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4.15~1519.5.2]---요즘 다빈치코드 책때문에 한번 올려보았습니다!
작성자그레이스 지니작성시간04.10.09조회수43 목록 댓글 2
|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4.15~1519.5.2] |
|
레오나르도 다 빈치 : 제1피렌체 시대(1466∼1482)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시절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14세 무렵 피렌체를 떠나 베로키오의 공방(工房)에 입문한 것으로 여겨진다. 20세 때 피렌체의 화가조합에 가입하였는데, 그 뒤에도 계속 스승의 공방에 남아 수련하다가 1479년에 독립한 것으로 보인다. 동문에 페루지노 ·보티치니 ·크레디, 친구에 보티첼리 등이 있었으나, 그는 누구보다도 철저히 스승의 공방에서 기초수업을 닦았다.
그가 일찍부터 투철한 자연관찰에 의한 엄격한 사실기법(寫實技法)을 습득하고 있었던 것은, 1473년경의 《성고(聖告)》(우피치미술관) 및 스승과의 공동작인 《그리스도의 세례》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좌단(左端)의 천사뿐만 아니라 스승이 작업한 그리스도나 배경 등에도 훌륭한 유채화법으로 정성껏 가필하였다. 그 정교하고 치밀한 사실기법은 후의 《지네브라 데 벤치》(워싱턴 내셔널갤러리)와 《마돈나 베아노》(에르미타주예술관) 등에서 명암법에 스푸마토(Sfumato)를 병용함으로써 이미 완성의 경지에 달했다.
1481년 스승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최초의 대작으로 제작한, 산 도나토 아 스코페토 수도원의 위촉으로 그린 《삼왕예배(三王禮拜)》(우피치미술관)와 그 직후의 《성(聖)히에로니무스》(바티칸미술관) 등은 모두 미완성이기는 하지만, 엄격한 사실(寫實)에서 깊은 정신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 제1밀라노 시대(1482∼1499)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30세경에 피렌체보다도 넓은 활동무대를 찾아, 로도비코스포르차(통칭 일 모로)가 지배하는 밀라노로 이주했다. 이 최초의 밀라노 체재는 그의 생애 중 가장 길었던 17년간의 정착시기며, 그 동안 축적된 다양한 재능이 충분히 발휘된 시기기도 하다.
우선 그림에서는 1483년 4월 위촉받은 산 프란체스코 성당을 위한 제단화 《동굴의 성모》(루브르미술관)와, 1498년에 완성된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성당 식당의 벽화 《최후의 만찬》 등을 그려, 객관적 사실과 정신내용을 훌륭하게 융합시킴으로써 다음 세기의 고전양식을 이미 달성하였다. 조각에서는 장대한 프란체스코 기마상(騎馬像)에 착수하여 1493년 11월 그 모델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일 모로가 주조를 위한 청동(靑銅)을 펠라라공(公)에게 주어버려 주조하지 못하고, 그 후 모델도 없어졌다.
건축가로서는 밀라노 대성당의 중당(中堂) 원개(圓蓋)의 모델 제작과 스포르차성(城)의 개축설계를 하였다. 디자이너로서는 성내(城內)의 사라델레아세와 그 밖의 장식이 있다. 일 모로의 호사스런 궁정생활의 연출가 겸 음악가로서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인체 해부 및 빛과 그림자의 연구를 비롯한 과학연구에 몰두하였고, 수학자 L.파치올리와 친교를 맺었으며, 《회화론》을 포함한 각종 저술에 힘썼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 제2피렌체 시대(1500∼1506)
1499년 10월의 프랑스군의 밀라노 점령으로 일 모로는 몰락하고, 레오나르도는 L.파치올리 및 제자들과 함께 밀라노를 떠났다. 그리고 1500년 2월 만토바에서 공비(公妃) 이사벨라 데스테의 초상을 그렸다.
피렌체로 돌아온 후 얼마 안 되어 산티시마아눈치아타 성당으로부터 제단화를 위촉받고, 이를 위한 화고(畵稿) 《성(聖)안나》(현재는 없어짐)를 그려 1501년의 부활제에 공개했으나, 대단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회화로 완성시키지 않았다. 이 무렵 그의 과학적 관심은 1502년 여름부터 약 8개월간 이탈리아 중부에서 체자레 보르지아군(軍)의 군사토목기사로서 종군하게 하였다.
보르지아의 실각으로 1503년 3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모나리자》의 제작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 10월 정청(政廳)으로부터 팔라초 베키오 안에 있는 대회의실 벽화 《앙기아리의 싸움》 제작을 위촉받았다. 이를 위한 밑그림을 끝내고 1505년 6월 6일부터 제작에 착수하였으나, 불운하게도 폭풍우로 밑그림은 파괴되었다.
그후 얼마 안 되어 피렌체를 떠나게 되자 벽화는 그대로 버려졌다. 지금은 벽화를 위한 많은 습작소묘와 루벤스의 중심부 모사(模寫, 군기쟁탈의 장면)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 시기에도 과학연구는 착실히 진행되어 새의 비상(飛翔)이나 지질 ·지지학(地誌學) ·식물학 ·입체기하학 등을 연구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 제2밀라노 시대(1506∼1513)
1506년 프랑스 치하의 밀라노에 초빙되어 루이 12세의 궁정화가 겸 기술자로서 6년 남짓 머물렀다. 이때 숙부 프란체스코의 유산상속으로 이복동생과 소송사건이 일어나, 1507년 9월부터 약 반 년 동안 피렌체에 돌아와 있었다.
밀라노 재방문 기간 동안 제자인 암브로조 디프레디스를 지휘하여 1503∼1506년 《동굴의 성모》 제2작(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을 완성했고, 자신은 트리불초의 장군 기마상과 《레다》(제자의 번안화만 현존) 《성(聖)안나》(루브르미술관) 《세례자 요한》(루브르미술관) 등의 제작에 착수하였다. 《성 안나》는 그의 예술의 귀결인 동시에 전성기 르네상스 고전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기의 그는 오히려 여러 가지 과학연구, 특히 수류(水流)에 관한 연구나 운하공학 또는 기계학과 해부학 등에 주력하고 있었다. 해부학자자 마르칸토니오 델라 토레와 공동연구를 하고, 알프스를 탐색한 것도 이 시기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 로마·앙부아즈 시대(1513~1519)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13년에 교황 레오 10세의 동생 네무르공(公) 주리아노 데 메디치를 섬기기 위해 로마에 가서, 같은 해 말에는 바티칸궁에 체재하였다. 그러나 3년 후 후원자인 네무르공이 죽어 로마에서는 구체적 업적을 거의 남기지 못하였다. 수학 연구에 몰두했다는 것과 산파오르 성당의 측정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1516년에는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가서 1517년 5월 제자인 멜치와 함께 앙부아즈의 클루관(館)에서 살았다. 이 곳에서는 궁정화가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방대한 양의 수기를 정리하였다. 또한 여러 가지 사색에 잠겨, 운하설계나 궁정설계 등을 지휘하면서 충실한 생활을 하였다.
그의 방대한 수기는 평생에 걸친 여러 과학(圖學 ·물리학 ·역학 ·광학 ·천문학 ·지리학 ·해부학 ·기계공학 ·식물학 ·지질학 ·造兵學 ·수리학 ·토목공학 등)의 연구 및 예술론과 인생론이 기록된 것이다. 유언에 따라 멜치에게 보내졌으나, 현재는 그 일부(약 5,000장)가 서구 각지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
과학론은 그의 실증적 경험주의와 냉철한 관찰적 사고법의 결정체로, 과학사상(科學史上) 그 선구적 의의가 크다. 전 분야에 걸친 지칠 줄 모르는 탐색과 광범위한 업적은 당대의 특징인 ‘전인(全人:워모우니 베르살레)’의 최고 전형(典型)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