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6. 14 주일예배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마태복음 5:7)
이 땅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간다. 한 끼 식사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돈을 어떻게 써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엄청난 돈을 소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는 하루에 자기 통장으로 얼마가 들어오는 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한푼도 쓰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부자들의 모습을 보며 비애를 느끼기도 하도 때로는 분개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그들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을 위해 불쌍하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요즈음은 사람의 인심이 참으로 각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쌍한 사람들을 보고도 불쌍하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니 개인주의의 만연으로 인해 오히려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되어버렸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아주 바보스러운 행동으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 그러면 ‘긍휼히 여기는 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자인가?
* ‘긍휼’이라는 단어의 의미
여러분!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가련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호랑이는 상처 입은 토끼를 보면 당장 잡아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사람은 다리가 부러진 제비를 보면, ‘놀’씨 성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 그 부러진 다리를 싸매어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긍휼히 여기다’는 말은 단순히 이런 종류의 불쌍한 처지를 보면서 직관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동정심’을 말하지 않는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이 속에 담겨 있다
‘긍휼(矜恤)’이라는 단어는 대단히 어려운 한자어다. 불쌍히 여길 ‘긍’(矜)에, 불쌍히 여길 ‘휼’(恤)이 합쳐진 단어이다. 따라서 긍휼이라는 단어의 한자의 뜻은 ‘불쌍히 여기고 또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사실은 ‘긍휼’은 헬라어로 ‘엘레에오’인데, 이것은 ‘불쌍히 여기며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긍휼’이라는 단어는 어려움에 빠진 자를 대상을 가리지 않고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즉 ‘긍휼’이란, 비참한 상태에 빠진 사람은 물론, 누가 볼 때도 당연히 벌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요 원수라 할지라도 그 사람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자비의 손길을 베푸는 행위이다.
* 긍휼의 최고봉 -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구속사건
오늘 우리는 이 ‘긍휼’이라고 하는 것을 이론적 차원에서, 논리적인 차원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긍휼히 여긴다’는 말의 의미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실제 삶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신 분이 계시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에게 긍휼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삶으로 보여주신 분이다.
여러분! 주님이 왜 이 땅에 오시어서 십자가에 달리셨는가? 주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실 이유가 전혀 없는 분이셨다. 아니 이 땅에 오셔서 형벌을 받아 죽어 마땅한 죄인들과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이유가 전혀 없으셨던 분이시다. 그런데 그런 주님이 이 땅에 오셨고, 죽으셨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죄로 인해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이 땅에 오셨고,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 받아 마땅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따라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바로 그 사건이야말로 우리들에게 긍휼의 의미를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알 수 없다.
“홀아비의 마음 과부가 안다.”는 말처럼 긍휼을 받은 자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와 불쌍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용서함 받고 의인(義人)이 된 우리들이 우리의 눈길과 우리의 손길을 주변에 돌려서 과거의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그 사람들을 향해 불쌍히 여기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자비의 손길과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긍휼을 베풀어야 할까?
1.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긍휼은 내가 가진 적은 것을 나누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 주위에는 육신의 문제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이 있다. 전쟁과 기근 속에서 신음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많고,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많다. 또한 인간관계의 문제로 고통당하는 사람(예: 누가복음 19장 삭개오)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참된 긍휼’은 고난당하는 이들의 고난이 육신적인 고난이든 물질적 고난이든, 정신적 고난이든,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 간에 ‘고난당하는 자들을 향하여 자비의 손길을 베풀어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우울해 보일 때, 말을 걸어준다든가, 말없이 그저 손을 꼭 잡아주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행동이 동반될 때, ‘참된 긍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긍휼’은 하나님 안에서 절대적인 부요함을 누리는 자만이 베풀 수 있다.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상대적인 빈곤감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긍휼을 베풀 수 없다.
반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부요함이 무엇인지 알고 누리는 사람은 비록 가진 것이 적다할지라도 적은 중에서도 자신의 것을 나누어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실제적으로 도와준다.
예) 마가복음 12:41-44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
구제 연보궤에 헌금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모으고, 그들 중 두 렙돈을 드린 가난한 과부가 어떤 누구보다도 더 많은 헌금을 했다고 칭찬하셨다.
그러면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가 예수님께 칭찬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헌금에 대한 액수가 아니라 헌금을 드리는 그녀의 마음 자세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의 일부를 헌금했지만,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
이스라엘에서 고아나 과부는 경제력이 없는 가난한 계층으로 보호대상자 1순위였다. 따라서 살아가기도 어려웠던 그 과부는 도움을 받을 우선 대상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1000원~1500원)을 구제 연보궤에 헌금한 것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과부의 아름다운 이웃 사랑, 즉 긍휼은 개인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를 밝히는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주님은 우리의 적은 나눔에 역사하셔서 기적을 일으키신다.
예) 요한복음 6:1-14 오병이어의 기적
그러므로 여러분! 내가 가진 것이 적다고 남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을 주저하지 말고 우리의 적은 것을 나누어 주님께 받은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다른 사람들에 대한 최고의 긍휼은 <복음 전파>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결국은 사망의 길이지만 그것도 모르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도 모르고, 천국도 모르고, 멸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가까이는 내 가족과 친구 가운데도 존재한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불쌍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긍휼은 무엇일까?그것은 바로 ‘복음전파’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생복락을 보장받았고 천국의 기쁨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생각할 때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떤가? 주님처럼 저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여러분 속에 있는가? 즉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는가? 그래서 기도하고 있고 전도하고 있는가?
여러분! 전도를 통해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목회자나 성도 모두의 바람이다. 그러나 전도의 목적이 단지 교세를 확장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전도의 올바른 동기가 아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전도의 동기, 선교의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내가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의 감정 때문에 긍휼을 베풀기를 주저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또한 지금 이 순간 누군가를 생각하면, 아니 그 이름 세 글자만 생각해도 치가 떨리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이 망해버리든지 아니면 콱 꼬꾸라져서 죽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 드는 그런 사람은 있는가? 그 사람이 불행 당하면 쌍수를 들고 기립박수라도 하고 싶은 그런 사람은 있는가?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라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긍휼을 받아 누리라고.....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은혜와 복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그러면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은 무엇인가?
☞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5:7의 말씀처럼 ‘주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한 복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때 우리의 모든 죄악과 어려움과 고통은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회는 너무나 각박해졌다. 우리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고 몸서리 처지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의 만연으로 다른 사람들의 아픔이나 병들어 가는 이 사회에 너무나 무관심하다. 오직 사람들의 관심은 혼자만 잘 사는 데에 있다. 그래서 지금 이 세상에는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버려져 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과 병든 세상을 고치시기 위해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매정한 세상, 각박한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먼저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돕기 위해 내가 가진 적은 것을나누라. 또한 예수님을 모르고 멸망의 자리로 나아가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라. 특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용서하기 위해 기도하시기 바란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긍휼의 마음으로 그들을 용서하기 바란다.
그럴 때 비로소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하나님 나라의 평강과 희락이 넘치게 될 것이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이다.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