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9-53 예수님께서 받으셔야 할 세례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
▶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종말의 불을 당기는 불쏘시개요 장차 당신을 심판자로 오시게 할 종말론적 세례로 묘사하십니다. 이 불은 거룩한 세례 안에서 성령에 의하여 우리에게 오는 복음의 불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 가슴을 뜨겁게 한 이 불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불은 오순절에 내린 성령의 불입니다. 죄악을 드러내고 사랑의 행위를 일으키는 불은, 그리그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그분을 입는 세례 전에 받는 교리교육의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위해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진노 아래 두는 요르단에서의 물세례로 전도 활동을 시작하셨으며, 하느님의 진노를 당신께서 모두 받으심으로써 세상의 죄를 씻으신 십자가 위의 피세례로 당신의 전도 활동을 완성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세례 가운데 하나인 동시에 다른 모든 세례가 가리키는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불과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셋이 들에, 둘이 셋에 맞서면 숫자로는 다섯 식구가 되어야 하는 데 언급된 사람은 아버지, 아들, 어머니, 딸, 시어머니, 며느리, 이렇게 여섯입니다. 하지만 문자적으로나 신비적 의미로 풀어, 각 사람을 하느님의 집 또는 악마의 집으로 보면, 숫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2,49-50 불과 세례
복음의 불과 세례의 성령
예수님께서 지르시는 불이 인류의 구원과 유익을 위한 것임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이 불로 가득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 이 불은 구원의 복음이요 그 계명의 권능입니다. 본성으로 하느님이신 그분을 모르고, 스스로 지은 죄 때문에 우리는 차갑게 죽어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복음은 땅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불을 질러 경건한 삶을 살게 하고 성령으로 타오르게 합니다(로마 12,11).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불과 같으신 성령의 동반자가 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 길을 배웁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이 불을 때로는 거룩한 말씀에 돌리고 때로는 우리를 영으로 타오르게 하는 성령의 능력에 돌리는 것은 성령의 도움으로 기록된 성경의 관행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루카 복음 주해』)
성경의 불
사랑은 좋은 것입니다. 성도들의 가슴을 뚫고 날아다니며 속된 것을 태우고 순수한 것을 단련시키는 불타는 날개를 가졌지요. 사랑은 그 불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더 좋게 만듭니다.
주 예수님께서 이 불을 세상에 지르셨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이 밝게 빛나고 신심이 불타올랐습니다. 사랑은 환해졌고 정의는 찬란하게 빛을 발했습니다. 클레오파스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하고 증언했듯이, 주님께서는 이 불로 사도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셨습니다. 불의 날개는 성경의 불꽃을 말합니다. (암브로시우스 『이사악 또는 영혼』)
오순절에 내린 성령의 불
그것이 왜 ‘불’입니까? 성령께서 불꽃 모양의 혀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으랴?” (예루살렘의 키릴루스 『예비신자 교리교육』)
세례를 준비시키는 불
주님께서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에서 나온 이 불타는 말씀은 죄의 사악함을 드러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선행의 훌륭함도 드러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와 죽음, 장례와 부활의 예형인 물세례를 받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받을 준비가 된 사람은, 새로 태어나 사는 곳과 습관을 바꾸고 성령과 함께 걸으며 성자의 이름으로 세례 받아 그리스도를 입을 준비가 모두 갖추어진 사람입니다. (대 바실리우스 『세례론』)
12,51-53 평화와 분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세례의 절정인 예수님의 피세례
첫 번째 세례는 죄에서 갈라져 나오게 하는 홍수에 의한 세례였습니다. 두 번째 세례는 구름과 바다 속에서 이루어졌는데(1코린 10,2). 구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바다는 물을 상징합니다. 세 번째 세례는 율법의 세례로서, 모든 부정한 사람은 물로 자기 몸과 옷을 깨끗이 씻은 다음 진영으로 들어갔습니다. 네 번째 세례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도록 준비시키는 요한의 세례입니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 3,11). 요한은 사람들이 성령을 맞을 수 있도록 물로 그들을 정화했습니다. 다섯 번째 세례는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세례입니다. 그분께서는 깨끗해지시려고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여 저를 깨끗하게 하시고, “물 위에서 용들의 머리를 부수고”(시편 71,13), 죄와 옛 아담의 모든 것을 물속에 묻어 버리고, 세례 주는 이를 성화하며, 율법을 완성하고,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고, 세례 받는 본보기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주님의 완전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불꽃 모양의 혀로 사도들에게 성령의 은총을 부어 주셨기에 그분의 세례를 불세례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사도 1,5)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하는 것은 장차 징벌하는 불의 세례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섯 번째 세례는 회개와 눈물의 세례로서, 참으로 아픈 세례입니다. 일곱 번째 세례는 피와 순교로 이루어지는 세례인데,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 세례야말로 어떤 얼룩도 더럽힐 수 없기에 지극히 숭고하고 복된 세례입니다. 여덟 번째이자 최후의 세례는 구원의 세례가 아닙니다. 죄와 악을 완전히 박멸하는 이 세례는 그것들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하고 영원히 징벌하는 세례입니다. (다마스쿠스의 요한 『신앙 해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불과 세례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그분께서 받아야 하는 세례란 당신 육신의 죽음입니다. 짓눌린다는 것은, 그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당신께서 슬픔을 겪고 수난을 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까? 구원의 복음은 유대아에만 전파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불에 비유하시며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온 세상에 타올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고귀한 십자가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기 전에는 그분의 계명과 거룩한 기적의 영광이 유대아에서만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루카 복음 주해』)
하느님보다 부모를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
복음서의 모든 말씀에는 영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 공경과 사람 사랑을 아울러 가르치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어서 가까운 친척들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서로 등져야 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가족과 불화될 것을 명하셨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우리의 평화시며 하나 되게 하시는 분께서 어떻게 그러시겠습니까? 그분께서 만일 가정을 깨뜨려 아비와 아들을, 아들과 아비를 갈라지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면, 어떻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고 하시겠습니까? 자기 부모를 업신여기는 자를 저주하신 분(신명 27,16)께서 어떻게 부모를 버리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첫째는 하느님 사랑이고 그다음이 사람 사랑임을 안다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우리는 사람보다 하느님을 더 공경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면 부모를 지으신 분은 얼마나 더 공경해야 하겠습니까? 자기 부모의 아버님을 몰라보는 자가 자기 부모는 어찌 알아보겠습니까? 자기 부모의 아버님을 몰라보는 자가 자기 부모는 어찌 알아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자식이 아비를 물리쳐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가장 위에 모셔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다른 책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여러분은 부모 사랑을 금지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자식은 실로 하느님께서 내리신 복입니다. 그러나 복을 내리시고 지켜 주시는 하느님보다 복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암브로시우스 『루카 복음 해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집이거나 악마의 집이다
신심 깊은 사람은 이 구절을 문자적 의미에서 종교적 의미를 찾아냅니다. 우리는 여기에 더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로 든 사람은 아버지, 아들, 어머니, 딸, 시어머니, 며느리, 이렇게 여섯인데, 이 다섯은 누구입니까? 같은 여자가 어머니면서 시어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아들의 어머니는 며느리의 시어머니입니다. 문자적으로 읽어도 숫자는 문제 삼을 것이 못 됩니다. 핏줄의 유대가 신앙의 유대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현실입니다.
이 구절을 신비적 의미를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각 사람은 하나의 집입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하느님의 집이거나 악마의 집이니까요. 베드로가 서간에서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1베드 2,5)라고 썼듯이, 영적 인간은 영적 집입니다. 이 집에서 둘이 셋에 맞서고 셋이 둘에 맞서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 『루카 복음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