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부흥케 하소서!! 합 3:1-3. 주일 낮 6/7
저는 오늘 창립 57주년을 앞두고 회복과 부흥이라는 주제로 한 주간 여러 교우들과 함께 기도하려고 합니다. 이기간 동안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생수가 흐르듯 흘러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부흥이란 말을 사전에서는 “쇠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남, 또는 다시 일어나게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revival’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다시 살아나다' '회복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흥은 죽었던 영혼이 다시 깨어나고, 살아나고,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낙심했던 자들이 새 힘을 얻고, 절망 가운데 있던 자들이 소망을 발견하고, 어둠 가운데 있던 자들이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무능력하던 자들이 세상에 소망을 주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 하박국은 지금부터 2600년 전의 선지자입니다. 당시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입니다. 그는 25세에 왕이 되어서 11년간 통치하는 동안 하나님 앞에 많은 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성경을 읽어주면 칼로 잘라 불에 던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유다 나라에는 우상이 가득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패역한 모습 뿐 이었습니다. 경건한 자들이 핍박을 받고, 악한 사람들이 흥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하박국은 선지자로소 예루살렘 안에 만연되어 있는 악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의 도시가 이렇게 죄악으로 뒤덮일 수 있습니까?‘ 하고 여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통하여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큰 문제입니다. 차라리 몰랐다면 나을 뻔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도덕적으로 너무 병들어서 하나님께 여쭈었더니 불치병이라 이제 곧 바벨론 군대를 보내어 멸망시키려 한다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하박국은 3장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그래서 그 심정을 고백하기를 1장14절에서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하고 기도합니다. 이 답답함을 가지고 기도할 때 하박국에게 하나님이 다가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택하신 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그 백성을 구하시겠다. 그러므로 의인은 어떤 경우라도 낙심치 말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멧세지를 듣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는 속히 그날이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바로 오늘 읽은 ‘부흥하게 하옵소서’라는 말입니다. 2절을 보십시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 내시 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영어 성경에는 ‘해가 지기 전에 이루어주시옵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천천히 부흥을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불의가 가득하고, 악이 가득한 오늘의 삶의 자리에 속히 부흥이 임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부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의 부흥, 교회의 부흥, 민족의 부흥이 무엇입니까? 숫자가 늘어나고 예산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고는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없다는 고백과 함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부흥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하박국 선지자는 무엇을 꿈꾸었을까요? 바로 주의 일의 부흥을 꿈꾸었습니다. 다른 부흥이 아니라 주의 일의 부흥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번 새벽기도회에서 구해야 할 부흥은 단순히 교회가 양적으로 커지거나, 사람이 계획한 어떤 대단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박국이 부르짖은 부흥은 철저히 ‘주의 일’이 수년 내에 나타나는 부흥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주의 일’의 위대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세상의 일, 사람이 하는 일을 보십시오. 오늘날 인간의 과학과 기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람의 일의 부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시작된 PC, 구글로부터 시작된 포털검색, 애플로부터 시작된 스마트폰, 그리고 오픈AI의 Chat GPT로부터 시작된 AI... 정보화시대의 빠르고 눈부시게 변화되어온 세상의 변화를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리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어도 영혼을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최근 우리가 목도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 최첨단의 예측 조사라며 엄청난 돈을 들여 만든 출구조사 프로그램조차, 결국 실제 결과 앞에서는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무기력하게 무너졌습니까? 이것이 인간이 자랑하는 지혜의 한계요, ‘사람의 일’의 실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부흥은 이런 사람의 일의 부흥이 아니라 주의 일의 부흥입니다.
Ⅰ. 그러면 부흥을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부흥을 갈망하고 기대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박국 선지자가 살던 시대는 불의와 패역이 가득한, 영적 겨울과도 같은 암흑기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절망뿐이던 그때, 하박국은 과거 역사 속에 일어났던 '하나님의 소문'을 듣게 됩니다. 이 소문은 그로하여금 현실을 극복하는 회복의 시작입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에서 백성들을 먹이시며 구원하셨던 위대한 행적들을 다시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기서 ‘놀랐다’는 것은 단순한 감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거룩한 위엄 앞에 압도되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엎드러졌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흥의 시작은 어디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분의 소문 앞에 우리의 심령이 다시 한번 전율하는 것입니다.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크심을 깨달을 때, 우리의 얼어붙은 신앙이 깨어납니다. 그리고 여전히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일하심 앞에 지금의 현실 앞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박국처럼 부흥을 갈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모하고 기대하는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토미 테니라는 목사님은 “갓 캐처스” 책에서 부흥을 태동시키는 힘을 ‘배고픔’이라고 정의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목마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기대하며 사모하는 태도입니다. 시편 81:10절에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말씀하십니다. 조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자기가 낳은 새끼가 다 소중하지만 입을 크게 벌리는 새끼에게 먼저 먹이를 넣어 준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망하고 낙심한 자에게는 깨달을 때 까지 두고 보십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제비 새끼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채워주십니다. 이제 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 앞에 오늘의 현실 앞에 무력하고 체념하며 살았던 자신을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로,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탁월한 평신도 저술가 C.S. 루이스는 “타락한 시대에서는 죄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한 몸부림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합니다. 시대가 타락할수록 죄에 대해서 둔감해지고, 죄에 대한 진지한 회개가 없다는 말입니다. 부흥은 언제나 눈물의 회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회복을 넘어 놀라운 부흥을 갈망합니다. 그렇다면 그 부흥은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바로 ‘회개’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그동안 마음이 완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자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가슴이 찔려 외쳤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체면도, 고집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철저히 무릎 꿇으며 가슴을 찢는 통회의 역사,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가 경험한 폭발적인 부흥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참된 회복과 부흥은 우리의 환경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완악했던 내 마음이 먼저 깨어지는 것입니다. 내 죄를 붙잡고 통곡하며, “주님, 내가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파산 선언을 할 때, 비로소 하늘의 문이 열리고 성령의 새 바람이 불어옵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살 길입니다. 오늘 이 시간, 굳어버린 우리의 마음을 찢고 주님 앞에 진정으로 돌이킵시다. 우리의 철저한 회개를 통해 이 제단 위에 진정한 회복과 뜨거운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면 끊임없이 눈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넘어질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과하면 정결케 됩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는 방법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의 눈물은 더러운 마음을 새 마음으로 바꿔줍니다./ 회개의 눈물은 탄식을 변하여 새 노래, 찬양으로 바꿔줍니다./ 회개의 눈물은 절망을 변하여 새로운 희망으로 바꿔줍니다./ 회개는 진정한 부흥의 전제 조건입니다.
셋째로, 하나님만이 우리의 전부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3:17절은 절망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기에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없다’라는 단어입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미래의 소망도 통째로 사라져 버린 완벽한 영적·육적 파산 상태입니다. 불평과 의심이 가득했던 지난날의 하박국이었다면, 이 ‘여섯 번의 없다’라는 현실 앞에서 깊은 비관과 좌절에 빠져 완전히 무너졌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인생에 ‘없다’라는 결핍이 찾아오면 원망하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어떻게 이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섰습니까? 그는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내 삶의 모든 소유가 사라질지라도, 나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한 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는 환경을 보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철저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자, 소유의 유무를 뛰어넘는 영적인 눈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18절에 위대한 반전의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비관론을 이기는 힘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뢰’에서 나옵니다. ‘없다’라는 현실에 갇히지 마십시오. 다 없어져도 우리에게는 구원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 하박국처럼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감사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모든 절망은 떠나가고 진정한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시작될 줄 믿습니다.
Ⅲ. 수년내에 부흥케 하소서!!
오늘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나아가는 이 복된 시간에, 1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붙잡아야 할 기도의 비밀을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은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낯선 ‘시기오놋’이라는 단어는 본래 음악적 용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열정적이고 격렬한 곡조’, 또는 ‘예측할 수 없이 변화무쌍하고 빠르게 요동치는 리듬’을 뜻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 하박국 선지자가 마주한 현실이 바로 이 시기오놋과 같았다는 뜻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불의가 판을 치고, 나라가 망해가는 예측 불가능한 절망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가슴이 찢어지고 요동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어떻게 그 깊은 침체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부흥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까? 바로 그 요동치는 ‘시기오놋’의 현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은 자신의 통제할 수 없는 불안과 아픔, 격렬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 박자 그대로 하나님 앞에 쏟아놓았습니다. 내 삶의 리듬이 깨어지고 요동칠 때, 낙심하여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그 거친 호흡 그대로 기도의 자리에 맞추어 나아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내 삶의 부서진 리듬을 하나님의 주권에 맞추는 작업입니다. 세상의 거친 파도에 내 마음이 시기오놋처럼 요동칠 때, 기도의 무릎을 꿇으면 그 격렬한 고통의 곡조가 어느새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찬양과 열정의 곡조로 변화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박국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껴안다’, ‘포옹하다’, 또는 ‘붙잡고 씨름하다’라는 아주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하박국 선지자의 삶과 그의 기도 여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하박국은 왜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통받는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보며, 하나님께 부르짖고 질문했던 선지자입니다. 이름 뜻 그대로 하나님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격렬하게 씨름한 사람입니다. 동시에 그는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슴에 꼭 껴안고, 그들의 아픔을 대신해 하나님 앞에 나아간 중보자였습니다.
결국 처음에는 거친 의문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하박국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사랑을 깨닫고 그분의 품에 온전히 안기게 됩니다. 요동치는 현실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품에 안고 놓지 않았던' 그의 이름처럼, 이번 한 주간의 새벽기도회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꼭 붙잡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한 주간 새벽기도회로 모입니다. 내 삶이 아무리 침체되어 있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이 요동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시기오놋의 처지를 그대로 가지고 기도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우리가 부르짖을 때, 요동치던 우리의 환경은 변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영혼이 깨어나며, 하박국처럼 “오직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는 위대한 부흥을 선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번 한 주간, 기도로 우리의 무너진 리듬을 회복하고, 침체를 넘어 찬란한 부흥의 자리로 함께 일어서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