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개핀 목사님의, '구속사와 오순절 성령강림'이라는 책을 읽고 한 페이퍼 인데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개혁주의적 성경해석을 보여주는 글이라 처음으로 글을 올려봅니다. 저 자신이 목사님의 책을 통해 성령에 대한 바른 개혁주의적 관점을 적립하게 되었고 또 다른 성경을 보는데에도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무식하여 요약하는 것도 많이 부족한데 아무쪼록 읽으시는 분들에게 오순절 성령 강림의 진의를 알아가시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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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성격과 그 의미
사도행전 2장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Ⅰ. 서론
성령에 대한 대다수 언급은 신약 성경 후반부에서 발견된다. 대략 80%퍼센트가 사도행전과 서신서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고, 상대적으로 복음서에 나타나는 빈도는 약하다. 복음서에서는, 성령의 현재 사역에 대한 한, 예수님과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역사에 강조점이 있다. 대신 제자들에게는 성령이 주로 약속의 문제로서, 성령의 은사는 아직 미래의 은사로 남아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보면, 성령이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신자들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성령의 현재의 사역에 강조점이 있다. 이러한 패턴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도출한다.
“신약 성경 책들이 이러한 차이점 곧 결정적으로 강조점이 제자들에게 옮겨진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인데, 이 사건은 성령의 세례나 성령의 부어지심이나 성령의 선물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된다. 따라서 고찰해 볼 질문은 ‘오순절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곧 ‘성령의 선물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a)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그리스도, (b)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교회 그리고 (c)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신자의 경험이라는 관계속에서 답을 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그리스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사역 전체는 오순절에 성령의 선물(성령 세례)를 베풀고 전하는 것이었다. 이 기본적인 전제는 (a) 약속, (b) 성취라는 이중의 각도에서 볼 때, 더 잘 전개되고 평가될 수 있다.
1)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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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절 |
본문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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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3:11 |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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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8 |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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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3:16 |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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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33 |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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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5 |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
성경은 성령의 오심에 대해 여러 차례 예언하고 있다. 4복음서가 세례 요한의 예비 사역과 선포를 기록하고 있는 방식, 특히 요한이 자신이 자신과 오실 메시아 사이를 대조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요한복음 1:29-34절에 나타나 있는 세례 요한의 증언의 핵심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사역은, 요한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도록 보냄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로 오신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다.
요한복음 14-16장은 오순절 날에 오실 성령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니리”(요14:1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요15:26),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요16:17). 예수님은 오순절 날이 이르기 며칠 전에(행1:15),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2) 오순절 성령 강림의 성취
(1) 베드로의 설교(행2:14-39)
베드로가 오순절에 한 설교(행2:14-39)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성령의 강림을 설명한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구약에서 요엘 선지자에 의해 예언되었었는데(욜2:28-32), 이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함으로 성취되었다고 베드로가 증거하였다(행2:17-21).
여기서 베드로는 요엘서의 “그 후에/ 이 일들 후에”(meta tauta)를 “말세에”(en tais escatais)로 대체시키면서, 오순절 성령 강림이 하나의 종말론적 사건으로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심에 따른 일련의 계속되고 점진적인 하나님의 구속사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베드로가 전하는 설교의 요점은 32절과 33절에 나타나 있다.
사도행전 2장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성령을 부어 주심은 아버지의 약속이고(행1:4; 눅24:49), 따라서 옛 언약 아래에서 완전한 성취를 고대했던 그 본질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획기적이고도 결정적인 사건들, 특히 그 중에서도 그분의 부활 및 승천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개핀 교수는 이 사건들이 상호간에 유일무이한 중요성을 갖고 있어서 어떤 사건도 다른 사건들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요한복음 16:7에서는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보혜사”성령이 오게 되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임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떠나가시는 것, 곧 “아버지께로 감”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직접적이고도 최종적인 조건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구약과 복음서의 예언의 성취로서 구속사의 큰 흐름에 자리 잡고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2) 바울의 관점(고전15:45b)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 절을 주의 깊게 해석해 보면 다음 두 가지를 알게 된다. 첫째, ‘영’(프뉴마)은 성령의 위격을 가리킨다. 둘째, ‘되었나니’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부활 시에, 혹은 좀 더 광범위하게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셨을 때 된 일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사도는 부활을 기점으로 높이 되신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 어떤 동일시, 혹은 연합이나 일치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기독론과 성령론은 물론, 신약 성경의 나머지 상당 부분의 교훈도 주관하는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개핀 교수는 이 해석이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의 위격 구분을 부정하거나 모호하게 했다고 받아들이는 일이 없기를 염려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본질적 신성을 근거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 안에서, 즉 ‘마지막 아담’혹은 ‘둘째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경험하는 바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바울의 관점은 그리스도께서 무엇이 ‘되셨는가’에 눈길을 두는 역사적인 관점이다. 그가 바라보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하나 됨 곧 동일화는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경륜적이고 기능적이고 종말론적인 동일화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성령을 선물해 주신 날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주님께서 친히 ‘살려 주는 영’으로서 주님의 교회에 오신 날이기도 하다. 오순절에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은 곧 그리스도 자신 곧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신 것이다. 요한복음 14:12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심’을 전제로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그것은 동시에 예수님 자신의 ‘오심’에 대한 약속이였던 것이다(행14:18). 그리고 마태복음 28: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고 약속하실 때, 그 약속은 그리스도의 신적 편재로만 해석해서는 안되고, 그 보다는 성령의 임재와 권능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바울의 관점과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융합해 보면, 오순절에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성령을 선물로 부어 주실 뿐만 아니라 오순절에 그리스도께서 살려주는 영으로 직접 교회에 오신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의미에서 보면, 성령의 선물(성령 세례, 성령의 부어주심)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최고 업적이다. 이 사건은 유일무이한 구원 사역을 연결시킨다. 이 사건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정점을 이루는 사역은 미완성과 미완료의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2.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교회
오순절 성령 강림은 또한 신약시대의 교회의 타생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교회”라는 공동체가 탄생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 나갔던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 곧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설립된 사건이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엡2:22) 곧 하나님의 성령이 안에 거하는 성전(고전3:16)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한다. 따라서 성령 세례를 받은 몸으로 연합되어 그 안에 처소를 갖고 있는 자는 누구나 성령의 선물을 공유한다(고전12:31).
물론 “교회”는 구약시대에도 있었고(행 7:38참조), 복음서에도 “교회”라는 단어가 나타나지만(마16:18,18:17), 예수님의 완성도나 구속사역에 기초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기독교 신앙 공동체, 즉 신약 시대의 교회는 오순절 날 성령 강림에 의해 생겨난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출발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많은 개혁 신학자들은 그 오순절 날을 “교회의 생일”로 보는데 있어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헤르만 바빙크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비교하면서, “이전에도 성령의 온갖 활동과 은사가 있었지만 오순절 날에야 비로소 성령은 교회를 그의 성전으로 삼으시고 계속적으로 성화시키시고 양육하시며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3.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신자 개인
이상의 진술을 통해, 기본적으로는 120명의 그리스도인들의 특수한 영적 체험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오순절은 한 사건, 곧 구원의 역사에서 필수적인 한 사건이며, 구원의 서정에서의 한 특면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오순절의 사건은 ‘단번에 모두’완전히 성취된 구속에 있으며, 계속적인 적용에 있지 않다. 또한 이것은 개개인의 신자가 경험해야 할 패러다임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은사 운동이나 이러한 것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오순절의 일차적 중요성을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들과 다르게 경험하는 능력, 혹은 구원 ‘이후’에 경험하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고전12:13절은 개개인의 신자가 오순절에 오신 성령에 참여함을 가리킨다. 신약성경에 명사로 된 ‘성령 세례’란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동사로 된 ‘성령으로 세례주다’ 또는 ‘성령으로 세례 받다’라는 표현이 일곱 번 나타난다. 이 중에서 고린도전서 12:13절에서만 ‘과거의 사실’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미래의 약속’의 형태로 되어있다. 이러한 성경의 증거는 ‘단번에 모두’의 의미를 지닌 ‘성령 강림 사건’이 결과적으로 신자의 삶에서 어떻게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첫째, ‘모두’성령으로의 세례를 받았고 단지 몇몇 신자만 받은 것이 아니다. ‘모두’ 오순절의 은사에 참여하였다.
둘째, 그 경험은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 ‘안으로’들어올 때 즉, 회심할 때, 발생하였고 그 이후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 은사에 참여한 것에서 흘러나오는 포괄적인 경험의 일부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는 바울의 명령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헬라어의 현재형으로 표현된 이 명령은 이러한 성령의 ‘충만케 하시는’임재가 모든 신자의 계속적이고 항상 반복되는 관심이어야 함을 분명히 가르친다. 신약에서 성령의 세례를 받기를 명령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이것은 명령법이 아니라 신자의 상태를 전제로한 직설법이다. 따라서, 오순절의 성령의 강림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성령이 지속적으로 그들의 삶의 ‘모든’ 측면에서 활동하도록 신자들에게 권할 절대적으로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4. 오순절은 단 한 번의 유일한 사건
오순절 날에 임한 성령은 계속적으로 임하는가? 몇몇 개혁 신학의 저자들이 오순절은 우리의 구속을 ‘단번에 모두’ 성취한 단일한 사건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있기에 이점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실제로 1989년 판 브럭헌 교수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단번에 모두’의 사건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였고,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이에 대해서 좀 더 강하고 좀 더 혹독한 말로 반대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만일 오순절이 단번에 모두를 위한 사건이었다면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라는 매우 놀라운 결론을 내렸다.
개핀 교수는 저들이 ‘구원의 역사’와 ‘구원의 서정’의 구분을 분명하게 유지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오해에 근거한 주장이라고 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오순절은 한 사건, 곧 구원의 역사에서 필수적인 한 사건이지 구원의 서정에서의 한 측면이 아닌 것이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 복음(행10:39-43)을 전했을 때, 이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도 “우리가 유대 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고 말했다. 그는 처음 사도가 전했던 말씀을 고린도교회가 듣고 믿었을 때 모두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상의 경우를 보면, 오순절 날에 오신 성령은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도”(고전1:18-19; 롬1:16)를 전파하고 증거함으로써, 이 말씀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능력으로 계속 임하셨다(롬10:17).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거와 전파는 성령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땅 위의 모든 교회는 사도적 복음, 곧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계속적인 전파와 증거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이후 시대에도 역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는 또한 진정으로 오순절적인 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신 사건은 그것이 구속사의 사건들 중 하나에 속한다는 점에서는 그와 같은 동일 차원의 사건이 또 다시 반복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구원의 복음이 오고 오는 모든 세대와 개인에게 계속하여 적용되어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오순절에 임했던 그 성령은 주님께서 오실 그때까지 임하실 것이다. “성령의 오심”이나 “성령의 주심”은 말씀 전파와 함께 반복될 것이다. 우리는 클라스 스킬더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순절로 돌아가자는 향수에 젖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신 그 구호는 이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순절로부터 전진하자……살려 주는 성령의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능력 안에서.”
Ⅲ. 결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의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2-3)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이 같은 교훈은 ‘성령세례’가 구원을 받고 난 뒤의 반복적이고 여려 차례 적용 가능한 현상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을 때에 일어나는 단회적인 사건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상의 서술에서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논지는 ‘오순절 성령 강링 사건’은 종말론적이며 구속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마12:22이하에 기록된 치유 사건에서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힙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성령님의 일하심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가 이미 임했음을 알려 주셨다. 성령님은 하나님 나라의 원동력 곧 종말론적 권능이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의 역사를 종말론과 떼어내버리게 되면, 성령님의 역사를 지나치게 사적이고 개인 중심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자주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님을 주심’의 사건을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구원의 본질적 측면이며 부활의 첫 열매를 미리 맛보는 것이요, 교회가 물려받을 최종적 유산의 첫 지불금으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성령의 선물은 교회에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높아지심을 통해 현재와 같은 존재가 되신 그리스도를 주시는 선물이다. 이 의미에서 보면, 성령의 선물(성령 세례, 성령의 부어주심)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최고 업적이다. 이 사건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정점을 이루는 사역은 미완성과 미완료 상태에 있게 될 것이기에 성령님을 부어주심은 구속사적인 사건인 것이다.
참 고 문 헌
리처드 개핀, 『구속사와 오순절 성령 강림』, 김귀탁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
,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서울: 성약출판사, 2007.
목회와 신학 편집부 편. 『두란노 HOW 주석 신약시리즈5(사도행전)』. 서울: 두란노, 2003.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성령론연구보고서』, 연구 논문, 고려신학대학원, 1993.
[출처] 구속사와 오순절 성령강림 (SDG 개혁신앙연구회) |작성자 주님의 장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