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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주해

20,25-38 바오로가 에페소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다

작성자semo|작성시간26.06.15|조회수4 목록 댓글 0
20,25-38 바오로가 에페소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다


25 이제, 내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여러분 가운데에서 아무도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26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의 멸망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히 선언합니다.
27 내가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28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 떼의 감독으로 세우시어, 하느님의 교회 곧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얻으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29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
30 바로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31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32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이와 함께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여러분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33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34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35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36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37 그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38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오로의 말에 마음이 매우 아팠던 것이다. 그들은 바오로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다.

▶ 바오로의 사목 활동과 그의 말을 통해 이상적인 교회 지도자의 보습을 봅니다. 이 대목에서 가장 관심을 보이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얻으신 교회”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교회’는 온 세상에 퍼져 있는 구원받은 이들의 무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피”라고 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 안에는 한 분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20,26 그 누구의 멸망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

 

말하지 않는 자는 멸망에 대한 책임이 있다

바오로는 지금 부담스러운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의 멸망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는 이 말을 함으로써 그들을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이제 그들에게 모든 직무와 책임을 맡기려 하므로, “이제, 아무도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라는 말로 먼저 그들의 마음을 엽니다. 그러고는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의 멸망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합니다. 그들의 괴로움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오로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바오로의 말이 그들 모두에게 해당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오로가 “내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여러분 가운데에서 아무도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을 테니,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의 멸망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히 선언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피, 곧 멸망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것보다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바오로는 그들이 행동하지 않으면 그들에게도 멸망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곧, 자신에게 잘못이 없음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정직한 바오로는 잘못이 없다

“바오로는 자신은 이웃의 멸망에 대해 잘못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징계받을 잘못이 있는 이웃이 있으면 그는 조금도 눈감아 주지 않고 꾸짖었습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바오로에게는 잘못이 없다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의 멸망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거짓 교사는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해 잘못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짓은 사람들의 생명인 피를 뽑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말은 ‘나의 가르침은 아무에게서도 영원한 생명을 빼앗지 않았으며, 나는 하늘 나라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사람이라고 여겨야 할 것입니다. 나는 내 말을 듣고도 믿지 않은 사람들의 멸망에 대해서는 잘못이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암모니우스 『성경 주해 선집』)

 

20,27 하느님의 모든 뜻을 알려 주다

 

하느님의 모든 뜻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영혼에서 생명을 뽑아 버린다는 뜻이며, 피는 그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오로는 자신이 그들에게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다 알려 주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하느님의 모든 뜻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로마 11,34)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구절이 무슨 뜻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습니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것은 다른 무엇을 의미합니다. 바오로는 인간이 말하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을 ‘모든 뜻’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지식은 아무리 특별하고 충만한 것일지라도 다가올 시대에 얻게 될 지식과 비교하면 부분적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뜻’은 율법과 예언자들과 복음을 주신 하느님의 계획을 의미하는 말로 볼 수도 있습니다. (장님 디디무스 『성경 주해 선집』)

 

20,28 여러분 자신과 교회를 잘 돌보십시오

 

자신과 양 떼를 돌보는 일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 E[의 감독으로 세우시어, 하느님의 교회 곧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의 피로 얻으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바오로는 두 가지를 지시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7)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인도하기만 하는 것은 유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만 챙기는 것도 아무런 유익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기적이며 자기 금을 땅에 묻은 사람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합니다. 바오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이 양 떼의 구원보다 소중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보살피는 것이 양 떼에게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감독들과 원로들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밀레토스로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들을 감독, 곧 주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 도시에 주교가 여러 명 있을 수는 없습니다. 바오로가 여기서 감독이라고 한 사람들은 원로들을 가리킵니다. (존제 베다 『사도행전 해설』)

 

주님께서는 교회를 소중히 여기신다

그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 떼의 감독으로 세우셨다”는 것은 ‘성령께서 그들을 성직에 임명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교회를 돌보는 것’, 이것이 또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의 피로 얻으신 교회”입니다. 바오로는 이런 말을 통해, 매우 많은 것들이 여기에 달려 있으며, 주인은 당신의 교회를 위해 당신의 피조차 아끼지 않는데, 우리가 형제들의 구원을 가벼이 생각하면, 매우 귀중한 것이 위험에 처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피를 흘리신 것은 원수들을 화해로 품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오로는 “사나운 이리들”이라고 함으로써 그들이 난폭하고 무모함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 이리들이 그들 가운데에서도 나오리라고 합니다. 이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있으십시오”라는 바오로의 말은 참으로 적절하며, 그는 이 말을 통해 그것이 매우 중대한 일이며, 위험이 엄청나고, 싸움은 치열하게 양면으로 전개되리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하느님의 피

바오로는 주저하지 않고 “하느님의 피”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 안에는 하나이신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하늘에 계신 사람의 아들”(요한 3,13)이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네스토리우스는 사람의 아들과 하느님의 아들을 구분하여 그리스도를 둘로 여기는 짓거리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목자가 해야 할 일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성령에 의해 주교로 서품되는 것은 그의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오는 권능을 지니게 되는 것이므로,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도 마땅히 스스로를 살피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의 신분 때문에 교회의 목자로 세워지는 것이라면, 한 번 어떤 자리에 앉게 된 사람은 어떤 변화도 없이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감독은 자기 자신만 아니라 구원자께서 당신의 피로 얻으신 모든 양 떼를 보살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필수적인 덕들과 신앙 두 가지 면에서 다 스스로를 주의 깊게 살펴 이단들의 기괴한 가르침을 입에 올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기도 그들처럼 되려는 이기적인 야망에 빠져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나쁜 길로 유혹하지 않음으로써 타락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사도들로 불리지만 참된 사도가 아닌, 양 떼를 잡아먹고 사는 탐욕스러운 이리들로부터 돌아섬으로써 양 떼도 보살펴야 합니다. 교회를 감독하라고 성령께서 세우신 그가 선한 목자라면, 그는 이 이리들에게서 돌아섭니다. 목자가 아닌 고용인은 이리가 나타나 양 떼를 흩고 죽일 때 달아납니다. 고용인은 목자가 아닙니다. 고용인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공동체를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라 돈과 이익을 바라고 그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교회에 “첫째로 사도들”과 여러 직무를 맡을 사람들을 세우셨듯이, 성령께서도 교회를 위해 목자들과 감독들을 세우신다는 사실입니다. (장님 디디무스 『성경 주해 선집』)

 

20,29 사나운 이리들

 

부정한 것을 가까이 하지 마라

‘들짐승이 잡은 것’이 닿으면 부정하게 된다(레위 5,2)고 합니다. 저는 이 짐승을 베드로 사도가 말한 이러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적대다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 5,8-9). 이런 자들에 관해 바오로 사도도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라고 합니다. 이런 짐승의 포로가 된 사람을 보거든, 그를 따라가지도 말고 건드리지도 마십시오. 그랬다가는 여러분도 부정해집니다. 부정한 동물이란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은 사람들로서, 그들 안에는 이성도 종교적인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체’, 곧 이 모든 이들의 죄를 보거든, 그것을 손에 넣지도, 만지지도, 다루지도 말라고 입법자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레위기 강해』)

 

20,30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생겨날 것이다

 

이단자들의 특성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 이단자들은 사람들을 주님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애씁니다. 마니교도는 마니에서 생겨났고, 아리우스파들은 아리우스에게서 생겨났으며, 네스토리우스파는 네스토리우스에게서 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바오로 편이다, 아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케파 편이다”(1코린 1,12)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꾸짖고 이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일찍이 이런 일을 경계한 바 있습니다. 그는 그들의 신앙이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설명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그들이 비록 다른 교사들에게 배웠더라도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기를 바랐습니다. 모든 교사가 자신의 이름은 덮고 참신앙을 선포하며 학생들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한다는 같은 목적을 위해 노력할 때,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교사들이 교회의 어떤 가르침이라도 왜곡한다면, 그들은 정통 교회라는 이름을 박탈당하고 그들을 가르친 교사의 이름을 따라 불립니다. (암모니우스 『성경 주해 선집』)

 

20,31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르다

 

단 한 사람을 위해서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바오로

바오로는 “눈물로”, “밤낮 쉬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을” 같은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합니다. 그가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그가 여러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는 일을 삼갔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모든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해서 그들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20,32 하느님과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은총에 대한 확신

바오로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할 때 격려의 말로 시작해 기도로 끝냅니다.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라는 말로 그들을 크게 놀라게 했던 바오로가 그들이 당황해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이제 어떻게 그들을 위로하는지 보십시오. 그는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라고 합니다. 이는 그분의 은총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구원하는 것은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빚진 자들이므로 더욱 열심히 청하라고 가르치며 굳건한 용기를 지니라고 설득함으로써 늘 은총을 상기시킵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고”라는 말에서도 바오로는 ‘세운다’고 하지 않고 “굳건히 세운다”고 함으로써 그들이 이미 서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 다음 바오로는 “거룩하게 된 모든 이와 함께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여러분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라는 말로 그들에게 희망을 심어 줍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아버지와 아들의 단일성

바오로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말씀이신 하느님 예수님은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모호하고 비밀스러운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들에게 그런 것들을 ‘해 주실 수 있는 분’을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칭합니다. 바오로가 아시아의 교회들을 준비시키며 한 이 말에서 우리는 아버지시기도 하고 아들이시기도 한 존재가 계시며 이 존재는 단지 이름만 둘인 것이 아니라 진실로 두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암모니우스 『성경 주해 선집』)

 

20,33 누구의 재물도 탐낸 일이 없다

 

설교자는 스스로 생활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바오로는 교사들이 물질을 어떻게 여겨야 하는 원칙을 세우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자들에게 있어서 누구의 세속적 재산에도 생활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가장 순수하고 위대한 담대함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주해 선집』)

 

20,34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장만하다

 

재산을 버리는 것보다 훌륭한 가난

바오로는 위험에 직면해서도 대담한 면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맡아 돌보던 이들에 대한 연민과 분명한 가르침과 겸손과 청빈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자기 손으로 마련하는 것은 가난보다 훨씬 더 훌륭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너의 재산을 팔아라”(마태 19,21)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남의 것을 하나도 취하지 않았음은 물론 남들에게 필요한 것도 직접 마련해 주었으니, 무엇을 여기에 대겠습니까? 재산을 포기하는 것은 첫걸음입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자기가 해결하는 것은 두 번째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설교자는 사람들에게 생활을 의존할 권리가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오로는 단지 자기 재산을 포기한 사람들보다 훨씬 훌륭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선포하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선포하느냐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복음을 선포해서는 안 되며,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 복음을 선포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음식보다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행복을 먹는 것에 두는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도도 복음 선포를 먹고사는 방편으로 삼는 것은 엄금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을 그 일에 의존하는 것, 곧 이생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그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얻는 것을 허락하셨으며, 자신은 그렇게 할 권리가 있었지만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주님의 산상 설교』)

 

관상과 봉사 사이에서 갈등한 바오로

그가 아무리 거룩하고 숭고한 사람이라고 해도, 바오로의 마음도 때로는 세상 속에서 해야 하는 일들 때문에 거룩한 관상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오로는 그런 실질적인 열매로 자신이 부유해진다고 여겼고, 한편으로는 관상의 유익함을 생각해 보고 마치 저울에 달 듯이 그것을 달았습니다. 천칭의 한쪽 접시에는 이 모든 수고가 가져오는 유익함을 담고 다른 한쪽에는 거룩한 관상의 기쁨을 담았습니다. 오랫동안 그는 마음속 그 저울을 균형 잡아 왔습니다. 그러는 내내 한쪽 저울에는 자신의 수고가 가져온 막대한 보상의 기쁨이 담겨 있었고, 다른 쪽 저울에는 그리스도와의 합일과 결코 나뉘지 않을 친밀한 관계에 들고 싶어 이생을 떠나고 싶은 소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혼란에 빠진 바오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필리 1,22-24). 그때는 많은 점에서 그가 이 훌륭한 선을 자기 설교의 모든 열매보다 더 좋아했지만, 그런데도 사랑이라는 것에 복종했습니다. 사실 이것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복음의 가금으로 젖을 먹여 왔던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에게는 나쁜 일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익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의 엄청난 선의 때문에 더욱더 이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의는 바오로로 하여금, 설사 저주라는 결정적인 악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형제들의 구원을 위하여 항상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요한 카시아누스 『담화집』)

 

교회 지도자들은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돈을 받지 않음으로써 바오로를 본받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한 말입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라는 말에 그 뜻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떠올린다면, 그 원칙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좋은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주교들은 주는 것을 더 좋아해야 할 것입니다. (장님 디디무스 『성경 주해 선집』)

 

20,35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

 

초탈함의 지혜

선물을 주는 사람은 상대방이 선물을 받으면 그 사람을 하찮게 보며, 반면 상대방이 그것을 받지 않으면 그를 무척 존경하게 되니, 여러분이 선물을 받지 않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히에로니무스 『서간집』)

 

나는 모든 면에서 본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박해 가운데서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해야 할 뿐 아니라 육체적인 수고도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약한 이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짐에 짓눌리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편 복음서는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루카 10,35). 이는 복음을 선포하면서도 그 일로 생계를 해결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

주님께서는 부자는 비록 자선을 하더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사람들보다 훌륭하다고 보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은 단번에 모든 것을 버리고서도 “자기 손으로 애써 좋은 일을 하여 곤궁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에페 4,28) 있는 사람입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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