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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주해

10,34-43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설교하다

작성자semo|작성시간26.06.14|조회수1 목록 댓글 0
10,34-43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설교하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35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36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만민의 주님을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을
37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39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40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1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42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43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10,34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당신 뜻에 따라 응답하신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자비로우시다고 해도, 모든 기도를 언제나 다 들어주시지는 않으십니다. 세상에 안 청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분께서 모든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세상에는 죽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청원이 항상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면, 때때로 여러분의 청원이 들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왜 슬퍼하는 것입니까? (암브로시우스 『동생 사티루스의 죽음』)

 

덕의 길을 선택한 이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심을 명심하십시오.” 오히려 그분께서는 무수히 많은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당신께 기꺼운 행동을 하는 사람을 발견하시면, 그를 경멸하시기는커녕 당신의 특별한 섭리로 그를 기쁘게 해 주시며, 다른 사람들이 악에 기울어 있어 더욱 힘들게 덕의 실을 선택한 사람일수록 그에게 더욱 세심한 배려를 보여 주십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10,35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

 

하느님께서 의인을 보지 못하신 적은 없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바오로의 말처럼 “다른 민족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본성에 따라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을 실천하면”(로마 2,14). 그리고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그의 생각과 삶의 자세를 당신께 기꺼운 것으로 ‘받아 주십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도, 도둑과 창녀도 살펴 주신 하느님이시니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세심히 살펴 주시겠습니까? 그러면 분별 있고 개화된 사람이지만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들은 믿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말하는 분별 있는 사람 이에,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덕성이 있으며 마땅히 그래야 하듯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있어 탓할 데 없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이 사람이 하느님께 받아 들여진 것을 보십시오. 그가 천사의 말을 듣자마자 수긍한 것을 보십시오. ‘그러나 천사가 온다면, 어떤 사람도 믿을 것’이라고 여러분은 말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표징들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확실한데도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하느님을 경외한 코르넬리우스

루카는 코르넬리우스가 신으로 모시고 경외한 분, 율법과 예언서를 통해 말씀을 들은 분, 코르넬리우스로 하여금 적선을 베풀게 하신 분은 진정 하느님이심을 이처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레네우스 『이단 반박』)

 

10,36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인 평화

 

유대인들은 버림받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버림받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만민의 주님을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가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유대인들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코르넬리우스로 하여금 말하도록 시킨 이유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민의 주님’이라고 합니다. 또한 그는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몰랐으니까요.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모두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베드로는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인류와 화해하시기 위하여 주님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외아들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이 증언하듯이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믿는 이는 모두 그분의 이름 안에서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10,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하신 좋은 일들이 증거다

베드로는 자기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 행하신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들을 증거로 제시하며 그분께서 만물의 주님이심을 입증합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분은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일들 가운데서도 놀라운 것은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일, 곧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과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성령과 힘을 부음받으신 분

요한은 하느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셨으므로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 3,11). 또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라고 이야기하며 예수님을 선포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부으신 것은 기름이 아니라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교회가 세례 받는 사람들에게 바르는 기름은 이 선물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습으로 내려오신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때 그분의 몸, 곧 세례 받는 이들이 성령을 받는 가장 주된 곳인 당신의 교회를 예표하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부음받으신 것은 ‘하느님의 말씀’께서 육신이 되셨을 때, 다시 말해 선행으로 아무런 덕도 쌓은 바 없는 인간 본성이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해 동정녀의 태 안에서 말씀이신 하느님과 하나로 합쳐졌을 그때였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주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성령의 왕권

성경은 아버지와 같이 아들도 임금이라고 선포합니다. 또한 외아들께서 성령을 부음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고대에는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은 고귀함의 상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고, 기름부음을 받으면 사적이며 낮은 지위에서 다스리는 우월한 지위로 신분이 바뀌며, 이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겨진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뒤에는 보통 사람의 이름 대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로 불렸습니다. 이런 까닭에 인간들에게 성령의 고귀함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도록, 성경은 성령을 ‘나라의 표징’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셨다고’도 하며, 이로써 우리는 성령께서 하느님의 외아들과 나라와 영광을 함께 나누시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에서 기름부음을 받지 않은 자는 임금에 오르지 못했듯이, 성령의 고귀함이 함께할 때 아들의 나라도 있는 것임을 보여 주며 동등한 권능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불리십니다. 이 이름은 그분과 성령의 나누이지 않으며 나뉠 수 없는 결합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외아들이신 하느님은 ‘부음을 받은 분’이시고, 성령은 ‘부어지시는 분’이며, ‘부음을 받으신 분’이라는 칭호는 임금의 권위를 가리키고, 부어짐은 왕권의 표시이므로, 성령께서는 외아들의 존귀함 또한 함께 나누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신성의 고귀한 속성을 나타내는 이름이고 성령께서 이 속성을 나누시는 것이 드러났다면, 그 고귀함을 나누시는 분은 그것을 나타내는 이름 또한 함께 나누신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삼위일체』)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

사도가 세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버지와 성령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일이 많다고 해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로마 6,3)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를 이런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완전한 신앙고백입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이라고 한 말이나 이사야서의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 61,1)는 말, 또 시편의 “하느님께서 당신의 하느님께서 기쁨의 기름을 당신 동료들에 앞서 당신에게 부어 주셨습니다”(시편 45,8)라는 말에서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들을 근거로 세례 떼 성령의 이름만 불러도 완전한 세례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대 바실리우스 『성령론』)

 

성령으로 성화된 자녀들

그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그리고 성령 안에서 기름부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름부음받으심은 신성에 생소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라는 이름이나 그분을 따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이들도 그렇습니다.

피조물은 피조물을 거룩하게 만들지 못하며, 모든 피조물은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요한 17,19)라고 말씀하신 거룩하신 분에 의해서만 거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은 성령을 통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물론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느님 신성의 표지시며 만물을 거룩하게 하는 샘이십니다. 사도가 가르치듯, 우리는 성령의 거룩함 안으로 불렸습니다(2테살 2,13). 이 성화는 우리를 새롭게 하고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임을 다시금 보여줍니다. 성령 안에서 씻기어 새로 태어나고 새롭게 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니다. (바실리우스 『에우노미우스 반박』)

 

10,40 하느님께서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다

 

죽음으로 인성의 죽음을 정복하신 분

착한 목자께서 당신의 죽으로 죽음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양 떼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인성 안에서 고통의 몫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통해 사제이자 어린양이 되십니다. 죽음은 바로 영혼과 육신이 소멸하는 것이므로 자신을 이 둘, 곧 영혼과 육신에 결합시키신 분은 이 둘과 분리 되지 않으십니다. 사도가 이야기하듯이,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로마 11,29)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육신으로 죽음을 파멸시키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무효화되는, 곧 생명을 주는 본성 안에서 파멸이 무가 되는 것이며, 육신과 영혼에 일어난 그 일은 우리 모두의 본성에 유익이자 선물이 됩니다. 분리되었던 모든 것을 당신의 부활로 하나로 만드시는 분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당신의 몸은 땅의 배 속에 주시고 당신의 영혼은 아버지께 바치며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그분은 죽음에 드시는 동시에 죽음에 정복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육신은 썩지 않고, 영혼은 낙원으로 곧장 넘어가신 것이 그 증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사도 13,30)라고 말한 이는 이 사실을 논증한 것입니다. 그분께서 생명으로 돌아오신 것은 다른 사람의 권능에 의해 생명으로 돌아온 라자로 같은 이들의 부활과 다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께서는 영혼과 몸을 나누셨다가 다시 합치심으로써 당신과 하나된 이를 친히 다시 살리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인간 본성의 보편적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아폴로나리스 논박』)

 

10,41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들

 

부활의 증거

현세를 사는 존재만이 먹는 행위를 하므로,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써 육신의 부활을 증명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라자로와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을 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는 그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라고 이르셨(마르 5,43), 라자로는 당신과 함께 식탁에 앉게 하심으로(요한 12,2) 그가 실제로 살아났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키루스의 테오도레투스『에라니스테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먹는 것이다

그분께서 드신 것은 분명 부활 이전에 드시고 마시셨던 때의 질서에 속한 것이 아닌 새로운 음식이었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다르시지만 모든 면에서 우리와 비숫하셨던 그때, 그분께서는 우리처럼 잡수시고 마시셨습니다. 친히 육의 옷을 입으셨던 그분은 음식의 이로움도 기꺼이 취하셨고 그래서 기꺼이 우리처럼 배고픔도 느끼셨습니다. 그분은 부활 후에는 먹거나 마실 필요가 없으셨지만 사람들의 믿음을 위하여 그리고 절친한 제자들에게 증거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잡수시고 마시셨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후대의 사람들이 육신의 참본성을 믿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부활 후에 그분은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예전 같은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음식과 음료를 드셨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세베루스 『성경 주해 선집』)

 

10,43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다

 

예언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를 증언하다

악한 일을 저지른 것을 참회하고 주님의 이름을 믿는 자는 그의 진실한 마음이 받아들여져 되를 용서받습니다. 유대인들을 가르친 예언자들은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바탕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죄의 용서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예언자들이 증명한다는 것은 장차 누구나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장님 디디무스 『성경 주해 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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