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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양을나는 지신족이 아니라 환웅의 황자이다.

작성자법선- 양 인|작성시간18.11.27|조회수57 목록 댓글 0

시조 양을나는 지신족이 아니라 환웅의 황자이다.

배달국 천황 17세환웅 혁다세의 셋째아들이다.

가. 환인천제(桓仁天帝)의 환국(桓國)

우리들의 조상은 27,000년 전에 현생인류로 유라시아 중앙 바이칼호를 중심으로 출현하였다. 아버지 나반(那般)께서 어머니 아만(阿曼)과 처음 만나신 곳은 천하(天河 바이칼호)의 아이사비(阿耳斯庀)이었다. 두 분이 꿈에 천신상제(天神上帝)님의 가르침을 받고 스스로 혼례를 올리시고 하늘과 땅의 조화로운 기운을 받아 살았다. 그 자식이 아홉이라 그가 구환족(九桓族)이었다. 기원전 7197년에 환인(桓仁) 안파견(安巴堅)이 우주 광명의 도를 계승하여 아버지의 도를 세우려 천산(天山) 동방에 밝은 나라로 환국(桓國 광명의 나라)을 개국하고, 천자광명(天子光明) 문화시대를 열었다. 안파견은‘하늘을 받들어 지상의 부권(父權)을 세운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주권자임을 뜻한다.

백성들은 풍요로웠고 인구도 많았다. 처음에 환인(桓仁)께서 천산에 머무르시며 도를 깨쳐 장생하니 몸에는 병이 없었다. 천신상제(天神上帝)님을 대행하여 널리 교화를 베풀어 사람들로 하여금 싸움이 없게 하셨다. 돌을 부딪쳐서 불을 피워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모두 힘을 합해 열심히 일하니 굶주림과 추위가 저절로 사라져 무병장수(無病長壽)시대를 열었다.

환국은 초대환인 안파견(安巴堅)에 이어 2세환인 혁서(赫胥), 3세환인 고시리(古是利), 4세환인 주우양(朱于襄), 5세환인 석제임(釋提壬), 6세환인 구을리(邱乙利), 7세환인 지위리(智爲利)까지 3101년간 이어 갔다.

환국은 구환족(九桓族)이 12개 분국으로 나누어져 다스렸다. 12개의 분국은 수밀이국(須密爾國), 선패국(鮮稗國 일명 시위국豕韋國 또는 통고사국通古斯國), 사납아국(斯納阿國), 매구여국(賣勾餘國 일명 직구다국稷臼多國), 구모액국(勾牟額國), 객현한국(客賢汗國), 우루국(虞婁國 일명 필나국畢那國),` 일군국(一羣國), 구다천국(勾茶川國), 구막한국(寇莫汗國), 양운국(養雲國), 비리국(卑離國) 이었다.

나. 환웅천황(桓雄天皇)의 배달국(倍達國)

7세환인 지위리(智爲利)는 아들 거발환(居發桓) 환웅(桓雄)이 동방 천하를 건지려는 뜻을 가지고 있고,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자주 꾸니까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산(三危山)과 태백산(太白山백두산)을 내려 보시니 가히 홍익인간(弘益人間) 할 만한 곳이라 하여 그 뜻을 이루게 하였다.

동방으로 떠나려는 환웅 아들에게 천부(天符)와 인(옥쇄)세 개를 주어 무리 3천명을 이끌고 가서 동방의 개척을 떠나게 하였다. 그리하여 환웅천황은 태백산 마루 신단수(神檀樹)아래에 내려오시어 이곳을 신의 도시 신시(神市)라 하고 기원전 3897년 음력 10월3일 배달국(倍達國)의 나라를 열었다.

환웅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두어 나라를 다스렸는데 이는 지금 민주정부의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와 같았다. 그 아래에 오가(五加)제도를 두었는데, 우가(牛加)는 농사(主穀) 곡식을 맡고, 마가(馬加)는 왕명(主命) 법률을 맡고, 구가(狗加)는 형벌(主刑) 치안을 맡고, 저가(猪加)는 질병(主病) 보건을 맡고, 양가(羊加)는 선악(主善惡) 문화를 맡게 하였다. 인간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써 다스리고 깨우쳐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셨다.

 

배달(倍達)은 천황(天皇) 환웅께서 천하를 안정시키고 정하신 나라의 이름이다. 수도는 처음은 신시(神市)이었으나, 14세환웅천황에 이르러 청구(靑邱)로 옮겼던 나라로 1세환웅 거발환(居發桓)을 시작으로 18세환웅까지 1565년간 계속 되었다.

 

1세환웅천황(桓雄天皇)은 거발환(居發桓)으로 B.C 3897년부터 B.C 3804년까지 94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120세 이었다.

2세환웅천황은 거불리(居弗理)로 B.C 3804년부터 B.C 3718년까지 86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102세 이었다.

3세환웅천황은 우야고(右耶古)로 B.C 3718년부터 B.C 3619년까지 99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135세 이었다.

4세환웅천황은 모사라(慕士羅)로 B.C 3619년부터 B.C 3512년까지 107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129세 이었다.

5세환웅천황은 태우의(太虞儀)로 B.C 3512년부터 B.C 3419년까지 93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115세 이었다.

6세환웅천황은 다의발(多儀發)으로 B.C 3419년부터 B.C 3321년까지 98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110세 이었다.

7세환웅천황은 거련(居連)으로 B.C 3321년부터 B.C 3240년까지 81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140세 이었다.

8세환웅천황은 안부련(安夫連)으로 B.C 3240년부터 B.C 3167년까지 73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94세 이었다.

9세환웅천황은 양운(養雲)으로 B.C 3167년부터 B.C 3071년까지 96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139세 이었다.

10세환웅천황은 갈고(葛古)로 B.C 3071년부터 B.C 2971년까지 100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125세 이었다.

11세환웅천황은 거야발(居耶發)으로 B.C 2971년부터 B.C 2879년까지 92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148세 이었다.

12세환웅천황은 주무신(州武愼)으로 B.C 2879년부터 B.C 2774년까지 105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123세 이었다.

13세환웅천황은 사와라(斯瓦羅)로 B.C 2774년부터 B.C 2707년까지 67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100세 이었다.

14세환웅천황은 자오지(慈烏支,일명 치우蚩尤)로 B.C 2707년부터 B.C 2598년까지 109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151세 이었다.

15세환웅천황은 치액특(蚩額特)으로 B.C 2598년부터 B.C 2509년까지 89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118세 이었다.

16세환웅천황은 축다리(祝多利)로 B.C 2509년부터 B.C 2453년까지 56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99세 이었다.

17세환웅천황은 혁다세(赫多世)로 B.C 2453년부터 B.C 2381년까지 72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97세 이었다.

18세환웅천황은 거불단(居弗檀)으로 B.C 2381년부터 B.C 2333년까지 48년간 환웅에 재위하였고, 천수 82세 이었다.

 

배달국은 요하문명(遙河文明)의 주역 홍산(弘山)문화로 전기는 신석기 문화였으나 후기는 청동과 석기의 혼용하는 사회였다. 초기 국가 단계로 발전하여 문명사회에 진입하였다.

특히 14세 자오지환웅 일명 치우천황(蚩尤天皇)께서는 배달신시의 웅렬한 기상을 계승하여 백성과 함께 이를 새롭게 펼치니 백성들이 만물의 원리를 스스로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치우천황의 덕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지혜가 적합하지 않음이 없으며, 역량이 온전히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백성들과 더불어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고, 호랑이처럼 늠름하게 황하 북쪽까지 웅거하여 안으로는 군사를 용맹하게 훈련시키고 밖으로는 시국의 변화를 관망하였다.

구리와 철로 투구를 만들어 쓰고 인공적으로 안개를 일으키며,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는 기계인 구치(九治)를 제작하여 사용하므로 쉽게 철제무기를 만들어 무장하니 천하가 두려워하였다. 치우천황은 백두산 신시에서 서방을 개척하여 청구(靑邱)로 도읍을 옮겼다. 더구나 중국문명의 발상지인 탁록(涿鹿)에서 중국황제 헌원(軒轅)과의 10년 전쟁을 대승으로 이끌고 황제 현원을 무릎 꿇리고 항복을 받아 제후로 삼았다. 어느 누구와도 싸워도 패하지 않은 매우 용감하고 대단한 천황이었다. 더구나 중국의 묘족은 지금도 시조로 모시고 있다.

 

18세 환웅시대에 단군(檀君) 왕검(王儉)은 아버지 18세환웅 거불단(居弗檀)과 어머니 웅족(雄族) 왕의 딸과 사이에 B.C 2371년 신묘(辛卯)년 5월2일에 탄생하였다. 왕검은 매우 영민하고 지혜가 출중하여 14살부터 외가댁의 나라 대읍국의 비왕(裨王 왕의 보좌관)이 되어 24년간이나 국사를 맡아 다스렸다. 왕검이 38세가 되던 B.C 2333년에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다. 17세환웅천황 황자(皇子)의 표류

배달국은 구려하(句麗河 지금의 요하遼河) 주변으로 기온이 높고 습도가 높으며 해수면이 지금보다 10미터나 높았다. 그러나 18세 환웅시대에 들면서 기후 환경이 급변하여 홍수로 인하여 구려하(句麗河) 강이 자주 범람하였다.

그러므로 18세환웅천황 거불단(居弗檀)은 황제(皇弟)를 시켜 구려하 범람을 막을 수 있는 비책을 찾게 하였다. 천황의 명을 받은 황제는 비책의 답을 구하고자 20여명의 생각이 깊은 자들과 함께 숙의하였다. 우선은 구려하 주변의 산세와 바다 멀리까지 강의 상태를 조사하기로 하였다.

18세환웅 즉위 9년 기원전 2373년 7월에 황제의 일행 12명은 구려하에서 어로활동을 위해 쓰던 통나무배를 여러 개 연결한 통나무 뗏배를 타고 구려하 하구 바다로 나갔다. 때마침 홍수와 함께 불어 닥친 폭풍에 만나 휘말리기 시작하였고, 결국은 폭풍우를 이겨내지 못하고 먼 바다로 표류하고 말았다. 먼 바다에 표류하고 폭풍우에 시달리기 십 여일이 지나니 높은 파도를 이겨 내지 못하고 한 사람씩 죽거나 바다에 추락하여 실종되고 말았다. 이십 여일이 지나니 살아남은 자도 정신을 잃고 실신 상태 이었다. 바다 위에 태양 빛이 작렬하고 있었다. 바닷물로 입술을 적시며 어쩌다 잡힌 물고기로 연명하기를 사십 여일이 지났다.

어느 날 해안가에 도착하여 눈을 떠 보니 멀리 산이 보이고 아무도 없는 무인도 이였다. 그 곳이 바로 탐라(耽羅 지금의 제주도)의 해안 이었다. 그 곳이 지금의 한라산 기슭의 모흥혈(毛興穴) 이었다. 그 때가 기원전 2373년9월 이었다.

12명이 출발한 일행은 구사일생으로 겨우 세 사람만 살아 해변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일행 중에서 나이 어리고 젊은 세 사람만이 살아 무인도 탐라 땅에 오른 것이다. 한분은 17세환웅 황자 양씨(良氏)요, 또 한분은 촌장의 아들 고씨(高氏)이며, 또 다른 촌장의 아들 부씨(夫氏) 이었다.

양씨(良氏)는 17세환웅 천황 혁다세(赫多世)와 구다천국(勾茶川國 일명 독로국瀆瀘國) 왕의 딸 사이에 셋째 황자(皇子)로 B.C 2394년 계미(癸未)년 4월10일 인시(寅時)에 태어났었고, 고씨(高氏)는 B.C 2391년 경진(庚辰)년 10월10일 술시(戌時)에 태어났으며, 부씨(夫氏)는 B.C 2389년 무인(戊寅)년 12월10일 묘시(卯時)에 태어났었다.

후에 이 세분을 첫째는 양을라(梁乙那)요, 둘째는 고을나(高乙那)요, 셋째는 부을나(夫乙那)라 불리었고, 그 맏이 양을나(良乙那)가 우리 양씨 시조요, 둘째 고을나(高乙那)가 고씨(高氏) 시조이며, 셋째 부을나(夫乙那)가 부씨(夫氏) 시조 이다.

그 뒤로부터 이곳을 삼성혈(三姓穴)이라 부르게 되었고 또 모흥혈이라는 모()자도 셋 건너긋고 새을()자를 한 글자로서 삼을나(三乙那)라는 뜻으로 모()자가 쓰여 졌다하며 삼성(三姓)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모흥혈(毛興穴)이라 부르게 되었다.

↑ 양을나의 모습

라. 양을나의 탐라국(耽羅國)

태초에 제주도에 인간과 만물이 없었다. 표류하여 깨어난 기원전 2373년 9월부터 세 사람은 처음으로 한라산 북녘 넓은 땅 모흥혈(毛興穴)에서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지금으로부터 4,400여년전 일이다.

그들은 얼굴 생김새가 비범하고 매우 크고 도량이 활달하여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이 세분께서는 거치른 광야를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여 가죽으로 몸을 가리고 수렵한 날 짐승과 바닷가의 생선을 주식으로 생활하여 왔으나 가정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동해 지금의 남제주 서연포 쪽을 바라보니까 자줏빛 안개가 통나무 뗏배를 감싸고 붉은 흙으로 뚜껑을 봉한 여러 나무상자가 바다에서 떠 내려와서 동쪽 해안에 머무르므로, 세 사람은 내려와 통나무 뗏배를 맞이하고 나무상자를 열어 보았다. 뗏배 위에는 자주 빛 옷에 붉은 관대(冠帶)를 한 사자(使者)와 푸른 옷을 입은 처녀가 셋 있었다. 나이는 십오륙 세쯤 되고 얼굴과 태도가 범속하지 않았고, 기품은 그윽하고 얌전한데, 각자 화장을 하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안에 알 모양으로 된 또 하나의 옥()으로 만든 둥근 상자가 있었고. 옥함 안에는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종자도 있었다.

세 사람은 '세 공주는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신 것이다.'하며 기뻐하였다.

사자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저는 동해 벽랑국(碧浪國)의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 왕녀를 낳아 고이 키워 나이가 장성하였으나 배필을 구하지 못하여 탄식을 하며 여러 해를 보내던 중에 임금님께서 자소각(紫宵閣)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보랏빛 기운이 하늘로 이어지고 찬란한 서광이 한라산 높은 봉우리에 서려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세분의 인간이 출현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는지라 저에게 세 공주를 모시고 가게 하였으니, 마땅히 혼례를 치르시고 대업을 이루소서." 하고, 사자는 곧 바로 타고 온 통나무 뗏배를 타고 되돌아갔다.

벽랑국(碧浪國)은 현재 전라남도 완도군에 위치했던 나라이다. 탐라에 농경과 가축, 직조, 의상, 국가조직을 전해졌다. 신라 후기 경덕왕 때 불렸던 탐진현 남쪽 섬의 하나인 벽랑도(현재 소랑도)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후기까지의 각종 지도에는 벽랑도가 강진현의 섬으로 기록되어 있다.

벽랑국은 제주의 동쪽에 위치하며 섬의 정상에 서면 제주도가 보이고 섬의 둘레가 4리(2㎞ 내외)에 달한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를 토대로 현지답사를 벌인 결과 전라남도 완도군 금일읍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7°06′, 북위 34°19′에 위치한 소랑도(少浪島)일 가능성이 크다.

소랑도 면적 1.009km2, 해안선 길이 5km, 산 높이 106m(당산)로 10여 년 전에는 8부 능선까지 논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물이 풍부해 가뭄 걱정이 없었다.

소랑도(少浪島)는 물과 식량이 해결돼 외부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섬이라는 사실도 확인 되었다. 이 섬에서는 매년 제사를 올리는 신당도 있다.

완도 일대의 지명에 관하여 보면 완도해역을 넓게 벽량해역이라 할 수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전남 해안의 벽랑도(현 소랑도)가 벽랑국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세 분은 이에 제물을 바쳐 하늘에 제사 지내고, 나이 차례대로 각기 세 공주와 온평리에 있는 연못에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혼례를 올렸으며 연못 옆 동굴에서 신방을 차리고 생활하니 인간으로서 생활의 시작이며 이로써 농경사회로 발전하고 정주의 기초가 되었다.

그래서 자주 빛 구름 속에 통나무 뗏배가 도착한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를 연혼포(延婚浦)라 하며, 지금도 삼공주가 도착할 때 함께 온 말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데, 이곳이 온평리 바닷가 '황루알'이라는 곳이다. 또한 세 분이 목욕한 연못을 혼인지(婚姻池)라 부르며 신방을 꾸몄던 굴을 신방굴(神房窟)이라 하며 그 안에는 각기 3개의 굴이 있어 현재까지 그 자취가 보존되고 있다.

↑세 시조가 벽랑국에서 온 공주를 맞이하여 혼인하는 모습

세 분은 물이 좋고 기름진 땅을 찾아 활쏘기로 거처할 땅을 점쳤는데 양을나(良乙那)의 지역을 제일도(第一徒 : 史作都)라 하고, 고을나(高乙那)의 지역을 제이도(第二徒)라 하고, 부을나(夫乙那)의 지역을 제삼도(第三徒)라 하였다.

기원전 2369년에 양을나는 25세의 나이로 제일도에서 탐라국을 개국하였다. 그 후에 고을나의 제이도는 탁라국으로, 부을나의 제삼도는 탐모라국으로 발전하였다.

그 후 각각 오곡(五穀)의 씨앗을 뿌리고 말과 소를 기르게 되니 백성이 날로 늘고 부유해져 갔다.

동방 한()민족 시원 역사 시대의 역년(歷年)

환국

7세

환인시대

3301년간

배달

18세

환웅시대

1565년간

조선

47세

단군시대

2096년간

B.C 2333년∼

탐라

108세

을나시대

3281년간

B.C 7197년∼

B.C 3897년∼

B.C 2369년∼

이렇게 양을나의 탐라국은 창건되어 개국왕으로 군림했으며 그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108대에 이르렀다.

당시의 인도에서는 인더스문명이 전성기를 이루었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도시국가가 발전하였고, 이집트에서는 통일국가로 발전하고 있었다. 중국 대륙 황하(黃河)유역에서 한족(漢族)의 선조 도당씨(陶唐氏) 요제(堯帝)가 나라를 건국한 때였다.

그러므로 우리 양씨(良氏)는 신라 6성(六姓) 이전에 이 땅에 자리 잡은 배달민족의 탐라국 왕손(王孫)이며 가장 역사를 길게 갖는다. 또한 양씨들 모두가 탐라국 삼성혈(三姓穴)의 양을나를 단일 시조(始祖)로 하는 동계혈족(同系血族)이다.

 

마. 세 시조의 출현과 탐라국 개국

제주도 제주시 이도1동 1313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삼성혈(三姓穴)이 양씨,고씨,부씨 시조가 출현하여 거주한 곳으로서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장소라는 사실과 삼성(三姓)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창성(創姓)한 최고의 성씨로 B.C 2373년의 창성년도와 출현년도를 한국기록원으로부터 2012년3월20일 인증을 받았다.

서기 1449년의 고려사(高麗史)와 서기 1653년의 탐라지(耽羅志)에 제주시 이도1동 1313번지의 삼성혈에서 세 시조의 탄생하신 시기를 태초(太初)라고 기록하였는데 태초의 시기를 추정하면, 서기 1449년 내지 1653년에 위 문헌이 완성할 때 이미“B.C 2333년의 단군신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태초라고 표기하였으므로 삼성혈의 세 시조가 탐라에 출현한 시기는 단군왕검이 탄생한 B.C 2371년 보다 앞서 B.C 2373년에 출현하였다고 고증(考證)하였다. 이 시기가 중국의 우()나라 당요21년 무자년(戊子年)이었다.

양씨,고씨,부씨 시조의 출현이 B.C 2373년으로 단군왕검(檀君王儉) 탄생 B.C 2371년보다 2년 앞서 출현년도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 연도이다. 박씨의 시조인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는 B.C 69년 탄생,석씨의 시조인 신라의 석탈해왕(昔脫解王)은 B.C 19년 탄생,김해김씨 시조인 대가야의 김수로왕(金首露王)은 서기 42년에 탄생 하였다.

양씨는 한국양씨상세기요(韓國梁氏上世紀要)의〈탐라국제왕세기(耽羅國 帝王世紀 서기 1970년 발행)〉에서 시조 양을나와 그 자손들이 108대에 걸쳐서 3,245년간 탐라국을 통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고씨는〈탐라국종묘〉와〈탐라국왕세기>에서 시조 고을나와 그 자손들이 45대에 걸쳐서 B.C 2337년부터 서기 938까지 3,275년간 탐라국을 통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양씨상세기요(韓國梁氏上世紀要)의〈탐라국제왕세기(耽羅國 帝王世紀 서기 1970년 발행)〉에 의하면 양을나왕이 즉위한 원년은 우()나라 당요 25년 즉 B.C 2369년이요,탐라 출현 40년에 즉 B.C 2333년 단군조선 개국에 태자를 사신으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출현 56년에는 즉 B.C 2317년에는 태자를 당()의 요()임금에 보내 공물을 바치도록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양을나왕이 탐라국을 개국한 년도는〈제왕세기(당요 25년)〉및〈삼국유사〉와〈동국통감〉과 같이 한국과 중국의 신화에서 즉위년도와 개국년도를 용()의 해로 신격화(神格化)를 한바와 같이 용()의 해인 임진년인 B.C 2369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므로 탐라국의 기원은 기원전 2369년을 원년으로 쓰고자 한다. 단군조선의 개국보다 36년 먼저 임을 확인한다.

 

삼을나의 지신족 탄강설은 일제 강점기의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폄하하고 조선의 역사를 미개의 역사로 왜곡하기 위하여 조직한 조선사학회에 의해서 단군왕검의 곰 신화설과 함께 만들어져 고착화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위대한 실체의 역사를 숨기고 폄하하고 일본인들이 환웅의 자손으로 천황이라 하여 우리의 역사들 훔쳐간 사례이다.

이제는 진짜의 우리 역사를 찾는 역사 광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첨부파일 탐라탄생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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