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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 주해

15,11-24 되찾은 아들

작성자semo|작성시간26.06.19|조회수1 목록 댓글 0
15,11-24 되찾은 아들


11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죄인이 회개하여 새 삶을 얻는 것을 기뻐하라고 권합니다. 두 아들을 각기 누구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큰아들을 유대인으로 작은아들을 다른 민족으로 보는 해설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들 자격을 잃어 마땅했습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은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그리스도를 등지고 교회를 떠나, 자신의 재산을 모두 빼앗길 어둠의 땅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작은 아들에게 닥친 기근은 하느님 말씀의 기근이며 그의 굶주림은 충만하고 풍요로운 삶으로 이끄는 영적 자양분을 받지 못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절박해진 그는 그 고장의 한 주민을 찾아가 매달립니다. 돼지를 기르는 것으로 보아 다른 민족이 분명한 이 주민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를 나타냅니다. 그가 자기 아버지 집의 영화를 돼지우리 속의 잠자리와 맞바꾼 것은 실로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성령께서는 그를 떠나지 않으셨고,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믿는 아들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에덴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이들과 다시 함께하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의 혼잣말은 아버지와 화해를 구하는 그의 첫 번째 고백입니다. 방탕한 아들은 ‘주님의 기도’ 형식을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기 죄를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고백은 땅의 아버지와 하늘의 아버지께 동시에 드리는 고백입니다. 그는 더 이상 아들로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밭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가 되려고 합니다. 사람은 태생을 통해 아들이 되고, 덕을 행함으로써 친구가 되며, 몸으로 수고하면 하인이 되고, 두려움을 지니면 종이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가 목을 안고 화해의 입맞춤을 함으로써 아들이 새 삶을 살게 합니다. 아버지의 행동에 관한 예수님의 묘사는 육화를 통해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에게서 오는 완전한 은총, 조건 없는 사랑의 초상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영예의 반지와 아들 자격을 인정하는 신발을 주어 아들이 아버지 집에 받아들여졌음을 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거룩한 잔치에서 자기 아들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 위하여 아버지의 명에 따라 살진 송아지처럼 희생되십니다. 죄로 길을 잃었던 아담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죽었다가 살아난 다른 민족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15,11-24 방탕한 아들과 인자한 아버지

 

바리사이들에게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라고 이르는 비유

루카는 앞에서 우리 모두의 구원자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랑과 온유함을 베푸시는 데 대해 투덜거렸습니다. 자기들 보기에 부정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가르치시는 주님을 사악하고 불경스런 태도로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만유의 하느님께서는, 한결같이 확고하고 거룩한 행실로 세인의 칭송을 받는 이라도 당신의 뜻을 성실히 따를 것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아무리 평판이 나쁜 사람이라도 회개하면, 마땅히 함께 기뻐하며 그의 과거 때문에 나쁜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루카 복음 주해』)

 

두 아들은 누구인가?

두 아들을 거룩한 천사들과 이 땅에 사는 우리들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바르게 산 큰아들은 거룩한 천사의 무리요, 방탕한 작은아들은 인류라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달리 해석하는 이들도 있더군요. 그들은 행실이 반듯한 큰아들은 육에 따른 이스라엘을, 쾌락을 좇아서 살고자 아버지에게 멀리 떠난 작은아들은 다른 민족들을 나타낸다고 풀이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루카 복음 주해』)

 

작은아들이 아들의 자격을 잃어 마땅한 이유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친절한 만큼 아들은 참을성이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리기가 지루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 수명을 단축시킬 수도 없고, 결국 자시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아버지가 사는 곳에서 물려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아들의 자격을 잃어 마땅하지요. 몇 가지 생각해 봅시다. 그 아들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어떤 대단한 계획이 그를 부추겨 그토록 대담한 요구를 했던 것일까요? 그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입니까?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는 어떤 한계도 없으시고, 어떤 시간 안에도 갇혀 계시지 않고, 어떤 죽음의 힘도 이길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살아 있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자기 쾌락을 좇기로 결심했지요. 아들의 무례한 요구가 역으로 아버지의 너그러움을 입증했습니다.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설교집』)

 

아버지를 떠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떠나는 것이다

거룩한 상속재산은 그것을 구하는 이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그대는 압니다. 아버지가 작은아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나라에는 어린 나이도, 세월과 함께 시드는 믿음도 없습니다. 유산을 요구한 아들은 자신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가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면, 세월이 장해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 멀리 간 사람은 상속재산을 허투루 써버렸습니다. 성경은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장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떠나는 것만큼 멀리 떠나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에게서 떠난 사람은 누구나 자시 고장에서 유배당한 사람이요 세속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나그네도 아니고 순례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19). 멀리 떠났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으니까요”(에페 2,13). 먼 곳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을 깔보지 맙시다. 우리 또한 한때 먼 곳에서 떠돌던 신세 아닙니까?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라고 쓰여 있습니다. 멀리 죽음의 그늘진 곳이 있지만, 성령의 이끄심으로 “그의 그늘 아래 살리라”(애가 4,20)고 결심한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그늘 아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이의 그늘에 앉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아가 2,3)이라고 말합니다. (암브로시우스 『루카 복음 해설』)

 

허망한 욕정의 세계를 선택하다

당신의 복음서에서 작은아들은 당신을 떠날 때 말도 수레도 배도 타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날개를 타고 날아가지도, 걸어서 떠나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먼 고장에서 방탕하게 살며, 인자한 아버지이신 당신께서 주신 재물을 모두 허비했지요. 당신께서는 그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실 때 인자하셨고, 그가 궁핍해져서 돌아왔을 때에도 여전히 인자하셨습니다. 음탕한 옥정의 세계에 사는 것은 어둠의 세계에 사는 것이며 당신 얼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굶어 죽게 된 탕자

심한 기근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식량의 기근이 아니라 선행과 덕행의 기근이었습니다. 어떤 굶주림이 더 비참합니까? 하느님 말씀을 떠난 자가 진짜 굶주리는 자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마태 4,4) 살게 되어 있으니까요. 보화를 등진 자는 누구나 궁핍합니다. 지혜를 떠난 자는 누구나 지각을 잃습니다. 지혜와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거룩한 재산이라는 보물(콜로 2,3)을 버렸으니 그 아들이 곤궁에 허덕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가 곤궁에 허덕이고 굶주림으로 고통받은 것은, 방탕한 쾌락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양식으로 배를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늘 굶주림으로 괴로울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 『루카 복음 해설』)

 

돼지우리에 살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자기 아버지에게 의탁하지 않고 낯선 사람에게 자신을 넘긴 자는 이런 일을 겪습니다. 그는 지극히 너그러운 보호자에게서 달아나 가혹한 심판자에게 당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가혹한 심판자에게 당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자애로운 사람을 등진 그는 돼지를 먹이고 돌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의 평화로운 생활을 등지고 떠난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일인지 실감합니다.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설교집』)

 

성령께서는 죄지은 이에게서도 떠나시지 않는다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작은아들의 경우에도 그랬습니다. 그는 이 모든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아들이라는 영예로운 자격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남의 땅에서 포로의 신세가 된 그는 기억했습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그는 여전히 죄인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을 방탕한 행실로 바람에 날려 버릴 만큼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지요. 이는 성령의 은혜가 그를 떠나지 않아 그에게 하느님 아버지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누구도 이런 호칭을 써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아직 세례로 거룩하게 거듭나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이들은 이런 호칭을 쓸 자격이 없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마태 6.9)라고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아직 그들 안에 사시지 않아서 그런 호칭을 쓸 자격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룩한 신비 가까이 다가가 세례를 받으면, 우리 주님께서 세워 주신 전통에 따라 이 기도를 드릴 수 있고 마침내 거룩한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마부그의 필록세누스 『성령의 내재』)

 

아버지 집으로 돌아감

야곱이 양 떼를 이끌어

아버지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분별 있는 이들을 위한 상징,

지각 있는 이들을 위한 비유가

이 귀향에 들어 있는바,

우리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시다.

형제들이여, 덧없는 이 세상을 향한

욕망의 포로가 되지 맙시다.

그대의 본향은 에덴이니

거기서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는

사람이야말로 복 있는 자입니다.

(시리아인 에프렘 『낙원 찬가』)

 

화해를 모색하는 첫 번째 고백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는 자연의 창조주, 자비로운 후견인, 죄과를 판결하시는 재판관 앞에 내어 놓는 첫 번째 고백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그대의 고백을 기다리십니다. 고백하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위해 중재하게 하십시오. 고백이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변호자께서 용서를 약속하십니다. 후견인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옹호자께서 아버지의 호의를 약속하십니다. 이는 진리이니 믿으십시오. 이는 덕이니 따르십시오. 그분께서는 그대를 위해 중재하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은 “헛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갈라 2,21). 아버지께서 그대를 용서하시는 데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들이 바라는 것을 아버지께서도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암브로시우스 『루카 복음 해설』)

 

‘아버지’를 거듭 부르다

이제 그는 아버지께 돌아오며 울부짖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날마다 드리는 기도에서 교회는, 작은아들이 아버지 집에 돌아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교회는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기도합니다.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설교집』)

 

세례를 통해 태어난 아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그는 자기를 높이지 말고 겸손의 미덕이 그를 일으켜 세우게 해야 합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는 아들과 벗과 하인과 종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아들이 되고, 덕행을 함으로써 벗이 되며, 몸으로 수고하는 점에서 하인이며, 두려움을 지닌 점에서 종입니다. 종과 하인이 벗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요한 15,14-15)고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암브로시우스 『루카 복음 해설』)

 

달려가 아들을 품으시는 아버지

그리스도께서는 서 있는 이들을 뽑으십니다. 일어서서 교회로 달려가십시오. 거기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계십니다. 그대가 마음속 비밀스런 곳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시는 분께서 그대에게로 달려가십니다. 그대가 아직 멀리 있을 때 그분께서 보시고 그대에게 달려가십니다. 그분은 그대의 믿음을 보십니다. 행여나 누가 방해할세라, 달려가서 그대를 껴안으십니다. 달려가는 것은 그분의 예지며, 껴안고 아버지의 사랑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것은 그분의 자비입니다. 그분께서 그대의 목을 껴안아 죄의 짐에 눌려 굽은 몸을 일으키시고, 속세를 향했던 머리를 하늘로 돌려놓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멍에를 멘 그대를 자유롭게 하시고 당신의 편한 멍에를 그대 어깨에 씌우시고자 그대 목을 껴안으십니다. (암브로시우스 『루카 복음 해설』)

 

아들의 허물을 보지 않으시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것이 아버지가 곁길로 간 아들을 심판하고 바로잡는 방식입니다. 아버지는 매를 때리는 대신 입을 맞추지요. 사랑의 힘이 허물을 보지 않게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드러내거나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입맞춤으로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포옹으로 덮어 줍니다. 그렇게 상처의 흔적 하나 남지 않도록 말끔하게 고쳐 준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로마 4,7).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설교집』)

 

육화의 축복을 보여 주는 아버지의 행동

아버지가 멀리서 달려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8). 아버지께서 달려오십니다. 당신 아들을 통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실 때, 그분께서 아드님 안에서 달여오십니다. 그 아드님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요한 8,16)고 하십니다.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신성이 내려와 우리와 같은 인성으로 머무르실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껴안으셨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입 맞추시는 때는 언제입니까?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시편 25,11) 때지요. 아버지는 아담이 잃어버린 ‘가장 좋은 옷’, 곧 영원불멸하는 영광을 아들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워 줍니다. 이 반지는 명예의 반지, 해방 증서, 영의 뚜렷한 보증, 믿음의 인장, 하늘 혼인의 지참금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2코린 11,2)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또 아들의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라고도 했습니다. 이는 그가 복음을 전할 때 그의 발에 신발이 신겨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설교집』)

 

아들 자격을 회복시켜 주다

“손에 ‘반지를 끼워 주어라.”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의 허물을 없애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들이 예전에 지녔던 명예도 되찾아 줍니다.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아들은 아버지를 떠날 때는 부자였지만, 지금은 가난해져서 돌아왔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잃고, 신발조차 신지 못했습니다.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하여 발조차 헐벗지 않게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옛날의 삶으로 돌아오게 하여라.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설교집』)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어 주다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 ’나아가 고백합니다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이렇게 고백할 때 그는 자기가 바랐던 것보다 더 자격 있는 존재로 대접받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품팔이꾼이나 낯선 나그네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오히려 아들로 환영하고 입을 맞추었지요. 죽었다가 살아서 돌아온 자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거룩한 잔치를 베풀어 줄 자격이 있다 여기고, 예전에 입었던 값진 옷을 입혀 줍니다.

아버지의 집에 노래와 기쁨이 넘칩니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 덕분입니다. 그분은 당신 아들을 죽음에서 데려오실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해 당신 은총을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더러움을 모두 씻기고 더럽혀지지 않는 옷을 입히십니다. 굶주린 배를 채워 주려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십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멀리 못 가도록 그 발에 신발을 신겨 주시지요.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손에 거룩한 언약의 반지를 끼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 그분은 그를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다시 낳으십니다. (아타나시우스 『축일 서간집』)

 

아버지 명령으로 바쳐지신 그리스도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이를 두고 다윗은 “이것이 주님께는 더 좋다네, 수소들보다, 뿔 달리고 굽 갈라진 황소들보다”(시편 69,32)라고 노래했습니다. 아버지 명으로 송아지가 죽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당신 아버지의 명령 없이는 살해당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 8,32). 그분은 날마다 우리의 양식이 되시려고 희생당하시는 송아지십니다.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설교집』)

 

즈카르야의 성전 제물

사제적 성격을 지닌 루카 복음은 즈카르야 사제가 성전에서 분향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되찾은 작은아들을 위하여 희생될 살진 송아지가 이미 준비되어 었었던 것입니다. (이레네우스 『이단 반박』)

 

죄로 길 잃은 아담, 그리스도 안에서 되찾다

아버지는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며 기뻐합니다. ‘잃었다’는 것은 있었던 것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본디 없던 것은 지금 없는 이들이고 그리스도인은 지금 있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8)고 쓰여 있습니다. 아담은 존재했고, 우리 모두가 그 안에 존재했습니다. 아담이 길을 잃었고,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 『루카 복음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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