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0-25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복음을 선포하다 20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21 그 말을 들은 자들은 모두 놀라며, “저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자들을 짓밟은 자가 아닌가? 또 바로 그런 자들을 결박하여 수석 사제들에게 끌어가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2 그러나 사울은 더욱 힘차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명하여, 다마스쿠스에 사는 유다인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23 그렇게 꽤 긴 기간이 지나자 유다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기로 공모하였는데, 24 그들의 음모가 사울에게도 알려졌다. 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밤낮으로 성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25 그래서 그의 제자들이 밤에 그를 데려다가 바구니에 실어 성벽에 난 구멍으로 내려 보냈다. |
▶ 사울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으로 선교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고난에 대한 예언은 곧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바오로의 탈출은 여호수아의 정탐꾼들에 관한 이야기(여호 2,15)를 떠올리게 하며,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1장 32-33절에서 이 일에 관해 언급합니다.
9,20 곧바로 바오로가 예수님을 선포하다
처음부터 완전한 복음을 선포한 바오로
사울은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고 합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셨다’가 아니었습니다. 바오로는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사는 교의를 선포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9,24 그들의 음모가 사울에게도 알려지다
재판도 치르지 않고 바오로를 죽이려 한 이들
복음이 퍼져 나가는 것을 본 그들은 재판이라는 형식조차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음모가 사울에게도 알려졌다. 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밤낮으로 성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무엇보다 앞서 일어난 기적들보다, 오천 명이 신자가 된 사건보다, 삼천 명이 신자가 된 일보다, 한마디로 다른 모든 일보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복음이 퍼져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9,25 밤중에 피신한 바오로
선포를 계속하기 위한 사려 깊은 선택
바오로가 피신한 것은 비겁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선포를 위해 자신을 보전한 것입니다. 그가 겁쟁이였다면,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신중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죽는 것을 어려운 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죽음이 큰 유익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이래야 합니다. 바오로의 됨됨이가 바로 드러났습니다. 그 이전에, 그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로마 10,2) 일을 하던 때 그가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인간의 생각이 시킨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닻을 올리기를 주저한 그는, 항구를 떠난 직후 교역 여행을 시작할 때는 더욱 주저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일을 인간의 지혜가 하도록 남겨 주십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당신의 제자들은 인간이며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개입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이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피하는 것은 순교 못지않은 일입니다. 그것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많이 용서받은 자의 열정
“그래서 그의 제자들이 밤에 그를 데려다가 바구니에 실어 성벽에 난 구멍으로 내려 보냈다.” 그들은 바오로 혼자 보냈습니다. 아무도 그와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잘된 일이었습니다. 바오로가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바오로를 피신시킨 것은 그의 신변을 보호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정반대의 일을 했습니다. 그는 그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이런 것이 불타는 사람, 열정에 불타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날부터 그는 사도들이 들었던 모든 지시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믿음에 든 사실이 그를 더욱 열정에 불타게 했습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큰 사랑을 드러낸다”(루카 7,47)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나중에 온 그는 더욱 사랑했습니다.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매복 공격을 가했던 그는 자신이 무척이나 많은 죄를 저질렀다고 여겼고, 자신이 무엇을 해도 과거의 행적을 다 지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지킨 바오로
바오로가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박해하던 임금이 쳐 놓은 덫을 피해 도망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필리 1,23-24). (아우구스티누스 『서간집』)
그리스도의 제자들
이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리스어 성경에는 ‘그의’라는 말이 없고 ‘제자들’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일반적인 의미로, 이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거나 교회의 제자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바오로에게 그때 이미 제자들이 생겼다는 말은 없고, 그가 다마스쿠스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바구니에 실려 성벽 아래로 내려간 바오로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는 인간의 오랜 원수가 쳐 놓은 올가미나 이 세상의 덫에 빠진 사람이 신앙과 희망을 통해 구원받을 때면 언제나, 이런 탈출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마스쿠스(‘피를 마시는’이라는 뜻입니다)의 성벽은 세상의 역경을 상징합니다. 아레타스(‘내려감’을 뜻합니다) 임금(2코린 11,32-33)은 악마로 풀이됩니다. 대개 골풀과 야자나무 줄기로 짜는 바구니는 믿음과 희망의 결합을 나타냅니다. 골풀은 믿음의 생기를 나타내고, 야자나무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역경의 성벽에 둘러싸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덕의 바구니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