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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주해

17,16-21 아테네의 철학자들과 만난 바오로

작성자semo|작성시간26.06.15|조회수0 목록 댓글 0
17,16-21 아테네의 철학자들과 만난 바오로


16 바오로는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그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
17 그래서 그는 회당에서 유다인들과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과 토론하고, 또 날마다 광장에 나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토론하였다.
18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몇몇 철학자도 바오로와 대담을 나누었는데, 어떤 이들은 “저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바오로가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이방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군.” 하고 말하였다.
19 그들은 바오로를 아레오파고스로 데리고 가서 물었다. “당신이 말하는 그 새로운 가르침을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있겠소?
20 당신은 우리가 듣기에 생소한 것을 전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싶소.”
21 사실 아테네인들과 그곳에 머무르는 외국인들은 모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

▶ 주해가들은 바오로가 아테네에서 한 설교를 서로 다른 두 세계관을 대비시키 것으로 봅니다. 두 세계관은 실재에 대한 성서적 이해와 주변 문화적 세계관입니다. 성서적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재, 특히 그분의 부활로 새로운 단계로 상승한 시점에 있고, 주변 문화권의 세계관은 정교하고 세련되었지만 우주를 초월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바오로가 아테네에서 만난 철학파인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는 이승에서 인간이 행복해지는 길을 추구했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유물론자들이었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스토아학파는 현자, 곧 인간의 가장 위대한 선은 덕스러운 영혼에 있다고 보는 이상적 현인이 되는 길을 추구했습니다. 이 학파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점은 다소 미흡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이승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죽은 이들의 부활 안에서 얻어지는 완전함을 지향한다는 베다의 지적은 인간의 온전성과 행복은 이승에서는 단지 시작 단계에 있을 뿐이라고 보는 시각으로의 대전환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인간의 사변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으며, 무익한 궁금증을 소일거리로 삼는 여가를 하느님의 선물을 받을 꾸준한 준비를 하는 시간으로 극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부활을 기이한 것으로 본 가장 큰 이유은 그들이 부활을 예수님과 더불어 새로운 신적 존재가 되는 것으로 오해한 데 기인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오해에도 불구하고 바오로가 그들과 나눈 대화는 비록 금방 열매를 맺지는 못했지만 마귀들에게 사로잡힌 한 도시를 정화하는 과정의 시작이었습니다.

 

17,18 몇몇 철학자가 바오로를 만나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몇몇 철학자

에피쿠로스학파는 그 스승의 어리석음을 답습하여 인간의 행복이 육체의 쾌락에 있다고 보며, 스토아학파는 행복이 정신의 덕에만 있다고 봅니다. 이 둘은 서로 무척이나 다르지만, 인간 존재는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사도의 생각과 정반대라는 점에서는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사람은 두 가지 다에서 행복해져야 함을, 그러나 그 행복은 이승에서나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활의 영광 안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존자 베다 『사도행전 해설』)

 

새로운 신

아테네 사람들은 ‘부활’이라는 말을 신적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여신이라는 존재들도 섬겨 버릇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을 ‘다이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의 도시들은 다이몬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행전 강해』)

 

17,21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듣다

 

유익한 한가함과 무익한 한가함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가 시간을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바치는 한, 우리는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 것들에 마음을 두고 육체적 즐거움에 빠져 지내는 사람이 하느님께 관한 설교에 주의를 기울이고 명상이라는 엄격한 수련을 오랫동안 훌륭하게 해낼 수 있겠습니까?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면 가시가 숨을 막는 것(마태 13,22)을 아시지 않습니까? 육체적 쾌락과 이승의 걱정 근심과 부, 영광 같은 것들이 바로 가시입니다.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떠나 격정도 멀리하며 한갓진 시간을 내어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온갖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정신에 어떻게 하느님에 관한 명상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파라오도 하느님을 찾으려면 한갓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런 말로 조롱했던 것입니다. “너희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너희가, ‘가서 주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다”(탈출 5,17). 한가한 시간을 내어 구원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평화로운 시간으로 삼는 사람에게 한가함은 선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반면 아테네 사람들의 한가함은 사악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대 바실리우스 『시편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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