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0-26 교의적 가르침 :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
▶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심으로써 당신 말씀을 듣는 자들의 생각을 높은 데로 끌어올리십니다. 루카 복음은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라는 두 길에 대한 가르침으로 구약의 교의적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루카는 여덟 가지 참행복을 네 가지로 함축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자들을 꾸짖으심은 자기 재물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자들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자기 죄 때문에 우는 이들은 의로움에 굶주리는 이들입니다. 울음은 필수이고 웃음은 지혜의 은택입니다. 주님께서는 환난 중에 기뻐하는 제자들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박해받음은 기쁨이요 즐거움이며 하늘의 보물을 받는 보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비슷한 고난을 겪어야 했던 예언자들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당함을 기뻐하는 사도들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고결한 갊이 모든 사람의 칭찬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본능이 그런 삶을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6,20-26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
눈을 들다
‘눈을 들다’라는 말이 성경 여러 곳에 나옵니다. 거룩하신 ‘말씀’께서는 이 표현으로 우리에게 생각을 높이 들어 올리라고 권면하십니다. 낮아지다 못해 위를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병들어 굽어 있는 우리 눈길을 위로 들어 올리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이사 40,26).
구원자께서도 참행복에 대해 말씀하실 때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이런저런 이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오리게네스 『요한 복음 주해』)
생명의 길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두 길이 있습니다. 이 두 길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39).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무엇이든 남이 그대에게 하지 말기를 바라는 일이면 그대도 남에게 하지 마십시오. 이 격언들이 가르치는 바는 이것입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8). 나아가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단식하여라”라고도 했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는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5,44-47). 이렇게 하면 원수를 만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꾸어 달라는 자에게 주고 되받으려 하지 마라”.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디다케』
네 가지 참행복 : 네 가지 기본 덕목
루카는 여덟 가지 복을 네 가지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네 가지 기본은 덕목 절제, 정의, 신중, 인내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탐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우는 사람은 거만하지 않고 온순하며 조용합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우리 모두에게 공동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자기 것을 내줍니다. 자기 것을 내주는 사람은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이웃을 해치려 함정을 파지도 않습니다. 이 모든 덕목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가진 사람에게서 여러 가지 덕이 나타나고, 어느 한 덕목에만 충실해도 성인다워집니다. 덕이 충만한 곳에 그에 따른 보상도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절제에는 순결한 마음과 정신이, 정의에는 자비가, 신중에는 평화가, 인내에는 온유함이 있습니다. (암브로시우스 『루카 복음 해설』)
부유하시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지신 예수님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가난은 가치중립적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예언자가 “거짓말쟁이보다는 빈곤한 이가 낫다”(잠언 19,22)고 했을 때 바로 그 빈곤한 사람일 것입니다.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 들어 주시는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죄에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악덕에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세상 우두머리한테 빼앗길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본디 부유한 분이시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지신 그분처럼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마태오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뽐내지 않고 그 몸으로 으스대지 않습니다. 이 행복이 으뜸 행복입니다. 마음이 가난할 때 모든 죄를 밀쳐 내고, 모든 양심을 거두고, 단순한 삶으로 만족하며, 모든 악을 비우게 됩니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잘 절제된 행실이지요. 온유하고 겸손해지지 않는다면 물질의 가난이 무슨 유익을 가져다주겠습니까? (암브로시우스 『루카 복음 해설』)
재물을 잘못 쓰는 자들은 불행하다
부유함에는 매력적인 즐거움이 많지만, 덕행을 훼방하는 요소가 더 많습니다. 덕을 베푸는데 물질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부자들의 자선보다 가난한 이들의 기부가 더욱 칭송할 만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하늘 말씀의 권위를 빌려 말하건대, 주님은 그냥 재물이 많은 사람들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불안하게 다가오는 궁핍의 위협에 사로잡히지 않고, 뜨거운 자비심으로 자기에게 있는 것을 나누는 가난뱅이가 훨씬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연으로부터 풍족하게 받은 사람은 부족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받은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고 공동선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을 사유물로 삼아 숨겨 두는 부자는 더욱 죄가 많은 것입니다. 따라서 책망받을 것은 부유함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태도입니다. (암브로시우스 『루카 복음 해설』)
회개에는 유익한 슬픔이 따른다
그대 눈물로 그대 자신을 정화하십시오. 슬퍼함으로써 그대를 씻으십시오. 그대가 그대를 위하여 울면 다른 이들이 그대 때문에 울지 않을 것입니다. 죄인인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울고 자기를 책망함으로써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의인들은 자기 되를 힐책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죄를 내려놓았습니다. 제 행실을 다스렸고, 제 허물 때문에 울었습니다. 저는 배고픔을 느끼기 시작했고, 의로움에 굶주립니다. 중환자는 배고픔을 모릅니다. 심한 통증이 배고픔을 몰아내거든요. 의로움에 굶주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리던 내가 이제 늙었는데 의인이 버림을 받음도, 그 자손이 빵을 구걸함도 보지 못하였다”(시편 37,25). 여기서 말하는 빵이 무엇입니까? 배고픈 사람은 틀림없이 힘을 더 키우려고 합니다. 덕을 키우는데 의로움을 지키는 것보다 더 효과 있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암브로시우스 『루카 복음 해설』)
울음은 필수 조건이고 웃음은 지혜의 보상이다
웃음을 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회개에는 유익한 슬픔이 따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눈물을 필수 조건으로, 웃음을 그에 따라오는 은혜와 덕택으로 제시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울음은 필수 조건이요 웃음은 지혜의 보상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웃음은 기쁨을 뜻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박해는 하늘의 보물을 보장한다
성령의 은사로 성숙한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은 인간이 맛볼 수 있는 어떤 쾌락보다 영광스럽고 기쁘고 즐거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미움을 사고 하느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받는 온갖 수치와 상처들을 견뎌 냈을 때, 은총으로 그를 찾아옵니다. 삶 전체의 중심을 부활과 미래의 축복에 둔 사람에게는 상처와 모욕과 십자가에 이르는 모든 고통이 즐거움이요 기운을 돋워 주는 음료요 하늘의 보물에 대한 보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12)고 하십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
덕행이 모든 사람의 찬사를 받지는 못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여기서 ‘불행’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형벌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본래 애통하여 소리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는 그분의 말씀은 그들의 운명을 애통해하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분 말씀을 자세히 들어 보십시오. 그분은 그냥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악의 충동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창세기 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