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에는 상림공원이 있습니다. 이 공원은 1,100년 전에 지어진 공원입니다. 그 옛날에 이런 공원을 만들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도심에 있어서 함양 사람들에게는 친근한 공간입니다. 넓은 운동장 같이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고 중간중간에 정자가 있어서 고풍스럽고 아늑한 곳입니다. 잔디밭에는 초등학생들이 소풍 와서 놀고 있었습니다.
상림의 아름다움은 봄의 신록, 여름의 녹음, 가을 단풍, 겨울 설경 등 사철을 통하여 그 절경을 맛볼 수 있습니다. 여름철 상림은 숲속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누우면 도심 속 신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합니다. 고목들 사이로 냇물이 숲 안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상림에는 여름이 없다 합니다. 타향살이를 하는 함양 사람들은 생가보다 상림을 더 그리워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림에는 유명한 산책길이 있습니다. 길이 넓습니다. 산책길 안쪽에는 오래된 고목들로 울창합니다. 그 숲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양쪽에 밧줄 울타리가 늘어져 있습니다. 고목들 밑에는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언제부터 쌓여 있는지도 모릅니다. 너무나 조용해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도 오히려 숲에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갑자기 공중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니 다람쥐가 고목의 갈비뼈와 겨드랑이를 간질이자 참지 못하고 터뜨리는 고목의 웃음소리였습니다. 그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산책길까지 데굴데굴 굴러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고목님! 너무 경망스럽습니다. 연세도 있는데 좀 점잖고 무게 있게 웃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듬지에 앉아 있던 새도 배를 움켜잡고 웃고 있었습니다.
상림의 숲은 이른 아침에 와 봐야 한다고 합니다. 숲 사이를 뚫고 사선으로 들어온 햇살이 퍼지기 시작하면, 상림 숲을 끼고 흐르는 위천에서 피워 올린 물안개가 어우러져 환상의 공간을 만든다고 합니다. 상상만 해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새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산책길에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걷는 만추의 정취가 상림의 백미라고 합니다. 지금도 좋겠네요. 쓸쓸함과 낯설음이 적절히 조화되어 추억을 만드는 좋은 여행이 되겠습니다. 제가 갔을 때는 2년 전, 4월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때대로 신록이 싱그러워 좋았습니다. 연둣빛 희망과 샘솟는 에너지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옛날에 이 상림을 만드신 위대한 분을 만나러 여기에 왔습니다. 그분은 고운 최치원 선생입니다. 당시 선생은 천령군 태수였습니다. 함양 군수지요. 천령은 함양의 옛 이름입니다. 함양은 북으로는 남덕유산, 남으로는 지리산을 품고 1,000미터가 넘는 고봉도 여러 개 있습니다. 하늘과 맞닿은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선생은 천령군 태수를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 종적을 감춥니다. 하늘로 가기 위한 준비로 여기에 온 것인지. 이곳도 자원해서 부임했습니다.
선생은 12살에 당나라에 유학을 갑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성공한 조기유학생입니다. 선생은 18살 때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과 학문으로 이름을 날립니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24살 때, 종사관이 되어 황소를 치는 격문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여야 한다고 할 뿐만 아니라, 저 땅 밑에 있는 귀신들까지도 이미 너를 죽이기로 의논했도다.>
황소는 이 구절에 이르러 자기도 모르게 상에서 떨어졌습니다. 격문으로서 난을 평정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그 명문장은 당나라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었습니다.
28살 때, 신라로 돌아올 때는 희종 황제가 당의 국서를 가져가는 사신의 자격을 띠게 해주었고, 직속상관이던 고변은 2백관이나 되는 돈과 여러 가지 행장을 갖추어 주었습니다. 또 당나라에서 이름난 문사들은 석별의 시까지 지어 주었습니다.
계림나라 삼신산 맑은 정기로 태어난 기이한 사람
12살에 배를 타고 바다 건너와 글로서 중원 천지를 흔들었고
18살에 과거마당 들어가 대번에 급제 한 장 따낸 이라네
이렇게 금희환향했습니다만 기득권층에서는 시기질투를 하고 방해를 일삼았기 때문에 가슴에 품었던 이상과 포부는 무위가 되었습니다. 나라를 위한 모든 경륜조차 하나도 실시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헌강왕, 정강왕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진성여왕이 들어서고부터는 나라 안의 정세가 더욱 어지러워졌습니다. 조정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모략을 막아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천재의 고독입니다.
성골과 진골과 아닌 육두품 출신으로는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 한계를 넘으려고 당나라까지 가서 관록을 쌓고 왔건만 여전히 벽은 높았습니다. 이 꼴 저 꼴 안 보고 차라리 오지에 가서 관직생활을 하는 것이 선생에게는 마음 편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당시 함양을 가로질러 흐르는 위천은 덕유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홍수 때마다 범람하여 마을이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물이 서서 달려온다고 표현합니다. 선생은 운하를 만들어 마을 외곽으로 물길을 돌리고, 마을 중앙에 둑을 막아서 호안림인 상림을 만듭니다. 실제 제가 가보니까 덕유산 계곡의 끝부분과 상림의 호안림이 길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었습니다. 마을 외곽으로 흐르는 위천은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노인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었는데 참 한가한 풍경이었습니다.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나무를 가져와 금으로 만든 호미로 하루만에 3km 길이의 대관림을 일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천 년 이상을 상림과 함께 살아온 함양 사람들은 그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만큼 선생에 대한 존경심이 깊습니다. 한 구의원은 상림을 최치원 공원으로 개명을 하자는 주장도 했습니다.
중국에는 황하강, 양자강, 회수 등의 큰 강들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기 때문에 남북을 잇는 운하가 기원 전부터 건설되어 수나라 때 마무리되었습니다. 제가 작년에 중국 여행을 할 때, 강남인 항주에 갔습니다. 항주는 옛날 남송 때 수도이며 미인이 많은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이태백이 달을 잡으려고 뛰어들었다가 죽었다는 호수, 서호가 있습니다. 여기는 남쪽 지방이어서 물자가 풍부합니다. 이 물자를 북으로 운송하기 위하여 북경까지 2,000km의 경항대운하가 만들어집니다. 중국 역사에서 만리장성 다음으로 큰 공정이라고 합니다.
이 운하를 만든 목적을 가이드로부터 깜짝 놀랐습니다. 이 운하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고구려가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대국인가를 실감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대운하, 운운하고 있는데 여기에 비하면 장난감입니다. 중국 곳곳에 크고 작은 운하가 많습니다. 버스 안에서 본 어떤 운하는 주변에 버드나무가 늘어지고 잔디밭이 조성되어 공원처럼 경치가 좋은 곳도 있었습니다. 어떤 집 앞에는 조그만 나룻배가 정박되어 있었는데 작은 운하가 마치 골목길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화려한 운하의 전성기에 유학을 한 선생의 눈에는 함양의 운하가 너무나도 절실하고 자연스런 발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숲 한쪽에는 문창후최치원선생신도비가 서 있었습니다. 선생은 우리나라 유학자의 시조라고 합니다. 외국에 공부하러 간 유학자가 아니고, 학자으로서의 유학자를 말합니다. 학자이면서도 뛰어난 수리공학자이기도 합니다. 당시는 실학이란 말이 없었지만 실학의 이념적인 원조였습니다. 선생은 논리의 틀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For the people, Of the people, By the people의 애민사상이 투철한 진정한 목민관이었습니다.
신도비 옆에는 선생을 기리는 사운정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사운정에 올라 선생과 상상 속에서 교감을 하며 대화를 나누려 했으나 관광객인 아줌마 열두어 명이 둘러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음식 냄새가 풍겨 와서 더 이상 거기서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