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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문명]

아프리카의 역사

작성자nanjung|작성시간10.12.30|조회수234 목록 댓글 0

1) 선사 ·고대사  

1924년 남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두개골(頭蓋骨)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라고 명명되었고, 약 100만 년 전의 ‘사람과 흡사한 원숭이’로 추정되었다. 또 1959년 동부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계곡(溪谷)에서 발견된 두개골은 진잔트로푸스 보이세이라고 명명되었는데, 이것은 약 170만 년 전 원인(猿人)의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 말 올두바이 계곡(먼저 두개골이 출토된 부근)에서 12세 가량의 어린아이의 아래턱뼈 ·옆머리뼈가 발견되어 호모 하빌리스라고 명명되었다. 이것은 약 2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데도 불구하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진잔트로푸스보다 훨씬 인류에 가까운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발견을 통해서 아프리카 대륙이야말로 인류의 발상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등의 시대 이후부터 다시 수십만 년이 지난 다음, 아프리카에서는 구석기시대의 문화가 급속히 발전하여 돌로 만든 아름다운 창끝을 만들어냈다. BC 4000년대에는 나일강 하류를 중심으로 고도의 문화가 일어나 BC 1000년경까지 인류사(人類史)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빛나는 문화가 번영하였다, 그것은 현존하는 유적이나 유물로 미루어보아도 명백한 사실이다.

BC 1000년경 수단 누비아 지방에서는 이집트화(化)한 쿠시 왕국이 일어나 4세기 중엽까지 제철(製鐵) 등의 기술을 바탕으로 높은 문화를 유지하였다. 쿠시 왕국의 문화는 서부 아프리카의 나이저강 유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되지만 이 무렵 이미 나이저강 유역에도 농경을 바탕으로 한 전혀 다른 고도의 문화가 발전하고 있었다는 설(說)도 있다. 나이지리아 북부의 노크라는 마을에서 BC 900년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되는, 점토로 구워 만든 인형이나 동물상(動物像)이 발굴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대륙의 북동부는 좁은 홍해를 사이에 두고 아라비아 반도에 접하기 때문에 아랍 이민이 일찍부터 건너오기 시작했다. 그리스시대의 이집트는 그리스와 인도 무역의 통로가 되었으나 그 무렵 에리트레아 부근에 악숨 왕국이 성립하였다. BC 30년 무렵 이집트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뒤에도 악숨의 아둘리스(지금의 마사와 남쪽의 줄라)는 인도무역의 중계항(中繼港)으로서 번영하였다. 이 지방에 대해서는 l세기 무렵에 쓰여진 《에리트레아 항해지(航海誌):Periplus Maris Erythraei》에 기재되어 있다.

아라비아 반도에 이슬람교가 전파된 후 악숨 왕국은 홍해의 무역 루트에서 제외되었으며 점차 아랍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4세기 중엽부터 그리스도교를 믿은 그들은 아프리카적인 성격을 굳히면서 내륙에 고립하였다. 이윽고 자궤 왕조(王朝)가 일어나 13세기까지 계속되다가, 1270년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의 자손이라는 전설을 지닌 왕조(에티오피아 皇統)로 바뀌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는 4세기 무렵에 가나제국(帝國)이 일어난 것으로 짐작된다.

2) 중세  

639년 북부 아프리카를 침입한 아랍은 북부 아프리카를 서진(西進)하여 83년에는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까지 이르렀다. 북부 아프리카의 원주민 베르베르족은 곳에 따라서는 공존(公存)하고 또는 대이동을 하였다. 또 7세기 말부터 8세기 초에 걸쳐 아랍의 반주류파(反主流派)가 아라비아 반도를 집단 탈출하여 잔지바르섬 등 동부 아프리카로 이주하였다. 따라서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부에서 남동부에 걸쳐서 아랍인이 도입(導入)한 이슬람 문화가 보급되고 크고 작은 이슬람 국가가 일어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마그레브 지방에서는 이드리스 왕국(788∼l000) ·알모라비드 왕국(1061∼1149) ·알모하드 왕국(1149∼1307) 등이며, 동부 아프리카에서는 젠지(잔지)왕국(975년부터 포르투갈인들이 들어올 때까지가 전성시대)이 전형이었다.

아프리카 서부 내륙 및 동부의 역사나 문화를 알기 위한 사료(史料)로서는 11세기 무렵 이후의 아랍 학자나 여행자들이 남긴 기록이 문자로 쓰여진 최고(最古)의 것으로 보인다.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11세기에 베드윈의 제2차 침략 이후 아랍의 영향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가나 왕국이 베르베르 지배자의 영향을 벗어나 순수한 소니케족(흑인)의 왕국이 된 것이 770년, 알모라비드 왕국에 정복된 것이 1076년, 완전히 멸망한 것이 1240년이다. 가나 왕국의 속국인 말리가 대서양 연안에서 나이저강 중류까지의 영토를 소유하고 가나 왕국을 대신하여 대제국(大帝國)을 이룬 것은 13∼15세기이다.

말리 제국은 만사무사왕 시대(14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 후 말리 제국을 대신하여 송가이족의 제국이 일어나 16세기에는 가오를 수도로 하는 강대한 제국이 되어 동서에 여러 개의 종속국을 거느렸다. 한편 서부 내륙의 제국보다는 소규모였으나 차드호(湖) 주변에서 홍해 사이의 지역에도 하우사족의 여러 왕국, 카넴 ·보르누 ·동골라 왕국 등의 흥망(興亡)이 있었다. 또 기니만 연안의 열대우림 지대에는 작은 소국가군(小國家群)이 많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 콩고 분지 주변이나 동부 아프리카 내륙에서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겠지만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다른 왕국의 역사는 분명하지 않다.

우간다의 부간다 왕국이나 르완다 왕국, 부룬디 왕국 등은 북방에서 온 지배자에 의해서 16세기 이후에 건국되었다. 짐바브웨에 있는 유명한 석조 건축의 유적은 모노모타파 왕국 수도의 흔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11세기 무렵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노모타파 왕국에 관해서는 16세기 포르투갈 항해자의 기록에도 나타나는데, 이에 따르면 15세기 중엽에 건설된 것이라고도 한다. 1607년 모노모타파 국왕은 포르투갈의 허수아비가 되어 1629년의 포르투갈 모노모타파 조약에서는 모노모타바의 영토를 부당히 광대한 것으로 보이게 해서 희망봉(喜望峰) 근처까지를 그 영토라고 주장함으로써 영국에 대한 포르투갈의 세력권을 주장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콩고강 하구에는 1480년대에 포르투갈인 항해자들이 들어와 많은 반투족의 부족왕국(部族王國), 콩고 ·카콩고 ·로망고 ·은동고 등과 접촉하였으나 이 왕국들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콩고나 앙골라의 지명도 여기서 생겼으나 그들의 국왕은 포르투갈 ·프랑스 ·벨기에의 지배하에서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러나 15∼16세기에 포르투갈의 항해자들과 접촉한 아프리카의 여러 왕국은 모두 유럽의 그리스도교 문화와는 이질적이었으나 훌륭한 정치질서와 뛰어난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국왕은 이를 왕국의 국왕과 대등한 입장에서 외교관계를 가졌다.

4) 유럽인의 내항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 내항한 최초의 유럽인은 1364∼65년의 프랑스인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기니라는 지명이 유럽지도에 최초로 기재된 것은 1350년 무렵이었다. 사료(史料)에 의해서 확인된 최초의 항해자는 l434년에 북위 26°의 바하도르곶(串)을 남하한 포르투갈인(人) 질에아네스이다. 교황(敎皇)이 포르투갈에 아프리카 서안의 영토권을 부여한다고 선언함으로써 포르투갈인은 항해를 계속하여 디오고캄이 1471년 적도(赤道)에 도달했고, 1482년에는 콩고강 하구를 발견했으며 1488년 B.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했고 1497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우회해서 나탈에 도달하여 인도양 항로를 발견하였다. 1494년의 에스파냐 ·포르투갈 조약에서 에스파냐는 남북아메리카를,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각각 독점적인 세력범위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16세기의 30년대 이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덴마크 등 여러 나라의 항해가가 잇달아 아프리카 서해안에 내항하여 무역기지를 개설하였다. 이 항해가들은 처음에는 모두 금을 찾아서 내항하였으나 선적(船積)할 가치가 있는 아프리카의 산물은 상아(象牙)와 노예밖에 없었다. 네덜란드는 아프리카 무역에는 힘을 기울이지 않고, 아시아 항로의 보급기지를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 밖의 나라 특히 영국은 남북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유리한 식민지를 확보했기 때문에 남북아메리카의 부족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노예무역을 세계적인 통상(通商)의 일환으로서 중요시하였다. 포르투갈은 기니 ·앙골라 ·모잠비크에서 노예무역과 그리스도교 포교를 하는 한편 해안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밖의 나라는 1652년 네덜란드가 케이프식민지를 설치하였을 뿐 전혀 영토적인 야심을 갖지 않았다.

17세기 후반부터 성황을 이룬 노예무역 때문에 서아프리카 기니만 연안의 각지에 노예무역을 위한 성새(城塞)가 많이 구축되었으나 군인이나 무역업자가 성내(城內)에 체재하였을 뿐이고 유럽인은 성 밖으로 나가지도 않은 채 아프리카인에게 노예사냥을 시켰다. 유럽인에게 노예를 매매하면 생활할 수 있게 되자 아프리카인들은 노동을 해서 생산을 한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부족 대 부족, 마을 대 마을이 서로 습격하면서 포로(捕虜)로 잡힌 사람을 유럽인에게 팔아 넘기는 생활을 되풀이하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문화를 지탱할 수 있는 생산은 할 수 없게 되고, 남아 있는 문화적 유산마저 불태우거나 파괴되어 버렸다. 아프리카인이 호전적(好戰的)이고 미개 ·야만적인 열등인종이라는 이미지는 19세기까지 계속된 노예무역의 효과로서 얻어진 것이다. 노예무역은 아프리카 대서양안의 전체뿐만 아니라 인도양까지 파급되었다. 인도양 연안이나 중앙 아프리카 및 서부 아프리카의 내륙에서는 아랍 노예상인에 의한 대규모 노예사냥이 자행되었다.

유럽인의 내항은 다시 유럽상품을 기니만 연안으로 가져오는 대신, 금이나 상아 등을 유럽으로 반출했기 때문에 서부 아프리카 내륙의 대상(隊商) 루트를 통한 거래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상업에 의존해온 내륙의 부족은 새로운 생활을 찾아 기니만 연안에 영토를 확보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부족전쟁에 따른 파괴가 잇달았다.

5) 탐험 ·분할경쟁시대  

미국의 독립, 프랑스혁명에 의해서 노예해방의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한편 그것은 노예의 공급원에 불과한 아프리카 대륙에 구미 자본주의 제국이 영토적 야심을 가지기 시작한 과정이기도 하였다. 노예해방과 함께 영국 ·프랑스 ·미국은 이 대륙 내부를 침략하기 위한 교두보(橋頭堡)를 만드는 데 부심하였으며 1787년 M.파크에 의한 나이저강 유역의 탐험을 시초로 내륙 탐방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1787년 시에라리온에 해방노예를 이주시키고 아프리카인에 의한 자유의 나라를 건설하기로 하고 그 이듬해 런던에 ‘아프리카 협회(Africa Association)’를 설립하여 아프리카 내륙의 지리적 ·인문적인 조사연구를 준비하였다. 해방 노예의 이주지에 ‘프리타운(자유의 도시)’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1807년 노예무역이 금지된 이후에는 노예선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정착지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오래지 않아 포기되고 감비아 ·골드코스트(黃金海岸:지금의 가나) 등은 식민지를 만드는 전진기지가 되었다.

세네갈의 생루이를 전진기지로 삼고 있던 프랑스는 적도아프리카로 진출하기 위한 기지를 리브르빌(자유의 도시:1849)이라고 하였으나, 당시 프랑스는 노예무역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영토적 야심도 더 컸다. 미국의 이민 회사가 만든 라이베리아(자유의 나라:1821)만은 1847년 공화국으로서 독립하여 미국의 대(對)아프리카 정책의 기지가 되었다. 한편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원정하고, 이집트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견한 영국이 1801년 카이로를 점령하는 사태를 빚었다. 그것은 영국이 북부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북부 아프리카에 대한 영국 ·미국 ·프랑스의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1830년 프랑스는 알제리를 침략하였다.

한편,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나폴레옹 전쟁(1795∼1803) 때 영국이 네덜란드의 케이프 식민지를 점령하였다가 네덜란드에 되돌려 주었으나 1806년 영국은 아시아 항로(航路)의 보급기지로서 의의(意義)를 가진 케이프타운을 또다시 점령하였다. 이 결과 네덜란드계(系) 백인들은 노예를 해방(1834)한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 내륙으로 이주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 내륙의 탐험은 망고 파크에 뒤이어 1821∼22년 영국인 탐험대가 지중해를 거쳐 차드호(湖)에 도달하였고 이보다 앞서 1818년 프랑스인들은 세네갈강 유역을 탐험하였다. 또한 1850년 독일인 H.바르트는 지중해로부터 차드호, 나이저강 유역을 탐험하였다.

동부 아프리카에서는 1848년 독일인 요하네스 레브만이 킬리만자로를 발견하였고, 1850년대에는 영국인 리빙스턴, 1860∼70년대에는 미국인 H.M.스탠리, 1870∼80년대에는 프랑스인 P.S.de 브라자 등이 동부에서 콩고강 유역을 거쳐 남부 아프리카 등의 내륙을 탐험했다. 이와 같은 탐험과 병행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은 서부 아프리카에서 영국 ·독일은 동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1850년 무렵부터 산업자본이 발전하여 자유무역론이 굳어졌기 때문에 식민지를 획득, 통치를 한다는 데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때문에 서부 아프리카에서 영토를 획득하는 데는 프랑스가 우세하였으며, 리빙스턴이나 스탠리의 탐험 성과는 벨기에의 식민지 획득을 돕는 결과가 되었다.

영국 ·프랑스에 이어 뒤늦게 아프리카 분할 경쟁에 참가한 독일은 벨기에와 손을 잡고 식민지 점령의 실적을 올리면서 1884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당시의 구미열강 대표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여 콩고 분지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분할문제를 협의하고 ‘콩고분지조약’을 조인하였다. 이 조약은 대서양 연안에서 인도양 연안에 걸친 광대한 지역에 대해 식민지 보유의 원칙을 약속 결정하였다.

6) 식민지분할의 완료  

콩고분지조약의 발효에 따라서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서구 제국은 대(對) 아프리카 정책에서 두 가지 경향을 명백히 하기 시작하였다. 첫째는 특허회사에 의한 경제적 이익의 추구였고, 둘째는 실질적인 식민지 지배를 확립하기 위하여 무력에 의한 분할의 촉진이었다. 콩고분지조약은 식민지주의국(植民地主義國)에 대해 경제적 이익의 독점을 금하고 기회균등과 문호개방의 원칙을 강요하였다. 이 제약을 벗어나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서 1885∼1900년에 걸쳐 식민지주의 제국은 똑같이 특허회사를 설립하였다.

특허회사는 식민지 내에서 자원이 풍부한 지역에 대한 토지소유권 ·광업권 ·무역의 권리 등에 관한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징세권(徵稅權)을 비롯하여 행정 ·사법 ·입법 및 경찰의 권리까지 보유하면서 이 권리를 배타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영국의 특허회사는 산업자본가의 발언권이 강하고 자본주의적인 자원개발을 추진한 데 비해, 프랑스나 벨기에의 특허회사는 상업자본가나 봉건적 지배층의 의도에 따라 경영됨으로써 확대재생산을 꾀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강제 노동이나 강제재배에 의한 약탈적인 착취를 일삼았다. 따라서 아프리카는 종래의 노예무역을 대신하여 원자재 등의 국제 상품과 서구 공업제품의 부등가교환(不等價交換)을 강요당하였다.

한편 콩고분지조약은 식민지 영유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요건(要件)으로서 실질적인 점령과 지배상태를 명시할 것을 식민주의 국가에 요구하였다. 때문에 차드호(湖)를 목표로 한 영국 ·프랑스 ·독일의 군대 파견 전쟁이나, 수단을 점령하려는 영국 ·프랑스군의 충돌(파쇼다사건) 등의 분할경쟁이 진행되었다.

남부 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系) 보어인(지금의 아프리카너) 공화국 내에서 다이아몬드나 금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영국의 침략이 시작되고 1899∼1902년 사이에는 보어전쟁이 계속되었다. 또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통합 지배하려 한 포르투갈, 남서 아프리카와 동부 아프리카(지금의 탄자니아)를 연결하려는 독일, 게다가 케이프타운에서 카이로까지 식민지를 연속시키려고 하는 영국 등이 대립하여 콩고 분지 이남의 내륙에서 분할경쟁을 벌였다.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를 둘러싼 분할경쟁이 1912년에 끝났으며, 리비아는 1911년 이탈리아령으로, 이집트는 1914년 영국보호령이 됨으로써 북아프리카를 지배해온 터키의 세력은 일소(一掃)되었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아프리카 대륙은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라는 두 개의 형식적인 독립국을 남겼을 뿐 식민지 분할경쟁은 완전히 끝나고 식민지 대륙으로 바뀌었다.

7) 세계대전 때의 아프리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집트 ·리비아 및 소말리아에서는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리비아에서는 한때 터키의 원조로 독립국이 성립되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중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원칙은 전후(戰後) 크게 부각되어 아프리카인에게도 큰 자극을 주었다. 1920년 전후(戰後)의 아프리카에는 3가지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대전 전 독일식민지의 재분할이다. 이들 식민지는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령이라는 형식으로 카메룬과 토고가 영국 ·프랑스 양국에 분할되고, 동아프리카도 분할되어 탕가니카는 영국의 지배를, 르완다와 우룬디(부룬디)는 벨기에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남서 아프리카는 남아프리카 연방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둘째는 위임통치제도의 성립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는 ‘팬아프리카회의(會議)’가 국제적인 조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제1회 파리(1919), 제2회 런던 ·파리 ·브뤼셀(1921), 제3회 런던 ·리스본회의(1923) 등 회의를 거듭한 팬아프리카회의는 직접 아프리카의 민중을 조직화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으나 아프리카인 의식의 고양(高揚)과 아프리카 해방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셋째 반제국주의적인 민족주의운동이 활발해졌다는 점이다. 소말리아의 독립투쟁, 이집트의 독립, 또 모로코에서 아브드엘 크림의 독립투쟁과 ‘리프공화국’ 성립, 나이지리아 ·가나 ·시에라리온에서 민족주의 정당(政黨)의 출현과 선거제도 도입,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일어난 스트라이크 등 많은 사례(事例)를 지적할 수 있다.

1929년에 비롯된 세계공황은 아프리카인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였다. 자본주의적인 개발이 진행되고 있던 식민지의 경제적인 타격이 아프리카인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황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1930년대에는 노동조합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세계공황은 이탈리아 ·독일 ·포르투갈 ·에스파냐에 파시즘 정권을 성립시키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식민지의 아프리카인에 대한 압제를 강화하였다.

이탈리아는 1935년 에티오피아를 침략하고 에리트레아 ·소말리아를 합하여 광대한 영역의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1940년대에 들어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화(戰火)가 북아프리카에도 미치자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나 리비아와 튀니지는 많은 전쟁피해를 입고 1943년 추축군(樞軸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8) 식민지의 해방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적인 반식민지주의적 여론이 높아지고 아시아에서 민족독립운동이 성공함에 따라 아프리카 각지의 민족해방운동도 급격한 속도로 확대되었다. 이들의 민족해방운동은 이탈리아 식민지의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동서 양진영의 대립에 휘말렸으며, 아시아의 신흥제국과 함께 이른바 제3세계의 권리를 주장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또 이들의 민족독립운동은 1945년 맨체스터에서 열린 제5회 팬아프리카회의의 영향을 받아 팬아프리카니즘 운동을 구심점(求心點)으로 움직였다. K.은크루마가 그 지도자였으나, 당시의 프랑스령 아프리카 식민지의 정치가도 아프리카 민주집회(民主集會:RDA) 등을 중심으로 행동하였다.

UN의 노력으로 1951년 리비아가 독립함으로써 1922년 이집트가 독립한 이래 30년만에 아프리카의 독립국은 겨우 한 나라가 늘어 5개국이 되었다. 다음해인 1952년 이집트에서 나세르 등의 쿠데타가 성공, 독립을 이루었다. 그리고 반둥에서 개최된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회의(1955)를 거쳐, 격렬한 반(反)프랑스 독립투쟁을 벌인 모로코 및 수단이 독립국이 된 것은 1956년의 일이다.

이 대륙의 민족독립 운동의 물결은 먼저 북아프리카에서 고조되었다. 은크루마의 힘으로 1957년 가나가 독립하면서 서부 아프리카에도 민족독립의 물결이 밀어닥치기 시작하였다. 알제리의 독립을 저지하려던 프랑스 제4공화국이 무너지고, 드골의 프랑스 제5공화국이 성립된 1958년에, 기니가 프랑스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여 가나와 함께 전아프리카 해방 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1958년 말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열린 전아프리카민족회의는 팬아프리카 회의가 결실을 본 것으로서 역사적인 역할을 맡았다.

1960년대에는 아프리카의 민족독립이 절정에 이르러 17개의 신생독립국이 출현함으로써 ‘아프리카의 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 독립한 나라의 대부분은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 구종주국(舊宗主國)에 의해서 정치적 독립을 인정받은 것으로 민족주의적인 의욕이나 반식민지주의적인 힘은 강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아프리카 제국은 반식민지주의적이고 급진적인 팬아프리카니즘이 강한 ‘카사블랑카 그룹’과 그것에 대립하는 ‘브라자빌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이 두 그룹의 구체적인 쟁점(爭點)은 콩고 동란(動亂)을 둘러싸고 반서구적(反西歐的)인 세력과 친서구적(親西歐的)인 세력 중 어느쪽을 지지하는가, 또 알제리 전쟁에서 FLN(민족해방전선)과 드골의 알제리정책 중 어느 것을 지지하느냐 하는 두 가지 문제였다. 따라서 1962년 7월 알제리가 독립하고 1963년 초 콩고 동란이 일단 해결되었기 때문에 1963년 5월 아디스아바바에서 모든 독립국이 수뇌회의를 열어 ‘아프리카 통일기구헌장’이 조인되고, 아프리카 국가간의 정치적 그룹이나 블록은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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