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인상의 생애
필자미상, <이인상>, 지본담채, 51.1×32.7cm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시·서·화를 갖춘 대표적인 문인화가입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령(元靈), 호는 능호관(凌壺觀) 또는 보산자(寶山子)입니다.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낳은 명문출신으로 1735년(영조 11)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증조부 민계(敏啓)가 서자였기 때문에 본과에 이르지 못하고, 음보(蔭補)로 북부참봉(北部參奉)이 되고, 음죽현감, 지리산 사근역(沙斤驛) 찰방을 지냈으나, 몸이 쇠약하여 관직에 있는 동안에도 가슴앓이로 고생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격으로 탐관오리의 부정을 참지 못하고 끝내는 관찰사와 다툰 뒤 관직을 버리고 평소 좋아하던 단양에 은거하여 벗들과 시·서·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비록 서출이었지만 명문출신답게 시문과 학식이 뛰어나 당시 문사들의 존경을 받으며, 후대의 문인과 서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인상의 그림은 그의 곧은 지조와 강개한 성격이 그대로 반영되어 담백하면서도 투명한 색감과 깔끔한 멋과 함께 단엄한 분위기를 띠고 있습니다. 문인화풍의 소재를 즐겨 그려 〈송하독좌 松下獨坐〉(일본 개인 소장)·〈수석도 樹石圖〉·〈설송도 雪松圖〉·〈송하관폭도 松下觀瀑圖〉·〈검선도 劍僊圖〉(이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수하한담도 樹下閑談圖〉·〈강상초루도 江上草樓圖〉(이상 개인 소장) 등이 있으며, 사인풍(士人風)의 풍속화로 〈송하수업도 松下授業圖〉(개인 소장), 진경산수도는 금강산을 그린 〈옥류동 玉流洞〉·〈은선대 隱仙臺〉(이상 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습니다. 그의 화법은 엷은 먹으로 바림을 하고 농묵으로 굴곡과 윤곽을 짓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예서체를 응용한 필법을 특기로 하였습니다.
사승(師承)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으나 《개자원화전 芥子園畵傳》으로 배우고, 특히 17세기 중국 안휘파(安徽派)의 영향이 뚜렷이 보입니다. 당대의 이윤영(李胤永), 후대의 윤제홍(尹濟弘) 등에게 큰 영향을 끼치며, 정수영(鄭遂永)·이재관(李在寬)·김수철(金秀哲)·김창수(金昌秀) 등의 화풍도 이에 연결되어, 조선 후기 문인화풍의 한 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2. <검선도>
이인상,<검선도>,지본담채, 96.7×62cm
비단에 담채로 그린 그림입니다. 이인상의 담백함은 산수화에서뿐만 아니라, 이 검선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굵은 소나무 앞에 파란 유건을 쓴 도인이 소나무 앞에 앉아 있습니다. 소나무는 그의 작품 <설송도>처럼 두 그루가 교차되어있습니다. 이 구도는 이인상의 작품에서 여러 차례 발견할 수 있다고합니다. 정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도인의 수염이 바람에 날리고 있는데 도인 곁에는 손잡이만 보이는 칼을 소나무에 세워 놓았습니다. 바람이 부는 듯 나부끼는 긴 수염과는 달리 넝쿨풀은 움직임이 없어 어색하게도 느껴집니다.
제목이 검선도인 것 처럼, 제시에 '중국인이 그린 검선도를 방하여 그려 취설옹에게 바친다(倣華人劍僊圖 奉贈醉雪翁)'라고 되어 있어 당나라 때의 도인인 '여동빈'을 그렸을 것으로 측됩니다.
여동빈(呂洞賓)은 팔선(八仙)의 한명입니다. 팔선(八仙)은 중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기행(奇行)과 속세를 초월한 것으로 알려진 8명의 신선입니다. 이들 팔선은 종리권(鍾離權)ㆍ장과로(張果老)ㆍ이철괴(李鐵拐)ㆍ한상자(韓湘子)ㆍ여동빈(呂洞賓)ㆍ조국구(曺國舅)ㆍ남채화(藍采和)ㆍ하선고(女神仙)를 말합니다.
여동빈은 태어나면서부터 관상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고 합니다. 즉 양쪽 눈썹이 길고 비스듬히 구레나룻과 이어졌고, 봉황의 눈매에 광채가 나며, 코는 높고 단정하며 왼쪽 눈썹과 왼쪽 눈 아래 검은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학자이자 은자였던 그는 팔선의 수장격인 종리권으로 부터 도교의 비밀을 배우고 나이 50에 신선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발사의 수호 성자이며, 병자들이 숭앙하였습니다. 그는 오른 손에는 도가의 먼지 털이를 들고, 위 그림에서는 왼쪽에 세워져있는 그의 상징인 검을 보통은 등에 가로 차고 있습니다. 그는 열 차례에 걸쳐 계속 유혹을 받았지만 잘 극복하여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검을 하사 받았습니다. 그 검을 차고 그는 곳곳을 여행하면서 용을 베고, 400년 이상이나 세상 여러 가지 형태의 악을 제거하였다고합니다.
일반적으로 신인[神人]이나 선인[仙人]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인간 의 존재들이라 합니다. 자기 자신의 몸체에 도[道]의 완성을 이루어 늙지도 않고 영원히 죽지도 않는다는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관념아래 하늘을 날고 높은 산에 살고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신선들의 이야기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팔선[八仙]중에 여동빈[呂洞賓]이라고 합니다.
신선을 그렸으니 이 그림은 도석화입니다. 도석화 중에서는 속된 느낌을 받는 그림들도 약간 있지만 거의가 탈속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이 많습니다. 그런 그림들 중에서도 이인상의 검선도는 그 자신의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격을 나타내 주는 듯만 합니다. 담백한 필치로 그려진 꼿꼿한 자세의 검선은 정면을 보고 있는데, 그것이 마치 도망가거나 피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줍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이인상의 서화를 이해해면 곧 문자기文字氣를 갖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극찬을 했다고 합니다.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능수능란하다기 보다는 서툰 듯한 붓질로, 사물의 외형보다는 그 속에 내재된 본질을 그리고자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그 외의 작품
이인상,<강남춘의도>, 지본담채,24×66cm
이인상이 많이 그렸던 부채그림 중 하나로, 물가에 세워진 누정에서 두 사람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이인상 특유의 먹을 금처럼 아낀 갈필과 연한 채색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인상, <구룡연>,1752년, 지본담채,117.7×58.6cm
금강산의 구룡연을 그린 작품입니다. 구룡연은 수많은 작가들이 그렸으나, 이인상의 구룡연은 독특합니다. 능숙하다기보다는 담백하고 서투른 붓질로 뼈대만 그리고 있습니다.
이인상,<수석도(樹石圖)>,1738년, 지본담채,108.8×56.2cm
이인상,<야매도(夜梅圖)>, 지본수묵, 30×21.5cm
이인상, <은선대>, 지본담채,55×34cm
이인상의 작품세계가 언제부터 화보풍을 벗어나서 독창적인 화필을 드러냈는 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28세 때인 1737년에 금강산을 기행하면서 그린 <은선대>를 보면 뭔가 다른 조짐이 느껴집니다. 은선대는 금강산에 있는 명승지로 폭포가 아름다운 곳입니다. 연한 채색을 섞어 담묵으로 그린 폭포를 배경으로 각이 지고 뚜렷하게 그린 바위와 나무가 선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실경을 그렸으면서도 실경을 충실하게 옮기기보다는 자신의 느낌에 충실하게 그린 작품으로, 남종문인화의 일종입니다.
작가 : 강세황(姜世晃)
아호 : 표암(豹菴)
제목 : 영통동구(靈通洞口)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32.8 x 54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강세황은 사림(士林) 출신의 서화가로서.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菴)이다. 그가 개성(開城) 일대의 명승을 여행하면서. 담은 송도기행첩(松島紀行帖)은 17면으로 꾸며진 하경(夏景)들로. 그중 하나인 이 영통동구는. 바윗더미의 입체 표면에. 대담하게 준법(?法)에서 벗어나서. 채색의 농담(濃淡)으로 훈염(薰染) 함으로서. 그 입체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파격적인 입체묘사는. 당시의 한양 화단에서는 획기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중에는 미불(米?). 예운림(?雲林)을 비롯한 중국 송(宋). 원(元). 명대(明代)의. 명가(名家)들 작품을 방작(倣作)한 것이 많고. 특히 명대 절파(浙派). 오파계(吳派系)의 각체(各體) 그림을 익혔으며. 당시 한양 화단에서 자리잡히기 시작했던. 북종화(北宗畵)와 절충된 남종화(南宗畵)의 정착과. 그 국풍화(國風化)에 보이지 않는 키를 잡았던 작가였다.

작가 : 강세황(姜世晃)
아호 : 표암(豹菴)
제목 : 백석담(白石潭)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32.8 x 54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앞의 영통동구(靈通洞口) 와 같이 松島紀行帖에 실려 있는데. 백석담 은 17면 중 세 번째 게재되어 있다. 비 갠 뒤의 투명해진 공기를 통해서 바라다본. 백석담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화면에 옮겼음을. 제발(題跋)에 의해서 확인된다. 송도기행첩은 강세황의 실경산수도 중에서 대표작에 속하는 화첩인데. 이화첩 가운데서도 백석담 은 영통동구(靈通洞口). 청석담(淸石潭)과 더불어 백미로 손꼽히는 수작(秀作)이다. 정선(鄭敾)과 같은 넓은 시야의 대경(大景)을 화면에 압축하는 점에선 뒤지나. 시야가 좁은 대신 대상을 집중적으로 나타낸. 화면구상이나 과감한 생략은. 오히려 그보다 진일보한 점도 없지 않다. 강세황의 실경 산수는 정선의 영향이 역력함을 부인할수 없으나. 그 나름대로 분명한 개성을 갖추고 잇다. 수묵 위주로 원근에 따라 농담의 구별이 분명한 묵선. 그 위에 담록과 담청색이 가채되어 밝고 담백한 화면. 나타내고자 하는 목표에 있어 중요부분의 과감한 선택과 생략의 겸비. 산세나 바위 처리에 있어 선염(선염)에 의한 색의 농도차가 보여주는 입체감 등을 특징으로 열거 될 수 있다.

작가 : 강세황(姜世晃)
아호 : 표암(豹菴)
제목 : 연강제색도(烟江霽色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36 x 73.7 cm
소장 : 도오교 국립박물관
해설 : 화면 전체가 우선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의 넓은 강을 중심하여 대각선으로 분리되고. 전경 왼쪽에 강안(江岸)이 있어. 미법수림(米法樹林) 속에 기와집 누각이 보인다. 강 건너 오른편으로 좀 치우쳐. 여름비가 그친뒤 안개 자욱한 가운데. 발묵(潑墨)으로 묘사된 산봉우리들이 연이어 솟아오르고. 더멀리 원산의 푸른 봉우리와 산등성이가 아득하게 나타난다. 강 건너 안개짙은 숲속에. 담묵으로 처리한 어촌이 흐릿하니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앞에 짙은 먹으로 다리를 하나 걸쳤는데. 수면에 거꾸로 비친다. 널찍한 강심(江心) 에는 고깃배 하나. 애써 삿대질하는 어부가 강을 건넌다. 강 이쪽에 농묵으로 큼직한 미점(米點) 을 찍어 윤기나는 숲으로 가느다란 길이 나있어 누각으로 이어진다. 화면 왼쪽 위 공간에 표암(豹菴) 이라 쓰고. 그 아래 광지(光之) 라고 새긴 주문인(朱文印) 하나가. 고깃배와 대칭을 이루면서 그림에 산뜻한 생기를 북돋게 하고 있다.

작가 : 강세황(姜世晃)
아호 : 표암(豹菴)
제목 : 벽오청서도(碧梧淸署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30.1 x 35.8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강세황의 작품에는 중국 명가(名家) 들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 많고. 그는 특히 명대의 절파(浙派). 오파계(吳派系) 의 화법을 몸에 익혀. 당시 한양의 화단에 대두하기 시작한 북종화(北宗畵) 와 절충된. 남종화(南宗畵)의 정착이나 그 국풍화(國風化)에 보이지 않는 기수가 된 화가이다. 강세황은 숙종 때에 예조판서를 지냈던 가현(珂?)의 아들로 61세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와 영릉참봉(英陵參奉)을 거쳐 한성판윤(漢城判尹) 등의 중요 직책을 지내는 동안. 예술을 통해서 정조(正祖)의 각별한 지우(知遇)로 지내기도 했다. 이 벽오청서도 는 강세황의 많은 중국적 모방작품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이다. 심석전(沈石田)의 그림을 모방하여. 오히려 그 이상의 원숙함과 청정한 담채의 효과를 올리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한국 회화에 공통된 색감의 세계이기도 하다.

작가 : 이인상(李麟祥)
아호 : 능호관(凌壺觀) 또는 보산자(寶山子)
제목 : 설송도(雪松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117.4 x 52.7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인상의 자는 원령(元靈). 호는 능호관(凌壺觀) 또는 보산자(寶山子)로 인조(仁祖)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 의 현손 이다. 박규수(朴珪壽)는 이인상의 화첩에 기술한 제화(題畵) 속에서. “능호관은 절개있는 인품과 격조 높은 풍류인으로서 일세(一世)에 뛰어난 선비이다. 글과 그림을 아울러 좋아하면서, 여기(餘技)로 정도를 지나치지 않고 항상 산수와 천석(泉石)을 사랑하고. 세속을 멀리하여 왔다” 고 쓰고 있다. 진사 이면서도 겨우 현감으로 관직을 버린 것도 그러한 인품에 인한 것이다. 이 설송도에 표현된 맑고 투명한 분위기도. 그러한 기개의 표현이라 말할수 있을 것이다. 담담한 필선(筆線)으로 쭉쭉 뻗은 소나무 한 그루를 화면의 중앙에. 그리고 그 뒤로 가지가 꼬불꼬불한 또 한 그루의 노송을 교차시킨 배치법은. 그가 즐겨 사용했던 수법이었다. 또 담담한 묵색(墨色)을 다양하게 구사하여 청수(淸秀)한 맛을 더하는 필법도.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특기였다. 이인상은 당대의 명문 출신이지만 그의 증조부가 서출(庶出)이었기 때문에 그는 신분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는 조선시대의 선비화가중 가장 개성이 풍부한 기골(氣骨)이 있는 화가로서 서도나 시문에도 뛰어났지만 그의 그림 수업의 계보나 사승(師承)관계는 확실치 않다.

작가 : 이인상(李麟祥)
아호 : 능호관(凌壺觀) 또는 보산자(寶山子)
제목 :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23.8 x 63.2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인상 은 영조(英祖) 때 현감 벼슬을 거치고. 평생을 산수와 천석(泉石)을 벗하며. 속진(俗塵) 을 멀리했던 격조 높은 풍류인으로. 빼어난 화업(畵業)을 남긴 여기(餘技) 작가이다. 중앙 암반에 뿌리를 내리고 용소를 향해 구부러진 노송 한 그루와. 그 곁에 단정히 앉아 시상(詩想)에 잠긴 인물 구도는. 그의 산수화에 자주 보이는 포치법(布置法)의 특징이다. 주제는 노송과 동떨어진 바위 위에 조용히 앉아 있는. 선비의 유연한 모습으로 소품이면서도 비교적 밀도 있고 짜임새도 있다. 바위 벼랑의 색깔은 회청(灰靑)에 가까운데. 폭포수 물보라의 흰색과. 노송의 연한 녹색이 묘한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병약하면서도 시. 서. 화 에 두루 뛰어났었는데. 그의 표현기법은 비교적 여윈듯 싶은 가는 선휙을 즐겨 썼고. 설채도 매우 담담해서 그의 맑은 문인기질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특유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있다.

작가 : 이인상(李麟祥)
아호 : 능호관(凌壺觀) 또는 보산자(寶山子)
제목 : 선면송석도(扇面松石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25 x 47.7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이인상 은 이윤영(李允榮), 송문흠(宋文欽), 오찬(吳瓚), 김무택(金茂澤) 등과 절친하게 지내면서 벗들과 교유하는 청유도(淸遊圖)를 즐겨 그렸고. 40세 이후에는 은일자(隱逸者)의 고고한 뜻을 그리는. 설송도(雪松圖)나 모루도(茅樓圖)를 주 소재로 했으며. 필법은 담묵과 갈필을 많이 사용하는. 매우 담박하면서 차가운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이 송석도 는 기암에 뿌리를 둔 노송의 힘찬 생명력과 기개를 살린 작품으로. 꼿꼿한 필선과 선결한 담채가 마치 그의 해맑은 정신세계를 은유해주는 듯한 무기에 가득차 있다. 반은 떨어져나간 화제(畵題) 중간쯤에는 윤지지의(胤之之意) 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는 胤之의뜻 을 말하는 것으로 이윤영이 김무택을 위해 그려 주었던. 청수고사도(淸修稿舍圖) 와 같은 장소를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도서낙관(圖書落款)은 없고 단지 자손영보용(子孫永寶用) 이라는 소장인만 찍혀 있다.

작가 : 김응환(金應煥)
아호 : 복헌(復軒) 외에 담졸당(擔拙堂)
제목 : 강안청적도(江岸聽笛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화첩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20.7 x 37.3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김응환은 영.정조대(英.正祖代)에 활동이 두드러진 화원중의 한 사람으로, 벼슬은 별제(別提)를 역임했다. 그의 자는 영수 이고. 호는 복헌(復軒) 외에 담졸당(擔拙堂)이 있다. 그의 가문에서는 많은 화원들이 배출되었다. 김득신(金得臣). 김석신(金碩臣). 김양신(金良臣)의 세 조카들을 위시해 장한종(張漢宗), 이명기(李命基)는 사위이고 종손(宗孫) 김건종(金建鍾)과 김하종(金夏宗)도 화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김응환은 불과 3년 연하인 김홍도(金弘道)으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31세 때 김홍도 에게 그려준 금강산도(金剛山圖)가 유존(遺存)되고 있으며. 정조 12년 봄에 왕명으로 내외금강산을 탐승하여 화폭에 옮겼는데 이 당시 김홍도도 동행했다. 현존하는 김응환의 작품은 전칭을 포함하여 20여점 알려져 있는데 한폭의 운룡(雲龍)을 제외하곤 모두 산수화들이다. 또한 그의 그림은 일본에 있는 상산승람도(江山勝覽圖)를 제외하곤 50cm 이내의 편화(片畵)들이다. 대체로 실경산수와 더불어 남종화풍의 산수를 그렸음을 알수 있다. 이그림은 일찍이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게재되어 김응환의 그림중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었던 편화이다. 종앙에 접혔던 자국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화첩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여진다. 마일각(馬一角)의 변각 구도로 오른쪽에 무게를 둔 쌍구(雙鉤)의 노송과 그 아래서 동자를 대동한 인물이 나귀에서 내려 쉬며 강 저편을 응시하고 있다. 시선이 머무는 곳인 왼쪽상단에는 담묵의 갈필로 그린 성근 갈대숲과 돛만 보이는 몇척의 배가 있다. 갈대숲 사이의 배 위에는 피리를 부는 인물이 보인다. 노송과 그 아래 인물의 현격한 크기 차이는 화면의 깊이와 거리감을 부여해 준다. 수묵 위주의 명확한 선묘(線描) 와 두드러지지 않는 담청의 수면은 화면에 신선감을 준다. 그림 내용이 전해주는 시적(詩的)인 분위기는 이 그림의 격조를 고조 시킨다. 왼쪽 하단에 應. 煥의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있다.

작가 : 김응환(金應煥)
아호 : 복헌(復軒) 외에 담졸당(擔拙堂)
제목 : 헐성루(歇城樓)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화첩 비단에 담채
규격 : 32 x 42.8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헐성루는 김응환이 타계하기 1년 전인 1788년 정조의 명에 따라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금강산첩(金剛山帖)에 속해 있다. 이때 동행한 김홍도(金弘道)는 금강산화첩(金剛山畵帖)을 남겼다. 또항 강세황(姜世晃)도 금강산에 합류했다. 31세때 김홍도에게 그려준 금강산도(金剛山圖)와 비교할 때 비록 15년의 시차를 인정해도 도저히 동일인의 필치로 보기 어려운 현저한 변모가 간취된다. 헐성루는 화면을 상하로 양분하여. 상단에 원경의 골산을 정선화풍으로 그리되. 호분(胡粉)을 입혔고. 하단에는 중앙에 누(樓)를 포치시키고. 그 주변의 경관을 나타냈다. 중경에 나타난 기석(奇石)의 암봉에선. 선염(渲染)에 의한 입체감이 두드러 진다. 실경임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은. 중국풍의 화본식(畵本式)으로 그렸으며. 이 인물과 건물의 비례도 어색함이 보여진다. 정선의 여맥(餘脈)이 간취되며 강세황의 실경산수와의 연관도 보이고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宗孫 金夏宗의 金剛山畵帖과 비교할 때 가전(家傳) 화풍으로서 또 다른 짐작을 가능케 한다.

작가 : 이인문(李寅文)
아호 :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제목 :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부분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두루마리 비단에 수묵담채
규격 : 44.1 x 856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인문은 당시 조선 화단(畵壇)의 총아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던 화가였다. 강산무진도는 그의 대표작으로, 사계절의 대자연의 경관을 그린. 긴 두루마리 이다. 강산만리의 변화무쌍한 풍경이 세화(細畵)로서 끈기있게 그려졌으며. 수산. 농경. 해운에 이르기까지 평화로운 민생(民生)을 감싼 유교적 산수관이 맥맥히 서려있다. 한국 그림으로는 드물게 보는 정력적인 대작이라 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산수화가 이인문의 관록을 드러낸 작품이기도 하다. 이 두루마리는 원래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가 소장했던 것으로서 두루마리 머리에 “추사 김정희씨 노고지인(秋史 金正喜氏 老考之印)” “추사(秋史)” 두루마리 말미에는 “김정희인(金正喜印)” “자손영보(子孫永寶)” “초사진장(秋史珍藏)” 의 수장인이 찍혀있으며. “이인문욱도인인(李寅文郁道人印)” 이라 한 작자 도장이 찍혀있다. 이인문은 영(英). 정조(正祖) 양대에 걸쳐서 활약한 직업화가였으며. 명대 절파계(浙派系)류의 여운을 이은 작가로서 주로 산수화에 전념하면서 당시 한양 화단에 퍼지기 시작한 남종화풍(南宗畵風) 에도 마음을 쓴 작가였다. 이인문의 자는 문욱(文郁). 호는 유춘(有春)또는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을 즐겨 썼다.




작가 : 이인문(李寅文)
아호 :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제목 : 누각아집도(樓閣雅集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86.3 x 57.7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인문의 만년의 작품으로. 구도와 준법(?法) 등 모든 기법이 산수화의 대가다운 깊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가 비록 화원(畵員) 출신이지만. 이미 문인화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있음을. 이 작품을 통해 알 수있다. 특히 가까운 경치의 암벽에서 원경으로 보이는 어렴풋한 송림에 이르기 까지 그 배경에 깃든 청아하게 흘러내리는 계곡물의 정취등은 그의 그림 속에서도 드물게 보는 현실적인 한국 산수의 청정함을 느끼게 한다. 단지. 누각에 모인 인물들의 복식이나 태도 등이 중국풍으로 느껴지는 점에 다소 위화감이 없는 것도 아니다. 화면 위쪽의 화제(畵題)에 의하면 이것은 1820년 경신년(庚辰年)의 작품으로 76세 때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작가 : 이인문(李寅文)
아호 :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제목 : 송계한담(松溪閒談)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37.3 x 77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인문은 김홍도와 동갑내기 화원으로 산수에 뛰어났으며. 묵포도(墨葡萄)도 잘 그렸다. 그의 호인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이 시사하는. 소나무와 맑은 내가 흐르는 정경을. 자주 그림의 소재로 삼았음을. 현존하는 작품을 통해서도 짐작할수 있다. 다만 당시 크게 유행한 실경산수에 대해선 외면한 듯. 이 소재의 그림은 드문 편이다. 수옥정(漱玉亭)과 같은 실경풍(實景風)의 그림에 한복을 입은 인물이 등장되기도 하나. 이 풍속적인 성격의 그림 역시 몇점 안 된다. 이런 점에서 김홍도와 비교되며 다양한 여러 소재를 택하지 않은 점에서 김홍도 명성에 가려 소흘히 됨을 피할수 없었다. 그러나 산수화에서 그아 이룩한 높은 경지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음은 김정희(金正喜) 구장(舊藏)의 장대한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및 71세 노필(老筆)로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8폭 산수병(山水屛)을 위시해 그 밖의 화적(畵跡)을 통해서 확인된다. 그에 대한 성가(聲價)를 분명히 해주는 평을 살피면 남공철(南公轍)은 이인문을 명(明)의 당인(唐寅)에 비견하고 있으며. 신위(申緯)는 김홍도와 더불어 선조대(先祖代) 화원 중의 묘수(妙手)로 제발(題跋)에 언급하고 있다. 이인문의 산수들은 특히 완숙한 경지에 도달한. 노년시기의 대작들을 통해서 그 진면목을 보게 된다. 박제가(朴齊家)의 화평(畵評) 중에 “ 갈필로 산을 그리고, 발묵으로 나무를 표현해, 명암과 향배(向背)의 묘제(妙?)를 얻었다” 는 구절은 그의 산수를 잘 대변하고 있다. 고송이 적절히 어우러진 숲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담소를 나누는 세인물이 등장된 송계한담은, 선면(扇面) 외에 소폭 편화(片畵)로서, 또는 대폭의 부분에도 자주 나타나는, 그가 즐겨 택한 소재이기도 하다. 적합한 화면구성과 세련된 필치와, 담록가채(淡綠加彩)의 밝은 화면에서 완벽에 이른 화풍임을 알수 있고. 그림 내용이 주는 유현한 분위기는. 이를 넘어 청아함을 불러일으킨다. 왼쪽 하단에 고송유수도인(古松流水道人) 의 관(館) 자가 지워진 관서(款署)는 마치 작품제목 같아 보이기도 한다.

작가 : 이인문(李寅文)
아호 :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제목 : 도봉원장(道峰苑莊)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26.5 x 33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이 작품은 행유도(行遊圖)와 같은 화첩의 한 폭으로 四季山水畵帖 에서는 봄풍경으로 되어 있다. 원산의 표현으로 보아 만장봉(萬丈峯)과 삼각산(三角山)이 비껴보이는 도봉산 계곡 어디에 있는 원장(苑莊)아니면 서원(書院)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왼쪽 산등성이에 있는 성문은 이런 현장감을 강조하는 일종의 에피소드 처리 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역시 이인문의 티없이 맑은 설채가 돋보이는 명풍으로. 원장의 한가로운 정경과. 초가 마을앞 소 모는 농부의 모습이 그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왼쪽 냇물가로 구부러진 선묘(線描)들은 냇가의 버들을 표현한 것인데 이런 묘사법은 이인문의 원경을 그릴 때 즐겨 사용했던 것이다. 이인문의 작품들은 대부분 공간의 설정이 열려진 구도법 으로 전개되어. 화면상의 넓이와 깊이가 대단히 멀고 깊게 느껴지는데. 그것은 동시대의 대가이고 그의 벗인 김홍도(金弘道)의 생략을 통한. 집중구도법 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그들의 개성인 것이다. 때문에 이인문의 작품은 보다 먼 거리에서 작품을 감상할 때 제 맛이 나며. 담묵과 농묵의 강한 대비와 울림은 그의 이런 조형적인 배려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