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보다 더 문화가 발달했던 무우대륙과 아틀란티스의
침몰현장을 답사한다!
태평양에 침몰한 환상의 대제국과
아틀란티스
제임스 처치워드/ 지방훈 역/ 도서출판 부름 (1983)
머 리 말
이 책에 쓰여 있는 사건들은 모두 두 종류의 고대 비문판(타블레트)에 근거하고 있다. 그 하나는 나 자신이 몇 십 년 전에 인도에서 발견한 나아칼의 점토판이며, 또 하나는 월리엄 니이벤씨가 멕시코에서 발견한 2천 5백여 점의 석판이다.
이 두 종류의 비문판은 모두가 무우 대륙의 성전 <거룩한 영감의 책>을 바탕으로 하여 기록된 것이다.
나아칼의 점토판은 고대 나가인의 표상(表象)과 문자에 의해서 엮어져 있으며, 전설에 따르면 이것은 <어머니의 나라>무우에서 쓰여져 버마를 거쳐 인도로 가져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1만 5천년 전의 일이다.
멕시코의 석판이 어디에서 기록되어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북방의 고대 위글계(系)의 표상과 문자가 쓰여 지고 있다. 어쨌든 그런 것들이 무우 대륙에서 쓰여 지고 있었던 알파벳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멕시코 석판의 연대도 아주 오랜 옛날인 약 1만 2천년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는데<어머니의 나라> 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들 석판에 의해서 내가 발견한 나아칼의 비문 가운데 특히 천지창조에 관한 기술에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충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석판 가운데 천여 점이 천지창조 때의 <우주의 사대 원동력>의 발생과 그 활동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내가 동양에서 볼 수 없었던 나아칼의 점토판은 <잃어버린 고리> (밋싱 정)처럼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자기 자신의 체험에 의해서 이들 비문판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을 보증하고 증명해 보고자 했다. 나는 그것을 위해 약 50여 년의 귀한 세월을 소비하여 세계 각지를 싸돌아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어떤 중대한 사실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시기에 이 지구상에 아주 크나큰 문명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며, 그 문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 문명을 훨씬 능가하는 고도의 문명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위대한 고대 문명이라 하여 경탄해 마지않는 인도, 바빌로니아, 페르샤, 이집트, 유카탄(마야 문명의 중심지) 등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문명의 흔적은 사실 그 대 문명의 타다 남은 잔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수반하여 이해되었던 것은 인류 탄생의 땅, 인류 최초의 문명이 일어났던 발상지는 나일의 강변도, 유우프라테스의 강 유역도, 미국도, 오리엔트의 어떤 고장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책을 씀에 있어서 대영박물관, 호놀룰루의 비숍박물관, 아메리칸 위클리지(誌), 로스엔젤리스의 E.A.솔즈베리 대위, 켈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새뮤얼 하버트씨, 택사스주 오스틴의 윌리암 니이벤씨, 등의 협조에 뜨거운 감사를 보내는 바이다.
또 인도 및 티베트의 몇 군데 승원(僧院)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그 쪽의 희망에 따라 사원의 이름, 지명 등은 일체 기록하지 않기로 했다.
- 제임스 처치워드 記 -
차 례
1. 잃어버린 에덴의 동산]
지상 최초의 대문명(大文明)/ 고승원(古僧院)에 있는 수수께끼의 점토판/ 나아칼 비문의 해독/ 멕시코 석판의 표상
2. 빛나는 태양의 제국
아름다운 무우의 도시/ 무우왕실의 문장/ 세계로 뻗어가는 식민선(線)
3. 무우대륙의 대함몰
대륙 밑에 있는 가스 체임버/ 무우대륙 최후의 날/ 각지에 남아 있는 비극의 전설
4. 태평양에 잠든 무우의 유적
원시 식인(食人)으로의 환원/ 흰 폴리네시안의 수수께끼/ 거인상이 잠자는 이이스터 섬/ 태평양에 산재하는 무우의 유적/ 전설과 신화의 섬들
5. 아틀란티스 대륙과 지중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피라밋의 동서남북/ 파피러스의 <죽은 자의 책>/ 아틀란티스의 제국군/ 애처로운 그리이스 문자/ 무우대륙으로부터 파생된 언어
6. 북아메리카의 고대 유적
살아 있던 공룡/ 하바스파이 협곡의 암벽 그림/ 즈니족의 홍수 전설/ 사라져간 수수께끼의 고대도시
7. 중앙아메리카의 매몰된 도시
고대 도시의 발굴/ 작은 중국인의 수수께끼/ 무우. 어머니의 나라여!/ 밀림속의 고대 마야 문명/ 흰 마야인의 전설
8. 동양의 신비한 나라들
하늘차와 불을 토하는 화염기/ 나가제국의 향방/ 알려지지 않는 위글 대제국/ 시베리아의 수골군(獸骨群)/ 나아칼 도서관의 점토판
9. 무우대륙 최후의 날
파괴되어 버린 대륙/ 영광의 잔영을 찾아서
10. 동방으로 뻗어나간 식민선
마야로 불리 우는 이주자들/ 불가사의한 선주민족
11. 유사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
케투얼족의 신대륙 발견/ 태양이 물 속으로 빠졌다/ 지구에 산이 없었던 무렵
12. 멕시코 석판의 신비
남자와 여자는 왜 나뉘었는가?/ 인간의 시조<흰 남녀>/ <AUM>이란 무엇인가?/ 고대 공산 공영사회/ 거룩한 멕시코 버드(새)
13. 아마존해의 카라 제국
2만 5천년 전의 옛지도/ 쿠스코 골짜기의 새벽/ 환상의 챙카제국/ 마노아의 황금도시/ 아름다운 내해 아마존/ 식민근거지 이이스터 섬/ 큰 바다를 건너간 검은 식민단
14. 아틀란티스의 붕괴
빛나는 오리하르콘의 나라/ 새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 대서양의 해저산맥/ 축복받은 섬들
15. 서유럽의 원초를 더듬어 본다.
들소는 어디에서 왔는가?/ 스칸디나비아로의 도정/ 문명사회에 끼인 원시
16. 에게해의 선사민족
함몰해버린 고대 아테네/ 수도의 언덕이 말해주는 것/ 바알벡 신전의 경이
17. 나일강변의 여명
동서 식민단의 합류/ 환상의 식민지 마이오우/ 델타 모래밭의 개척자/ 오실리스와 이시스/ 최고의 신관 호루스/ 고대 이집트의 오케스트라
18. 살아있는 무우의 후예
황금의 얼굴이 말하는 비극/ 수수께끼 민족인 일본의 조상/ 아름다운 모국어 신하리이즈/ 땅의 맨 끝에 있는 유적/ 문명에로 귀환한 마오리족
19. 사막에 묻힌 위글 대제국
유사 이전의 대홍수/ 물이 풍부한 고비평야/ 나아칼 라이브러리/ 동서로 넓어진 판도/역자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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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도서에서 “위글 대제국”과 관련된 내용을 아래와 같이 발췌해 봅니다.
8. 동양의 신비한 나라들
알려지지 않는 위글 대제국
나는 기묘한 브론즈상(청동상)을 잘 알고 있다. 작지만 아주 정교한 것이다. 눈을 감고 있는 여인상의 왼쪽 어깨에 인간의 머리를 한 새가 앉아 있다. 이것은 여인상 즉 무우 대륙이 인면의 새 즉 창조주로부터 생명을 받으려 하고 있는 그림이다. 혹은 인간이 영혼을 부음 받으려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좋다.
이 브론즈상의 제작 연대는 아주 오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게 하면 이만한 재료, 기술을 합하여 이것을 만들 수 있는 고대문화는 자연히 한정된다. 무우 제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거의 전부 바다 밑으로 잠겨버려 현재까지 남아 있을 가능성은 아주적다. 그렇다면 고대의 위글 식민제국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19세기, 중국에서는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의화단 사건 등으로 소란이 잇달았다. 그때마다 오랜 궁전이나 사원이 폭도들에 의해서 황폐화 되고 귀중한 문화재가 약탈되어져 갔다. 의화단 사건 때 상하이(上海)에 정박하고 있던 미국 함대의 한 장교가 쿠울리이(苦力)에게서 한 개의 브론즈상을 강매 당했다.
그는 토산품이란 생각으로 그것을 가볍게 사들였다. 귀국 때 미국으로 가지고 돌아왔는데 천정속의 다락에 내 팽개쳐 오랫동안 뒤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가치가 재인식 되어 소중하게 금고 속에 보존되어 있다. 그것이 예의 브론즈상이다.
8세기 경부터 몽고 고원에 터어키계 유목민족이 국기를 세웠다. 이 나라는 백년쯤 계속되었지만 키르기스인의 공격을 받아 괴멸하여 서쪽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간슈 까오장(高昌) 등지에 왕국을 세우고 이란계의 선주민족과 혼혈하여 톨기스탄이 되었다.----이것이 보통 전해지는 위글의 역사이다.
그러나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위글, 예의 브론즈상이 만들어졌다고 하는 그 나라는 그것과 다른 위글인 것이다. 먼 옛날 이 지상에서 모습을 감추어버린 대위글 제국인 것이다.
무우 제국의 열일곱 개 식민지 가운데 위글 제국은 최대의 것이었다. 동은 태평양을 내다보고 서로는 모스크바 근방까지 뻗쳤으며 다시금 식민지는 점점 유럽 중앙부에 위치하여 대서양까지 달하고 있다. 북쪽은 시베리아로부터 북빙양에 미치고 남으로는 코오치시나, 버어마, 인도 페르샤의 일부와 접하고 있었다. 확실히 무우 본국과도 맞먹을 정도의 광대한 영토이다.
이 대제국에 관하여 안 것은 1896년 내가 티베트에 체재 중의 일이다. 어느 탐험가가 외몽고 카라코오타(몽고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서 유적 발굴을 했다는 것이다. 그 전부터 나는 티베트의 고사원에 있는 옛 기록이나 고승들의 이야기로부터 위글 제국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이 카라코오타는 몽고를 둘로 나누는 텐샨(天山)산맥의 북쪽, 바이칼호 남쪽의 오르혼강 상류 유역의 분지에 있다. 그것은 일찍이 대위글 제국의 수도가 놓여있던 위치와 부합하고 있다.
탐험대는 지하 15m까지 파 내려가서 귀중한 유물을 발굴할 수가 있었는데 자금이 모자라서 중단해야만 했었다. 그 말을 들은 러시아의 고고학자 P.K.코즈러프 교수가 발굴 작업을 물려받아 상당한 성과를 올렸는데 몽고정부가 발굴물의 국외 반출을 금지시켰으므로 사진을 발표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여기에 몽고제국의 수도가 자리 잡기 훨씬 이전에 위글 제국의 수도가 있었다는 것은 그 발굴물로 보아도 명백하게 되었다.
동양 제국에 전해지고 있는 전설로써 당시 중앙아시아의 지형을 상상해보자. “중앙아시아의 전역에 걸쳐 기름진 평야가 있고 호수 하천이 많아 큰 도시나 작은 도시들이 여기저기 있었고 으리으리한 궁전이나 신전, 의사당이나 관청, 주택 등이 늘어져 있었다. 도시나 마을들은 훌륭한 도로로 이어져 있었다.”
히말라야 산맥도 티베트 고원도 없었다. 즉 위글 제국이 번창하고 잇던 것은 지구상에 조산 활동이 일어나기 전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고비사막의 지하로부터 고대의 번영을 상징하는 유물이 발굴되는데 그렇더라도 이 상전벽해의 변모는 어떤 일일까! 지각 변동으로 인한 대홍수가 모든 것을 씻어가고 불모의 모래 바다로 바꾸어버린 것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 이 대제국이 존재했던 것은 도대체 언제쯤의 일이었던가. 나는 티베트의 사원에서 추정의 실마리가 되는 점토판을 발견했다. 그것에 따르면 『약 7만 년 전, 나아칼이 어머니의 나라의 “신성한 책”“거룩한 영감의 서”의 사본을 위글의 수도로 가져왔다』고 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무우 제국의 이주자들은 황해 연안을 우선 발판으로 삼고 점차로 내륙으로 진출하여 물이 풍부한 기름진 땅<고비의 아름다운 토지>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금 서로 진출하여 카스피해로부터 유럽 중앙부를 거쳐 멀리 대서양으로까지 그 세력을 뻗쳤던 것 같다. 현재 발칸 반도, 프랑스,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 아일랜드에서 까지도 이 고대 제국의 것들이라고 생각되는 유물이 발견되는 것은 아마 그러한 지점에 작은 나라들이나 식민지를 수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이 무우 제국의 식민제국의 통치자는 임명되어 본국으로부터 교체되어 와 있었던 것 같다.
위글인은 밝은 머리 색깔을 하고 있고 눈은 파란 색이었다.
이것은 기원 전 5백 년 경 중국의 기록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또 “위글인은 흰 피부를 하고 있고 북방에 살고 있는 자들은 밝은 머리 색깔에 눈은 파랗고 남방에 살고 있는 자들은 짙은 머리색에 눈은 검다.”고 기록한 문헌도 있다. 어쨌든 중앙아시아에 광대한 판도를 자랑하던 고대 위글의 민족은 그 웅장한 건축물, 예술품 등과 더불어 문자 그대로 이 지상으로부터 씻겨 흘러가 버렸던 것이다.
시베리아의 수골군(獸骨群)
“위글의 수도는 그 주민과 함께 홍수에 의해 멸망했다. 제국의 동부는 이 때 남김없이 괴멸했다” 티베트의 고사원에서 본 이 옛기록은 지리학적으로 증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1880년대에 어느 탐험대에 가담하여 바이칼호의 남쪽으로부터 레나강의 하구, 라시아의 북방향 연안을 탐사한 일이 있었다. 그 때의 경험은 내가 종래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충분히 보충해 주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혹은 1만년 이상이나 전에, 지각변동으로 말미암은 대홍수(성경 속의 노라 홍수?)가 아시아 대륙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지표를 쓸어갔다.
그 범위를 동경 백도 선으로부터 동쪽, 즉 바이칼호가 있는 동쪽을 레나강 유역을 따라 북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이것은 빙하와는 다른 것으로 동시베리아에 이 홍수가 휩쓸어 갔다고 생각되는 지역에는 빙하의 흔적을 볼 수 없었다. 레나강의 하구 부근에 하코프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 섬은 대부분 맘모스나 그 밖에 태고적 야수의 뼈, 어금니의 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이다.
이것들은 멀리 몽고 평야나 시베리아로부터 홍수에 의해 밀려 내려와서 여기에 모아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빙하에 의한 것이 아니란 것은 북아메리카 동부의 마찬가지 짐승의 뼈들이 얼음덩이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조각조각 부숴져 있는데 비해 이 섬의 것은 비교적 완전한 모양으로 남겨져 있는 점으로도 명백하다.
이리하여 그토록 영화를 뽐내던 위글 제국도 대홍수로 말미암아 그 동반부는 거의 괴멸 되었다. 그 후에는 돌과 모래뿐인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도 없는 황폐한 토지로 변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홍수를 면한 서방으로 도망쳐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 뒤를 추격하듯이 제3의 재앙이 닥쳐와서 제국의 숨통을 끊어 버렸다.
조산 활동이 홍수가 있는지 얼마나 뒤에 일어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대지는 무섭게 흔들리며 쌓여 올라왔고 거대한 금이 지각을 이리저리 갈라놓았다. 천지개벽의 형태였다. 밑창으로부터 고열에 흙탕물처럼 녹은 마그마(암장, 巖漿)가 분출하여 그것이 용암이 되어 흐르는 것에는 모든 것이 불태워 버렸다. 이윽고 용암은 괴물과 같이 괴이한 형태로 굳어져 겹겹이 쌓이고 쌓여 불모의 암산이 되었다.
이 조산 활동으로 생명이 있는 것은 사람이고 짐승이고 식물이고 모조리 괴멸했다. 우리가 그 위에서 살고 있는 대지가 이와 같은 대변동을 만날 때, 그것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컫는 히말라야 산맥, 해발 8천m에서 9천m에 이르는 높은 산들이 꼬리를 물고 잇달아서 생겨난 것이 이때였던 것이다.
고비 평야의 주변에도 산들이나 고지가 생겼다. 이전에 풍요한 고비평야를 적셔주고 있던 t수맥(水脈)도 크게 변했다. 현재 고비 사막을 여행하는 케러반이 3m나 4m뜸 모래밭을 파 내려가면 물을 얻을 수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전에 위글 제국을 가로세로 누비며 흐르고 있던 하천이 지표로부터 그 자취를 감추고 모래로 뒤덮인 채로 지금도 수맥이 끊기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시련을 거치고서도 그래도 살아남은 끈질긴 한 무리의 인간들이 있었다. 그들은 높은 산과 산 사이에 끼인 골짜기나 고지 위 등에 남겨진 채, 서로 간에 연락도 두절된 채로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처했다. 그 후 몇천 년 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그들은 불모의 산지에서 계속 살아갔다. 그곳에는 일찍이 영화도, 높은 문화의 흔적도 없이 들짐승들을 사냥하며 풀뿌리를 캐먹는 산민(山民)의 모습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그들도 중앙아시아의 산지로부터 이동을 시작했다.
“처음 카오카시아인은 중앙아시아의 산 속으로부터 소그룹으로 찾아 왔었다.(맥스 뮐러)”
“위글인은 산이 생겨났기 때문에 전에 살던 곳에서 살 수 없게 되어, 카스피해의 북쪽, 동쪽 및 서쪽으로 이주 했는데, 이것은 그들에 있어서의 두 번째의 이주였다.(인도 마누 법전)” 인도로 들어간 그룹은 간디스강 유역을 무대로 하여 이윽고 전 인도로 펴져 갔으며 나가인으로 되돌아간다. 유럽 방면으로 향했던 자는 위글 제국이 번창했던 무렵에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유럽 각지에 정주 했다.
전자는 인도, 현재의 국민을 이훈 힌두 아리아 이며, 후자는 슬라브, 튜우톤, 캘트, 아일리쉬, 플레톤, 바스크 등 유럽 제 민족의 모태가 되었다. 페르샤 제국을 건설한 이란인도 아리아계이다.
이제는 알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위글 대제국의 역사는 그대로 아리아인의 역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 사막에 묻힌 위글 대제국
유사 이전의 대홍수
1896년의 일이다. 고비사막의 중앙부로부터 바이칼호로 흘러 들어가는 오르혼강 유역, 항가이 산맥의 기슭 부분에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강이라 해도 항상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회색의 점토성 먼지를 뒤집어쓴 건조한 초원이 끝없이 뻗쳐 있을 뿐, 외로이 서있는 천막도, 그곳으로 드나드는 개미처럼 작은 사람들의 그림자도 흙먼지가 묻어서 사막의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보였다.
몇 개월인가 지나고 이윽고 천막도, 사람 그림자도 사막으로부터 사라지고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의 고고학자 P.K.코즈러프 교수가 칼라코오타 유적 발굴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로부터 얼마 뒤의 일이다. 어떤 고고학자가 티베트에서 얻은 정보를 근거로 탐험대를 조직하여 고비사막 중앙부의 유적의 발굴에 임했다. 지하 15.6m쯤 파 내려가자 자갈, 조약돌, 모래층이 나왔고, 그 밑에는 아주 오랜 문명의 유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금이 동이나 일단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이 말을 들은 코즈러프 교수는 재빨리 발굴단을 조직하여 고비사막으로 향했다. 교수는 상당히 귀중한 학술적인 발굴을 할 수가 있었는데 몽고정부에 의해서 발굴물의 국외 반출은 금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발굴물은 사진으로 찍혀서 그 몇 가지는 이미 앞에서 소개되고 있다.
바이칼호 남방으로부터 레나강 하구에 이르는 지질학적 조사를 목적으로 한 탐험대에 필자가 가담했던 것은 1880년대의 일이다. 탐사를 계속해 나가자 의외의 사실이 밝혀져 갔다. 아시아 대륙의 이 부분에서는 빙하의 흔적을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수천 년 전 매우 규모가 큰 홍수가 이 지역을 휩쓸었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동경 백도 선으로부터 동쪽, 즉 바이칼호가 잇는 부분을 경계로 하여 시베리아의 동부 전역에 걸쳐 있었던 것이다. 레나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남에서 북으로, 무서운 대홍수가 씻겨갔다는 사실이 분명했었다. 레나강 어구에는 라코프 섬이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오랜 짐승들 뼈의 퇴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섬이다. 그 짐승의 뼈들은 먼 옛날에 몽고나 시베리아의 평원 , 숲으로부터 흘러내려 온 것이다. 이것이 빙하에 의한 것이 아니란 것은 그 짐승의 뼈들이 심하게 부셔져 있지 않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북아메리카 동부의 빙식(氷蝕)작용이 있었던 지역에서는 모든 것이 가루처럼 분쇄되어 그와 같은 섬이 생겨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필자는 티베트의 승원에 비장되어 있던 나아칼의 비문판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아칼은 7만 년 전, 어머니 나라의 “거룩한 영감의 책”의 사본을 위글의 수도로 가져왔었다』
이리하여 이전에 아시아 대륙에서 패권을 잡고 있던 “알려지지 않는 대제국”의 모습이 어슴푸레하게 밝은 저편으로부터 떠올라 왔던 것이다. 위글--그것은 8세기 경 몽고르 고원에서 만들어진 저 유목민족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몇만 년 전인 옛날에 중앙아시아 전역으로부터 유럽에 걸쳐 광대한 판도를 자랑하던 또 하나의 위글인 것이다.
물이 풍부한 고비평야
고대 위글 제국은 태양의 제국 무우의 식민지중, 최대의 식민제국이었다. 무우 제국을 제외하고 이만큼 큰 제국은 지구의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다.
위글 제국은 동을 태평양으로 한정하고, 서는 현재 모스크바 부근까지 뻗쳤으며 그 밖의 대서양 연안에 이르기 까지 유럽 중앙부의 각지에 띄엄띄엄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북쪽은 아마 북극해, 그리고 남쪽은 코오티, 버어마, 인도, 페르샤의 일부 등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위글의 역사는 아아리아 민족의 역사하고 해도 좋다. 아아리아 인종이라고 불리운 자는 모두 위글족의 자손인 것이다. 처음 위글 제국은 중앙 유럽의 중앙부에 차츰차츰 식민지를 만들었다. 대홍수와 산의 융기가 있고, 지상의 생물은 거의가 소멸했다. 그때, 가까스로 살아남은 위글족의 후예는 다시금 유럽에 뿌리를 내렸다.
이 최초의 식민이 언제쯤 실시되었는가. 그것은 위글 제국의, 나아가서는 무우 대륙의 기원이 분명하지 않는 한,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그곳에는 무한하다고 한 시간의 흐름이 있다. 제2기의 유럽 식민은 홍적세 이후라는 셈이 된다. 슬라브, 튜우튼, 케르트, 아이뤼쉬, 브리톤, 바스크 등의 제민족은 이 홍적세에 유럽대륙에 식민한 위글인의 자손들인 것이다.
전설적인 역사에 따르면 위글족은 현재 황해 연안의 어딘가로부터 최초에 아시아로부터 발을 들여놓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내륙으로 나아갔다. 물이 풍부한 평야 (고비)를 목표로 최초의 이주가 이루어 졌다.』
그 후 그들은 중앙아시아로부터 카스피해연안으로, 다시 중앙 유럽으로부터 대서양 연안까지 진출해갔다.
우리가 모르는 아득한 옛날, 광대한 아시아 대륙에 큰 도로를 건설하고 장려한 대도시를 몇 개나 세운 위글족이란 어떤 민족이었을까? 기원전 5백 년 경 중국의 옛 기록들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위글인은 밝은 머리 색깔에 파란 눈을 하고 있었다.” “위글인의 백성은 우유빛 피부를 하고 있고 눈과 머리털 빛깔은 여러 가지 였다. 북쪽의 주민들 중에는 차란 눈과 밝은 머리털을 가진 자가 눈에 띠었고, 남부에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의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자랑하던 대문명도 무서운 대홍수에 휘말렸으며, 혹은 고비 사막의 모래 아래 묻혀 버렸던 것이다. 어느 승원의 옛기록은 말한다. “위글의 수도는 그 주민들 모두와 함께 홍수에 의해 멸망했다. 제국의 동부는 이 때 남김없이 괴멸했다”
카라코오타 유적의 상층에는 자갈이나 조약돌, 모래가 잔뜩 쌓여 있었다. 이것은 온세계의 지질학자들에 의해 인정된 바와 같이 홍수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홀수는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즉 최후의 지각 변동에 따라 일어난 대홍수의 하나 였음에 틀림없다.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이 대홍수가 일어났던 시기는 북반부의 빙하기와 때를 같이 한다고 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시베리아의 라코포 섬의 수골군(獸骨群)에는 알음덩어리에 의해 파괴된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또 옛기록도 위글 제국의 동반부가 홍수에 의해서 괴멸할 때, 서부 및 남서부는 무사 했었다고 전하고 있다.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기온의 저하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빙하현상에서 이와 같은 일은 도저히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중앙아시아를 종휭으로 가로지른 산맥은 특히 위글 제국 중심주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지역에 많이 모여 있다. 대홍수가 있는 후, 얼마쯤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 산이 융기 했던가. 그것을 말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산이 솟아 올라왔을 때 대지는 문자 그대로 명동(鳴動)하여 지진에 의해서 부서지고 암석은 땅 밑으로부터 튀어나와 분화구에서 흘러나온 용암의 흐름은 지표의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렸을 것이다.
대홍수 후에 다시 몰아닥친 이 대재난을 피해 나올 수 있었던 자가 도대체 몇 사람이나 있었던 것일까. 그 극소수 생존자들은 융기한 산들이 가로막혀 제각기 고립된 생활을 보내게 된다. 이윽고 그 인구가 증가하여 산중의 생활에 견딜 수가 없어 평야지대로 이동을 개시한다. 그것이 인도 아아리라인이며, 코카사스인이며, 페르샤나 유럽 제민족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역사는 영원히 그 그림자를 되찾을 수가 없었다. 그 옛날의 옥토에는 종휭으로 산맥이 솟아 올라와 수맥을 끊고 또 그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암반은 깨지고 지표로부터 물을 빨아들여 땅밑의 강이 되었다. 물은 거의 말라붙어 지표면은 건조해지고 현재와 같은 황량한 사막으로 변했다. 그러나 현재도 그곳의 지리에 밝은 카라반들은 지표를 수m 파내어 물을 얻기도 했다. 이것이야 말로 일찍이 펄펄 넘쳐흐르는 물을 저장하여 위글의 옥토를 적셔 주고 있던 강이나 운하의 남은 흔적인 것이다.
인도의 고전 “마누서(書)”에는 이런 기록을 볼 수가 있다. 『위글은 카스피해의 북쪽연안 및 동쪽 연안에 식민지를 만들었다.』이것은 아마 홍적세의 시대에 실시된 위글 제2의 유럽 식민으로서, 이 식민에 관해서는 맥스 뮐러도 언급하고 있다. 이른바 동유럽의 초기 식민이다. 『최초의 코카사스인은 소집단으로 중앙아시아의 산지로부터 나타났다.』
맥스 뮐러는 다시금 그들이 코카사스 평야에 나타난 것은 홍적세에 접어든 다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산이 융기하고 난 후의 일인 것이다. 세계의 다른 고장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산의 융기는 과거 방대한 시간의 퇴적에 한계를 지어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현재도 중앙아시아의 제민족들 중에는 산이 융기한 전과 후를 자신들의 민족 역사의 분수령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많다.
나아칼 라이브러리(도서관)
티베트--그것은 현재에도 선사시대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숨겨져 있는 보고이다. 동쪽은 중국, 서쪽으로는 케시미르와 톨키스탄에 접하고, 북쪽은 몽고, 남에는 인도를 바라보는 이 산악국은 일찍이 위글 대제국의 일부였었다. 물론 그 무렵은 산 하나 없는 비옥한 평야였는데 이제는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대 산악지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동거로 길게 뻗은 티베트의 큰 산덩어리. 그 남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이 있고 세계의 최고봉 에베레스트산이 만년설을 이루고 높이 솟아있다.
이 산악국 티베트의 가장 인적이 드문 신간지대, 눈이 아찔해지는 단애의 위나 절벽아래 매달려 있는 것처럼 승원이 붙어있다. 바위를 뚫고 돌로 쌓아 올린 그 승원들은 이른바 라마승(僧)들의 수업도장으로서 라마사(寺)라고 불리우고 있다.
외계와 단절된 이러한 승원의 계율은 엄격한 것으로 일반인의 상식을 초월할 정도이며,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부근에 살고 있는 극소수의 주민들뿐이다. 불교의 한 종파인 라마교를 신봉하는 이들 고승원에서 맑은 수도를 하고 있는 고승이나 노승들 중에는 스스로 나아칼의 후예라고 칭하는 자가 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약 3천 년 전에 바라몬 교도들에 의해서 인도로 쫓겨난 나가계 학자들의 후예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그 절에는 인류 최초의 문명, 인류 최초의 종교, 인류 최초의 과학이 전해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티베트에 수백 개의 사원이 있는 중에서도, 그러한 사원은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 밖에 안 된다. 그 중에서도 필자가 알고 있는 곳은 3개이다.
파울 슐리먼의 말에 따르면 티베트의 라사에 있는 고사원에는 무우 대륙의 붕괴에 관한 고문서가 있다. 그 옛 기록은 오랜 비문판으로부터의 번역인데 파리어와 티베트의 혼합으로 쓰여져 있다. 그러나 원전인 비문판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것은 다른 많은 점토판과 함께 승원의 지하실에서 만지와 곰팡이가 찌인 채로 굴러다니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히말라야 산맥을 따라 동서로 흘러내려, 이윽고 칸더스강과 합하여 뱅갈만으로 쏟아지는 브라마프토라강, 그 상류 지대의 깊은 산속에 몇 개의 사원이나 승원이 있다. 그 승원의 하나로 완전한 나아칼 라이브러리(도서관)라는 것이, 즉 몇천 개의 나아칼 점토판의 콜택션이 비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 나아칼 라이브러리는 원래가 위글의 수도에 있었던 것인데 이들 점토판에 얽힌 전설인지, 역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다.
필자는 은사인 리시(고승)에게 이 점토판들에 관해 들려주고 싶은 게 없는가 하고 질문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이런 얘기를 해 주었다.『대홍수가 아시아 동부와 북동부를 엄습할 때, 위글의 수도는 파괴되고 주민 모두가 익사했다. 그리고 어머니 나라로부터 나아칼에 의하여 들여왔던 많은 점토판도 물 속으로 잠겨 버렸다. 그리고 나서 꽤 오랜 후의 일이다. 제국의 서쪽에서 홍수의 재난을 면한 나아칼이 수도의 폐허로 가서 진흙탕 속에서 점토판을 파내 서방의 사원으로 옮겼다. 그런데 얼마 후 산이 융기하고 그 대이변으로 서방의 사원들도 괴멸했다. 점토판은 다시 땅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기나긴 세월이 지난 후, 그 대재액 속에서도 살아남은 나아칼의 자손들이 사원의 유적을 찾아 다시 점토판을 파내어 지금의 사원에 안치했던 것이다.』
이 승원과 점토판의 이야기가 전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동양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꽤 잘 알려져 있어 지금까지 세 명의 영국인과 두 명의 러시아인이 이 승원을 방문 했다는 것이다.
얘기를 다 듣고 나서 필자는 고승에게 물었다. 『그럼, 그 점토판 라이브러리라고 하는 것은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는 유일한 것입니까?』
노승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였다.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지. 우리들 사이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네. 우리의 성도 아요티아가 적의 침략을 만났었지. 온 시내가 다 불탔을 때, 나아칼의 점토판은 비밀 토굴 창고 속에 숨겨져 있어 무사했었다는 얘길세.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많은 점토판은 지금도 고스란히 지금도 그 사원의 폐허 아래 손도 대지 않은 채로 잠자고 있을 텐데........ ,』
그 아요티아라는 성도의 유적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필자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다만 그것은 지금까지 북부 인도, 티베트, 캐시미르에 관해 구체적인 지명이나 고유명사를 피해 온 것과 관계가 있다고만 말해둔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동서로 넓어진 판도
중국이라고 하면 동양의 노대국 등으로 형용되는데, 그 문명은 그다지 오랜 것은 아니다. 알고 있는 역사로는 겨우 5천 년밖에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문명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 부조(父祖)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중국인은 일반적으로 몽고계라고 생각하기가 일쑤인데 몽고인의 피는 섞여있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백색계의 아아리인이야말로 그들의 조상이었다. 위글 제국 시대, 그 남방에 인접한 황색인종 몽고와는 피가 섞이게 되어 그들 혼혈아인 자손이 최초의 차이나 제국을 이룩했던 것이다.
옛 기록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위글인은 황색의 미개인중 최량의 자를 선택해 결혼 했다.』이것은 분명히 원전으로부터의 오역이다. 왜냐하면 그 무렵에 이 지상에는 미개인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노랗고 못난 종족>이었음에 틀림없다. 사실 전설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황색의 몽고족은 위글족과 비교하면 꽤 뒤떨어져 있었다. 그 문명도 위글족 보다 낮은 것이었다.』
당연히 혼혈아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에게 수준이 높은 교육을 시키고자 했다. 위글 제국의 교육 시설은 그런 혼혈아들에게는 매우 인기가 높았다. 위글의 대문명에 혜택을 받는 그들의 자손이 얼마 후 차이나 제국을 건설한다. 따라서 중국의 문명에는 위글 대제국 문명의 잔영이 농도 짙게 남아 있는 것이다. 특히 도교의 묘 등에서 그런 사실을 얘기해 주는 옛 문서류가 많이 눈에 띠는데 다음과 같은 얘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차이나인은 원래부터 이 땅에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먼 나라로부터 해가 떠오르는 쪽을 향해 찾아왔던 것이다』
몽고 지방에서 보아 중국은 해뜨는 쪽, 동방에 해당한다. 필자는 중국의 선사를 말해주는 전설, 전승들을 가능한 한 다 모아 보여고 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것은 많지 않았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이라고 하는『시경(詩經)』만 하더라도 기원전 7백 년 전후의 것이다.
E.H.파아커는 그의 저서 “차이나”속에서 기원전 2850년부터 233년에 이르는 왕조와 군주의 수를 들고 있다. 그러나 그 5왕조와 90명의 군주들 중에 분명히 실재했다고 생각되는 것은 기원전 827년부터 255년에 이르는 25명뿐이고 그 나머지는 불확실한 신화, 전설에서 유추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원 전 2백 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중국의 역사에 광해 파아커는 아주 면밀하게 그 발자취를 더듬어, 많은 몽고계의 부족이나 국가의 흥망을 그리고 있다. 파아커는 그 확실한 역사의 근거를 모두 문자에 의해 기록된 기록에만 두고 있는 듯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일본에 관해서는 매우 그릇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다른 기술에 있어서도 커다란 의문을 남기게 되며 또 고비사막이나 그 밖에 아시아의 선사를 말해주는 유적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 유감이다.
위글 대제국의 소멸 후, 아마도 7천 년이나 8천 년이 지나고 나서 많은 소국가가 동아시아에 나타났다. 이들 제국가들 전부가 몽고계였다. 그리고 13세기에 이르러 징기스칸의 출현에 의해서 몽고의 제국가, 제부족은 통일되어 대몽고제국이 건설되었다. 이 제국 5대째의 황제 쿠빌라이는 젊어서 중국으로 가 그 사정을 알아냈고 후에는 남종(南宗)을 멸하여 중국 전토를 그 지배하에 두어 원(元)왕조라 일컬어 몽고족의 대정복 국가를 완성한다. 그러나 일본 원정은 마침내 실패했다. 이 쿠빌라이의 재위 연대는 1260년대부터 1290년대에 걸쳐 있다.
중국의 최대 철학자인 공자는 중국의 역사가 분명하게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하고부터 약 3백 년, 기원전 551년부터 기원 전 480년에 제세하고 있었다. 이 현인이 자국의 선사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까닭은 없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건설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는 기원 전 214년, 정치를 비판하는 학자들을 생매장하고 정책에 따르지 않는 책들은 다 불태워 버리는 만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 때 불타버린 유교 경전들 가운데는 공자, 맹자가 쓴 것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방대한 양에 달하는 이 금단의 서적들 속에는 중국의 선사와 관계가 있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남몰래 사원 깊숙이 비장되어 분서(焚書)의 화를 면한 것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그런 책들은 지금도 도교의 묘(廟) 등에 보존되어 있었을 터인데도 아마 문외 불출(門外不出)의 계율은 엄격하여 특히 외국인들의 눈에 띨 기회란 절대 없는 것 같다.
위글 제국 동쪽에는 이와 같이 위글인과 몽고인의 혼혈 민족에 의해서 중국이 이룩되었다. 그럼 서쪽은 어찌되어 있었을 것일까? 제국의 서쪽은 동쪽처럼 바다가 없었기 때문에 그 세력도 넉넉히 펼쳐져 나갔다. 위글의 식민단은 아시아의 중앙부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진출했다. 발칸반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가 있다. 또한 대서양 연안으로 나온 그들은 아틀란티스를 거쳐 아일랜드에 도달하여 이윽고 여기에서 발을 멈추었다.
북방은 북극해 연안, 남쪽은 인도로 나가 제국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불확실한 말을 하는 것은 산이 융기되기 전과 현재로서는 지형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으리라고 상상되어 정확한 판도는 파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도에도, 의문의 부분에는 줄을 쳐 표시해 놓았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동토(凍土) 지대의 밑으로부터 고대 위글의 유적 같은 것이 발견된 일이 있다. 유럽의 식민만 하더라도 선을 이루어 뻗어 나갔는지, 차츰차츰 뿔뿔이 흩어져 버린 식민지였는지,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고대 위글 제국과 아틀란티스 제국은 원래부터 그 영토의 넓음에 있어서는 모국 무우를 능가할 만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대제국도 태양의 제국 무우의 종주권 아래 있었던 것은 확실 하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위글 제국은 많은 소왕국, 또는 주(州)와 같은 것으로 성립되어 있어 제각각 자치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그 자치제를 통솔하는 대통령 같은 것이 있었고, 그 위에 무우제국의 황제가 있었다. 무우의 종주권을 제외하면, 어쩌면 오늘날 아메리카 합중국 체제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역 자 후 기>
제임스 처치워드의 <잃어버린 무우 대륙(The Lost Continent of Mu)> 이 뉴욕에서 출판된 것은 1931년 가을의 일이었다. 당시 학계에서는 이 책을 냉소로 대했지만 (미국의 고고학자 협의회 D프리드먼 박사와 같은 예외도 없지는 않았다) 일반의 반응은 놀라운 것이어서 곧 중판을 거듭했다.
이 책의 첫머리에도 쓰여져 있지만 제임스 처치워드는 영국 육군의 퇴역 대령인데 그는 청년 시절인 1868년에 군무로 인도에 체재해 있으면서 원주민들의 기아 구제사업 등에도 정열을 쏟았다. 그러는 중에 중부 인도의 고사원에서 아주 오래된 점토판의 비문을 발견하고 태평양의 잃어버린 초고대 대륙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것이 그의 인생의 운명을 바꿔 놓는 계기가 된다.
그는 12년 동안 신비의 동양 나라에서 살며 초고대 대륙 연구의 방침을 설정하고 군무에서 물러났던 것 같다. 그는 이후로 초고대 대륙인 무우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찾아서 세계를 편력하게 된다.
그의 잃어버린 대륙을 찾기 위한 편력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수년간 실무에 종사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실로 50년에 걸친 한 생애를 오로지 탐구의 외길에 바쳐 각종 광대한 자료와 사진들을 수집한 끝에 뉴욕에서 자리를 잡고 붓을 들었을 때는 이미 그의 나이가 70세를 훨씬 넘어섰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70평생의 피나는 외고집 희생의 결정을 네 권의 대작으로 묶어 남겼다.
이 책은 그의 첫 작품 (The Lost Continent of Mu)와 (The Children of Mu)를 편역한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현재의 문명을 최고의 것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언제나 최첨단에 서 있다는 감각 때문이다. 과연 그런 것일까? 문명의 정도는 반드시 시간의 흐름에 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인간은 그 시대의 지혜로 풀 수 없는 현상은 모두 수수께끼라고 말하고, 혹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납득시켜 왔다. 그러나 그 시대의 지혜로는 풀 수 없는 현상도 그 이전의 보다 높은 지혜에 있어서는 상식에 지나지 않았었는지도 모른다.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다. 당연한 말이다. 처치워드는 항상 하나의 문명의 시작은 그 문명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문명과 문명과의, 또는 역사와 역사와의 구획을 짓는 것은 여러 모양으로 이 지구상에 반복되어온 대이변이라고 말한다.
처치워드는 일련의 저서들을 통해 최후의 지각변동에 의해서 소멸해 간 인류 최초의 문명의 흔적을 파내려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최초”라고 하는 말은 편의상의 말이어서 하나의 거대한 구획을 의미하는 것뿐이라는 숨은 뜻을 은근히 느끼게 된다. 일종의 영원회귀의 사상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비단 처치워드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불교를 높이 평가하고 있던 니이체도 유럽인은 앞으로 인도인이 수천 년 전에 행했던 사색의 발자취를 쫓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허무 사상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미지의 것을 모두 “허무”나 “암흑”이라는 말로 접어 치우는 쪽이 허무적이라고 하겠다. 현재 우리가 유사 이전의 암흑, 허무라고 부르고 있는 시대에 현재보다도 더 농밀하고 충실한 “시간”이 있었다고 말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은 없다. 처치워드 말을 빌면 암흑의 베일은 조금씩 걷혀져 현대의 인간도 조금씩 일찍이 문명이 존재했던 위치에로 부상하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시대나, 어떤 사회, 어떤 분야에서나 선구자란 그러기 마련이지만 미치광이 소리를 들으면서 외고집 인생, 미답(未踏)의 길을 개척한 한 인간의 업적이 이제는 전세계 전인류의 인정을 받기에 이르는 것이다. 늦은 감은 없지 않으나 이 유사 이전의 인류 기원에 관한 귀중한 자료들을 펴내기로 한 도서출판“부름”의 용단에 감사해 마지않으며 이 책이 독자 여러분의 원초적인 종교 이해 및 인류의 기원 과 역사의 이해에 다소나마 도움이 된다면 더 할 수 없는 다행으로 여기겠다.
1983년 1월
역자 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