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예였다
이병주
사자는 사자시대의 향수를 지니고 있다.
독사는 독사시대의 향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너는 도대체 뭐냐
용병을 자원한 사나이
제 값도 모르고 스스로를 팔아버린
노예.
그러니
너에겐 인간의 향수가 용인되지 않는다
지금 포기한 인간을 다시 찾을 순 없다
갸륵하다는 건 사람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말의 노예가 되겠다는
너의 자각이라고 할까.
먼 훗날
살아서 너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더라도
사람으로서 행세할 생각은 말라
돼지를 배워 살을 찌우고
개를 배워 개처럼 짖어라
고 적어놓은 네 수첩을 불태우고
죽을 때 너는 유언이 없어야 한다.
헌데 네겐 죽음조차도 없다는 것은
죽음은 사람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죽을 수 있는 것은 사람뿐이다.
그 밖의 모든 것, 동물과 식물, 그리고 너처럼
자기가 자기를 팔아먹은, 제값도 모르고 스스로를 팔아먹은
노예 같지도 않은 노예들은 멸하여
썩어 없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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