 탈환했다. 이제는 백제군은 류금필이란 이름만 들어도 사기가 꺽일 지경이었다. 나주를 탈환한 류금필은 왕건의 재가를 얻어 나주에 상주하며 오다련과 함께 나주를 조직적으로 경영하기 위한 장기적인 대책들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나주에 백제의 부의 절반이 있다’라고 옛날부터 전해왔지만 나주가 백제의 다른 지역과 연결되지 않았던 지금까지는 백제의 풍부한 물산들이 나주로 들어오지 못해 나주는 번영하지는 못했다. 이제 백제가 망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백제 멸망 후의 나주의 큰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었다.

 

이때 백제에서는 견훤의 아들들인 신검, 양검, 용검이 아찬 능환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견훤이 후계자로 점찍었던 배다른 아들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견훤 자신이 미륵이라며 크게 중창했던 김제 금산사에 유폐시켰다. 견훤의 책사 파진찬 최승우도 이때 죽었다.

견훤은 사위 박영규를 통하여 고리제국 황제 왕건에게 밀서를 보내어 고리제국으로 귀순하겠으니 탈출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김제 금산사의 북쪽 지역은 견훤의 고리제국으로의 탈출을 막기 위해 백제군이 철통 같이 지키고 있어 류금필이 또다시 자청하여 수십 명의 무사(武士)만 이끌고 김제 금산사의 남쪽 길로 견훤을 안전하게 나주로 모시고 왔다.

 

나주에서 류금필이 고리제국 수군의 군선으로 견훤을 개경으로 모시고 왔다.

견훤은 왕건의 앞에 무릎을 꿇고 ‘황제폐하, 망국지주 이 늙은 것이 전하에게 몸을 맡기려 하나이다.’라고 간청했다.

왕건도 이 모습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왕건은 견훤을 상보(尙父)에 봉했다. 상보(尙父)는 옛적에 주(周) 무왕(武王)이 여망(呂望,강태공 姜太公)에게 준 칭호로 존경하는 어버이라는 뜻이다.

또한 개경의 남쪽 궁궐을 내어주고 남녀종 수십 명과 커다란 식읍까지 하사하여 우대했다.

견훤이 왕건에게 공식적으로 청원했다.

‘황제폐하, 청컨대 군사들을 푸시어 왕관만 알고 의리도 모르는 제 아들놈들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쳐 죽여 주시옵소서. 저것들은 자식이 아니라 역적으로 화했소이다.’

드디어 오십 여년 역사의 백제제국을 멸망시킬 명분이 생겼다. 백제제국이 망하더라도 백제 유민들이 끈질기게 항전한다면 계속 골치 아플 일이었는데 견훤이 자청하여 백제를 멸해달라고 하니 호기(好期)였다. 왕건은 천안도독부에 말갈기병대 일만 명을 포함한 삼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천안도독부 도독 정윤(황태자) 왕무(王武)와 류금필이 전 군을 지휘하여 백제 공격을 하도록 칙명을 내렸다.

백제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새 황제 신검이 백제 전국에서 오만 병력을 모아 황산(黃山,논산)에 진을 치고 이에 맞섰다.

그러나 견훤의 맏아들 신검은 견훤이 무명시절에 시골 촌부(村婦)에게서 얻은 자식이라 허울만 황제일 뿐 아무 실권도 없었다. 견훤이 맏아들 신검을 그동안 중용하여 신검의 위세가 있었으므로 새 황제로 옹립했을 뿐 무진주(광주)지역 유력호족이 외가인 용검과 양검이 실제로는 실세였다. 황산에 모인 신검의 병력 대부분이 무진주(光州) 지역 군사이고 신검의 반란 때 죽은 금강의 외가인 완산주(전주)호족들은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고리제국의 천안도독부와 인접한 지역이라 금강의 외가 지역인 황산에 어쩔 수 없이 진을 치게 되어 신검일당은 불안했다.

이때 천안도독부의 병력 중 주력부대인 말갈기병대 일만과 보병 일만이 추풍령 쪽으로 이동하였다.

자신들의 지지 세력이 있는 무진주 쪽을 고리제국군이 우회하여 공격하려 한다고 판단한 신검일당은 즉시 전군을 황산에서 고리제국군이 가는 방향으로 이동시켰다.

고리제국군이 추풍령을 넘어 금오산 옆을 지나 상주 선산지역으로 이동하였으므로 백제군도 이를 따라 계속 이동하여 따라오게 되었다.

왕건이 주전장(主戰場)을 금오산(金烏山)이 내려다보고 있는 상주 선산평야로 정하고 백제군을 유인했던 것이다.

이미 제해권(制海權)을 완전히 장악한 고리제국 수군은 수군 총사령관 량능길(梁能吉)의 지휘 아래 낙동강을 따라 올라와 왕건이 바다와 같은 넓은 곳이라 하여 해평(海平)이라고 이름 붙인 폭이 아주 넓고 강 가운데에 큰 섬이 있는 낙동강 중류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곳은 주전장인 선산평야 바로 옆이라 고리제국 육군과 수군이 협동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백제제국군 입장에서는 선산평야는 이른바 사지(死地)였는데, 백제제국군은 뭐에 홀린 듯 사지(死地)로 들어오고 있었다.

왕건은 도선대사가 ‘동사서독중금오(東邪西毒中金烏)’라고 했던 중금오(中金烏)인 금오산(金烏山) 아래에서 천하통일의 결정타가 될 이 대전(大戰)을 치루기를 원했다.

량금오(梁金烏)가 천손(天孫) 량씨(梁氏)로서 천손등룡(天孫登龍)을 이룰 힘을 줄 대혈(大穴) 자리인 것이다.

왕건이 선산전투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 호족들은 사병(私兵)들을 이끌고 오라고 칙명을 내리자 고리제국 전역의 호족들이 모두 참전하겠다고 나섰다. 이제 큰 전투로는 마지막이 될 이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누가 봐도 이 대전의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왕건은 호족들의 참전의사에 사의를 표하고 이들 중 정예로 판단되는 소수만 선산전투에 참전하게 하였다.

백제군 오만 명을 상대할 적정병력은 그 배인 십만 명 정도면 적당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 토착 호족들인 선궁(宣弓), 훤술(萱述) 등이 적극적으로 고리제국군을 도왔으므로 왕건은 이들에게 금(金)씨 성을 하사하여 이들은 금선궁(金宣弓), 금훤술(金萱述)이 되었다.

또한 이들 토착호족의 딸들 중 용모와 품행이 가장 뛰어난 처녀를 골라 왕건의 부인으로 들였다. 선산지역에 대한 배려를 표시한 것이다. 이 부인이 왕건의 마지막 부인인 스물아홉 번째 부인 해량원부인(海良院夫人)이다.

 

왕건의 십만 대군은 최적의 위치에 병력 배치를 마치고 백제군 오만 명이 도살장(屠殺場)으로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건은 십만 대군을 좌강(左綱), 중군(中軍), 우강(右綱)으로 나누어 선산평야 중앙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낙동강의 지류 일리천(一利川,감천) 북쪽에 배치했다.

백제군이 오랜 행군 끝에 지친 몸을 이끌고 선산평야로 들어섰다. 고리제국군은 백제군이 진용을 다 갖출 때까지 기다렸다. 이미 이긴 싸움이라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다만 호랭이가 작은 사슴을 상대할 때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이 방심만 하지 않으면 되었다.

백제군이 진용을 다 갖추는 것을 보고 왕건이 중군에서 고리제국군 좌강(左綱)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고리제국군 좌강(左綱) 선두에서 견훤이 백제군 쪽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백제군을 향해서 외쳤다.

“너희들의 황제가 여기 있다. 어서 와서 예를 갖추거라.”

칠십이 넘은 노구가 맞나 싶게 선산 평야를 쩌렁쩌렁 울리며 견훤이 외치자 백제군의 역전의 용사들인 효봉, 덕술, 애술, 명길 장군 등이 앞 다투어 나와 견훤에게 무릎을 꿇었다. 어쨌든 견훤은 오십여 년의 긴 세월을 백제를 통치한 황제인 것이다.

이어서 백제군의 좌군과 우군 모두가 견훤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을 했다. 이미 백제군은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있었다.

백제군의 중군에는 새 황제 신검이 있었는데 중군의 병사들은 무진주 병력들이라 아직 항복을 하지는 않고 주춤거리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고리제국군의 중군에서 왕건의 명을 받은 류금필이 말갈부족들인 흑수(黑水), 달고(達姑), 철륵(鐵勒)의 기병들을 이끌고 백제군의 중군을 향해 달려 나갔다.

“여기 류금필이 있다. 나와 감히 맞설 자가 있느냐.”

류금필이 말갈기병대의 선두에 서서 크게 외치며 돌진하자 백제군 중군이 크게 무너지며 도주하기 시작했다. 말갈기병대는 도망치는 백제병사들을 추격하며 닥치는 대로 베었다. 망구다이고 뭐고 작전도 필요 없는 일방적인 도살(屠殺)이었다.

신검은 허둥지둥 전주 쪽으로 도망갔다.

선산 평야에는 도살(屠殺)당해 죽은 백제군의 시체가 즐비했다. 나중에 시신을 수습해보니 죽은 숫자는 육천 명에 달했다.

주인을 잘못 만난 탓에 불쌍한 젊은 생명들이 선산평야에서 무수히 스러져 갔다.

고리제국군은 백제군을 추격하여 황산벌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아냈다. 오십년을 이어온 견훤의 백제제국이 드디어 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의 왕 금부(金溥)가 그해 십이월에 고리제국에 신라를 들어 바치고 귀부했다.

왕건은 금부(金溥)를 정승공(正承公)에 봉했는데 지위가 고려의 태자보다 높았다. 금부(金溥)는 녹봉으로 쌀 1천석을 받고 신란궁(神鸞宮)을 하사받았다. 신라국을 폐지하여 경주(慶州)라 하고 경주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주면서 금부(金溥)를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하여 경주지역을 그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삼한 천하가 통일되었다.

이제는 삼한 내에서는 더 이상 전쟁으로 죽는 불쌍한 생명들은 없을 것이다.

다만 북방의 강대한 遼帝國(요제국,거란)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 방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왕건은 특유의 포용력으로 고리제국을 아우르며 강성한 통일제국(統一帝國)을 완성해 갔다.

 

왕건은 고리제국 조정에 치밀하고 공정하게 논공행상을 하여 공신들을 선정하는 작업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공신들을 선정하여 1등 공신, 2등 공신, 3등 공신으로 분류하는 작업은 난항에 난항을 거듭 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공신 선정 작업에 모든 신료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잡음만 계속 들리고 선뜻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류금필이 박술희를 데리고 왕건에게 독대를 주청했다.

“폐하. 저 류금필과 박술희를 3등 공신에 봉해주십시오. 류금필과 박술희가 3등 공신이라면 누구도 자신이 3등 공신이 되었다고 불평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두 사람은 1등 공신으로도 모자라는 특등 공신인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그럴 수 없소이다.”

“교토사이주구팽(狡兎死而走狗烹,교활한 토끼를 잡고나니 쓸모없어진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이라는 옛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두들 이제 토사구팽(兔死狗烹)이 시작될 터인데 공신 작위라도 받으면 그나마 살아남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공신 직첩(職牒)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공신 지위를 받으면 관례에 의하면 후손들은 문음(門蔭)의 특전을 받게 되고 이와 함께 식읍(食邑)이나 녹읍(祿邑) 또는 역분전(役分田)의 형태로 경제적 기반이 보장되므로 공신 작위에 목을 매는 것입니다.

1등 공신과 2등 공신은 열 명 이내로 하시고 나머지는 모두 3등 공신으로 해서 재정적 특혜는 없이 명예만 내려준다면 국가 재정 부담도 줄이고 나중에 뒷말이 나도는 것도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자신이 왜 3등 공신 밖에 안되느냐는 반발이 있을 수 있어 저와 박술희를 3등 공신으로 봉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전쟁이 없으면 별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니 토사구팽(兔死狗烹) 되기 전에 말갈족들을 거느리고 요동지방을 넘나들며 사냥이나 하면서 살아갈까 합니다.”

류금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왕건은 류금필의 주청대로 1등, 2등 공신은 신숭겸대장군 등 특별한 인물들만 소수 선정하고 나머지 이천여 명은 모두 3등 공신으로 책봉하여 3등 공신 직첩(職牒)을 내려주어 골치 아픈 공신 책봉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류금필은 왕건이 어릴 때부터 보필하여 오십년 이상을 사심 없이 충성을 바쳐온 충신 중의 충신이었는데 마무리까지 역시 충신다웠다.

 

고리제국에 평온한 날들이 이어졌다.

왕건은 어느 날 탐라가 어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왕건은 탐라와 가까운 나주의 오다련에게 탐라를 상세히 정탐하여 보고하게 했다.

오다련은 상세하게 탐라 정탐을 하여 보고서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이 놀라왔다.

탐라는 성주(星主)인 량금오(梁金烏)의 아버지 량주형(梁柱兄)이 나이 육십이 되어 물러난 후 왕자(王子) 고자견(高自堅)이 세력을 규합하여 량씨(梁氏) 대표들이 모여 량씨(梁氏) 중에 가장 능력 있는 자를 성주(星主)로 세우던 것을 폐지하고 고자견(高自堅) 자신이 왕자(王子) 겸 성주(星主)가 되어 탐라를 통치하고 있다가 연로하여 아들 고말로(高末老)에게 왕자(王子) 겸 성주(星主) 직위를 물려주었다. 고말로(高末老)는 성주(星主)제도를 폐지하고 탐라국왕(耽羅國王)이 되어 고씨 왕조의 시작이라고 스스로를 태조국왕(太祖國王)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마치 고쿠리(高句麗)의 해씨(解氏) 마지막 왕인 모본태왕(慕本太王)을 시해하고 등극한 고쿠리 고씨(高氏)왕조의 시작인 태조태왕(太祖太王)의 이야기와 똑같은 일들이 탐라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왕건은 탐라에 사신을 보내어 올해 안에 고말로(高末老)가 고리제국 조정에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군사를 보내어 탐라를 정벌하겠다고 통보하였다.

 

그해 시월에 고말로(高末老)가 고리제국 조정에 입조(入朝)하여 왕건을 알현하였다. 왕건은 만조백관 (滿朝百官)이 모여 있는 가운데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고말로(高末老)를 황좌(皇座)에서 내려다 보았다.

“탐라촌주(耽羅村主) 고말로(高末老) 황제폐하를 뵈옵니다.”

커다란 덩치의 고말로(高末老)가 최대한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막강한 고리제국군이 탐라를 정벌한다면 자신은 물론 탐라의 고씨들도 모두 죽은 목숨인 것을 잘 아는 것이다.

“탐라는 빈한한 땅이라 예물도 제대로 갖춰오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만일 고리제국군이 탐라를 정벌해도 빈한한 곳이니 얻을 것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말을 돌려서 하고 있는 것이다.

“빈한한 땅에서 촌주 역할을 하느라 고생이 많구나. 촌주는 영명(英明)해보이니 고리제국에 들어와서 일을 해 보겠는가?”

“미개한 섬이라 제 이름 하나 제대로 쓸 줄 아는 자가 드믄 곳입니다. 하명을 거두어 주소서.”

“제 이름자만 쓸 수 있으면 빈공과를 따로 보아 벼슬을 줄 터이니 촌주는 솔가(率家)하여 고리제국으로 들어오도록 하라.”

“예, 황명대로 하겠나이다.”

고말로(高末老)는 황명이라 어쩔 수 없이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짐이 듣자니 탐라에는 영세불망맹세(永世不忘盟誓)라는 것이 있다고 하니 한 번 해보겠느냐.”

“그런 것이 있사오니 미개한 섬의 풍속이라 황제폐하 앞에서 들려드릴 만한 것은 못됩니다.”

“괜찮으니 한 번 해보아라.”

“그러면 외람되오나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고말로(高末老)는 영세불망맹세(永世不忘盟誓)를 고리제국 황제가 어떻게 알고 있나 당혹했지만 황제가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것 같아 할 수 없이 탐라에서 하고 있는 영세불망맹세(永世不忘盟誓)를 큰 소리로 어전에서 외쳤다.

 

“영세불망맹세(永世不忘盟誓)”

“고씨 천손(高氏 天孫)”

“영세불망 은(永世不忘 恩)”

“고씨 탐라 주인(高氏 耽羅 主人)”

“만세 만세 만만세(萬歲 萬歲 萬萬歲)”

 

왕건은 오다련의 보고서에서 이미 영세불망맹세(永世不忘盟誓)가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고말로에게 한 번 시켜본 것이었다. 저절로 쓴 웃음이 났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가서 쉬도록 하라.”

 

그날 저녁 왕건이 량능길(梁能吉)을 은밀하게 불렀다.

“삼중대광(三重大匡) 수군총사령(水軍總司令) 량능길(梁能吉) 입시옵니다.”

내관이 량능길이 입시했음을 알렸다.

“능길아. 어서 오너라. 낮에 탐라 고말로(高末老)가 영세불망맹세(永世不忘盟誓)를 외는 것을 보니 어떠하더냐?”

“피가 거꾸로 솟는 줄 알았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탐라의 고씨들은 원래 그런 부류들이다. 지금부터 어려운 일을 능길에게 좀 시킬까 한다.”

“이제 전쟁도 없고 심심해 죽을 지경입니다. 무슨 일이옵니까.”

“수군 오천 명을 이끌고 탐라로 가거라. 가서 제일 먼저 탐라의 고씨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개경으로 보내라. 짐이 작은 벼슬을 주어 북방 거란과의 국경에 배치시킬 것이다. 거란이 고쿠리의 원수임은 저들도 잘 알고 있으니 국경 수비에 작은 도움은 될 것이다. 그리고 탐라의 다까씨들을 고씨(高氏)로 부르도록 하라. 걸걸씨는 부씨(夫氏)로 부르게 하라.

그리고 잘 알고 있겠지만 지금 서남해안에는 해적들 때문에 폐허가 된 어촌들이 널려 있다. 이제 해적의 준동은 없을 터이니 탐라주민의 절반 이상을 오년 이내에 서남해안의 어촌으로 이주시켜라.

삼한을 통일한 강력한 국가가 세워졌으니 짐의 당대는 아니라 해도 백년 이내에 자원이 풍부한 탐라는 지속적으로 수탈당하여 지옥도(地獄道)가 온 섬에 펼쳐질 것이다. 빨리 섬을 탈출하는 것이 살 길임을 탐라의 지도자들에게 설복하도록 하라.

탐라에서 육지로 이주하는 주민은 나주의 오다련에게 인계하면 살 집과 작은 배, 양식을 주어 서남해안의 어촌들에 정착시킬 것이다.

탐라는 쌀이 귀한 곳이니 나주평야의 쌀을 풍족하게 가져가서 탐라 주민들을 먹이도록 하고 어떠한 민폐도 끼쳐서는 안된다.

짐도 탐라를 지상낙원으로 만들고 싶지만 여러 가지로 궁리해봐도 탐라의 미래는 암담하기만 하구나.

혹시 내륙으로 이주하려고 하는 량씨들이 있다면 능길이 네가 돌아올 때에 모두 인솔하여 청주로 가도록 하여라. 청주는 호족들이 반역을 꾀하다 모두 제거되어 지금 무주공산인 곳이니 칙명으로 능길이 너에게 청주 땅을 하사할 것이니 청주 호족이 되어 대대로 청주 땅을 다스리도록 하여라. 충주 량씨(忠州 梁氏)로 새로 성을 하사할 것이니 능길이 네가 충주 량씨의 시조가 되어 이들을 이끌도록 하라. 청주는 반역향이라 어감이 좋지 않아 충성스러운 고장 충주의 이름을 하사하는 것이다.”

“존명(尊命). 황제폐하의 칙명을 받들겠나이다.”

량능길(梁能吉)은 십년간에 걸쳐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이로써 탐라는 원래의 질서를 되찾고 안정되게 되었다. 왕건은 탐라가 고립된 지상낙원의 세계를 향유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음을 예견하고 탐라에 지옥도(地獄道)가 펼쳐지기 전에 탐라주민들을 최대한 배려할 수 있는 조치들을 취했던 것이다.

 

삼한이 고리제국(高麗帝國)으로 통일된 지도 팔년이 지났다. 고리제국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고 삼한에 전쟁이 없어지니 백성들은 편안해졌다.

 

왕건은 몸의 이상을 느끼고 이제 갈 때가 된 것을 직감했다. 왕건은 조정의 대신들을 불러 자신이 승하하면 왕무(王武)를 다음 황제(皇帝)로 추대하도록 조치를 하였다.

 

“짐이 숨을 멈추면 조정의 대신들과 황족들은 예성강 포구로 나가보라. 천손등룡(天孫登龍)을 볼 것이다.”

 

왕건이 평안한 표정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때 예성강 포구 앞 바다에 길이가 두 장(二 丈,약 6m) 정도 되는 흑룡(黑龍)이 나타나서 바다 위를 오르내리며 놀기 시작했다. 흑룡은 점점 자라더니 이윽고 네 장(四 丈,약 12m) 크기의 청룡(靑龍)이 되었다.

소낙비가 한 식경(약 30분) 정도 세차게 내리더니 이내 그치고 무지개가 남쪽 하늘에 구름다리처럼 놓였다. 청룡(靑龍)은 금빛 찬란한 황룡(黃龍)이 되어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기 시작했다.

“천손등룡(天孫登龍)이다!”

“폐하. 부디 잘 가십시오.”

예성강 포구에서는 조정의 대신들과 황족들이 왕건이 황룡이 되어 승천하고 있음을 보고 무릎을 꿇고 왕건을 배웅하고 있었다.

 

황룡(黃龍)은 남쪽 하늘로 날아가다 선산 금오산(金烏山) 위에서 산위를 크게 한 바퀴 돌더니 세 발 달린 태양의 새 삼족오(三足烏)가 되어 다시 남쪽으로 날아갔다.

탐라 태백산(한라산은 몽골어로서 몽골 침입 후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됨)위에서 삼족오(三足烏)는 탐라 섬을 크게 세 바퀴 돌더니, 온몸이 활 활 불타는 찬란한 불사조(不死鳥)가 되어 해(태양) 안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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