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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 주해

11,1-13 주님의 기도

작성자semo|작성시간26.06.18|조회수0 목록 댓글 0
11,1-13 주님의 기도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5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심으로써 제자들이 기도를 통해 당신과 하느님의 관계와 똑같은 들게 하십니다. 이는 특권이자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즉 그분의 이름과 임금으로서 다스리심을 드러내 주시기를 아버지께 기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러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도록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을 위해 은혜로이 응답하시리라는 믿음으로 우리 가운데 그 이름이 늘 거룩하게 보존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성도들만 할 수 있습니다. 사악한 자들은 자기들이 죄 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 주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늘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면전에 사는 성인들처럼 흠 없고 순결한 삶을 살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실상 그 나라를 위한 기도는, 그 나라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하나인 그대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양식을 청하는 기도는 재물이 아니라 성도다운 가난을 비는 기도입니다. 가난한 이들만 이 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양식’이라는 단어를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역사적으로 두 가지 주된 견해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먹어야 하는 물질적 양식과 이제 다가오는 시대에 영적 자양분으로 생명을 지탱해 줄 종말론적 양식입니다. 양식을 청하는 기도는 우리의 빵이신 그리스도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며 생명의 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그다음 항목인 죄의 용서는 양식 청원과 균형을 이룹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탕감해 주시는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이리하셨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악마의 유혹이 입증해 주듯이, 유혹하는 자는 주님이 아니라 악마입니다. 루카가 전하는 주님의 기도에는 우리를 악에서 구해 달라는 청원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 곧 악에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세기의 손님 환대법에 따르면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할 때 공동체 모두가 돕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친절하심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느님은 그 어떤 인간보다 훨씬 고결하고 너그러운 분이십니다. 빵 세 개는 우리가 거룩한 성사들을 통해 하느님께 받는 자양분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 합니다. 좋은 선물을 주시는 분인 하느님께서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리면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다만 당신의 시간표에 따라서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그분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는 인간 세상의 아비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께 살아 있는 빵을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통해 당신 아드님을 주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몸과 영혼에 해가 되는 것을 구하지 말고 성령께로부터 오는 선물을 청할 일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천사와 성인들과 함께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게 만들어 줄 좋은 선물들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11,1-4 아버지게 간구하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전과 책임

주님께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라고 하셨고, 또 다른 복음사가는 여기에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종들을 자유라는 고귀한 지위로 들어 올리십니다. 사람에게 자연의 힘을 넘어서는 영예의 관을 씌워 주십니다. 옛 시편 저자가 노래한 바를 실제로 이루십니다.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 그분은 우리를 종의 신분에서 건져 내시고, 우리가 본디 가지지 못한 것을 은혜로 주시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러 아들의 대열에 서도록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특권과 함께 이것을 그분한테서 받았습니다. 이 특전들 가운데 하나가, 아들로 불리는 이들에게 특별히 어울리는 자유라는 존귀함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저희 아버지’라고 담대히 부르며 기도하라고 명하십니다. 땅의 자녀요 종이며 우리를 지으신 분께 자연의 법에 따라 예속되어 있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그분은 기도하는 이들이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그토록 엄청난 영예를 얻기에 합당하다 여겨졌으니 우리는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땅히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할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에 걸맞지 않거나 어울리지 않는 것은 생각도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유의 구원자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허락하셨으니,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우리를 영예롭게 해 주신 분께 맞갖은 행동을 하도록 힘씁시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간청을 받아 주실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루카 복음 주해』)

 

모든 기도는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께 바쳐진다

우리는 만유의 아버지 하느님께만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구원자께서도 그분께 기도하셨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주님은 우리에게도 그분께 기도를 드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청을 받으시자 그분은 당신에게가 아니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시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말로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시도 중에 하느님께 감사드릴 때, 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베푸신 은혜에 감사드린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신중한 사람이라면, 기도를 올리는 이에게 기도할 것 아니라, 주 예수님께서 그분께 기도하라고 이르신 아버지께 기도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아버지께 바쳐지는 기도는 있을 수 없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오리게네스 『기도』)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낸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본성에 따라 만유의 하느님이신 분이 모든 거룩한 이들 가운데 가장 거룩하신 분이라고 우리가 확고히 믿을 때, 우리는 그분의 영광과 지고한 위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으로 그분을 경외하며 바르고 흥 없는 삶을 꾸려 나가게 되며, 이로써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 거룩하신 하느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라는 기도는 ‘그분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과 뜻 안에서 거룩하게 지켜지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거룩히 드러내시며’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하고 기도 할 때, 그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도록 다른 무엇을 어떻게 해 달라고 청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이 영예롭고 거룩한 것임을 알고 고백하는 마음과 믿음이 자신에게 생기게 해 달라고 청원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생명의 근원이요 모든 축복의 원천입니다. 영혼이 구원받아 높이 들어 올려지는 데 이보다 더 쓸모 있고 가치 있는 기도는 없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루카 복음 주해』)

 

성도들만이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한다

하느님은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우리의 임금님이십니다(시편 71,12). 하느님은 예로부터 다스리시고 전능하신 분이시데, 그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들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는 청원을 드리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만유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군림하시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더 이상 우리처럼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가 아니고 심판자로 내려오실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어울리는,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1티모 6,16)으로서 천사들을 거느리시고 영광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은 것이다”(마태 16,27). 그 심판관은 치우침이 없습니다. 그 자리는 탄원하는 자리, 고난의 징벌의 자리입니다. 사악한 자들이 받을 영원한 고통의 벌인 꺼지지 않는 불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광경을 보며 누가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사악하고 불경한 자들은 천박하고 음탕하게 살며 온갖 악덕을 저지릅니다. 그런 자들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고서’라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구원자께서 온전히 다스리시는 때가 오기를 기원합니다. 그들은 자기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고, 깨끗한 양심을 지켰고,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한 보상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즐거운 잔치가 곧 시작되리라 기대하며 목마르게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들은 심판관 앞에 영광스럽게 서서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라는 말을 들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세상 종말에 대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그분께서 다시 하늘로부터 그들에게 나타나실 때, 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마태 13,43)입니다. 그들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용기에 대한 상을 받고 그들이 희망하는 최고의 것에 이르리라고 확신하고 있으니까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루카 복음 주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청하는 기도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우리는 이 기도를 누구에게 올립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가 외지 않습니까? 그 나라는 세상이 끝난 뒤에도 존재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분께는 결코 나라가 없을 수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분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뜻하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청원입니다. 물론 그 나라는 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 여러분이 왼쪽에 서게 된다면 여러분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 청원에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복도 기원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이 청원에서 여러분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그 나라에서 모든 성도에게 돌아갈 몫을 여러분도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선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당신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성인들과 의인들에게 올 나라가 저희에게도 오게 하소서. (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일용할 양식’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이다

“날마다 너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그분께서 ‘일용할 양식’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세상의 것들에 가난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잠시라도 여분의 것을 위하여 걱정하면 그만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일용할 양식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뜻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빵만 아니라 옷을 비롯한 다른 것들도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고 하셨습니다. (시리아인 에프렘 『타티아누스 네 복음서 발췌 합본 주해』)

 

그리스도가 우리의 양식이다

거룩한 지혜께서 이 기도의 순서를 절묘하게 잡으셨습니다. 하늘과 관련한 기도 후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간청하는 기도가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카 12,31)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청원은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시고 생명은 양식이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양식’이시니까요. 그분은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직전에는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하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몸이 빵 안에 있다고 여겨지므로, 주님께서는 “이는 내 몸이다”(마태 26,26 ; 마르 14,2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고 그분의 몸과 하나 되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기도』)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을 닮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먼저 자기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빈 다음, 자신들도 남들의 죄를 모두 용서한다고 고백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자기들이 실천한 만큼 해 주십사고 청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정당하게 주시는 하느님께서, 그들이 같은 종들에게 보여 준 것만큼의 온유함을 보여 주십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빌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그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용서해야 합니다. 단 그것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영광을 거스르는 잘못이 아니라 우리를 거스른 잘못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거스른 죄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할 입장이 못 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저지른 잘못은 우리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못하는 형제들을 용서할 때,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준비가 되어 계신 온유하신 만유의 구원자 그리스도를 우리는 분명히 뵙게 될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루카 복음 주해』)

 

유혹하는 자는 악마다

순서가 참으로 잘 잡혀 있는 이 기도를 마무리하는 청원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의 용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십사고 기도해야 한다고 덧붙이십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이는 우리가 유혹하는 자에게 이끌리지 않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을 마치 사람의 믿음을 모르시거나 그것을 둘러엎으시려는 분인 양 유혹자로 보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런 결과 사악함은 악마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명은 그의 믿음을 유혹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입증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엇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아니 된다는 가르침의 본보기로 아브라함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을 때 그 유혹을 뒤에서 꾸미는 자의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그분은 사도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루카 22,46)라는 말씀으로 다시 한 번 이 명령을 확인하십니다. 그들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치는 유혹에 빠진 것은 기도 대신 잠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앟게 하소서”와 균형을 이루며 그 뜻을 알려 주는 구절이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기도』)

 

악에서 구하소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하고 청하라고 명하십니다. 루카는 이 말로 주님의 기도를 끝내지만, 마태오는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이 두 구절은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 곧 악에서 구해지는 것입니다. 무엇에 빠지지 않는 것과, 그것에서 구해지는 것이 같다고 말한다면 틀린 말이 아닙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루카 복음 주해』)

 

11,5-8 한밤중에 찾아온 벗 : 아버지께서는 어떤 식으로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는가?

 

넉넉히 주시는 하느님

벗이 길을 가다가 찾아왔는데 대접할 것이 없습니다. 그는 이웃 친구에게 가서 빵 세 조각을 꾸려고 했습니다. 이 숫자는 한 본질이신 삼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는 온 식구와 잠자리에 든 벗을 깨웠습니다. 그가 끈질기게 조르자 벗은 원하는 만큼 그에게 주었습니다. 잠을 자던 사람이 벗의 끈질긴 요청을 마지못해 들어 주었다면, 주무시지도 않으며 잠든 우리를 깨워 간구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 『서간집』)

 

거룩한 신비라는 자양분

밤중에 잠든 벗을 깨워 빵 세 개를 달라고 한 사람은 끈질기게 졸라 댄 끝에 마침내 그것을 얻었습니다. 그 빵들이 거룩한 신비의 자양분입니다. 그대가 그대의 주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대 자신만 아니라 남들을 위해서도 그것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내준 벗보다 더 훌륭한 벗이 있습니까? (암브로시우스 『루카 복음 해설』)

 

11,9-13 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 : 아버지께서는 어떤 식으로 당신 영을 주시는가?

 

기도로 청하고, 올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라

하늘 나라의 기쁨에 도달하기를 갈망하는 우리에게 구원자 주님께서는 청하라고 가르치시며, 우리가 청하면 그 기쁨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우리는 온 마음을 기울여 주님의 이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늘 나라는 게으르고 한눈파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발견되고 열리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분명하게 증언하십니다. 그 나라의 문은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만 열리는 문입니다. (존자 베다 『복음서 강해』)

 

거룩한 선물을 주시는 분

거룩한 선물을 주시는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이 말씀은 맹세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는 않지만 온전한 맹세의 효력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믿음이 적은 데는 타당한 이유가 없음을 나타내시고자, 주님께서는 때때로 맹세의 말로 듣는 이들에게 확인시켜 주십니다. 구원자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말한다”며 이 말씀을 시작하시는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도 그런 식의 맹세로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이 이 약속을 믿지 않는다면 죄에서 자유롭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루카 복음 주해』)

 

생선, 달걀, 빵은 믿음, 희망, 사랑을 상징한다

사도가 높이 말한 세 가지 가운데 생선은 믿음을 상징합니다. 생선은 물세례를 연상시키고, 이 세상 파도에 상처를 입지 않으니까요. 교활하게 사람을 속여 하느님을 믿지 않게 만드는 뱀은 그 반대를 나타냅니다. 달걀은 희망을 상징합니다. 아직은 생겨나지 않았지만 병아리가 생겨날 것이고,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곧 눈에 보이리라고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로마 8,24). 전갈은 희망의 반대입니다.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필리 3,13) 나아갑니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는 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는 전갈을 경계해야 합니다. 빵은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1코린 13,13)이라 하였고 음식물 가운데서는 빵이 단연 으뜸이기 때문입니다. 돌은 그 반대입니다.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마음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요. 이것들이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아시는 분께서 우리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이르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서간집』)

 

기도해야 할 것과 기도하지 말아야 할 것

우리는 아낌없이 주시는 하느님께 나아가, 저마다의 쾌락을 좇아 이런저런 것들을 청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정말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가려내거나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자신에게 과연 복이 될지, 오히려 해가 될지 헤아려 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기도를 드리지요. 그렇게 멋대로 충동에 휩쓸리면 마침내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지옥의 그물과 죽음의 이빨에 걸려들게 하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 기도는 올려도 하느님께서 결코 응답해 주지 않으십니다. 그저 우리가 조롱받기에 딱 맞는 기도를 올리는 것이지요. 어째서 그런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선물 주시는 일에 하느님께서 지치셨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아낌없이 주시는 그분께서 주시지 않는 것인가?’ 하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악해도”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이 악에 휩쓸리기 쉽고 만유의 하느님과 달리 오직 선에만 이끌리는 존재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여기서 ‘성령’은 ‘성령의 은사’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좋은 것입니다. 그것을 얻는 사람은 가장 복되고 칭송받을 만한 사람이 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루카 복음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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