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인 초대석- 문희숙, 우형숙, 박홍재, 곽종희, 김영희
목련을 보내고 외 2편
문희숙
너는 나를 다 지우고
강 건너 바라보았네
하마터면 사랑할 뻔한
떫고 아프던 날에
저 꽃잎 소복을 입고
봄 길을 떠난 이후
남겨진 미움으로
뻐근히 마른 가지
함께 지은 집 한 채
추억으로 늙어 가네
가 닿지 못할 길에서
따로 오래 걸었네
혀에 관한 잡념들
발꿈치를 잡을 수 없는 소문이 낭자했다
가벼운 공기에서 무거운 납덩이로
화장한 입술에 숨어 구름처럼 피는 독
그림자와 바람에 들썩이던 우물은
생각하면 할수록 덧없이 나약해져서
어디로 도망을 가나 속절없이 숨졌다
편집과 각색으로 성냥을 그어대던
치장한 독버섯 같은 검은 혀 날름거린다
죽음도 이길 수 없는 치사량의 저 감옥
비만 안경의 백서
그릇 속에 매혹적인 향기와 때깔들이
두 개의 안경알을 그득 채우고 있다
식탐은 자동반사체, 주화입마로 들어간다
비친 대로 읽을 뿐인 나는 수동형 인간
4D의 안경 속에 매몰된 결핍을 안고
허름한 인큐베이터에서 매일 내가 양육된다
얇은 사 변명들이 뱃속에서 부푼다
터질 듯 부풀어가는 풍선, 나를 불어제낀다
어둠이 내릴 때까지 나는 나의 장난감이다
문희숙
1996년 중앙일보지상백일장 연말장원 등단. 이호우이영도 문학상, 통영 김상옥 문학상 등 수상. 시조집『짧은 밤 이야기』『사랑은 주소 없이도 영원히 갈 집이다』 외.
시작 노트
소멸과 왜곡, 결핍과 탐욕의 바퀴 아래서
「목련을 보내고」는 잃어버린 인연에 대한 기억이다. 흰목련 꽃잎이 소복처럼 깔린 길 위에서 '사랑할 뻔했던' 죽어버린 옛 감정을 떠올린다. 그렇게 함께 지은 집이 늙어 가듯 끝이 난 관계들은 끝내 가 닿지 못한 채 평행선을 가는 단절로 귀결된다.
「혀에 관한 이끼 낀 잡념들」은 실체 없는 '소문'과 '말(혀)'이 가진 폭력성을 표현했다. 화장한 입술 뒤에 숨은 독 같은 언어들은 누군가의 삶을 편집하고 각색하며, 죽음보다 지독한 감옥을 만들어낸다. 이는 언어의 사회적 살상력을 현실적으로 드러내려 애썼다. 마지막 작품인「비만 안경의 백서」는 결핍을 탐식으로 채우려는 씁쓸함을 말했다. 안경알을 가득 채운 식탐은 '주화입마'처럼 자아를 집어삼키고, 스스로를 환경에 미약한 존재 즉 '인큐베이터에서 양육되는 수동형 인간'으로 고백한다. 결국 비대해진 욕망의 풍선이 터질 때까지 질주함으로써 누구 탓도 아닌 '나'라는 존재가 결핍이 낳은 한낱 장난감으로 전락해 버린 위태로운 자화상이 그려진 백서이다.
내 마음은 와이파이 외 2편
우형숙
뭇 사람 시선 좇아
차오른 삶 만족 못해
앞만 향한 행진 속에
기력이 다 닳아도
끊겼다
또 이어지는
기대 품은 나날들
치간칫솔의 하루
금광에서 금을 캐듯
시시콜콜 다 훑는다
지하 감옥 탈출하듯
튕겨나는 부스러기
세상을
다 가진 표정
배 두드린 잔칫날
기도하는 너에게
마음의 감옥에서
탈출하고 싶은 건가
오로지 기도로만
쇠사슬이 끊어질까
그래도
무릎을 꿇자
인내와 닮은꼴로
우형숙
2001년《한국시》등단. 시조집『괜찮아』,『아침 창가에서』,『산안개』. 숙대문학상, 한국시 대상, 여성시조문학상, 역동시조문학상, 한국문협 전영택문학상, PEN 번역상 등 수상.
시작 노트
마음이 바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있다. 해야 할 일에 쫓길 때 사방은 그저 배경일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삶의 속도를 늦추자 동서남북이 새로워졌다. 나뭇잎 하나, 바람 한 줄기도 저마다의 얼굴로 다가왔다. 눈길만 주면 모두가 신선한 소재가 되었다.
시인들은 각자의 빛깔로 노래한다. 나는 아직 뚜렷한 개성을 말하지 못한다. 다만 그날의 마음 상태에 따라 노래하고 싶다. 고요하면 고요한 대로,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3장 6구 12마디의 가락 속에 내 숨결을 얹고 싶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오늘도 햇살 속에 홀로 호숫가를 걷고 왔다. 산책 중 시조 한 편이 완성되어 호숫가 카페에 들렀다. 카푸치노 한 잔으로 흐뭇하게 자축했다. 시조를 만나 마음이 한층 넉넉해진 기분이다. 시조시인의 길이 쉽지 않음을 알지만, 나는 시조 가락에서 깊은 행복을 느낀다. 절제 속에서 선명해지는 이미지. 그리고 그 리듬을 붙들고 있으면 오늘도 마음이 벅차오른다.
불편한 우산 외 2편
박홍재
낯선 이 나를 들고 앞뒤로 훑어본다
곁에 것 견주면서 길이를 재어보다
얼결에 목덜미 잡혀 낯선 길로 끌려간다
내 주인 아닌 이와 함께하니 어색하다
빗물이 눈물 되어 몸 둘 곳 불편하다
구석에 던져진 채로 손길 한번 없었다
본 주인 옷 감싸며 빗줄기를 막아내면
한 겹씩 펴 말리고 다시 곱게 접고 접어
선선한 바람 통한 벽 걸어주던 그 눈빛
지리산 병동病棟
지리 종주 맛 들이면 중독에 빠져든다
휴일만 기다리며 배낭을 꾸려놓고
눈앞에 산등성 계곡 눈에 자꾸 밟힌다
노란 듯 붉은 동자꽃 뒷덜미를 자꾸 당겨
힘들 때 눈 맞춤에 잊히지 않는 꽃 무리
내몸이 뜨거울 즈음 꽃 마중을 가야지
겹겹이 쌓인 눈이 발걸음 낚아채도
뼛속에 도장 찍어 지리산을 못 잊는다
망설임 짊어지고서 다시 찾는 지리 병동病棟
톱질에 톱밥이 운다
일어서는 세월 동안 부귀를 꿈꾸지 않아
나름의 길을 찾아 가지를 뻗었지만
어느 것 귀하지 않은 나무의 길 있겠나
이웃과 키 맞추며 눈인사 나누면서
바람이 부는 날은 어깨춤 같이 추며
뿌리에 모든 거름도 나눠가며 지냈다
곁가지 곁 나무에 생채기 내질까 봐
견딤을 지워내어 아픔을 감싸려고
두 손을 마주 잡고서 전기톱을 돌린다
박홍재_ 2008년 《나래시조》 등단. 시조집 『말랑한 고집』 『말랑한 고집』(2022년 세종도서 선정) 『핑계에도 거리가 있다』 여행에세이 『길과 풍경』
시작 노트
지난 시간이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때는 산에 가는 게 나의 일상이 되었다. 주말을 일과처럼 기다리며 주중을 보냈다. 산을 유랑하듯 걸어온 길이 4~50여 년, 그 수많은 산길이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그 한 대목을 목을 풀어 노래한다.
지리산의 그 늠름한 매력에 끌려 15년 정도 매달 산등성과 계곡을 오르면서 보아 온 것이 마음에 남아 있다. 종주 길에서 만난 꽃은 어린아이 맑은 눈망울 같았다. 나무 한 그루에도 지리산을 대신 말해 준다. 자꾸만 지리산이 그리웠다. 사랑하는 사람처럼 그가 그리웠다.
이처럼 살아가면서 주위에서 만나는 것이 나의 마음속에 다가오면 그냥 보낼 수 없어 눈 맞춤 한다. 톱날이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이별이다.
얼마 전 내가 아끼던 우산을 잊어 버렸다. 나도 잊어버리면 어떨까? 말 못 하는 우산은 무슨 말을 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견디는 날 외 2편
곽종희
겨울 물 멈춘 자리 소나무 전망대 위
목을 감춘 왜가리들 날개를 접어 두고
떠남도 머묾도 아닌 정물처럼 서 있다
허기진 하루가 깃털처럼 가벼워도
비밀스런 눈으로 평화를 가장하지
언제나 반듯한 자세 회색빛의 실루엣
무소음 보법에다 냄새마저 끊어내고
인내심과 넓은 시야 타이밍을 잡아본다
사는 건 오늘을 버티는 일, 체온을 지키는 일
공룡시대 사냥 법을 치밀히 계획한다
날 세운 바람 앞에 얼음 호수 숨죽일 때
날개 펴 적어둔 좌표 순식간에 낚아챈다
갑진 조약
인감도장 들고 앉아 다짐을 받습니다
사는 거 별거 없어 싸우지 좀 맙시다 정초에 먹은 다짐 언제까지 가려나 목소리만 작아봐라 내가 왜 이러는동, 아이고 핑계는 내가 괜히 그랬냐고 닭이 먼저 계란 먼저 원조를 따지지만 자꾸만 뾰족해진 모서리엔 날이 서고, 사랑도 때맞춰 물을 줘야 한다지만 완전한 사랑이란 애초부터 없었던 것 깜빡깜빡 한다는 건망증도 거짓말 중언부언 지나간 일 생생하게 늘어놓지,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지는 싸움, 사소하고 배려 없는 자존심만 내세우며 평생의 웬수끼리 칼로 물을 또 베는데
빛바랜 성혼선언문 혀를 끌끌 찹니다
장기투자
잊자, 하고 지울수록 오히려 선명하네
기다림 적립하면 청산될 날 있겠지
당신의 그리움 챠트 폭등하는 그날까지
곽종희
2018년《나래시조》신인상 등단. 한국꽃문학상, 나래시조 젊은시인상, 울산시조 작품상 등 수상. 운문시대 동인. 시조집『외로 선 작은 돌탑』.
시작 노트
사람이 살면서 때를 안다는 것만큼 현명한 것은 없어 보인다. 떠나고 머무르는 일 말이다. 동네 호수 공원 산기슭에 여름 철새인 왜가리가 겨울을 난다. 아마도 북쪽에서 여름을 보내다가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 이 기온이면 겨울을 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모양이다. 도무지 먹이 활동은 언제 하는지 하루 종일 정물처럼 앉아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
내 것과 내 집과, 먹는 일에 집착해서 평생을 사는 우리네와 달리 거친 보금자리 하나 없다. 동남아로 북만주로 시베리아로,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삶이다. 왜가리나 동남아에서 돈 벌러 온, 아직은 어린 청년들이 추워 보이는 계절을 지나 보냈다.
시를 쓰는 일을 생각해 본다. 가끔씩 늦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무슨 사조니, 이즘이니 하는 낯선 문학적 시류를 따라가야 하는 건지, 쉽게 이해되는 시를 써야 하는 건지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다 문득 내 나이 때는 알아듣기 쉽게 쓰는 게 맞다고 안주하고 만다.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시가 오는 때를 기다리는 시간 또한 벌 받는 일인 것만 같다. 마치 때 늦은 사랑에 빠져버린 천형의 삶을 사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이다. 시조를 향한 나의 철 지난 사랑을 천천히 분할 매수해서 조금씩 적립하다 보면, 내 시조의 폭등 챠트를 만나는 날도 오지 않을까? 기다려 볼 일이다.
여름밤 외 2편
김영희
개 건너 호다리꽁 유성 되어 날아갈 때
하르르 꽃 지는 소리 납작한 단 한 문장
별빛이 깜짝 놀라며 눈만 반짝 뜨는 밤
무더위 발꿈치에 무참히 밟힌 꽃잎
꽃등을 엮어들고 마중이나 나가볼까
꼬집어 말하라 하면 내가 나를 찾는 밤
행간에 접힌 바람 술래도 못 찾는 밤
아슴한 기억들은 계획도 예고도 없이
분봉을 시작했는지 울타리를 넘는다
초록 문장
한겨울 무명씨가 머리말을 쓰면 꽃씨
적빈의 내력은 흙 한 줌에 묻어뒀다
어둠의 껍질 안에서 빛을 켜는 이름들
햇살이 지나는 길 하루치를 여는 시간
압축한 파일 안엔 소소한 말의 기록
바람은 무심한듯한데 방향을 일러준다
창문을 활짝 열고 계절을 넘기는 날
함축한 문장 따라 넝쿨들이 올라간다
씨방 속 맺음말 속엔 다시 온단 약속 하나
꽃의 기록
활짝 펴 보여주던 향기는 속내였다
바람에 몸을 실어 그곳에 닿을 허공
진다는 서늘함 대신 꽃 봉분을 지었다
그늘을 털어내려 온몸으로 살아온 날
지금은 다른 꽃의 도착을 알려야 할 때
회한에 젖지 않는 몸짓 깊은 쉼에 들었다
기록은 까만 한 점 지극한 눈빛이다
또 다른 나를 만나 설렘으로 피기 위해
비로소 흐를 수 있는 까마득을 건넌다
김영희
2022년《강원시조》신인상 등단. 시조집『바람이 노래하는 곳』『달콤한 공기』. 2024년 천강문학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