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12 바오로가 트로아스에서 에우티코스를 되살리다 7 주간 첫날에 우리는 빵을 떼어 나누려고 모였다. 바오로가 신자들에게 이야기하였는데, 이튿날 떠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정까지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8 우리가 모여 있던 위층 방에는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다. 9 그런데 에우티코스라는 젊은이가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바오로가 길게 이야기하는 동안 깊은 잠에 빠졌다. 그렇게 잠에 취하여 그만 삼층에서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이미 죽어 있었다. 10 바오로가 내려가 에우티코스에게 엎드려 그를 끌어안고, “걱정하지들 마십시오. 살았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바오로는 다시 올라가 빵을 떼어 나누고 또 식사를 한 다음, 날이 샐 때까지 오래 이야기를 하고 나서 떠났다. 12 그리고 사람들은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면서 크게 위로를 받았다. |
▶ 바오로에 관한 루카의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 9장 36-41절에 나오는 베드로가 타비타를 살린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루카가 이 청년이 삶으로 다시 돌아온 사건을 ‘빵을 떼어 나누는’ 성찬례를 배경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에우티코스(그리스어로 ‘운 좋은 사람’)는 이 청년에게 매우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자른 빵’을 분배하는 행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데도 바오로가 성찬례를 거행하는 것으로 루카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바오로는 말씀 전례와 빵을 나누는 예식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에 해당하는 거룩히 보내야 하는 주일에 거행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식으로 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부활과 죽음에 대한 그분의 승리를 전례로 기리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주일은 바오로가 에우티코스를 되살리는 사건에 적합한 배경이었습니다.
20,7 빵을 떼어 나누려고 모이다
잊지 못할 모임
성경은 “우리는 빵을 떼어 나누려고 모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하던 때 바오로의 말이 시작되었고 그것이 길어졌습니다. 바오로의 식탁에서 모든 사람이 함께 먹었으며, 바오로는 식탁에 앉아서도 계속 이야기를 한 듯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나머지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집은 불이 환히 밝혀졌고 사람으로 가득찬 한가운데 바오로가 앉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왜 밤에 이야기를 했을까요? 바오로가 곧 떠나기로 되어 있어 다시는 그들을 보지 못할 터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미 알렸습니다. 그때 일어난 기적은 그들로 하여금 그날 밤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청중들이 느낀 기쁨은 참으로 컸습니다. 청년이 떨어진 것은 교사에게 이로운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관심을 보이지 않던 모든 이가 죽음을 거친 청년으로부터 바오로의 말을 들으라는 힐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이 사건에 대한 우의적 해석
이 사건은 우의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위층 방은 영적 선물의 고귀함을 나타내고, 밥은 성경을 이해하는 데 대한 어려움을 나타내고, 등불이 많이 켜져 있는 것은 수수께끼 같은 말들에 대한 해석을 나타내며, 주간 첫날은 주님의 부활이나 우리의 부활을 기리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이 구절은 영적 교사가 새겨야 할 가르침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그 가르침은, 부활의 감미로움과 다가올 생의 기쁨에 매혹되고, 자기가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덕을 키우도록 자극하는 교사는 긴 토론 끝에 성경의 수수께끼를 하나라도 풀었을 때, 바오로 사도가 그랬듯이, 약한 청중들을 위하여 즉시 평이한 설명으로 그 수수께끼에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났다”(갈라 4,22)는 성경 말씀을 이야기하고는, 곧 이어서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갈라 4,24)하고 설명했습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20,9 에우티코스가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
바오로의 가르침을 들으려는 사람들의 열정
바오로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에우티코스는 창문에 걸터앉아 있었고 한밤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바오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고 계시는데도 아무도 듣고 있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그 청년이 가진 관심입니다. 그는 잠이 쏟아졌지만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창문에서 떨어질까 봐 겁내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잠이 든 것은 바오로의 말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몸의 생리가 그렇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에우티코스
히브리어로 “에우티코스는 어리석다는 뜻이고, 그리스어로는 운이 좋다는 뜻입니다”. 이 두 뜻 가운데 하나는 젊은 시절 쾌락에 빠져 덕의 높은 봉우리에서 떨어진 사람을 표현하는 데 적절하고, 다른 하나는 설교자의 사랑 깊은 도움으로 덕의 높은 경지로 되돌아온 사람을 표현하기에 적절합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20,10 살아나다
죽었다가 살아난 두 사람
바오로는 그에게로 내려가 엎드려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나약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보다 나태해서 죄를 지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살린 타비타가 전자라면, 에우티코스는 후자입니다. 타비타는 병이 들어 낮에 죽었고, 에우티코스는 한밤중에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죽은 타비타는 깨끗이 씻긴 채 옥상 방에 눕혀져 있었고, 삼층에서 떨어진 에우티코스는 죽은 자로서 낮은 곳에서 사람들의 애도를 받았습니다. 타비타에게는 베드로가 그곳에 없었고, 에우티코스에게는 바오로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여자를 되살리려고 위로 올라갔고, 바오로는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타비타는 베드로를 본 순간 일어나 앉았고, 한밤중에 죽은 에우티코스는 아침이 되어서야 일어나 의로움의 아들에 의해 힘을 되찾고 인도되었습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20,11 바오로가 오래 이야기하다
주일에 올리는 성찬식
오늘날 우리가 주일이라고 이르는 날을 그 당시에는 주간 첫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마태오는 ‘주간 첫날’이라고 하고, 다른 세 복음사가도 관사를 붙인 차이만 있을 뿐 ‘주간 첫날’이라고 하며,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이 이 날임은 확인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모인 것은 주님의 날이며 주간 첫날이라고도 하는, 다음 날이 시작된 때였으며, 그렇게 본다면 사도는 그리스도의 성체성사 때처럼 그들과 빵을 떼어 나누기에 앞서 자정까지 이야기를 했고, 성찬례를 거행한 뒤에 또다시 그곳에 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주일 아침 일찍 떠나기로 되어 있어 시간이 촉박했던 까닭이었습니다. 또는 만약 그들이 모인 것이 주간 첫날, 곧 주일의 해가 지기 한 시간 전이었다면, “바오로가 신자들에게 이야기하였는데, 이튿날 떠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라는 말이 바오로의 이야기가 길어진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곧 떠나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그들이 주일에 늘 단식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는 사람들이 매우 열성적으로 귀 기울이는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음식물을 먹고자 설교를 중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음을 알려 줄 따름입니다. 바오로는 곧 그곳을 떠나게 되어 있었고, 많은 곳을 다녀야 하는 여정 때문에 언제 그곳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기약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서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