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인 초대석
신성리 갈대숲 외 2편
권혁모
철새 떼 울음소리 입영 열차를 타고 간다
강변을 지켜야 할 당당한 어깨를 밟고
가거라 그리운 숲에 젊음을 매복하라
오늘은 줄빳다로 오와 열이 다 맞았네
갈대숲 굵은 힘줄 애꿎은 총대를 메고
금순아 고무신 바꾼 금순아 떼창으로 부른다
기상나팔 그도 놀라 하루해를 장전하고
밥알이 튀어나올 듯 군가를 외치다 보면
눈 맞춘 귀인이 와서 꽃을 두고 가겠지
달과 소년
연둣빛 한 소년이 하냥 여기 밀려왔네
질긴 끈 샅바를 잡고 모래판을 지키다가
귀뚜리 그리운 소리 청진기로 엿듣네
날려 보낸 종이비행기 해도 달도 비껴갔지
는개비 지평선엔 이정표도 흐릿하고
약병 속 남은 의미가 몇 알밖에 없구나
고개고개 넘다 보니 가고 없는 버들피리
그 시절 손톱이 남아 눈썹달이 떠오르고
그래도 달빛 좋아라 뻐꾹새가 울어라
귀소
이 한 폭 포구 앞에서
나도 한때 그림이었지
풍금 소리 파도 소리
날려 보낸 물새 한 마리
아련히
예 와서 보니
하마 물든 저녁놀
몇 번째 코드를 잡고
반주는 어떻게 넣나
한 줌 쥔 모래알도
손가락 사이 달아나고
리스 차
희미한 후미등
나도 따라가야지
권혁모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아버지의 솜사탕』등 4권, 오디오북『눈이 내리네』. <오늘> 시조동인.
/시작노트/
누구는 지난 군 시절을 잊고 싶어 하는데, 나는 그 야전 병영에서 총대를 잡고 다시 산천을 누리고 싶다. 눈 내리는 GOP 철조망 앞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도 보는 국방부의 시침이 아직도 돌아간다.
50년 전의 환상을 금강 변 신성리 갈대숲에서 만난다. “철새 떼 울음소리가 입영 열차를 타고” 가고 있는데, 울창한 숲에 젊음을 매복하고 싶었다. 갈대도 오伍와 열列을 맞추어 연병장에 도열하였고, 남아의 굵은 힘줄은 총대를 메고 서 있었다.
그때 조바심하였던 나의 “금순아”를 주먹눈물 흘리며 떼창을 하지 않았더냐? 병영 시절의 하루해를 탄알로 장전하고 “밥알이 튀어나올 듯 군가를 외치다 보면” “눈 맞춘 귀인”이 몰래 찾아와 꽃을 두고 간 적도 있었다.
“귀뚜리 그리운 소리 청진기로 엿듣던” 옛 시절도 다 지나고, 이제 “약병 속 남은 의미가 몇 알” 밖에 없는데 그래도 달빛은 환하니, 마음껏 울거라 뻐꾹새 너도.
“풍금 소리 파도 소리” 다 날려 보낸 나는 한 마리 물새였지. 내 삶의 “몇 번째 코드를 잡고” 반주는 또 어떻게 넣나? 태산이던 모래알도 “손가락 사이 달아나고”, 애초 내 것이 아닌 세월을 리스하여 예까지 왔으니, 희미한 후미등을 따라 나도 갈밖에… 이런저런 비감이 시에 젖어 드는 파란 낙엽의 계절이다.
오도카니 앉아서 문득 드는 생각 외 2편
김진길
푹 꺼진 싱크홀,
그 안쪽이 눅눅하다
손끝을 감싸안는
말캉한 어둠의 살점
세상은 몽글몽글한
슬픔의 외피였네
공소권 없음
가던 길 멈춘 사내
묵상에 잠긴 듯이
한참을 뜸들이더니
달을 향해 찔끔, 쏜다
소심한 고각 뒤에 선
저 노구의 당랑거철
엠바고
그랬죠, 그땐 그 말 참인 줄 알았었죠
혓바늘이 돋아도 근질거림을 참는 것,
풀 먹인 얇은 입술로 말들을 밀봉했죠
하지만 오래지 않아 봉쇄선은 찢기고요
우후죽순, 경쟁하듯 입들이 자라더니
단숨에 말의 깍지를 풀고 말았어요
가둘 수 있다고요, 오물이 될 때까지
말캉한 혀의 범람에 세상이 잠겼는데
당신만 앵무새처럼 또 주문을 외는군요
* 엠바고 : 어떤 기사의 보도를 일정 시간까지 유보하는 일.
김진길
200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작 노트/
외피가 있는 것들의 안쪽이 궁금해진다
어느 날 문득 뉴스에 비친 싱크홀의 한 장면을 마주한다. 예고 없이 한 지점이 푹, 꺼지고 나서 비로소 그 내면의 살점을 더듬더듬 만져본다. 말캉하다. 세상은 저 어둠의 말캉한 살점을 감싸안은 단단한 외피였구나. 외피가 있는 것들의 안쪽이 궁금해진다.
라포*(rapport) 외 2편
윤경희
두 팔을 뻗으니 하늘이 닿을 듯하다
눈 시린 풍경들은 수묵으로 와 닿고
겨울 산 너른 능선은 하나 되어 껴안고 있다
그제야 훤히 뵈는 엎드린 겨울 민낯
무성한 숲이었을 땐 보이지 않았던
스러진 존재감들이 파르르 입술을 떤다
한바탕 난장 속을 빠져나온 그림자가
바람이 지나간 자리 침묵으로 누웠다
시치미 뚝 떼는 길목, 그러다 또 봄은 올 테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형성되는 신뢰와 안정감을 뜻하는 프랑스어.
청령포에 기대어
떠나온 그 여린 몸 섬 하나 되어갔지
기댈 곳 없는 마음은 가마득한 절벽
두고 온 그리움들이 달빛 아래 피어났네
구부러진 물길처럼 버텨야했던 세월
단절의 적막 한 채 너부시 노를 젓네
이제야 목 놓아 우는가, 붉은 저녁 물소리
감정이라는 책
수십 번 들여다봐도 여전히 모를 낱말
당신의 그 깊은 생각 짚어낼 수 없네요
난해한 감정이 반쯤 접힌 멈춰버린 페이지
윤경희
2006년《유심》신인문학상 등단. 시조집『환절기 무렵』외 6권. 대구시조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신인상, 대구예술상 등 수상.
/시작노트/
가깝게 느껴졌던 것은 일종의 착시현상이었다. 평소에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탓에 근육들이 힘들어했다. 그저 바람소리에 몸을 맡기고 풍경을 위안으로 삼으며 정상을 향해 걸었다. 세상 삶도 그렇지 않았을까, 때로는 가까운 듯 먼 듯한 사람들과의 관계처럼.
티끌 한 점마저 내려놓은 풍경 속에 스러진 존재감들이 잠시 쉬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들이 내 감정의 촉수를 건드리는 시간, 맑은 민낯의 풍경이 외려 소박하고 따뜻했다. 다 비워서 무성한 겨울 산, 조건 없이 손 내밀고 보이는 그대로의 네가 하얀 눈 속에 서 있었다. 저 침묵의 계절이 눈을 뜰 즈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봄은 오겠지. 행여 착시의 순간일지라도 거기 있으리라.
글멍 외 2편
정병기
비 그친 창가에
빛줄기 날카롭다
글줄에 혀끝 베이고
맑은 피가 돋는다
어둡고 빛나던 문장이
하얗게 웃는다
물-물
하천이 스며들고 강이 밀려든다
작은-물 받아 담아 바다라 이른다
윤슬막 드리운 수면에 흐름이 묻혔다
물-물의 흔적이 파문으로 번지고
잔물결 거품 터져 소용돌이 파도 감겨
물-물이 부딪고 흘러 큰-물, 차오른다
봄눈이 녹지 않는다
경칩 지난 어느 삼월
먼동 트는 도적눈에
각진 아파트들 더 높이 솟았다
땅 아래 주차장에선 조용히 아우성들이다
정병기
2016년《나래시조》신인상 등단. 시조집『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시간 환상통』『산은 이미 거기 없다』.
/시작 노트/
시집을 읽을 때 간혹 시인에 대한 예의를 벗어나는 일이 있다. 행간을 읽지 못하고 행간을 헤매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시집을 벗어나 상상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때로는 상상이 아니라 과거의 한때로 돌아가 부끄러웠던 일이나 아련히 그리운 때에 머물러 돌아올 줄 모른다. ‘글멍’에 빠져드는 것이다.
창작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시조를 바다라고 생각해 본다. 이리저리 비유를 찾다 초심을 잃고 바다는 큰물로 바뀌어 버린다. 노자의 도덕경을 떠올리고 큰물 속의 운동을 생각한다. 작은 물들이 모여든 것이 아니라, 큰물 속의 작은 물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한다.
소한과 대한 사이, 날이 무척 춥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는 벌써 3월이다. 경칩이 지났건만 도적처럼 밤새 눈이 내리고 겨울을 옮겨 놓은 듯 눈이 녹지 않는다. 눈을 쓴 아파트는 더 높아 보이고 땅을 짓누르는 듯하다. 땅속에서 아우성치는 생명들을 떠올린다. 이런 새싹들이 잘 자라면 좋겠다.
폐건전지 외 2편
한승남
눈빛이 닿자마자 전류가 흐른 우리
손끝만 스쳐가도 가슴이 더워오니
반지하 단칸방 아래 점등을 꿈꾸었다
서로가 다르기에 내일을 밝히지만
어긋나는 접점마다 말꼬리는 배배 틀려
부딪친 감정의 오류 스파크가 튀는 중
다시 한번 이으려고 병렬도 꿈꿨지만
방전된 시간만큼 멈춰버린 이야기들
전하를 읽지 못한 채 나뒹구는 교차로
비그이
개미장 섰다 한마디에 달려 나간 발자국
멍석 위에 널린 벼를 재빠르게 걷는다
소나기 그칠 때까지 지켜내는 그 자리
빗방울 쏟아지면 몸이 먼저 튕겨 나가
아버지 말씀보다 걱정 어린 손놀림
한차례 긋고 간 자리 오랫동안 붙든다
흠뻑 젖은 옷자락 꾹 쥐어 짜낸다
쓰다듬는 마른 얼굴 낟알로 피어올라
후드득 거둬들일 때 번지던 물비린내
별빛 보초
높고 긴 능선 따라 쇠울짱 굽이돌아
밤하늘 뭇별들이 총총히 떠오른다
철책선 하늘 닿는 곳 겨끔내기 별빛 점호
직립하는 자들은 넘나들 수 없는 곳
초병은 두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총구는 멈춘 시간을 직선으로 겨눈다
달조차 눈을 감아 사위는 어둠 바다
별 겯듯 질금 내어 흐르는 정적 넘어
풀벌레 울음소리만 철책선을 넘는다
한승남
202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작노트/
별들처럼, 풀벌레처럼
노트의 첫 장에 펜글씨로 꾹 눌러 새겨둔 다짐이 다시 눈앞에 환하다. 단단하게, 때로는 한숨처럼 깊고, 물젖은 솜처럼 글을 쓰겠다는 약속. 화려함보다는 가장 낮은 곳의 진솔한 목소리를 담겠다는 초심이 여전히 노트에 살아 숨을 쉰다. 말보다 앞서 있었던 감각과 침묵을 시조의 호흡 안에 담아보고자 했다. 동시대의 숨결과 조용히 맞닿기를 바란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방식이 전기회로 같다. 서로를 밝히기 위해 다른 극으로 서 있지만, 접점이 어긋나면 말은 튕겨 나가고 끝내 통하지 못한 감정은 회로를 이탈해, ‘폐건전지’처럼 잔열을 안고 나뒹군다. 삶의 조건이 어두울수록, 점등은 간절해지고 그만큼 쉽게 방전되기도 한다는 생각.
비를 잠시 피하여 그치기를 기다리는 일. ‘개미장 섰다’라는 말 한마디에 움직이던 기억. 비를 앞두고 벼를 걷는 일은 삶에서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는 것을 어린 날 몸으로 익혔다. 빗방울이 튀기 시작하면 걱정도 함께 쏟아졌다. 후드득, 벼를 거두는 끝자락에서 번지던 젖은 마당의 물비린내와 그 모든 감각은 노동의 기억이자 삶을 지켜내던 시간의 온기였다.
밤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별들의 교대를 본다. 철책선은 물리적 경계이지만, 밤이 되면 별빛과 정적이 무시로 넘나든다. 긴장과 감시의 공간은 오히려 가장 미세한 생명의 통로가 된다. 사람은 넘지 못하는 선 위에서, 총구를 겨누든 말든 별들과 풀벌레는 묵묵히 보초를 서며 교대를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