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나는 어떤 도둑인가?
이형우 고전문학자
1.
교연(唐)[8세기, 唐]이 쓴 『시식(詩式)』이란 책에는, 글도둑 세 유형이 나옵니다. 첫째가 남의 텍스트를 훔치는 도둑[①투어(偸語)]입니다. 가장 아둔하다고 했습니다. 둘째가 남의 의미를 훔치는 도둑[②투의(偸意)]입니다. 용서할 수가 없다 했습니다. 셋째는 남의 작품 구조를 훔치는 도둑[③투세(偸勢)]입니다. 구조와 형식을 변형시켜 마치 자신의 고유한 창작물인 양 행세합니다. 이 능숙한 도둑을 일컬어 ‘재주가 교묘하고 뜻이 정밀하여 흔적이 없다. 굳게 닫힌 문 안에서 흔적없이 귀한 여우 가죽 옷을 훔쳐낸 솜씨와 같다. 그래서 ‘재주로 칭찬받을 구석도 있다’고 했습니다. ‘도둑질 할 바에야 투세(偸勢) 정도는 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환골탈태로 이어지는 긍정성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구호입니다. 창조와 창작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작가를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천재’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를 여지없이 폭파했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 하는 생각, 심지어는 문화적 기호까지도 어디선가 읽었고, 누구에겐가 들었고, 익혔습니다.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의 질서 아래, 무의식까지도 질서화해 있음이지요. 모든 텍스트는 흔적 밟기고, 인용의 모자이크라 했습니다. 작가는 어느새 필사자이며 조립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작은 없다’란 말이 예술의 소멸을 뜻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창작은 인드라망처럼, 의미의 바다에서 새로운 관계맺기입니다. 무엇을 새로 쓸까보다는 ‘나의 시선’으로 어떻게 특별하게 ‘엮을까’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원전, 원본을 인정하던 시대에는 이를 뒤틀기 위해서 ‘패러디’를 했지만 이젠 ‘혼성모방’을 즐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2.
『장자』 「거협」에는 대도(大盜)의 덕목이 나옵니다. 도둑도 오상(五常)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척 보고 재물 있는 곳을 간파하는 성(聖), 젤 먼저 들어가는 용(勇), 맨 뒤에 나오는 의(義), 성패여부를 직감하는 지(知), 두루 나누는 인(仁)입니다. 이 오도(五道)를 두루 갖춰야 대도(大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유학자들의 궁극을 도둑질 기법으로 바꿔버렸습니다. 기호[언어]가 재배치 되어 있고, 뜻은 바뀌어 갑니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연(Différance)’입니다. 고착된 질서[개념]에 균열을 내는 이런 작업, 현대시조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답안이라 생각합니다.
시도(詩盜)가 지녀야 할 성(聖)은 중첩된 텍스트에서 새로운 의미망[누빔점]을 만드는 작업이겠지요. 어떤 기호가 지닌 잠재력 포착입니다. 모든 언어가 드러나는 차이 속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통찰력입니다. 용(勇)은 새로움을 찾아가는 개척 정신입니다. 경계선 넘기를 즐기는 실험정신입니다. 의(義)는 텍스트에 대한 의무입니다. 텍스트의 효과가 극대화 될 때까지, 작품의 완성도가 극대화 할 때까지 탁마(琢磨)하는 자세입니다. 지(知)는 텍스트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전략 전술입니다. 가장 극적인 효과, 미적 괘감을 극대화하는 영역입니다. 인(仁)은 세상에 개방하는 일[발표]입니다. 독자와 함께 맥락과 재해석의 여지를 여는 일입니다.
3.
많은 시조집과 잡지를 읽습니다. 카피킬러에 바로 걸릴 위험천만한 글들, 단어를 교묘하게 바꾸어 의미 구조만 가져온 글들, 감탄하다가 뒤통수 맞는 글들, 처음 보는데 이미 읽은 글들이 수두룩합니다. 장자는 오도(五盜)를 갖추지 못하면 좀도둑이 되고, 좀도둑은 잡혀 처벌받는다 합니다. 그러나 대도(大盜)는 오히려 제후가 되고, 의로운 선비들까지 몰려온다고 합니다. 제가 도둑타령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술로 진위(眞僞)를 논하던 시대는 근대입니다. 현대는 미메시스가 벌이는 놀이판입니다. 현대는 현대적 글쓰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쓰는 글들은 모두, 우리도 모르는 흔적 밟기고, 어차피 창작품은 없습니다. 그러니 알게 모르게 우리는 도둑입니다. 이 도둑이 저 도둑에게 뭐라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왕 훔칠 바엔 자잘한 거 훔쳐서 망신당하지 말고, 이왕 훔칠 바엔 시조단 정도는 기본으로 훔치자고요. 그래서 좋은 사람들 몰려오게 만들자고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고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지만, 땅 위에 같은 것도 없습니다. 대도가 버글거리는 우리 시조단을 기원합니다.
이형우
1991년 《현대시》 등단. 저서 『창세기부터』, 『착각』, 『체질시학』, 『체질과 욕망』, 『체질과 언어』 외. 김동명 학술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