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시간을 미리 안다는 것
엊그제 방문, “어디선가 강아지 한 마리 튀어나올 것 같은 뜨락이군요.”
라고 하신 손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글 〚2007년 어느 가을의 주간일기〛
-주 영 숙
한 주간 내내 일도 많고 탈도 많았습니다. 얼굴박물관에 갈 얼굴그림도자기……초벌구이 단계에서 몇 점 파손, 그래서 월요일도 수요일도 여주에 들러 다시 여분까지 빚어놓고 왔는데 또 몇 점 파손되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음 월요일엔 납품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다음 수요일에나 재벌구이가 나온다고, 여주의 도예가마에서는 피치 못할 사정을 전해주네요.
한편, 엊그제 목요일, 서울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차 뒤편유리가 왕창 깨어지는 사고를 당했지요. 어느 옥상주차장에서 생긴 일입니다. 물론 시설공단에서 변상해 받았지만, 시방 차 유리는 반창고(테이프: 그날 붙인 것은 하루 만에 뗐지만, 덜 붙은 데가 있어서 다시 테이프를 붙여놨음) 붙이고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어제(금), 오전강의를 다른 때보다 일찍 끝내고 세랑이 미용하러 갔었지요. 이미 예약해두었고 해서 새벽부터 세랑이를 데리고 나왔던 것입니다. 제가 수업하는 동안 세랑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아빠(울옆지기)하고 놀았답니다. 새암이(울손녀)하고 놀 때는 새암이가 계단 오르기 등 여기저기 빨빨거리고 다니기 때문에 매우 바쁜데다가 자칫하면 아이를 잃어버리므로 무척 운동이 되지만 세랑이는 1996년 한글날에 태어나서 12년째에 든 파파할머니라서인지 아빠를 덜 힘들게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렇지만 꽤 오랜만에 데리고 나온 터에 갑자기 운동을 하였으니 매우 힘들었을 겁니다.
하여간 수업 끝내자마자 세랑이 단골미용실(이마트 내에 있음)로 뒤에 반창고 붙인 차를 몰아갔지요. 1시가 예약시간이었지만 우리는 12시 조금 넘어서 도착했습니다. 예약시간이 되면 미용하겠다고 2시 반에 오라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세랑이를 거기 맡겨놓은 채로 마트 내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쇼핑도 하면서 시간 보냈지요. 그러다 남은 시간엔 차에 앉아 시험공부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세 시 반에 영어 독해 시험이 있기 때문이었지요. 기억세포가 많이 망가졌을 이내 머리,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몽롱했습니다. 일주간 내내 틈틈이 공부(영문은 앞쪽만 눈에 넣고 해석된 국문만 달달 읽기)했지만 돌아서면 까맣게 되는 판이었습니다. 그나마 마조히즘과 사디즘, 히틀러……이런 대목이 꽤 관심 갔었지요. 다른 수업에서 「들뢰즈」연구 발표를 했었는데, 들뢰즈 또한 광범위하던 판이라 이 영어 독해수업과 관련된 「들뢰즈의 매저키즘」만을 똑 따서 책 정리를 해가서는 발표라고 했었지요. 그래서 겸사겸사 공부한 셈인 그 부분만 알고 있기는 했습니다……영어 독해, 아마도 1시간 동안에 얼토당토않은 소설 한편 써서 낼 수 밖에 없을 거라고 체념하고, 따라서 0점을 각오하고서 잠시 눈을 붙였지요.
심혈 기울여 그린 얼굴그림이 자꾸 터져버렸던 일, 멀쩡한 주차장에서 차 유리가 나간 일, 등등을 모두 모종의 큰 사건에 대한 액땜이라고 여기고 옆지기한테도 그리 위로했었지만, 참나……카페 난정뜨락 게시판 [남기고픈 고운 흔적]에다 “차암 나………시방 서울의 가을을 만끽하고 있답니다.”라고 흔적 남긴 한줄 글, 바로 (목요일)서울의 한 자동차공업사에서 컴퓨터에 앉아 쓴 건데요. 공업사의 컴퓨터로 어디 급한(영문초록 교정본) 이메일 하나 보내려다 여의치 않아 그냥 뜨락에 한줄 글만 남긴 거랍니다. 아무튼 파란만장한 한 주간, 오늘(금요일) 시험에 대하여는 마음을 비우자……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차 안이었지만, 저는 차 안에서 자는 게 참 편해요. 그리고 아이들 키울 때도 그랬지요. “잠을 자라. 일단 자야지만 시험문제가 보이고 답이 떠오르는 거야.” 그랬는데, 수요일에 여주에서 부서진 도자기 대신 다시 여분까지 그리느라고 해종일 애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또 다른 도예공장에 들러 '쌀항아리'에 모란 다섯 점 그려놓고,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와서, 도무지 잠을 못 이뤄 끙끙 애를 먹었었지요. 오죽하면 술을 좀 마시면 잠이 올까…… 그랬을라고요.(저는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시는 형입니다)……그렇게 뜬눈으로 며칠 보내던 판이라 그랬는지, 차안에서는 마음을 비우고(1시간 뒤에 시험이 있는데도) 잠을 청했던 것이지요. 2시 반이 되어야 세랑이를 데려올 수 있었지만, 혹 미용을 빨리 마칠 수도 있으니 가보라고 옆지기를 동물병원으로 보낸 뒤여서 한결 잠이 잘 오겠다 싶었습니다.……그런데, 한 10분 뒤에 핸드폰이 울려 들어보니 세랑이 찾으러 간 옆지기였습니다.
“세랑이가 죽었어!” 어안이 벙벙하여 “아니 왜? 어쩌다가?” 그러자 그는 “몰라.”
하고 전화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잠이 싹 달아났습니다. 한참 멍하니 앉아 있다가 차를 잠그고 나가봤지요. 동물병원은 마트의 이층에 있어서 한참 걸어가야 했습니다만, 주차장인 지층에서 일층으로 가는 도중에 옆지기를 만났습니다. “왜 이제 와?” 얼떨떨해진 정신이 아직도 안 돌아온 상태였지요. 저는 일단 그를 멈춰 세우고 재차 물었습니다. “도대체 믿을 수가 없어, 언제 죽었다는 거예요?” “깨끗이 씻기고 말리고 한 다음 점심 먹고 와서 보니 죽었더라고……”
저는 더 이상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세랑이 못 보겠어요. 당신 혼자 다시 가서 해결하고 와요.” “그래,” 그는 마치 로봇인양 뚜벅뚜벅 이층으로 다시 갔다가 와서는, “장례나 잘 치러달라고 했어. 미용사가 계속 울고 있어서 너무 안쓰럽더라고, 그래서 아까까지도 같이 뛰어다녔었다는 말을 했다가 금방 말을 바꿨지. 그렇지만 죽을 나이가 되었다고 말이야.”
저는 그랬습니다. “뽀미(세랑이 어미)도 깨끗이 목욕하고 나서 죽더니 세랑이는 한수 더 떠서 그렇게 미용까지 하고 죽었구나. 어찌 보면 개들은 제 죽을 시간을 미리 아는 것 같아.”
저의 동화부문 신인상 수상작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그 제목은 「뽀미가 된 세랑이」인데요, 당선소감만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그림을 직업으로 삼았으며…(중략)…지난 1월 8일, SBS월화드라마 <여인천하>에 들어가는 병풍그림들을 끝낸 감격의 순간을 월간문학에 동화를 투고 하는 것으로 여미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2월8일 오늘, 그림 그릴 부채를 구하러 담양에 가 있는 중에 느닷없이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똑똑한 세랑이가 빨리 전화 받으라고 공공 짖어댔고, 저는 알았다 알았어! 하며 부랴부랴 여행중의 첫 전화, 당선 통지를 받았지요.…(중략)…지난 학기에 “동화는 안 쓰요?”라고 지나가는 말인양 슬쩍 저를 부추기신 이문구 교수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올립니다.…(생략)
-월간문학 제93회 신인상 동화부문 당선소감 (2001년 3월호)
이처럼 저에게 동화를 쓰게까지 한 세랑이가 이젠 없습니다. 우리는 세랑이 어미 뽀미에게 했던 것처럼 똑 같이 말했습니다. “세랑아, 이담에는 꼭 사람으로 태어나렴……똑똑하고 귀엽고 새침한 여자아이로 태어나렴”
이마트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오며, 옆지기는 자꾸 눈을 훔쳤습니다. 우리 첫 손녀 새암이가 태어나고서는 찬밥신세가 되었던 세랑이, 처음에는 새암이를 질투하다가 나중에는 기꺼이 새암이의 똘마니가 되어 새암이를 졸졸 따라다니던 세랑이, 새암이가 좋아하는 공을 세랑이는 너무 무서워해서 새암이가 공으로 세랑이를 위협하던 일……그래서 세랑이는 가만있는 공만 봐도 여기저기 숨으러 다니던 일……만감이 교차하였습니다. 아이쿠, 새암이가 오면 세랑이 찾을텐데, 큰일 났다(뜨락에만 오면 세랑아, 세랑아, 하고 찾아다니는 새암이에게 그랬지요. “새암이처럼 세랑이도 자기 엄마한테 갔어.”)……그나저나 시험답안지에 온통 세랑이 이야기만 쓰게 되겠다고, 그런 예감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도 함께 시험 볼 거면서 시험 잘 보라고 격려 전화하는 K선배에게 그리 대답한 것이지요.
그런데, 시험문제가 바로 제가 흥미로워하던 부분이라 깜짝 놀라 줄줄이 영어 독해(?)를 하는 사태가 벌어졌지 뭡니까? 하하하…… 마조히즘, 사디즘, 히틀러, 그 단어들 덕분에 0점 각오했던 제가 만점 경지에 도달해버렸던 거죠. 문학연구방법론발표에서 들뢰즈 이론과 다른 문학작품을 비교분석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눈 딱 감고 “마조히즘” 책정리만 해간 덕분이었습니다. L교수님, 참 기가 막히셨죠? 작품수준의 논문 하라니까 책 정리 해왔다고……이제는 논문 해가겠사오니 염려 놓으세요. 일단 영어시험은 기말고사 접더라도 통과점수에 들어간 셈이고, 이제 맘 푹 놓고 논문 쓰겠습니다. 아 글쎄, 그놈에 영어를 통과해야지만 논문제출자격이 생기는 걸 어찌합니까?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국이 되면 영어독해 통과 필요 없이 논문 제출 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