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영(徐有英·1801~74)의 금계필담(錦溪筆談)에 따르면
미모와 기예가 뛰어나 그 명성이 나라안에 자자했던 송도의 명기 황진이를
종실(宗室)의 벽계수가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풍류명사(風流名士)'가 아니면 어렵다기에
친구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의논한 바,
이달이 이르길 "황진이의 집을 지나 누(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면 황진이가 곁에 와 앉을 것이다.
그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 말을 타고 가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나 다리를 지나도록 돌아보지 말라"하고 일렀다 한다.
이에 벽계수가 이달의 말대로 말을 타고 뒤돌아 가던 중 황진이가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 워라 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라는 시조를 읊자,
이를 들은 벽계수가 다리목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다 말에서 떨어진 것을 보고 황진이는 웃으며 "명사가 아니라 풍류랑(風流郞)이다"라고 하며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벽계수는 매우 부끄럽고 이를 한스러워했다고 한다.
[2006 kbs2 드라마 황진이에서 황진이역의 하지원]
한편 구수훈(具樹勳, 영조 때 무신)의 <이순록(二旬錄)>에는 내용을 조금 달리 하고 있다.
-종실 벽계수는 평소 결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해왔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황진이가 사람을 시켜 그를 개성으로 유인해왔다.
어느 달이 뜬 저녁, 나귀를 탄 벽계수가 경치에 취해 있을 때 황진이가 나타나 “청산리 벽계수야...”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는 밝은 달빛 아래 나타난 고운 음성과 아름다운 자태에 놀라 나귀에서 떨어졌다고 전한다.
벽계수 이종숙은
건등산(建登山·260m)이 건너다 보이고 발 아래로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가며 그 너머 섬강의 반짝이는 아름다운 물빛이 한눈에 드는 원주시 문막면 동화2리 명봉산 국사봉 기슭에 잠들어 있다.
벽계수는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의 제 17남 영해군 당의 제2남 길안도정 義의 다섯째 아들인 벽계도정(碧溪都正) 이종숙(李終叔)이다.
이종숙의 묘는 당초 경기도 시흥군 동면 봉천리 삼성산에 위치해 있었으나 1985년 토지수용관계로 전주이씨 영해군파 종친회에서 현재 위치인 문막읍 동화리 산30번지로 이장했고 정부인 해평 윤씨와 합장돼 있다.
명봉산 정상에서 문막 건등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기슭에 마련된 유택은 언듯 보아 물길이 쏠리는 계곡 끝자락 인듯 싶어 의아해 지기도 하지만
풍수지리로 보면 용으로 결지된 혈로 정혈에 쓴 명당중에 명당이라고 한다.
기실 황진이에겐 당시 우뚝선 사상가였던 서경덕이 있었다
스스로 큰절을 올려 제자 삼기를 원했던 황진이와 서경덕의 이야기는 이?게 전한다.
<송도에는 꺾을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사옵니다.> 서경덕이 황진이를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첫째가 박연폭포요, 둘째가 선생님이십니다.> 서경덕이 미소를 지으며 셋째를 물었다.
<바로 저올시다.> 송도에 있는 것 중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세 가지 혹은 가장 뛰어난
세 가지. 송도삼절(松都三絶)은 그렇게 황진이의 입을 통해 만들어졌다.
황진이에 靑山裏 碧溪水야를 현대감각으로 풀이해보자면, ‘청산 속에 흐르는 푸른 시냇물아, 빨리 흘러간다고 자랑 마라. 한 번 넓은 바다에 다다르면 다시 청산으로 돌아오기 어려우니, 밝은 달이 산에 가득 차 있는, 이 좋은 밤에 나와 같이 쉬어감이 어떠냐?’ 란 뜻으로 볼 수 있다. 배경은 임금의 친족인 벽계수(碧溪水)가 자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황진이를 보면 유혹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늘 큰소리친다는 말을 듣고 황진이가 시험해보려고 개성구경을 청하였는데, 벽계수가 나귀를 타고 달밤에 송악산 만월대에 이르니 소복차림한 미인(황진이)이 벽계수를 쳐다보며 이 노래를 부르는지라 벽계수가 마음이 황홀경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나귀 등에서 내렸다하여, 이 노래를 ‘벽계수 낙마곡’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