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고기가 없으면 수라를 들지 않으셨다. 비만한 체형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40대 이후에 당뇨합병증이 와서 시력을 잃었다.
한글이 창제 되던 1440년대 세자빈 권씨, 광평, 평응대군이 연이어 죽고 1446년엔
소헌왕후 마저 승하하여 세종은 인생 무상을 느껴 불교적인 취미를 보인다.
세종이 한글을 연구하던 과정이 실록엔 전혀 보이지 않아 자녀들과 몰래 스터디를 하거나
집현전 김수온의 형 신미대사와 협력하였을 것이란 주장이 있다.
특히 문종, 세조와 정의공주가 가장 기여도가 높다는 기록이 있다.
그중 불교 부분을 픽션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워낙 세종이 만들었다는 고정관념이 강해
비판의 중심에 섰다. 역사 왜곡도 정도가 지나치다는 의견과 픽션 영화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각자 영화를 보고 즐기는 것은 관객의 몫이고 역사 고증 문제는 사학계의 몫이다.
신미가 한글에 관여한 기록은 영동 김씨 족보에 있는데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다.
신미는 세조 부부와도 대를 이어 불교 중흥에 이바지하였다.
신미가 한글 창제 직후 불경을 언해한 것도 갑자기 나온 조치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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