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6년 6월 12일~13일
장소: 대구 · 안동 일원
인원: 38명
광복운동기념공원에서 독립운동가를 기리며...(오미마을)
오미마을- 원래 이름은 오릉동(五陵洞)이다. 이 마을은 풍산김씨(豐山金氏) 세거지로 1630년 인조(仁祖)가 14세 유연당 김대현(金大賢)의 여덟 아들들이 모두 소과에, 그중 다섯 아들은 대과에 급제하니 “팔연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 칭찬하고 사명(賜名)하여 오미동(五美洞)으로 불리었다.
오미마을에서는 계몽운동과 항일운동에 앞장선 독립투사 24명이 배출됐다. 대표적 인물인 김응섭(1878∼1957)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법무장관(현 법무부 차관급)을 역임했고, 또 다른 인물 김재봉(1891∼1944) 선생은 3·1운동 직후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에 뛰어들었고,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을 이끌었다. 평생을 항일운동에 바친 그는 끝내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보섭(1911~ 1942)은 광주학생독립운동 사건으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김지섭(1884~1928)은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는 등 오미마을은 항일독립운동의 산실(産室)이었다.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김재봉이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며
김재봉의 삶에 대해 회원들에게 설명하는 이건상 남도역사연구원 상임위원
근전(槿田) 김재봉 생가
풍산김씨영감댁- '학남고택’이라고도 한다. 조선 시대의 문신인 김상목(金相穆)이 영조 33년 (1759)에 지은 사대부가의 집이다. 김상목의 손자인 학남(鶴南) 김중우(金重佑)가 순조26년(1814) 지금의 구조로 크게 지었다. 영감이란 높은 관직을 지낸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로, 김중우의 아들 김두흠(金斗欽)이 동부승지 벼슬을 지냈기 때문이다. .
또한 이 집은 김두흠의 증손자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김정섭, 김이섭, 김응섭 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며 곤전 김재봉(金在鳳)일가와는 형제 집안이다. 특히 천장 위 다락은 웅크려야만 겨우 몸을 넣을 수 있을 만큼 협소하고 어둡다. 설명에 따르면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내부 공간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몸을 숨기며 거사를 도모하던 비밀 장소로 활용됐다고 한다.
오미마을 출신 독립운동가 24명을 기리는 오미독립운동기념탑에서 이건상 상임위원의 설명에 집중하는 회원님들!
병산서원 외삼문 복례문(復禮門)에서 찰칵!
병산서원(屛山書院)- 출발은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선조8년(1575)에 지금의 풍산읍에 있던 풍악 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류성룡은 선조 때 도체찰사(都體察使)와 영의정을 지냈던 정치가이며 유학자로, 1607년에 타계한 뒤 1614년에 그를 따르던 제자와 유생들이 이곳에 위판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 이로써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講學)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祭享)공간을 모두 갖춘 정식 서원이 되었으며, 철종14년(1863)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때에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다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復禮門과) 만대루(晩對樓)를 지나면 강당과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다. 입교당의 동쪽 뒤편에 있는 계단을 으르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內三門)과 사당인 존덕사(尊德祠)가 있다. 열려있는 복례문 앞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거나, 서원 안에서 만대루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면 어디하나 막힘이 없이 탁 트여 있어 건물과 건물 밖의 자연이 하나인 듯 느껴진다. 지은 솜씨가 빼어나고 보존이 잘 되어있으며,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은 점에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로 이름나 있으며,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병산서원의 유래에 대한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의 해설에 집중하는 회원님들!
만대루에서 바라본 병산서원 전경
임청각-임청각은 조선 중기 형조좌랑을 지냈던 이명(李洺)이 1519년(종종 14)에 지은 집이라고 전해진다. 집의 이름인 임청(臨淸)"은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登東皐以舒嘯),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臨淸流而賦詩)라는 구절에서 따왔으며, 현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직접 쓴 것이다.
임청각은 안채와 중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별당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임청각은 용(用)자가 가로 누운 듯한 평면 구성으로 되어 있다. 남녀와 계층별로 공간을 뚜렷이 구분하여 위계질서를 분명히 한 것이다. 군자정(君子亭)은 ‘T’자 모양의 누각으로 된 별당 형식으로 된 건물이다. 정자 안에는 이곳을 찾은 농암 이현보, 제봉 고경명, 백사 윤훤, 송강 조사수가 지은 시들이 걸려 있다.
임청각은 이명의 후손이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이 태어난 집이기도 하다. 이상룡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이름해 임청각을 팔아 독립 자금을 마련하였고, 서간도 삼원보에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세우고,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 되는 신흥강습소를 세우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힘썼다.
군자정(君子亭)에서 이상룡 집안과 고경명 집안의 사연에 대해 설명하는 노성태 원장
임청각 내부 모습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전시물을 관람하는 회원님들
조선 말기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유인석(柳麟錫)이 제시한 처변삼사(處變三事)는 국가의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선비가 취해야 할 세 가지 행동 지침이다. 거의소청 (擧義掃淸-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원수를 갚고 외적을 깨끗이 소탕하는 행동), 거지수구(去之守舊-외국으로 망명하여 선비로서의 절의와 옛 도(道)를 지키고 후일을 도모하는 행동), 자정수지 (自靖遂志-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절개를 지켜 자신의 굳은 의지와 뜻을 완성하는 행동)가 있는데 광주 전남을 '거의소청'을 실천한 지역이라 노성태 원장은 강조하고 있다.
권오설의 항일독립운동사 역할을 설명하는 이건상 상임위원
이육사 문학관에서...
이육사-본관은 진성(眞城), 호는 육사(陸史), 본명은 이원록(李源祿) 또는 이원삼(李源三). 한때 이활(李活)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조부 치헌 이중직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0년 결혼 후, 백학학원에서 수학하고 9개월간 교편을 잡았다. 1924년 4월 일본으로 유학했다가 1925년 1월 귀국하여 대구에서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문화활동을 벌였다. 1925년 8월중국대학(中國大學) 사회학과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중퇴하였다. 1927년 여름에 조재만과 동행해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로 지었다.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첫 시 ’말‘을 발표했고 이후 청포도. 절정. 광야 등 총 40편의 시를 남겼다. 1932년 베이징과 난징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의열단에서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해 6개월 과정을 마쳤다. 이곳에서 그는 폭탄·탄약·뇌관 등의 제조법과 투척법, 그리고 피신법·변장법·무기운반법 등을 배웠으며 권총 사격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한다.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가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 둘째 동생 이원창과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이병희가 그의 유해를 수습하여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고, 1960년 안동시에 이장됐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강인한 필치로 민족의지를 노래했다.
이육사 묘소
이육사 생가 복원-육우당
이육사 생가터
이상화 고택(古宅)-이상화(李相和-1901~1943)는 일제강점기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중의 사망」 등을 저술한 시인이다. 한때 일본에 유학했고 1922년 『백조』 창간호에 동인으로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했고 의열단 관련 사건으로 구금되기도 했다. 초기의 시에서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 인습에 대한 공공연한 반역과 도전이 드러난다. 1925년과 1926년은 작품 활동의 절정기로 작품의 3분의 2를 발표한다. 이 중에서도 1926년에 <개벽70호>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작가의 반일(反日) 민족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 나라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식민지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주된 흐름으로 하고 있다.
대구 3·1운동의 길-1919년 3월8일 대구에서도 3.1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현장이다. 계단이 90개라 90계단이라고도 불린다. 옆에 당시 현장과 생활모습을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다.
청라언덕-개화기 때인 20세기 초 황무지였던 지금의 동산병원과 청라언덕 땅을 1898년, 아담스와 존슨이라는 이름의 선교사들이 싸게 구입해 병원과 학교를 지었고 지금의 청라언덕이 생겨났다.
청라(靑蘿)라는 이름의 유래는 언덕 위 선교사 주택들의 벽면에 푸른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있어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써 '푸른 담쟁이덩굴'이란 뜻의 청라언덕이라 불리게 되었다. 동무생각: 음악 시간에 배우는 이은상 시, 박태준 작곡의 가곡 <동무 생각>에 나오는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의 청라언덕이 바로 이곳이다.
사과나무 시배지-대구 최초의 사과나무의 2세이다. 1899년 동산의료원 개원당시 존슨 선교사가 미국에서 직접 가져온 72그루의 사과나무 중 마지막까지 남은 사과나무의 후손으로, 한때 대구의 특산물이었던 대구 사과의 기원이다. 2000년 대구광역시 보호수 1호로 지정되었으나 2018년 고사하였다. 현재 바로 옆에 3세 나무가 건강히 자라고 있다. 더위를 식히는 회원님들!
대구 계산동(桂山洞)성당- 이 건물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다. 프랑스인 프와넬 신부가 설계하고 서울 명동성당의 건립에 참여하였던 중국인들이 공사를 담당하여 1902년 완공하였다. 1911년에 주교좌(主敎座)성당이 되면서 종탑을 2배로 높히는 등 증축을 하여 1918년 12월 24일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평면은 라틴 십자형이고, 종탑부에는 8각의 높은 첨탑 2개를 대칭 구조로 세웠으며, 앞면과 양측에는 장미창으로 장식하였다. 대구 최조의 서양식 건물이며 현존하는 1900년대의 성당건축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대구형무소-대구형무소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감옥으로 1908년 대구부에 처음 설립된 뒤 1910년에 중국 삼덕동으로 이전하였다. 대구형무소에서는 2,386명의 서훈 독립운동가가 투옥됐었다.
대구감옥(형무소)에서 순국한 광주·전남인 독립운동가는 47명이나 된다. 47명은 대구감옥 독립운동자 순국자 212명의 22.2%에 해당한다. 왜 광주·전남의 독립운동가들은 광주 감옥이 아닌 대구 감옥에서 47명이나 순국했을까?
이는 당시의 사법제도와 관련이 깊다. 대구 복심법원(현 고등법원)의 관할 구역이 경상도뿐만 아닌 전라도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 감옥에서 순국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심남일·안규홍·오성술·김원국이 있으며, 양진여·양상기 부자 의병장도 있다. 일제가 이들에게 적용한 죄목은 내란, 폭동, 강도살인 및 방화, 모살(謀殺) 등 이었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는 강인한 남도인의 ’정의로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대구형무소 역사관에서 회원들에게 광주 전남인의 활약상을 설명하는 노성태 원장
김광석 거리에서
즐거운 식사시간!! 아따! 맛있네^^
선생님들!!!
이번에도 너무 멋졌습니다.
다음에도 아름다운 추억 함께하실거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