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棍)과 곤(困)을 잘못 읽은 것은 무식한 소치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관속들을 통솔함)
시동(侍童)은 잘 어루만져 기르고 죄가 있더라도 가볍게 다스려야 하나,
이미 장성한 자는 아전과 같이 단속하라.
시동이란 통인(通引 : 수령 앞에서 잔심부름하는 이속)인데, 혹은 지인(知印)이라고도 한다. 이들의 농간질은, 위조문서에 도장을 훔쳐 찍고 과강(科講 : 과거 응시에 앞서 유생들이 치르는 예비고사)에서 답안지를 훔쳐내고 백일장(白日場 : 고을에서 유생의 학업을 권장하기 위하여 시(詩)ㆍ문(文) 짓기를 시험하던 일. 조선조 때 지방 고을에서 과거의 형식을 흉내 내어 시험문제를 내걸고 즉석에서 글을 짓게 하여, 우수한 사람에게는 장원(壯元)을 내려 표창하였다)에서 방권(房卷 : 방(房)은 시관, 권(卷)은 답안지를 뜻한다. 과거에 향시(鄕試)의 동고관(同考官 시관)을 방관(房官)이라 칭했는데, 동고관들은 각기 딴 방에서 시권을 채점했기 때문이다)을 바꾸는 것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수령의 동정을 살펴서 밖에 퍼뜨리고 근거 없이 떠도는 말을 교묘하게 꾸며서 참소하니, 어리다고 해서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린 시동의 죄는 매 때리는 정도에서 끝내는 것이 좋다. 하지만 요즈음 사람들은 곤장 치기를 좋아하니 크게 옳지 못하다.
통인 중에 큰 자는 지통통인(紙筒通引)이라 하는데, 절에서 매월 바치는 지물(紙物)을 반드시 퇴짜를 놓아 제 위엄을 세우려고 하니 그것을 단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산청현(山淸縣)의 수석 통인이 종이 다루는 승려에게 곤장을 쳐서 죽이고 살인사건에 관한 검시(檢屍) 및 판결을 적은 보고서에는 결곤(決棍 : 곤장을 침)을 오기하여 절곤(折困)으로 썼기 때문에 옥사가 오래도록 해결되지 못했는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그 조사 보고에서 “결(決)과 절(折)의 음을 통용하는 것은 상것의 관습이요, 곤(棍)과 곤(困)을 잘못 읽은 것은 무식한 소치이다.” 하였으므로, 옥사의 진상이 드디어 밝혀졌으니, 이것으로 보면 이들은 결코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 연암의 보고서인 「밀양의 의옥에 대해 순찰사에 답함」 전문을 다음에 놓는다.
밀양의 의옥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밀양부의 통인(通引) ‘윤양준’이 중 ‘돈수’를 치사한 사건에 대하여 초검 및 복검이 모두 매를 맞은 것으로 사망원인을 삼았는데, 죽은 자와 가까운 사람의 고발이 없는 이상, 이 옥사는 법리로 따져 보면 관에서 지레 검시했다는 게 옥사의 체통에 어긋난 일입니다.
다만 절의 중이 이방 아전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 두서없이 돈수의 일을 언급했다는 말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지난번 돈수가 통인청(通引廳)에서 형벌로부터 풀려날 때 절곤(折困)을 당하여 그로 인해 병사했으니 이런 견해가 있다는 것을 알아 두시오.”
그 말이 아주 모호하기는 하나 꺾일 절(折) 괴로울 곤(困)이란 두 글자는 극히 수상합니다. 더구나 그 사단이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관아의 아전과 하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병사했다’는 대목은 미처 자상히 살펴보지도 않고 먼저 ‘절곤’이란 말에만 마음이 동요했던 것입니다. 뒤미처 혐의를 받는 것을 피하려고 바로 가서 초검을 시행한 것인데, 급기야 본 사건을 규명해 보니 몇 대의 태형으로 위엄을 보인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인즉, ‘절곤’ 두 글자는 저절로 허망한 고발이 되고 말았습니다.
애당초 이 ‘절곤’이란 말만으로 검사하여 증명했던 것이나 끝내 그 말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매 맞은 자국 말고는 다른 상처나 병환의 증거도 찾을 수 없었고, 앞뒤 정황들이 번번이 실상에 들어맞지 않은 것으로 짐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조사하려고 해도 더는 잡히질 않는 상태에서 우왕좌왕 옥사가 이루어졌는데, 꼭 맺혀 풀리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대개 타박상을 입어 목숨을 잃었을 땐 반드시 흉기가 나타나기 마련이니, 그 흉기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내면 이 옥사가 당장에 해결되리라 봅니다. 하관(下官 연암 자신을 가리킴)의 얕은 소견으로는 ‘절곤’ 두 글자는 바로 ‘결곤(決棍)’의 오기인 듯합니다. 곤장이건 태장이건 볼기를 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그다지 물건 쓰인 곳의 경중을 따질 것은 못 됩니다. ‘결(決)’을 ‘절(折)’로 바꾸어 발음함은 상것들의 일반적인 폐단이요, ‘곤(棍)’을 ‘곤(困)’으로 잘못 기록한 것은 무식한 소치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보는 자의 선입견이 부러뜨림의 ‘절(折)’ 자에 놀라고, 곤욕을 보임의 ‘곤(困)’ 자에 더욱 현혹된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 명의 통인이 다 같이 했다고 나서는 바람에 주범과 종범을 분별하기 어렵게 되니, 마치 힘을 모아 함께 두들겨 패서 낭자하게 상처를 입힌 일이 있는 것처럼 되었으며, 뭇 중놈들이 일제히 병을 앓았다고 칭하였으며, 그 증언들이 하나같이 똑같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관아의 아전을 두려워하여 수군거린 끝에 입을 맞춘 것이므로 하나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전후의 검시관들이 감히 그 정상을 경솔히 논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데, 여러 해 지나고서도 사건을 결말 못 지은 것도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다만 옥사의 진상을 들어 판단한다면 이러합니다. 어떻게 15대의 태형으로 목숨까지 잃을 것이며, 그나마 두서너 곳의 상처도 급소가 아니질 않습니까? 대개 각 고을의 통인들이 종이 자르는 판자를 장척(長尺)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그놈들 두목이 항용 쓰는 볼기 치는 막대기인즉, 통인들이 이것으로써 벌을 시행하는데 더러는 속여서 ‘태(笞)’라고도 합니다. 중들이 이 장척을 잘못 보고서 혹시 ‘곤(棍)’으로 오해하였을 수도 있는데, 상식적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검관이 된 사람들은 마땅히 먼저 그 ‘절곤’이 무슨 말인가를 신문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결곤’의 오기였다면, 또한 마땅히 그것이 과연 곤장(棍杖)이었는지 태장(笞杖)이었는지를 자상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곤’이 아니고 ‘태’라 말한다면, 또한 마땅히 그 크기가 어떤 종류인가를 자상히 분별하여, 매 맞은 자국과 대조해 본다면 판자에 맞은 흔적인지 태를 맞은 흔적인지를 그 자리에서 저절로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 보면 과연 태형의 여부와 병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 진술을 참조하고 검증해 보면, ‘조갈증이 나서 물을 찾다가 계단에서 떨어져 돌에다 부딪쳤다’느니 ‘방을 심하게 달구어 땀을 내느라 이렇게 짓무르게 되었다’느니 하였는데, 열병으로 미친 증상이 생기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요, 달군 구들에 살이 데어 부풀어 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지금의 이 사망 원인으로 단지 매 맞은 것만을 장부에 기록한다면 옥사의 체통이 서지 못할 것이며, 원범을 유독 당직 통인에게만 뒤집어씌운다면 더욱 원통한 죄가 될 것이오니, 헤아려 주십시오.
주영숙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