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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주해

10,9-16 베드로가 환시를 보다

작성자semo|작성시간26.06.14|조회수0 목록 댓글 0
10,9-16 베드로가 환시를 보다


9 이튿날 길을 가던 그들이 그 도시 가까이 이르렀을 즈음, 베드로는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갔다. 때는 정오쯤이었다.
10 그는 배가 고파 무엇을 좀 먹고 싶어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 베드로는 무아경에 빠졌다.
11 이어서 하늘이 열리고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내려와 네 모퉁이로 땅 위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12 그 안에는 네발 달린 짐승들과 땅의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13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14 베드로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무엇이든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5 그러자 베드로에게 다시 두 번째로 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16 이러한 일이 세 번 거듭되고 나서 그 그릇은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

▶ 초기 그리스도교 저작가들은 라삐들의 해석 방식에 따라 성경의 모든 단어, 특히 거룩한 숫자에서 영적 의미를 찾으려 했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한 장소는 기도하기 적당한 장소에 대해 알려 줄 뿐만 아니라, 기도에는 변화시키는 특성이 있다는 사실도 알려 줍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거룩한 무두장이의 집에 있는 것입니다. 아마포는 온 세상을 나타내거나, 혼인 잔치의 식탁보와 세례복을 떠올리게 하며, 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동물들은 하느님께서 기껍게 여기시는 모든 인종을 나타냅니다. 세 번 거듭된 지시와 꾸짖음은 세례 때 세례 받는 이가 삼위일체께 대한 신앙고백을 하여 삼위에 의해 정화됨을 나타냅니다. 아마포와 세 번에 걸친 꾸짖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깨끗이 하신 모든 민족이 부름 받았음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일이 정오에 일어난 것도 만인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불렸음을 나타내는데, 베드로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갈증과 배고픔이 배어 나오는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10,9 베드로가 기도하려 옥상에 올라가다

 

속된 욕망은 모두 버려라

베드로가 옥상에 올라간 것은, 교회가 속된 욕망을 모두 버리면 하늘에서 생명의 길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천상의 것을 추구한 베드로

베드로 사도는 야포에 있을 때 ‘기도하러’ 그 집 “옥상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는 낮은 곳에서 기도하지 않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땅 위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저 위의 것을 추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는 ‘옥상으로’ 올라갔고, 주님께서도 이 높은 곳에 대해 “옥상에 있는 이는 물건을 꺼내러 집 안으로 내려가지 말고”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말도 분명히 알려 줍니다. “베드로는 기도하려 옥상에 올라갔다. 하늘이 열리고 … 것을 보았다.” 베드로가 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도 그랬다는 것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 베드로가 ‘무두장이의 집에’ 머무른 것은 적절했습니다. 그 무주장이는 “살갗과 살로 저를 입히시고”(10,11)라는 욥의 말이 가리키는 자일 것입니다. (오리게네스 『레위기 강해』)

 

세상의 구원에 대한 배고픔

기도하던 베드로는 여섯째 시간 정오에 배가 고팠습니다. 진정 그것은 주님께서 찾고 구하시려고 여섯째 시대에 오셨던 세상의 구원에 대한 배고픔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것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분께서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있는 우물가에서 목이 마르신 때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하느님께 대한 배고픔과 갈증

뜨거운 한낮에 옥상으로 올라간 베드로, 땅이 내려다보이는 그 높은 곳은 베드로에게, 땅의 것들이 아니라 언제나 천상의 것을 좇으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 시각은 여섯째 시간(정오). 그리스도께서 구원자 당신의 풍요로움을 나누어 주시려 세상에 오신 것도 여섯째 시대, 하루의 여섯째 시간을 나타내는 그 수는 그분께서 일찍이 세상을 세우셨던 양식을 드러내 주네. 구원자께서 이 수의 시대에 세상에 오시어 죄의 지배력 아래 짓뭉개지는 것을 금하셨다네. 그런데 성경은 여섯째(시간)에 일어난 또 다른 일들도 알려 주는바, 여행으로 지치신 주인께서 우물가에 앉아 하녀가 들고 있는 잔에 물을 청하시는 것(요한 4,6-14)은 온 세상에 있는 당신의 교회에 그 샘에서 나오는 안식을 주시려는 것이었도다. 베드로가 배가 고팠던 것도, 늘 당신의 선물을 더해 주고 싶어 하시는 그의 거룩한 주인께서 목이 마르셨던 것도 바로 그 여섯째 시간. 베드로의 이름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긴 그분께서는 그의 신앙도 자라게 하셨도다. 세상은 베드로의 이 배고픔으로 인해 충만해지리니, 그 배고픔은 어떤 선물보다 풍요로우며, 영원한 잔칫상을 차려 내며 감미롭게 흘러 아무도 배고프게 놓아두지 않기 때문이로다. (아라토르 『사도행전』)

 

10,10 베드로가 무아경에 빠지다

 

영적 눈

성령께서 시간을 어떻게 연결시키는지 잘 보십시오. “베드로는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갔다. 때는 정오쯤이었다.” 옥상은 다락방처럼 개인적인 공간이며 조용한 곳입니다. “그는 배가 고파 무엇을 좀 먹고 싶어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 베드로는 무아경에 빠졌다.” 무아경은 영적 눈으로 어떤 환시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단식과 기도

성경이 우리에게 베드로가 배가 고팠으며 다른 민족들의 세례에 과한 신비가 그가 허기진 상태에서 기도할 때 계시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도들은 단식할 때 영적 눈이 더욱 날카로워진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모세가 단식하는 동안에 율법을 받았듯이(탈출 34,28), 베드로도 단식하던 중에 신약성경의 은총에 대해 배웠습니다. 다니엘도 단식한 덕분에 사자의 아가리에서 벅어났고 미래의 일들을 보았습니다(다니 6,10-8,27). 그리고 단식과 자선이 죄를 없앤다는 성경 말씀(토빗 12,8-9)을 생각할 때, 우리가 단식으로 우리 죄를 닦아 버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암브로시우스 『서간집』)

 

인성의 일치

본성상 사악한 인간은 결코 없으며, 사람은 그 품은 뜻으로 인하여 사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부정하고 더럽다고 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베드로에게 가르치실 때,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네 모퉁이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앉게 하셨고, 그 그릇 안에는 온갖 종류의 맹수가 다 들어 있었으며 베드로는 그것들을 잡아먹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유대 율법을 따르던 베드로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실제의 광경인 줄 알고 자신은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다며 지시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이야기하자 그에게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내렸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특성에 관한 말씀이며 하느님께서 본성상 더러운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베드로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순순히 온 가족과 함께 복음의 가르침의 열매를 받기 소망하는 코르넬리우스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여러 종류를 나타내는 네발 달린 짐승들과 땅의 길짐승들과 새들이 다 하느님께서 기꺼이 여기시는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성경은 “베드로는 무아경에 빠졌다. 이어서 하늘이 열리고”라고 합니다. 성령을 받은 예언자라고 자처하는 정신착란에 빠진 프리기아 출신 여인들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예언의 순간에 자기가 내뱉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무아경에 빠졌다는 이 성경 말씀이 자기들의 경우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참으로 정신 나간 자들은 이 단어가 많은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단어는 놀라운 것을 보았을 때 느끼는 경탄과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것, 들 다를 뜻합니다. 베드로나 예언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지만, 지각이 마비되는 망상의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무아경에 빠져 자신이 보도 들은 것과 표징이 분명히 보여 분 것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 후에 그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라고 분명하게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듣고서 왜 베드로와 논쟁을 했을까요?

사도들의 지극히 거룩한 지도자 베드로에게 다른 민족들에 관한 하느님의 계시가 필요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신앙에 있어서 할례 받고 안 받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뿐 마니라 베드로는 지금까지 말로 표현된 바 없는 하느님 뜻의 신비와 계시를 주님께서 드러내시기 전, 주님께서는 율법에 따라 바치는 눈에 보이는 예배와 상관없이 다른 민족들도 제자로 만드시려고 부르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마포 같은 그릇이라는 표상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총이 내린 사실을 통하여,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다른 민족의 구별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장님 디디무스 『성경 주해 선집』)

 

민족들에게 세례를 주라는 지시를 받은 베드로

저는 복된 베드로가 배가 고팠으며 이 말씀이 이야기하는 것가 같은 취한 상태였다는 것도 압니다. 그는 육신의 양식이 주어지기 전 “배가 고파”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 거룩하고 맑은 도취 상태에 빠졌습니다. 도취에 빠진 그는 육신을 이탈하여 복음을 나타내는 아마포 같은 그릇이 하늘에서 네 모퉁이로 내려오는 것과 각기 바치는 예배의 특성에 따라 새들과 네발 달린 짐승과 길짐승 등 온갖 다양한 모양의 짐승들로 표현된 인류 전체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씀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들 예배의 짐승 같은 불합리한 형태를 희생 제물을 잡듯 잡아서 그것을 깨끗이 하여 남아 있는 것을 먹어도 좋도록 만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것들이 깨끗이 되었다는 것은 신심 깊은 그 말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거룩한 목소리는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은 더럽지 않다는 말을 한 번만이 아니라 세 번이나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말씀에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정화하신다는 것을, 두 번째 말씀에서는 똑같은 방식으로 정화하시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세 번째 말씀에서는 더러운 모든 것을 정화하시는 하느님이 성령이시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아가 강해』)

 

10,11 큰 아마포 같은 그릇

 

온 세상을 상징하는 비유

아마포 같은 그릇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온 세상을 상징합니다. 코르넬리우스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유대인과 공통점이라곤 없었습니다. 모두가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니요?’ 하며 베드로를 변절자라고 비난할 만했습니다. 그러면 섭리에 따라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나 잘 보십시오. 베드로도 “주님,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두려워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가 그렇게 말하도록 시키셨습니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을, 곧 하느님께 반대하는 말씀을 드렸다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파견되는 시점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이 점으로도 비난받는 일이 없도록, 하느님의 섭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준비해 두셨는지 보십시오. 그 소리를 환상이라고 넘겨 버리지 않도록 “이러한 일이 세 번” 거듭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1,8). 이것은 베드로에게 주어진 말씀처럼 보이지만, 사실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들의 교사가 꾸짖음을 듣는다면, 그들은 더욱 큰 꾸짖음을 듣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아마포가 나타내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땅과 그 안의 짐승들은 다른 민족들을 나타냅니다. ‘잡아먹어라’라는 명령은 그가 이들에게도 가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 일이 세 번 반복되었다는 것은 삼위일체를 고백함으로써 받는 세례를 나타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썩지 않는 교회

‘이 그릇은’ 썩지 않는 신앙을 부여받은 “교회를 나타냅니다. 옷을 좀먹는 나방도 아마천은 상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편 교회라는 신비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자는 “자기의 마음에서 사악한” 생각이라는 “부패를 뿌리 뽑아야 하며, 그럼으로써 썩지 않는 신앙 안에서 굳건해지고 그리하여 마음속의 나방과 같은 사악한 생각들에 빠져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 나방을, 주님의 옷을 더럽히고 싶지만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므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단자로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못한다는 사실은 군인들이 주님의 속옷은 감히 찢지 못한 일로도 예시된 바 있습니다(요한 19,23-24).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네 모퉁이

아마포 같은 그릇이 네 모퉁이로 내려앉았다는 말에서 네 모퉁이는 교회가 뻗어 나간 세상의 네 지역을 가리킵니다. 교회는 온 땅에 기쁨의 소리를 퍼뜨리는 “당신의 거룩한 산에 솟아오른 하느님의 도성”(시편 18,1-2)이기 때문입니다. 아마포 같은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교회가 성령의 은총이 내림으로써만 보존되고 더욱 커지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요한은 묵시록에서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묵시 21,2)라고 합니다. 또한 네 모퉁이는 교회를 기르며 거룩한 선물들로 교회를 높이 들어 올리는 복음사가들을 나타내는 표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베드로가 본 환시의 뜻

천국의 열쇠를 지키는 직무를 맡은 이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네. 그가 본 것은 그릇이 내려앉는 광경. 그가 먹는 모든 것을 교회의 양식으로 만드는 베드로의 몸이 어떤 것이라도 먹어도 된다는 것을 알려 주는 환시였다네. 그릇은 네 모퉁이로 내려앉았다지. 이것은, 세상의 네 지역에서 일어나, 네 사자들의 능변을 널리 퍼뜨리며, 온갖 종류의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길짐승을 하나 되게 하는 교회의 표상 가운데 하나. 짐승들은 그 덕과 악덕에 따라 인간의 종류를 나타내나니, 그러므로 창조주께서 다른 민족 사람들도 교회의 그릇 안에 담으라 명하셨음이 분명하도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일어나 잡아먹어라. 그들에게서 지금의 모습을 없애고 너와 같이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로다. 돌아선 사람은 변화한 사람, 바오로가 살기 시작하자 마침내 사울이 죽은 것과 같도다. (아라토르 『사도행전』)

 

온 세상이 불리다

복된 삼위일체의 은총에 의해 세상의 네 지역 모두가 믿음으로 불렸습니다. 이렇게 해석해 보면, 넷에 셋을 곱한 수인, 사도들의 수 열둘은 온 세상의 네 지역이 삼위일체의 은총 안에서 구원됨을 상징하는 거룩한 수가 되었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본 온갖 종류의 짐승, 곧 모든 민족으로 가득 찬 그릇도 이 수를 나타냅니다. 그 그릇은 하늘로부터 네 모퉁이로 내려앉기를 세 번 거듭하였으므로, 넷이 열둘이 된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고 열두 날이 지났을 때 다른 민족들의 맏물인 동방의 현자들이 그리스도를 찾아와 경배하였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구원을 확실히 하였을 뿐 아니라 모든 이방인의 구원을 예시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10,12 모든 짐승이 들어 있다

 

모든 민족을 상징하는 모든 짐승

이 짐승들은 오류로 인해 더러웠으나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로 세례 떼 세 번 물에 담겨 정화된 모든 민족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들짐승과 길짐승의 모습을 취하는 자들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독사의 자식들”(마태 3,7)로 불립니다. 교만하고 불충한 자들에 관해서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마태 8,20)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코헬 12,13)라는 솔로몬의 말은 참된 인간, 타락하지 않은 인류는 어때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10,13 잡아 먹어라

 

그리스도의 초대

베드로가 들은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어나 복음을 선포할 준비를 하여라. 다른 민족들을 그런 인간으로 살도록 만든 것을 죽이고 그들을 너와 같은 이들로 만들어라. 음식을 먹으면 먹는 이의 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 목소리는 믿음이 결핍되어 바깥에 있는 다른 민족들은 지금까지의 생활 방식이 죽으면 교회라는 사회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임을 알려 준 것입니다. 베드로의 환시는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바오로 사도도 자신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갈라 2,19).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실로, 이단자들에게 넘어간 사람들은 살아 있어도 이미 죽음이 삼켜 버린 사람들입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10,14 속된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다

 

새 질서의 시대

율법은 영적인 것이며, 육체적 의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더 나은 것들로 나아가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이 표상들에 대해 엄청난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짐승들로 가득 란 아마포 같은 그릇을 하늘에서 내려 보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것들을 잡아먹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무엇이든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를 꾸짖으시며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그 순간 베드로는 그림자가 진리로 변모되어야 하는 순간이 왔음을 깨달았습니다. 율법을 주신 분께서 돼지를 비롯한 여러 동물이 언제는 깨끗하고 언제는 불결하다고 보지 않으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복을 내리시고”(창세 1,31). 모든 피조물은 그것이 생겨났다는 사실로 그리고 그것이 창조되었다는 사실로,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아닐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존재의 본성에 적절한 것은 그것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율법은 “새 질서의 시대가 시작될 때까지”(히브 9,10) 남아 있는 표상이고 그림자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율리아누스 황제 반박』)

 

10,15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다

베드로가 환시를 보았을 때, 하늘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그에게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하고 대답했습니다. 율법으로 정결한 먹을거리와 불결한 것을 구별하신 그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피로 다른 민족들을 깨끗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코르넬리우스가 섬겼던 분이 이 하느님이었습니다. (이레네우스 『성경 주해 선집』)

 

10,16 세 번 거듭되다

 

삼위일체의 상징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열두 사도에 의해 세상의 네 지역 모두에 선포될 터였습니다. 아마포가 네 모퉁이로 하늘에서 세 번 내려앉은 것은 그런 까닭이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세 번 거듭된 그 광경은 삼위일체의 역사하심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신비 안에서는 세 번 물음이 제기되고 세 번 확증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삼중의 고백으로만 사람은 정화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세 번 받으며(요한 21,15-17). 세 번에 걸친 그의 대답은 일찍이 그가 주님을 부인함으로써 자신을 묶은 차꼬를 풀어 주었습니다.”

아마포 같은 그릇의 환시는 마침 알맞은 때 베드로에게 계시되었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신앙에 받아들이는 것을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가 깨닫도록 다른 민족 사람인 코르넬리우스가 그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코르넬리우스는 복음을 상징하는 그릇 안에 들어 있는 생물들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베드로도 이 그릇과 같아져야 한다는 것을 성령께서 확언해 주신 것입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순례자인 교회

세 번에 걸쳐 내려앉았던 그 그릇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교회가 믿음과 세례로 씻긴 순례자로서 여행길을 가는 이 세상의 일들이 끝나면, 행복하고 영원한 천상 거처가 주어집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세례의 씻김

어떤 것들이 깨끗하게 된 것은 한 번의 기원(祈願)이나 주 번째 기원으로 깨끗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 기원이 발해지지 않는 한 아무도 정화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안에서 정화되지 않는 한, 여러분은 깨끗해질 수가 없습니다. (오리게네스 『레위기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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