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11월 1일 제주4·3 당시 총살 명령을 거부하고 수백 명의 제주민의 목숨을 구한
고 문형순(1897∼1966년) 전 모슬포경찰서장(경감)을 기리는 흉상 제막식이 제주지방경찰청사에서 진행되고 있다.
나치독일휘하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모든 재산을 바쳐서 유대인 1,200명의 목숨을 구원한 업적으로 오스카 쉰들러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우리나라에도 그런분이 계셨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한 경력의 문형순은 해방후
경찰에 투신해서 제주 모슬포지서에 근무했다. 1949년 10월 19일 경감으로 승진하면서 성산포경찰서장으로 부임하였다.
문형순 서장은 당시 국가 시책이었던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교화와 관할 지역 경비에 여념이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6·25 당일오후 3시경, 내무부 치안국장은 각도 경찰국장에게 전통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및 ‘요시찰인’들을 예비검속하도록 지시했다. 제주도경찰국은 내무부 치안국의 통첩을 받아 관할 경찰서에 요시찰인 및 불순분자
를 일제히 구금할 것을 지시하게 된다. 이른바 예비검속 집단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약 1천 명으로 추산되는
예비검속자들이 해병대 사령부에서 총살 후 암매장되거나 수장되었다.
문형순서장은 1950년 8월 30일 계엄군측으로부터 예비검속자 총살 집행 지시 공문을 접수하였다. 그러나 문형순 서장은
공문의 ‘성산포경찰서장 귀하’ 옆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 직접 쓰고 날인해서 끝까지 거부했다.
이 일로 성산포에서 예비검속으로 처형된 사람은 단 6명 뿐이었다. 성산서장 다음에는 경무과 감찰계장, 경찰국 경무과
서무계장 겸 공보실장을 거친 후 1951년 3월에 경상남도로 전출했다가 1952년 4월 다시 제주도로 전입해서 경찰국 보안과
방호계장을 끝으로 1953년 9월 경감 퇴임했다. 문형순은 1897년 1월 4일,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출생하여 1919년 3월
신흥무관학교 속성과를 졸업하여 만주 등지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으며, 고려혁명군의 군사교관으로 복무한 후 1929년에
만주 한인사회 준 자치정부인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을 역임했으며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을 겸임했다. 1935년엔 북지 하북성에서
지하공작대에 복무했으며 1945년 8월까지 화북지역에서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하다 해방후 귀국하여 경찰계에 투신하였다.
1952년 제주도 경찰국보안과 경감으로 근무하던 그는 곧 퇴직하였다. 퇴직 후 제주시에서 자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던 그는
장사가 안 돼 가게를 넘기고경찰 쌀배급소 직원도 했고, 산지천과 칠성통 입구사이의 남의 집 단칸방에서 얹혀 살면서 제주의
첫 영화극장이었던 대한극장(현대극장의 전신)에서 매표원으로 일하다가 1966년 6월 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가족도 가진 것도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그는 광복군 출신으로 친일군경과 맞설수 있는 배짱과 용기를 가진 참경찰이었고 의인이었다
퇴임 이후인 1953년 제주시 삼성혈 삼성전 앞에서 촬영된 그의 마지막 사진. 맨 오른쪽이 문형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