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게는 조금도 변함이 없으시니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크게 기도할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닌가? 그에게는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의 뜻대로 기도하면 이루어 주실 것이 확실하다. ‘기도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마음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원하시는 뜻을 붙드는 것이라’라고 루터가 말했다.
이것으로 인해서 기도의 목적에 대하여 몇 가지 고려하게 된다. 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에게 받기 위해서 기도한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한 가지 목적이지만 결코 기도의 중요한 목적은 아니다. 더욱이 기도는 인간 면에서 고려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편에서 고려하는 것이 심히 필요하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더러 기도하라고 명령한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하나님이 친히 존귀함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당신은 참으로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계시는 분(사 57:15)이심을 우리로 인정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우리가 당신이 우주적으로 주관하심을 인정하기를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 비를 달라고 간구할 때에 엘리야가 다만 하나님이 자연 세력을 조관하심에 대하여 고백한 것 뿐이다. 죄인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위해 기도할 때에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 2:9)라는 말씀을 인정한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에는 우리는 그가 전 세계를 주장하심을 말한다.
또 하나님이 우리로 당신을 경배하며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진정한 기도는 예배 행위로 알기를 원하신다. 다음과 같은 태도들을 지닐 때에는 기도가 예배하는 행위이다. 기도는 영혼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것이다. 기도는 그의 거룩하고 크신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기도는 그의 착하심과 은혜와 권능과 불변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도는 그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의지에 복종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성전을 가리켜서 제사하는 집이라고 하시지 않고 기도하는 집이라고 부르신 것이 기도와 관련해서 하신 말씀으로 주의하는 것이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
또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한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에 우리는 그를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겸손히 신성한 존재에게 간구할 때에 우리가 온전히 그의 능력과 자비를 의지한다. 하나님께 축복을 구할 때에 그는 모든 좋은 것과 완전한 은사의 주인이요 근원이심을 인정한다. 기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기도하므로 신앙이 역사하게 하는 사실에서 더 알 수 있고 또 우리의 마음으로 신임하는 것처럼 그에게 영광이요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다.
둘째로,
기도는 우리가 은혜에서 성장하는 방편으로 우리의 신령한 축복을 위하여 하나님이 제정하신다. 우리가 기도의 목적을 알려고 할 때에 기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받는 방편으로 알기 전에 우리가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로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게 하신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이요 그의 심히 장엄하심을 깨달으므로 자기의 허무함과 무가치함을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이 기도로 우리의 신앙을 연단하게 하신다. 신앙은 말씀에서 생기나(롬 10:17) 기도로 연단함을 받는다. 그런고로 믿음으로 하는 기도라는 성구를 기억한다. 또 기도는 사랑을 실천으로 옮기게 한다. 외식자에게 묻기를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불러 아뢰겠느냐”(욥 27:10) 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오랫동안 그를 떠나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저희가 자기들의 짐을 그에게 맡기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사랑으로 실천에 옮기게 할뿐 아니라 직접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시 116:1).
또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가 발견한 축복의 가치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제정하신 것이요, 또 우리가 간구한 것을 주신 때에 더 기뻐하게 하기 위함이다.
셋째로,
기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기 위해서 제정하셨다. 이 책의 앞에 있는 장들을 주의해서 읽은 사람들에게는 난제가 생길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창세전에 이 세상에서 될 모든 것을 다 작정해 두셨다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무엇인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는 말씀이 사실이라면 기도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직접 대답하기 전에 물어봐야 될 이유가 많은 것을 지적해야 되겠다. 하나님께 나갈 필요가 무엇이며 그가 이미 알고 계시는 것을 말할 필요가 무엇인가? 그라 벌써 다 알고 계심을 알면서 내게 필요한 것을 그 앞에 널어놓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작정해 놓았는데 무엇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고 하셨는데 기도는 하나님에게 무엇을 알리려는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그가 아시고 계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께 제공하기 위해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함에 대해서 그에게 고백으로 계획된 것이다.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와 같이 이것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것과 같지 않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시는 은사를 간구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주실 축복을 위하여 감사하기를 기대하시는 것과 꼭 같이 우리가 간구하는 것으로도 찬송하는 것이 되게 하셨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될 모든 일을 다 예정하셨고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신다면 기도는 무익한 일이 아닌가? 이런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시기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하신다. 또 “항상 기도하라”(눅 18:1)고 하셨고 더욱 성경에 말씀하기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5-16)라고 했고 모든 일에 우리의 완전한 모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기도의 인물이었다. 그러니 기도가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도 이것은 우리가 처음에 질문한 것의 난점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관과 신자의 기도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의 목적을 변하려는 것도 아니요 그로 하여금 새 목적을 제정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들은 생기게 작정하셨으나 역시 그것들이 되게 하는 방편도 제정했으니 그 기도를 통하여 되어 지도록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으나 그들이 복음 전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도록 작정하셨다. 그러면 복음은 주님의 영원한 뜻을 성취하시는 방편으로 작정하셨고 기도는 또 다른 방편이다. 하나님은 목적과 함께 수단도 작정하셨으니 기도는 방편들 가운데 하나이다.
당신의 백성이 드리는 기도도 그의 영원한 작정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고로 기도가 무의미한 대신 하나님이 당신의 작정을 성취하는데 사용하시는 방편을 가운데 하나이다. 참으로 모든 것이 우연히 또는 숙명적 필요에 의하여 생긴다면 그런 경우의 기도는 아무런 도덕적 효과나 아무런 소용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가 하나님의 지혜로 지도함을 받아들이게 되니 기도는 여러 사건들의 차례에 들어 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들이 되게 하기 위해 하는 기도가 무의미하지 않은 것을 성경이 분명히 가르쳐 준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거의 비를 주실 때임을 알았으나 그는 곧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약 5:17, 18).
다니엘도 예언서에서 포로 생활이 70년 동안 계속 될 줄 알고 있었으나 70년이 거의 다 된 때에 그는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했다(단 9:2,3).
하나님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렘 29:11-12)라고 했다.
또 한 번 에스겔 36장에 분명하고 적극적이요, 무조건적 언약이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미래에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 장 37절에 말하기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찌라”라고 하셨다.
여기 기도의 목적이 있으니 곧 하나님의 뜻이 변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좋은 때에 당신의 완전한 방법에 의하여 성취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확고한 신앙으로 어떤 것들을 위해서 간구할 수 있음은 하나님이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뜻을 당신이 정해 놓은 방편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요 또 당신의 조건 아래서 즉 언약과 간구라는 [방편]과 [조건]에 의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유익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가 죽었다가 부활하신 후에 성부께서 자기를 존귀케 하실 것을 확실히 아시지 않았는가? 정녕 그렇게 아셨다. 그래도 바로 이것을 그가 간구하신 것을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라고 한 말씀에서 발견한다. 당신의 백성 가운데 한 사람도 멸망할 수 없음을 아시지 않았는가? 그래도 그가 아버지께 간구하시기를 저희를 보존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셨다(요 17:11).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으며 우리가 부르짖는다고 변하실 수 없다고 말해야 된다. 하나님이 어떤 백성에게 유익되게 하실 생각이 없을 때에는 그에게 가장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이 가장 열심 있고 성가시게 하는 기도를 하여도 그의 생각을 돌이킬 수 없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치라”(렘 15:1).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드린 기도가 이와 같은 경우이다.
우리의 기도관(觀)을 고쳐서 기도에 대한 성경 교훈과 일치시킬 필요가 있다. 보편적인 사상으로 보이는듯한 것은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내가 원하는 것을 그에게 간구하며 내가 간구한 것을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존경과 고귀함을 저하시키는 생각이다. 흔히 일반적인 사상과도 같이 하나님을 우리의 종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니 그로 하여금 우리의 심부름을 하며 우리를 기쁘게 해 주며, 또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게 한다. 그런 것이 아니라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요 내게 필요한 것을 고하며 내 행로를 그에게 맡겨서 당신이 합당하게 생각하는 대로 다루시도록 그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뜻을 그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이요 전자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의 뜻을 내 것에 복종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라는 것이 기도의 정신이 되기 전에는 아무런 기도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기도하는 백성에게 복을 주실 때에 기도 때문에 방향을 돌린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하여 또 당신의 주권적 의지와 기쁨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 무슨 목적으로 기도를 하는가 하면 그 대답으로 이것은 당신의 좋은 축복을 자기의 백성에게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제정하신 수단과 방편이다. 그가 목적하셨고 제정하셨고 또 저희와 언약했을지라도 오히려 저희가 그를 구하게 될 것이요 또 받을 것이요 간구하는 것이 의무요 특권이다.
그들이 기도의 영을 받았을 때엔 하나님이 간구한 것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 간구한 것들은 항상 하나님의 뜻, 곧 내 원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하는 마음으로 간구해야 된다 (John Gill).
위의 구별은 우리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실제상 매우 중요하다. 다른 많은 것들과 같이 신자들로 번민케 하는 것중 한 가지는 응답되지 않은 기도일 것이다. 저희가 무엇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했다. 자기들이 알기에는 믿음으로 기도했다. 즉 저희가 주님께 간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고 열심히 계속해서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다. 많은 경우에서 그 결과는 소망이 절망으로 변해서 기도 생활이 등한해질 때까지 기도 응답에 대한 신앙이 약해진 탓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제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다 응답되었다고 말할 때에 독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인가? 그래도 우리는 서슴지 않고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에 우리는 기도의 정의(定義)로 돌아가서 그것을 되풀이해 보아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또는 필요한 것이나 또는 다른 것을 말하고 우리의 생활을 그에게 맡기고 또 모든 것을 당신이 좋으실 대로 처리하시게 맡겨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합당하게 보시는 대로 기도를 응답하실 것이다. 또 때때로 인간이 보기에는 가장 합당한 것 같은 것의 정반대로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그래도 우리의 필요한 것을 전연 그의 수중에 맡겨 둔다면 그가 어김없이 응답하실 것이다. 실례를 두어 가지 생각해 보자.
요 11장에 병든 나사로에 대한 기록이 있다. 주님이 그를 사랑하셨으나 베다니에 계시지 않았다. 그의 누님들이 예수님에게 그의 형편을 알리기 위해서 사람을 보냈으나 그 사자가 주님에게 어떻게 호소한 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렇게 말한 것뿐이고 나사로의 병을 고쳐 달라고 하지 않았다. 베다니로 곧 가시자고 요청하지도 않았다. 저희는 단순히 저희의 요구를 주님 앞에 알리고 그가 좋게 생각하시는 대로 돌보시도록 그에게 맡겨 버렸다. 그때에 우리 주님의 답변이 어떠했는가? 그가 저희의 호소에 응하여 무언의 요청에 답을 하셨는가? 정녕 저희가 희망한 대로는 아닐지라도 요구를 들어 주셨다. 그가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요 11:6) 유하시고 나사로를 죽게 버려두시는 것으로 답하셨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후에 그가 베다니로 내려 가셔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셨다. 여기서 이 경우에 언급하는 목적은 신자가 하나님이 필요할 때에 그 신자에게서 호응하시는 방법을 강조할 것이다.
고후12장을 살펴보자. 사도 바울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특권을 받아서 낙원에 올라가서 죽음의 저편에 대하여 아무도 듣거나 보지 못한 것을 그는 듣고 또 그의 눈으로 보았다.
그것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계시였다. 그는 특별한 경험으로 교만해 질만한 위험에 당면했다. 그런고로 그의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셔서 그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셨다.
바울 사도는 자기에게 요구되는 것을 주님 앞에 고하여 그것이 자기에게서 없어지게 해 달라고 세 번 기도했다. 그의 기도가 응답 되었는가? 그가 원한 대로는 되지 않았을지라도 분명히 응답됐다. 가시는 없어지지 않았어도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그 고통은 없어지지 않았으나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셨다.
우리의 특권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알리는 이상의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백지 수표를 주시고 거기에 금액을 기입하라고 하신 것을 되새기는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전체적으로 포함되어있고 또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을 하나님께 간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잘 알기 위하여 성구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한 다음에는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는 말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언약을 하나님이 제한하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니 거기에 그의 뜻과 우리의 것이 사상적으로 공통될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생각으로 우리의 마음에 채워 주시며 그의 소원이 우리가 따라가야 될 우리의 소원이 된다.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과 신자의 기도가 일치된다. 만일 우리가 그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간구하면 그가 들으실 것이나 만일 우리가 그렇게 간구하지 않으면 그가 우리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으시니 이는 야고보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그러나 주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23)고 하셨으나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이 약속에 의하여 자유행동을 하게 하지 않았다. 주님의 이 말씀도 사도 요한의 말씀과 같은데 그 말씀은 곧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확실히 그것은 기도하는 형식 이상 훨씬 뛰어난 것이니 그 형식은 다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말로 우리의 기도를 끝맺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애원자인 것 같이 믿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가 원하실 것을 위해서만 간구할 수 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자기의 뜻은 버리는 것이다.
이제 기도의 정의를 확대시켜 보자.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하는 태도 이외에 다른 것은 아니니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이다. 기도는 피조물의 허약 아니 무력함을 고백하는 태도이다. 기도는 우리의 필요한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기도에 대한 것으로 전부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기도의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간단한 문장이나 혹은 몇 마디의 말로 기도의 정의를 완전히 할 수 없음을 쉽게 인정한다. 기도는 인간의 태도와 행동이요, 따라서 신령한 요소도 있다. 그래서 그것을 철저하게 분석할 수 없는 동시에 그렇게 하려는 시도는 불경건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시인하면서 다시 주장하기를 기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이다. 그런고로 기도는 하나님이 지시하는 것의 바로 반대되는 것이다. 기도는 의지하는 태도이므로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의지하는 일이요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기쁨에 의해서 우리를 지시하시는 대로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주심을 만족하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고로 이런 정신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다 응답을 받는 것이 확실하다고 우리는 말한다.
이제는 여기에 우리가 처음 질문한 것에 대답과 난점으로 보이는 것의 성경적 해결책이 있다. 기도는 하나님에게 당신의 목적을 변하거나 새로 그것을 작정하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를 취하고 그 앞에 우리의 요구를 알리고 그의 뜻에 합하는 것들을 간구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주권과 성도의 기도 사이에 아무런 불건실한 면이 없다.
결 론
이 장의 결론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언급한데 대하여 독자들이 그릇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주의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기도의 제목에 대한 성경 교훈의 전부를 간소화 하거나 일반적으로 기도에 대한 난제를 논란하려고 하지도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주권과 신자의 기도와의 관계를 다소 고려하기로 제한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것은 주로 신신학적 교훈의 대부분을 항변하는 것이니 그 교훈은 기도의 인간적 요소를 매우 강조함으로 신령한 요소는 거의 전적으로 잊어 버렸다.
렘 10:23에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잠 16:9)라고 했으나 오히려 사람이 여러 가지에 있어서 불경건하게 주님을 당신의 길로 지도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또 그가 의당하셔야 될 것으로 생각해서 만일 자기가 이 세상일과 교회의 일을 지도하기만 한다면 그것들을 자기가 매우 다르게 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영적 이해를 약간이라도 하는 사람은 누구나가 현대에 인간이 좌우하는 기도회들의 많은 경우에서 이런 정신으로 지도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만한 사람들은 겸손하게 무릎을 꿇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을 깨닫기가 더디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하는 정신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흔히 잘못하는 대로 전능자를 지도하여 의당 그가 하실 것을 하시게 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보는 사람으로 만일 하나님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진 긍휼의 반을 가지셨다면 모든 일이 다 빨리 오게 될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있는 옛 사람의 교만한 성품이다.
이 장의 중요한 목적은 기도할 때에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킬 필요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첨부해야 될 것이 있으니 기도는 경건한 행위 이상의 것이요 기계적으로 하는 기도 보다 그 각도가 훨씬 다른 것이다. 기도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제정한 방편으로 이에 의하여 우리가 그의 뜻대로 간구한다면 그것들을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을 수 있다. 이상에서 말한 것에 의하여 그 쓴이와 그 독자가 다 “주여 ……기도를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라고 하는 것 이상의 열심히 외치지 않으면 공론에 불과할 것이다.
[출처] 하나님의 주권과 기도-아서핑크 (SDG 개혁신앙연구회) |작성자 라벤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