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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문학]

홍길동전4- 홍길동전

작성자순환|작성시간10.12.02|조회수539 목록 댓글 8

홍길동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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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고전소설 > 국문소설
저자 허균
창작연대 조선광해군

작품해설

조선조 광해군(光海君) 때의 허균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고전소설.
방각본. 필사본. 활자본. 이 작품의 작자에 대해서는 허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설(異說)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허균과 약간의 격차를 두고 살았던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인 이식(李植 : 1584~1647)의 ≪택당집 澤堂集≫에 이 작품을 허균이 지었다는 기록이 전해 오기 때문에 결정적인 반증 자료가 없는 한 아직은 이 기록을 신빙할 수밖에 없다. <홍길동전>은 최초의 국문 고전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까닭은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대부분의 이본(異本)들이 국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균이 당대 한문학의 대가였던 만큼 <홍길동전>을 한문으로 지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홍길동은 아버지 홍승상이 용몽을 꾼 후 시비(侍婢)인 춘섬과 정을 통하여 난 얼출(孼出)이었다. 홍길동은 이렇게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비록 비범한 재주를 지녔지만 호부호형(呼父呼兄)도 할 수가 없었으며, 남들로부터도 천대를 받아야 했다. 더우기 홍승상의 애첩이 된 곡산모는 홍길동을 시기하여 특재라는 자객을 시켜 그를 해치려고까지 했다. 곡산모의 간계를 알아챈 홍길동은 특재와 상녀(相女)를 살해하고 그 길로 정처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 마침내 활빈당(活貧黨)의 괴수가 된다. 활빈당의 괴수가 된 홍길동은 그 무리를 이끌고 합천 해인사와 함경 감영을 차례로 공략하여 재물과 무기를 탈취하고 전국을 소란에 빠뜨린다. 국가에서는 우포장 이흡을 파견하여 홍길동을 잡으려 하지만 우포장은 도리어 홍길동에게 속아 간단히 농락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만다. 임금은 다시 형 인형을 경상감사로 삼아 홍길동을 잡으려 하니, 홍길동은 마지못해 임금 앞에 잡혀온다. 그러나 임금이 친국하는 앞에서 팔도에서 잡혀온 여덟 명의 홍길동이 저마다 자기가 참 홍길동이라 주장하다가 넘어지니 모두가 초인이었다. 이 후 홍길동은 사대문에 방을 붙여 자신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하면 조선을 떠나겠다고 하니, 임금은 마침내 홍길동의 뜻을 받아 들여 그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한다. 병조판서를 제수받은 후 홍길동은 약속대로 조선을 떠난다. 조선을 떠난 홍길동은 제도에서 울동이라는 괴물을 처지하고 두 아내를 얻으며, 마침내 율도국이라는 나라를 정벌하여 왕위에 오른 후 이상적인 정치를 펼치다가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한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영웅의 일생’을 기본 구조로 하면서 연산군대(1494~1506)의 ‘홍길동(洪吉同) 사건’이나 명종대(1545~1567)의 ‘임꺽정 사건’, 허균 당대의 ‘칠서(七庶)의 사건’ 등과 같은 역사적 사실에 일정 부분 영향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국내외의 여러 영향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작자 나름의 창작 의식을 바탕으로 당대 사회의 문제를 예리하게 형상화한 소설이기도 하다.
현재 전해지는 <홍길동전>의 이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김동욱(金東旭) 편(編) ≪경인고소설판각본전집 景印古小說板刻本全集≫ 소재의 한남본(翰南本), 야동교본(冶洞橋本), 어청교본(漁靑橋本), 송동교본(宋洞橋本), 안성(安城) 23장본, 안성 19장본, 완판본(完板本)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일반적으로 경판계인 한남본이 최고본(最古本), 혹은 최선본(最先本)으로 평가되어 왔으나 야동교본이 보다 앞선 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홍길동전>은 많은 이본을 지니고 있으나 크게 경판계와 완판계로 대별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고전 소설의 이본의 경우가 그렇듯이 <홍길동전>의 경우도 완판본 <홍길동전>이 경판계에 비해 보다 많은 내용이 첨가되어 있어 내용상 무시못할 편차를 지닌다. 특히 완판본의 경우는 경판계에 비해 배불 의식(排佛意識)이 강하게 드러나 있고, 탐관오리나 소인배에 대한 징치 의식이 보다 첨예하게 드러나 있으며, 홍길동의 영웅적 면모가 더 부각되어 있다. 특히 홍길동이 율도국을 정벌하는 과정이나 죽어 신선이 되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 등은 완판본이 후대 영웅 소설의 영향을 입고 흥미 본위로 변질된 것임을 알려 준다. <홍길동전>은 우리 나라 고전 소설 가운데 당대의 현실 문제를 가장 강력하게 제기한 사회 소설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이 작품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 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적서 차별의 문제이다. 홍길동은 뛰어난 재주를 지녔지만 시비 춘섬의 몸에서 태어난 얼출이었기 때문에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할 수가 없었으며, 가정 내에서도 천대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홍길동은 출가하여 도적의 괴수가 되고, 활빈당의 무리를 이끌고 합천 해인사와 함경 감영을 공략하며, 초인으로 여덟 길동을 만들어 전국을 소란하게 만든다. 홍길동이 이와 같이 반항적 행동을 전개했던 것은 자신이 뛰어난 인재라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한 방편이었으며, 뛰어난 재주를 지녔는데도 신분이 미천하다 하여 인재를 버리는 당시 사회의 불합리에 대해 불만을 표출한 것이고, 이의 부당성을 강력히 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허균이 <유재론 遺才論>에서 재주 있는 자를 버리는 당대의 사회 제도를 강력히 비판했던 것과 잘 연결되는 점이다. <홍길동전>은 적서 차별로 인해 인재마저 버리는 당시의 신분 제도의 모순을 문제삼은 작품일 뿐만 아니라 불의와 비리가 판치는 당대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 작품이다. 이 점은 허균이 <호민론 豪民論>에서 목민자(牧民者)가 정치를 잘못하면 호민이 그 틈을 노려 무도(無道)한 자를 죽이게 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홍길동은 뛰어난 재주를 지녔고, 부당성에 대해 자각하고 있었던 인물이며, 이를 시정해 보려는 행동력까지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에 호민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특히 홍길동은 활빈당의 무리를 이끌고 다니면서 수령 가운데 탐관오리들만을 골라 징치하는데, 이는 호민이 한번 소리치면 원민과 항민이 모여들어 무도한 자를 징치하는 모습과 서로 통한다. <홍길동전>에는 홍길동이 일반 백성들의 재물은 추호도 건드리지 않고 각읍 수령의 준민고택(浚民膏澤)하는 재물만 빼앗아 먹었다고 하고 있으며, 특히 완판본의 경우는 불의지사(不義之事)를 일삼는 불도(佛徒)들에 대한 비판과 강한 응징 장면이 나오고, 천총을 가리는 조정의 소인배들에 대한 증오심 등이 잘 드러나 있는데, 이는 불의와 비리가 판치던 당대 사회의 문제를 나름대로 강력히 제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홍길동전>은 또한 이상 사회의 실현이라는 낭만적 동경 의식이 짙게 배어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홍길동은 임금으로부터 병조판서를 제수받은 후 조선 사회를 떠난다. 그런데 홍길동이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조선 사회를 떠나는 것은 그가 제기한 문제의 해결의 결과라기보다는 실현 불가능한 암울한 역사 의식이 배태한 결과라는 느낌이 보다 강하다. 홍길동은 조선을 떠나 조선 사회와는 상대적 거리에 위치하는 율도국이라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 율도국은 옥야(沃野) 수천리의 천부지국(天府之國)이며, 이 나라의 왕이 된 홍길동의 위상은 진짓 조선왕의 위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특히 홍길동은 율도국을 정벌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삼 년만에 산무도적(山無盜賊)하고 도불습유(道不拾遺)하는 태평세계를 건설한다. 홍길동이 이런 나라의 왕이 되고, 또한 율도국을 이상세계로 만들었다는 것은 작품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는 율도국과 같은 이상세계는 조선 사회가 지녔던 모든 문제점이 해결된 사회라는 의미를 지니며, 이런 이상 사회의 실현은 홍길동과 같은 뛰어난 인재가 통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작가 의식이 담겨 있다. 이처럼 <홍길동전>은 인재를 버리는 당시 사회의 모순을 제기한 작품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인재가 나라를 다스려야만 이상세계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작자 의식이 짙게 배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홍길동전>은 영웅형 소설의 대표적 작품으로 후대 영웅형 소설의 출현이나 성장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지닌 바의 강력한 사회 비판적, 낭만적 성향 때문에 동종 계통의 사회 소설을 형성시키는 데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이 작품의 고전 소설사상 위치를 더욱 돋보이게 해 주는 요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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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선조시대의 풍운아 교산(蛟山) 허균(許筠)의 작품. 서자로 태어나 온갖 천대를 받으며 자라다 공부 대신 무술을 익혀 집안의 음해를 피해 가출하여 활빈당을 조직하여 도술과 기지로 탐관오리의 재물을 탈취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일도 한다. 후에 원하던 병조판서를 제수 받고 고국을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된다. 율도국에서는 적서와 서얼 제도를 몸소 철폐시키고 있다.

조선국 세종조 시절에 홍모(某)라 하는 재상이 있었는데 대대로 명준거족이 있었다. 그는 소년 등과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러 조신들 중에서 충효가 겸비한 재상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정실 소생 유씨로부터 난 인형(仁衡)이요, 차자는 시비 춘섬(春蟾)의 소생 길동(吉童)이었다.

길동은 나이 8세가 되자 총명이 하나를 들으면 백을 통할 정도로 뛰어나 부친의 사랑이 깊었으나 근본이 천(賤)한 출생이라 나이 십여 세가 되어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천대를 받으며 자랐다.

그는 자기의 이러한 신세 한탄을 하다가 스스로 이렇게 한탄했다."대장부 세상에 나매 공명(孔明)을 본받지 못하면 차라리 병법을 외어 장수가 되어 나라에 공을 세우는 것이 장부의 일이다. 나는 어찌하여 부형이 있으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심장이 터질지라. 어찌 통한치 않으리오."하고서 책을 덮어두고 뜰에서 검술을 익히니 마침 공(公)이 또한 달빛을 구경하다가 길동을 보고 물었다.

"네 무슨 흥이 있어 밤이 깊도록 잠을 자지 아니하느냐?"길동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소인이 평생 설운 바는 대감 정기로 태어난 당당한 남자였사오나 그 부친을 부친이라 못하옵고 그 형을 형이라 못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하고 눈물을 흘리자 공이 그를 측은히 여기나 마음이 방자해질까 두려워 크게 꾸짖었다."재상가의 천비 소생이 너뿐이 아닌데 네 어찌 방자함이 이 같으냐. 차후 이런 말이 있으면 안전에 용납치 못하리라."

길동이 감히 말을 못하고 엎드려 부복하니 물러가라 하자 침소에 돌아와 혼자 서러워했다. 하루는 길동이 마음을 정하고 모친을 찾아가 울며 아뢰었다."소자의 팔자 기박하여 천한 몸이 되오니 품은 한이 깊사온지라 장부가 세상에 처하매 남의 천대받음이 불가하온지라 소자 모친 슬하를 떠나려 하오니 소자를 염려 마시고 귀체를 보중하소서." 하자 어머니는 크게 놀라 말했다."재상가 천생이 너뿐이 아니어든 어찌 협한 마음을 발하여 어미 간장을 사르느뇨."

길동이 말했다. "소자는 후일을 기약하고자 떠나오니 훗날을 기다리소서. 대저 곡산 모의 행색을 보니 상공의 총애를 잃을까 하여 우리 모자를 원수같이 아는지라, 큰 화를 입을까 하옵나니 모친은 소자 나감을 염려치 마소서."하니 그 어미 또한 슬퍼했다.

원래 곡산모는 본디 곡산 기생으로 상공의 총애하는 첩이 되었으니 이름은 초란이라, 가장 교만 방자하여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에게 참소 했다. 그녀는 또한 아들이 없고 춘섬은 길동을 낳아 상공이 매양 생각하매 하루는 무녀를 통해 흥인문 밖 관상녀를 청하여 은자를 주고 길동을 없애는 묘책을 강구했다. 하루는 한 여자가 당하에 들어와 문안하며 아뢰되,

"소인은 관상을 일삼더니 마침 상공 문하에 이르러 공자의 상을 보니 흉중의 조화가 무궁하고 미간에 산천 정기 영롱하오니 천고영웅이요 일대호걸로 짐짓 왕후의 기상이라 장성하면 장차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니 상공은 살피소서."공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아무에게도 누설치 말라 당부하고 은자를 주어 보냈다.

차후로 공이 길동을 대할 때마다 근심이 쌓여 병이 드니 초란이 기뻐하며 상공께 말했다."상공의 환후가 위중하심은 길동을 두심이라, 천한 소견은 길동을 죽여 없이 하면 상공의 병환도 쾌차하실 뿐 아니라 문호를 보존하오리니 어찌 이를 생각지 아니시나이까."

부인과 인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나 천륜이 지중하니 차마 어찌 못하고 근심했다. 초란이 부인과 인형의 허락을 받아 특재를 불러 오늘밤에 길동을 죽이라 지시했다.

길동이 한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중 까마귀 세 번 울고 가자 이상히 여겨 팔괘를 벌여놓고 둔갑법을 행하여 동정을 살피자 한 사람이 비수를 들고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지라 길동이 조화를 부려 첩첩산중으로 만들고 나귀 타고 오며 꾸짖기를,"네 무슨 일로 나를 죽이려 하는가. 무죄한 사람을 벌하면 하늘에서 화를 내리리라."이에 침입자가 말했다."너는 죽어도 원망치 말라. 초란이 무녀와 관상녀 함께 상공과 의논하여 너를 죽이려 함이니 어찌 나를 원망하리오."

하고 칼을 들고 달려들자 길동이 요술로 특재의 칼을 앗아들고 호령하여 왈, "네 재물을 탐하여 사람 죽임을 좋이 여기더니 너 같은 무도한 놈을 죽여 후환을 없이 하리라." 하고 단칼에 특재의 목을 벤 뒤 관상녀도 잡아죽이고 초란이까지 죽이려 하였으나 상공의 사랑하심을 깨닫고 칼을 던지며 상공의 침소에 나아가 하직을 고하자 상공이 측은히 여겨 그날부터 호부호형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길동은 이미 결심한지라 어머니의 침소에 가서 하직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갔다.

길동이 깊은 산 속을 찾아 들어가니 큰 바위 밑에 석문이 닫혔거늘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보니 수백 호 인가가 즐비하고 여러 사람이 모여 잔치하며 즐기니 이곳은 도적의 굴혈이라 문득 길동의 위인 됨이 녹록지 아님을 반겨하여 그를 우두머리로 앉혔다.

이후로 길동이 제인으로 더불어 무예를 연습하여 수월 내에 군법을 재정비한 연후에 합천 해인사를 쳐 재물을 탈취하고 이 무리를 활빈당(活貧黨)이라 하여 조선팔도로 다니며 각읍 수령의 불의로 재물이 있으면 탈취하고 혹 가난한 자 있으면 구제하여 백성을 침범치 아니하고 나라에 속한 재물은 추호도 범치 아니하니 다른 도적들이 모두 항복하여 그 수하에 들었다.

연이어 그는 탐관오리로 알려진 함경 감사의 관아를 습격하여 창고를 열고 전곡과 군기를 모두 거두어 달아나자 온 나라가 시끌시끌했다. 이 소문이 전국에 퍼지자 길동이 잡힐 것을 우려하여 초인(草人) 일곱을 만들어 진언을 염하고 혼백을 붙이니 일곱 길동이 일시에 팔을 뽐내며 팔도에 흩어지니 어느 것이 진짜 길동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임금이 크게 놀라 우포장 이흡에게 명하여 길동을 잡도록 명하시었다.

포장 이흡이 상의 명을 받아 관졸을 거느리고 발행할 새 하루는 한 주점을 들러 쉬더니 한 소년과 술을 마시다 깨어보니 부대 속에 들어 있는지라 풀어주어 단상을 올려다보니 활빈당 행수 홍길동이었다. 그는 홍길동이 풀어주니 할 일 없이 돌아갔다.

그 후로도 전국에서 홍길동을 잡아달라는 상소가 빗발치니 임금은 길동이 전임 이조판서 홍모의 서자이며 지금의 병조좌랑 홍인형의 서제임을 알고 인형을 경상 감사로 제수 하여 1년 이내에 길동을 잡아올리라 명했다.

어느 날 감사가 동생인 길동이 스스로 찾아온 것을 크게 기뻐하는데 길동은 스스로 결박하여 자기를 서울로 압송해 가라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결박하여 서울로 보내자 사람들이 모두 나와 길동을 구경했다. 이때에 팔도에서 하나씩 길동을 잡아 올리니 어느 것이 진짜 길동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길동이 경상 감사인 형에게 가서 다시 잡혀가겠다고 하자 형이 기특히 여겨 사지를 한번 살펴보고 결박하여 함거에 넣어 서울로 다시 압송해 보냈다. 그러나 서울에 이르러 스스로 쇠줄을 끊고 함교에서 벗어나 달아나니 근심하던 임금은 길동에게 병조판서를 제수 하겠노라 방을 붙여 스스로 찾아오면 도부수를 매복시켰다가 사은하고 나오면 쳐죽이게 했다.

길동이 궐내에 들어가 임금께 사은 숙배하고 나와 구름을 타고 가버리니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그 후부터 임금은 길동을 잡는 것을 그치게 했다.

그 후부터 길동이 소란을 떨지 않자 상이 또한 근심 없이 지내시니 가을 어느 날 밤, 후원을 거닐 때 문득 하늘에서 한 소년이 내려와 땅에 엎드렸다. 이에 임금이 물으니 아뢰었다.

"신은 병조판서 홍길동이로소이다. 신이 전하를 받들어 만세를 뫼시올까 하였으나 천비 소생이라 문(文)으로 옥당에 막히옵고 무(武)로 선천에 막힌지라, 전하께서 신의 소원을 들어주옵시니 전하를 하직하고 조선을 떠나가오니 복망 전하는 만수무강하소서."

하고 공중에 올라 표연히 날아가자 임금이 그 재주를 크게 칭찬하셨다.길동이 조선을 하직하고 남경 땅 저도섬으로 들어가 수천 호 집을 짓고 농업을 힘쓰고 재주를 배워 무고를 지으매 군법을 연습하였다. 또한 길동이 귀신이 든 한 여자의 목숨을 살려주어 각자 처소로 돌아가게 하니 그녀의 부모가 크게 기뻐하며 길동을 사위로 삼으니 단번에 아내를 얻어 저도섬으로 돌아오니 모든 사람이 반기며 치하했다.

어느 날 길동이 천문을 보다가 부친 홍공이 세상을 떴음을 알고 가서 통곡한 후 다음날 운구하여 자기 어머니를 모시고 부하들을 지휘하여 산역을 마치고 삼상을 마친 후에 모든 영웅들을 모아 율도국을 치고자 진군했다.

정병 오만을 거느려 율도국 철봉산에 다다라 싸움을 돋우니 태수 김현충이 크게 놀라 왕에게 고하고 대적했다. 길동은 단칼에 적장 김현충을 베고 철봉을 얻어 백성을 안무하고 대군을 휘동하여 도성을 치자 왕과 신하들이 모두 항복했다.

이에 길동이 성중에 들어가 백성을 안무하고 왕위에 오른 후 율도왕으로서 의령군을 봉하고 마숙 최철로 좌우상을 삼고 제장은 각기 봉작한 후 만조백관이 천세를 불러 하례 했다.

왕이 치국 3년에 태평세계라 백룡을 불러 조선 성상께 표문을 올리고 돌아 오라 하니 백룡이 조선에 도달하여 표문을 올린대, 상이 보시고 찬 왈, "홍길동은 짐짓 귀재로다."하시고 홍인형으로 위유사(慰諭使)를 하사 조서를 내리시니 인형이 부인을 뫼시고 율도국에 이르니 왕이 맞이하사 대연을 배설하여 함께 즐겼다.

여러 해가 지나 모친상을 당하자 선릉에 안장한 후에 세 아들과 두 딸을 얻으니 장남과 차남은 백씨 소생이고 삼남은 조씨 소생이었다. 장남 현으로 세자를 봉하고 다른 아들들은 모두 봉군하였다.

왕이 치국 삼십 년에 홀연 병을 얻어 세상을 뜨니 나이 70세였다. 선릉에 안장한 후 세자가 뒤를 이어 즉위하여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태평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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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이정필 | 작성시간 10.12.15 왜 아무개는 홍길동이라 할까요
  • 작성자윤주 | 작성시간 10.12.15 '<홍길동전>은 우리 나라 고전 소설 가운데 당대의 현실 문제를 가장 강력하게 제기한 사회 소설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경완 | 작성시간 10.12.15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상은 | 작성시간 10.12.16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민정 | 작성시간 10.12.17 ㅋㅋㅋㅋㅋ저도 드라마가 생각나는건 왜일까요 잘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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