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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설진관 회화론의 정신분석적 독해-甲

작성자조약돌|작성시간26.06.20|조회수89 목록 댓글 0

甲, 곧게 서려는 기표의 운명

甲, 곧게 서려는 기표의 운명


민둥산에 선 나무 한 그루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남자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는 뭘 해도 갑갑합니다." 갑갑하다. 이 세 글자가 상담실 공기를 눌렀다. 무엇이 갑갑한지 물었더니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 말했다. "그냥…… 저라는 사람 자체가 갑갑합니다." 오래 상담실에서 사람을 만나온 내게 그 말은 낯선 고백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주 자기 존재를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한 채 감각으로만 자신을 더듬는다. 뭔가 막혀 있고, 뭔가 부족하고, 뭔가 꽉 찬 것 같은데 정작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느낌. 그 느낌이 만성이 되면 사람은 그것을 자기 성격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포기가 체질로 굳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남자의 사주를 펼쳤을 때 일간(日干)에 甲(갑)이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甲은 천간(天干)의 첫 번째 글자, 나무다. 곧게 뻗어 올라가려는 큰 나무, 교목(喬木)이다. 설진관은 이 나무를 독산고목(禿山孤木)이라 불렀다. 민둥산에 홀로 선 나무 한 그루다. 그 기세가 다르다고 했다. 단단한 흙을 만나 뿌리 내리려 오랜 세월 견딘다고 했다(설진관, 2023: 323). 곧게 서려는 나무와, 갑갑하다고 토로하는 사람. 이 둘은 같은 존재의 양면이 아닐까.


설진관(薛晉寬)은 현대 사주명리학계에서 2세대 빅3로 불리는 실무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작업을 이해하려면 먼저 물상론(物象論)과 회화론(繪畫論)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물상론은 글자 하나에 사물 하나를 대응시키는 방식이다. 甲은 나무, 庚은 쇠, 丙은 태양. 글자가 곧 사물이다. 여기까지는 고전 명리학이 해왔던 것이다.
설진관은 여기서 결정적인 도약을 했다. 甲 혼자서는 아무 그림도 없다. 甲이 庚을 만나야 비로소 나무가 도끼에 맞는 장면이 생긴다. 甲이 壬을 만나야 나무가 물을 빨아 먹는 장면이 열린다. 글자 하나의 뜻이 아니라, 글자와 글자의 만남이 장면을 만든다. 이것이 회화론이다. 물상론이 사전이라면 회화론은 영화다. 사전은 단어의 뜻을 알려주지만 영화는 단어와 단어가 부딪치면서 장면을 만들어낸다.


설진관은 오행의 생극으로 보는 것보다 십간끼리의 회화론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단언했다. 그는 십간 회화론이 자연의 현상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적는다(설진관, 2023: 409). 그런데 설진관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가 회화론을 전개하면서 이미 기표의 물질성, 곧 소리를 따라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甲이 甲을 만나면 "갑갑하다"가 되고, 辛이 甲을 만나면 "심각하다"가 된다. 의미가 아니라 소리가 장면을 연다. 甲甲이라는 소리의 겹침에서 갑갑이 튀어나오고, 辛甲이라는 소리의 겹침에서 심각이 튀어나온다. 물상론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물상론에서 甲은 나무이지 갑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회화론에서 甲은 나무이면서 동시에 갑이라는 소리다. 소리와 소리가 만나 장면을 만든다.
이 에세이에서 설진관의 甲論을 라캉(Lacan) 정신분석의 기표(記標, signifiant) 이론으로 다시 읽으려 한다. 설진관이 물상론에서 회화론으로 넘어간 것은, 언어학에서 소쉬르(Saussure)가 라캉에게 넘겨준 것과 같은 구조적 도약이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의 대응을 정의했다. 라캉은 기표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다른 기표를 만나야 의미가 발생한다고 뒤집었다. 설진관은 글자 하나의 물상을 정의한 전통을 넘어, 글자와 글자의 만남에서 장면이 터져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두 도약이 만나는 자리에서, "갑갑하다"는 말이 왜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적 고백인지가 드러날 것이다.


사주팔자, 기표의 무대


사주(四柱)는 네 개의 기둥이다. 연주(年柱), 월주(月柱), 일주(日柱), 시주(時柱). 각 기둥은 위아래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글자가 천간(天干), 아래 글자가 지지(地支)다. 일간(日干)은 일주의 천간, 곧 나 자신을 가리키는 글자다.


時柱  日柱  月柱  年柱
 ○     甲     ○     ○
 ○     ○      ○     ○


甲이 일간 자리에 앉아 있다. 나머지 일곱 자리에 어떤 글자가 들어오느냐에 따라 甲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글자들은 대체 무엇인가. 甲은 진짜 나무인가. 물상론에서는 그렇다. 그런데 회화론에서 甲은 혼자서는 아무 그림도 아니다. 甲이 庚을 만나야 비로소 나무가 도끼에 맞는 장면이 되고, 甲이 壬을 만나야 나무가 물을 빨아 먹는 장면이 된다. 글자의 뜻이 아니라 글자와 글자의 만남이 장면을 만든다.
이것이 기표(記標, signifiant)다. 기표는 혼자서는 아무 의미도 만들지 못한다. 다른 기표를 만나야 비로소 의미가 발생한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記意, signifié)의 대응을 정의했다. 나무라는 소리(기표)에 나무라는 이미지(기의)가 붙어 있다고. 이것이 물상론의 구조와 같다. 라캉은 이것을 뒤집었다. 기표의 의미는 기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표와의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이것이 회화론의 구조와 같다. 설진관이 물상론에서 회화론으로 넘어간 도약과, 소쉬르에서 라캉으로 넘어간 도약이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기표는 소리로 작동한다 — 알베르트와 쥐인간


설진관이 甲甲에서 갑갑을 듣고, 辛甲에서 심각을 들었듯이, 기표는 의미가 아니라 소리로 연결된다. 이것을 가장 날것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두 개 있다.
우리는 나무라는 단어를 들으면 머릿속에 초록 잎이 달린 줄기를 떠올린다. 이때 나무라는 소리가 기표이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기의다. 그런데 라캉이 S라는 약자를 쓸 때, 이 S는 Signifiant의 머리글자다. S₁은 주인기표(主人記標)라 불리는 첫 번째 기표이고, S₂는 지식의 기표라 불리는 두 번째 기표다. S₁이 홀로 서 있으면 아무런 의미도 발생하지 않는다. S₁이 S₂와 만나는 순간 의미가 번쩍 발생한다. 임진수는 주체를 두 기호형식(S₁/S₂) 사이의 분절 자체에 의한 생산으로 보아야 한다고 적는다(임진수, 2016: 163). 설진관의 회화론에서 甲(S₁)이 庚(S₂)을 만나야 비로소 장면이 열리는 것과 같은 구조다.


알베르트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었다. 아버지가 이웃집 아들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 아인 절대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할 거야. 어머니도 거들었다. 맞아, 자기 아버지처럼 게으르니까. 알베르트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정체 모를 말들이 어딘가에 가라앉았다가, 그가 고등학교 수학 시험을 치르던 날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시험지가 눈앞에 있었다. 5분 전만 해도 내용이 손에 잡혔다. 그런데 막상 시험이 시작되자 머릿속이 하얘졌다(핑크, 2010: 35-37). 기표는 의도를 따지지 않는다. 들린 것을 새긴다.


기표가 소리로 연결되는 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프로이트의 쥐인간이다. 이 남자를 괴롭히던 강박 관념의 중심에는 쥐가 사람의 항문을 파고드는 형벌 장면이 있었다. 왜 하필 쥐인가. 프로이트가 발견한 것은 의미가 아니라 소리였다. 독일어 Ratten(쥐)은 Raten(할부금)과 발음이 비슷하다. 쥐인간의 아버지는 노름빚을 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Spielratte라는 단어가 노름꾼을 뜻한다. Ratten과 Raten과 Spielratte. 소리가 기표를 연결하고, 그 연결이 강박 이미지를 만들었다. 핑크는 이것들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단어들 사이의 축자적 관계에서 도출된다고 적는다(핑크, 2010: 57). 알베르트에게 아버지의 목소리가 기표로 새겨졌듯이, 쥐인간에게 Ratten이라는 소리가 기표로 새겨졌다. 둘 다 의미가 아니라 소리다. 설진관이 甲甲에서 갑갑을 듣고 辛甲에서 심각을 들은 것과 같은 구조다. 기표는 의미의 사다리가 아니라 소리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다. 사주명리학이 기표와 기표의 만남에서 장면을 읽는 것은 바로 이 소리의 사슬을 따라가는 작업이다.


환유에서 은유로 — 돌다리가 보여준 것


사주팔자의 여덟 글자를 한 줄로 늘어놓으면 여덟 개의 기표가 수평으로 나란히 서 있다. 이것이 기표의 사슬이다. 라캉은 이 수평적 나열을 환유(換喩, métonymie)라 불렀다. 환유는 기표가 다른 기표 옆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운동이다. 의미는 발생하지 않는다. 의미가 발생하기 직전의 상태,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잡히지 않는 상태다.
상담실에서 이 환유의 감각을 생생하게 경험한 적이 있다. 삼십 대 중반의 간호사가 찾아왔다. 지금은 무직이라고 했다. 병원을 여러 군데 옮긴 것에 자책을 하고 있었다. 수술방에서 일하는 게 좋다고 했다. 50분 동안 그 사람은 이직 이야기를 했다.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왜 옮겼는지, 어디가 좋았는지, 어디가 싫었는지. 수술방 이야기도 했다. 남들이 꺼리는 일을 자기가 맡았다. 집중해야 했다. 잘못하면 환자가 위험해졌다. 기표들이 수평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이 장면에서 저 장면으로. 환유의 운동이었다. 의미가 잡히지 않았다.


분석 마무리에서 내가 말했다. 지금까지 돌다리를 말씀하셨네요. 그 사람이 멈췄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병원 이직 이야기를 한 건데요. 당신은 이직을 돌다리 건너는 심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평탄한 길을 마다하고 스릴이 있는 돌다리를 건너고 있었어요. 돌다리 아래에는 물이 흐르고, 실수하면 빠집니다. 그래서 집중해서 다음 돌로 넘어갑니다. 당신이 수술방 이야기를 할 때도 같은 구조였어요. 남들이 꺼리는 곳, 잘못하면 환자가 위험해지는 곳, 집중해야 하는 곳. 수술방이 돌다리 아닌가요?
돌다리라는 기표가 그 수평적 미끄러짐을 수직으로 꿰뚫었다. 여러 겹의 장면이 하나의 소리 안에 압축되는 순간, 은유(隱喩, métaphore)가 터졌다. 새로운 의미가 생산된 것이다. 그 이후 그 간호사는 다시 수술방 간호사가 되었고, 정기적으로 분석을 받는 단골이 되었다.
이것이 환유와 은유의 차이다. 환유는 기표가 기표 옆으로 미끄러지는 수평 운동이다. 은유는 기표가 다른 기표 위에 겹쳐지면서 의미가 번쩍 발생하는 수직 운동이다. 사주 해석이라는 작업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글자들의 수평적 나열(환유)을 넘어서, 글자와 글자가 수직으로 부딪치는 장면(은유)을 포착하는 것. 설진관의 회화론이 강력한 까닭은 바로 이 은유적 충돌을 눈에 보이는 그림으로 펼쳐놓기 때문이다.


甲이 만나는 열 개의 기표


설진관은 甲이 나머지 아홉 개의 천간을 만나는 장면을 각각 하나의 그림으로 풀어냈다. 이 열 개의 그림을 정신분석의 언어로 다시 읽되, 한 가지를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그 만남이 사주 안에 태어날 때부터 박혀 있는 것인지, 밖에서 찾아온 것인지다. 사주 안에 있으면 구조(構造)다. 이 사람이 세계와 관계 맺는 근본적인 방식이다. 밖에서 올 때는 둘로 갈린다. 세운(歲運)으로 한 해에 오면 사건(事件)이다. 그해 한 번 스쳐 지나간다. 대운(大運)으로 십 년에 오면 기후(氣候)다. 십 년을 그 기운 속에 산다. 같은 글자라도 세운으로 한 번 오는 것과 대운으로 십 년을 머무는 것은 깊이가 다르다.


甲이 甲을 만나다 — 갑갑한 관계


나무가 두 개 있다. 나무가 나무를 만났다. 갑갑(甲甲)하다. 다투지는 않는다. 두 개가 서로 침범하지 않고 경쟁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관계다. 자연의 모습에서는 영양분을 서로 갈라 먹는 것이다(설진관, 2023: 321). 같은 기표가 반복된다. S₁ 옆에 또 S₁이 놓인다. 의미가 발생하지 않는다. 새로운 기표(S₂)의 도래가 없으니 은유가 터지지 않는다. 환유만 있고 은유가 없는 구조다.
정신분석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라캉이 말한 거울 단계(le stade du miroir)의 정체(停滯)다. 유아가 거울 속 이미지를 자기라고 착각하듯이, 甲은 옆의 甲을 타자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반영으로만 만난다. 임진수의 말처럼, 전이 없는 반복은 동어반복이요 삶을 단축하는 도착적 반복이다(임진수, 2016: 130). 상상적 동일시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쟁은 하되 침범은 하지 않는다. 진짜 부딪침이 아니라 거울 속의 부딪침이다.


사주 안에 있을 때. 갑일간의 사주에 또 甲이 있으면, 이 사람의 구조 자체가 갑갑함으로 짜여 있다. 경쟁과 동어반복이 체질이다. 뭘 해도 옆에 자기와 같은 기표가 서 있다. 이것은 성격이 답답해서가 아니라 이 사람이 타자(他者)와 관계 맺는 근본적인 방식이 거울적 반복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같은 기표의 반복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기표의 도래다.
세운·대운에서 올 때. 세운으로 갑(甲)의 해가 오면, 그해 갑갑함이 한 겹 더 씌워진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 경쟁하되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사건이다. 대운으로 오면 십 년을 거울 앞에 선 채로 산다. 같은 기표가 옆에 오래 머문다. 그런데 이 갑갑함의 바닥에서 비로소 질문이 시작될 수 있다. 나는 왜 이렇게 갑갑한가. 그 질문이 거울을 깨는 첫 번째 균열이 된다.


甲이 乙을 만나다 — 새가 모여드는 관계


나무(甲) 위에 새(乙)가 앉아 있다. 온갖 잡새가 다 모여든다. 주변에 사람이 모인다. 인기가 오른다. 대신 좋은 새, 나쁜 새가 모두 달려든다. 새가 둥지로 파고든다. 때로는 새 때문에 나무가 힘들다. 그런데 새가 씨를 뿌려 나무가 번식을 한다(설진관, 2023: 321). 甲이 S₁이고, 乙은 수많은 S₂들이다. 의미가 발생하기 시작하지만 그 의미는 주체가 원한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타자의 욕망(le désir de l'Autre)의 구조다. 밀레가 옮긴 라캉의 말처럼,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밀레, 2008: 39). 甲은 가만히 있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 사람들(乙)이 甲에게 욕망을 투사한다. 甲은 자기가 원해서 인기를 얻은 것이 아니다. 타자들이 甲을 욕망했기 때문에 인기가 온 것이다. 그런데 타자의 욕망은 통제할 수 없다. 좋은 새만 올 수 없듯이, 좋은 욕망만 올 수 없다.
사주 안에 있을 때. 갑일간의 사주에 乙이 있으면,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타자의 욕망이 모여드는 구조를 타고났다. 혼자 가만히 있어도 주변이 복잡해진다. 인기와 기생이 체질에 내장되어 있다. 이 사람이 피곤한 이유는 자기 욕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세운·대운에서 올 때. 세운으로 을(乙)의 해가 오면, 그해 갑자기 새들이 몰려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인기가 올라가지만 동시에 복잡한 일이 시작된다. 대운으로 오면 십 년을 사람에 둘러싸여 산다. 기생의 패턴이 길게 이어진다. 나무에 새가 너무 많이 앉으면 가지가 부러진다.


甲이 丙을 만나다 — 키워주는 관계


나무 근처에 태양이 떠 있다. 오행에서는 甲木이 丙火를 木生火로 키워주는 것이지만, 진화한 모습에서는 오히려 丙火가 甲木을 길러준다. 자식이 시집, 장가가서도 나(甲)를 보살펴준다. 살다 보면 오히려 丙火가 甲木을 더 챙기고 보살피고 키워준다. 인연법(因緣法)이다(설진관, 2023: 322). 오행의 木生火가 회화론에서 火育甲木으로 뒤집어진다. 기표의 사슬에서 S₁이 S₂를 생산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S₂가 역으로 S₁의 의미를 규정한다.


정신분석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사후작용(事後作用, Nachträglichkeit)의 구조다. 먼저 일어난 사건의 의미가 나중에 일어난 사건에 의해 소급적으로 결정된다. 어머니(甲)가 자식(丙)을 낳았지만, 자식의 존재가 어머니의 의미를 새롭게 연다. 인과(因果)가 뒤집어진다. 라캉은 이 구조를 기표의 본질적 속성으로 보았다. 기표는 시간 순서대로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뒤에서 앞으로, 소급적으로 의미가 발생한다.
사주 안에 있을 때. 갑일간의 사주에 丙이 있으면, 이 사람은 누군가에게 키워지는 것이 존재의 근본 방식이다. 주는 것보다 받는 쪽에서 성장한다. 그런데 나중에 그 받은 것을 되돌려주는 구조가 된다. 이 사람의 삶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기의 의미가 바뀐다. 젊을 때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나이 들어 비로소 보인다.
세운·대운에서 올 때. 세운으로 병(丙)의 해가 오면, 그해 성장의 계기가 한 번 열린다. 어둠 속에 있던 나무에 빛이 비추는 사건이다. 대운으로 오면 십 년을 빛 속에서 자란다. 겨울의 甲에게 丙이 오면 아주 감사해한다(설진관, 2023: 328). 그런데 이미 丙이 충분한 사람에게 또 丙이 오면 과잉 성장의 위험이 생긴다. 여름에 태양이 뜨면 고마운 것을 모른다(설진관, 2023: 328).


甲이 丁을 만나다 — 태워버리는 관계


甲 나무가 다 타버리고 잿더미가 된다. 甲이 丁을 만나면 희생해야 한다. 일은 엄청나게 하지만 나(甲)는 온데간데없다. 甲木이 丁火 자식을 위해 온몸을 태워 다 해주었으나 甲은 혼자 쓸쓸히 떠나게 된다(설진관, 2023: 323). 이것이 진정한 木生火가 된다. 甲木이 탄다. 주체가 기표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소진하는 구조다.
정신분석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주체의 소멸(aphanisis)이다. 라캉은 주체가 기표의 사슬 안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했다. 밀레가 옮긴 말처럼, 기표는 다른 기표에게 주체를 대표한다(밀레, 2008: 314). 甲이 丁을 위해 탈 때, 甲이라는 주체는 丁이라는 기표 아래에서 소멸한다. 남는 것은 재뿐이다. 그런데 그 재가 다음 나무의 거름이 된다. 소멸이 곧 재생의 조건이 되는 역설. 주이상스의 구조가 여기에 있다. 태우는 것이 고통이지만 태우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사주 안에 있을 때. 갑일간의 사주에 丁이 있으면, 희생이 이 사람의 체질이다. 자기를 태우는 것이 존재 방식이다. 이 사람에게 쉬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의 존재를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증상이 곧 존재다. 이것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태우지 않으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공포가 밀려오기 때문이다. 헌신적인 사람이 헌신을 멈추면 공허해지는 구조와 같다.
세운·대운에서 올 때. 세운으로 정(丁)의 해가 오면, 그해 자기를 태우는 사건이 한 번 찾아온다. 무리하게 헌신하고, 돌아오는 것이 없고, 쓸쓸해진다. 대운으로 오면 십 년을 연소하며 산다. 재가 십 년에 걸쳐 쌓인다. 그런데 그 재가 다음의 거름이 되기도 한다.


甲이 戊를 만나다 — 고독한 관계


민둥산에 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은 것이다. 독산고목(禿山孤木). 甲 나무의 기세가 다르다. 단단한 흙을 만나 뿌리 내리려 오랜 세월을 견딘다. 영험한 큰 나무다. 영(靈)이 맑고 깨끗하다. 성황당에서 사람들이 기원하고 간다(설진관, 2023: 323). 기표의 사슬에서 이탈하여 홀로 선 자리다. 다른 글자들의 소란에서 벗어난 자리다.
정신분석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실재계(實在界, le Réel)와 맞닿는 자리다. 언어와 질서로 짜인 상징계의 기표 사슬이 닿지 않는 곳에서 주체가 텅 빈 채로 서 있다. 백상현의 말처럼, 주체가 자신의 존재 근거를 상실한 채 텅 빈 기표로 남는 자리다(백상현, 2017: 45). 그 텅 빔이 역설적으로 영험함이 된다. 비어 있기에 사람들이 자기 소망을 걸어놓을 수 있는 나무가 된다. 라캉이 대상 a(objet a)라고 부른 것의 자리다. 욕망의 원인이 되는 대상, 그 자체로는 비어 있지만 타자의 욕망을 끌어당기는 자리다.
사주 안에 있을 때. 갑일간의 사주에 戊가 있으면, 고독과 영험함이 이 사람의 존재 방식이다. 혼자 있을 때 가장 맑다.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오히려 흐려진다. 이 사람의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필요한 고독이다. 스님, 성직자, 학자의 길과 닿아 있다.
세운·대운에서 올 때. 세운으로 무(戊)의 해가 오면, 그해 뿌리를 내리는 사건이 한 번 온다. 떠돌던 사람이 어딘가에 정착한다. 대운으로 오면 십 년을 단단한 흙 위에서 산다. 산 위의 산처럼 고독이 깊어진다. 그런데 그 깊어진 고독 안에서 맑아지는 것이 있다.


甲이 己를 만나다 — 불안하지만 쓰러지지 않는 관계


甲이 밭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뿌리를 내리지만 조금 불안하다. 그런데 쓰러지지는 않는다. 어찌 되었든 뿌리를 내린 것으로 안정된 상태를 이루었다. 甲은 己에 의지해서 성장한다(설진관, 2023: 324). 戊(큰 산)가 아니라 己(밭)라는 점이 핵심이다. 단단한 바위가 아니라 부드러운 흙이다. 깊이 박히지는 못하지만 넘어지지도 않는다.
정신분석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환상(幻想, fantasme)의 구조다. 라캉은 환상을 주체가 자기 존재를 지탱하기 위해 구성하는 시나리오로 보았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쓰러지지 않게 해주는 것. 甲이 己 위에 서 있는 것이 정확히 그렇다. 불안하지만 쓰러지지 않는다. 환상이 주체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환상은 견고하지 않다. 己는 부드러운 흙이다. 비가 오면 패인다.
사주 안에 있을 때. 갑일간의 사주에 己가 있으면, 이 사람은 불안정한 안정 속에 살아간다.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지만 완전히 안전하지도 않다. 항상 조금 불안하다. 그런데 그 불안이 오히려 이 사람을 깨어 있게 한다. 완벽한 안정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약간의 불안 속에서 보인다.
세운·대운에서 올 때. 세운으로 기(己)의 해가 오면, 그해 불안한 뿌리를 한 번 내린다. 완전한 정착은 아니지만 떠돌지도 않는 상태가 된다. 대운으로 오면 십 년을 그 어중간한 자리에서 산다. 이미 己가 있는 사람에게 또 己가 오면 甲己合이 작동한다. 묶인다. 보이지 않는 구속들이 발목을 잡기 시작한다.


甲이 庚을 만나다 — 박살 나는 관계


甲은 온전한 나무인데 庚이라는 큰 쇳덩이, 도끼가 甲을 내리친다. 甲이 깜짝 놀란다. 철퇴 한 방을 맞은 것이다. 甲木이 쪼개진다. 비궁파벌(飛宮破伐). 사망, 중상, 박살, 이사, 도피. 나무가 성장하는 데 장애가 생긴다(설진관, 2023: 324). 이 장면에서 능동과 수동이 뒤집어진다. 甲이 맞는 것이면서 동시에 庚이 때리는 것이다. 한 관계 안에 맞는 자와 때리는 자가 동시에 있다.
정신분석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소외(疏外, aliénation)의 구조다. 라캉은 세미나 11에서 이 소외를 강제 선택의 벨(vel)로 정식화했다. 밀레가 옮긴 말처럼, 돈이냐 목숨이냐에서 돈을 선택하면 돈도 목숨도 다 잃고, 목숨을 선택하면 돈 없는 목숨,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목숨만 건진다(밀레, 2008: 321). 甲+庚의 관계가 정확히 이것이다. 庚을 받아들이면 甲이 쪼개진다. 庚을 거부하면 甲은 바깥 세계와의 접속을 잃는다. 어떤 선택을 하든 무언가를 잃는다. 권택영의 말처럼, 숨을 쉬기 위해, 살기 위해 우리는 도둑을 맞은 것이다(권택영, 2003: 88).
사주 안에 있을 때. 갑일간의 사주에 庚이 있으면, 이 사람의 구조 자체가 충격과 쪼개짐으로 짜여 있다. 성장하려 할 때마다 장애가 생긴다. 이것은 운이 나빠서가 아니라 이 사람이 세계와 관계 맺는 근본적인 방식이다. 쪼개짐이 이 사람의 존재 방식이다. 쪼개지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하다. 고통이지만 익숙한 고통이다.
세운·대운에서 올 때. 세운으로 경(庚)의 해가 오면, 그해 도끼가 한 번 날아온다. 사업이 무너지거나, 이혼하거나, 몸이 망가진다. 예측할 수 없는 충격의 사건이다. 대운으로 오면 십 년을 도끼의 그늘 아래 산다. 쪼개짐의 패턴이 길게 반복된다. 핑크가 말한, 기표의 사슬이 더 촘촘해지는 것이다. 같은 자리에 도끼가 거듭 떨어진다.


甲이 辛을 만나다 — 도려내는 관계


다듬어진 날카로운 칼날이 辛金이다. 辛金은 날카로운 부위로 甲木을 살살 도려낸다. 甲이 辛을 만나면 庚金처럼 한 방 맞는 것이 아니다. 칼로 살살 오려낸다. 그러면 甲木이 미친다. 이것을 辛甲하다고 한다. 지금의 심각하다가 이 말에서 왔다. 甲木 입장에서 庚金보다 辛金이 더 겁난다. 고문이다. 죽지는 않는다(설진관, 2023: 325). 辛甲이라는 소리의 겹침에서 심각이 튀어나온다. 기표의 물질성, 소리가 장면을 만든다.
정신분석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반복강박(反復强迫, Wiederholungszwang)의 미세 외상(微細外傷) 구조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반복강박은 큰 외상의 반복만이 아니다. 일상의 작은 상처들이 같은 자리에 반복적으로 쌓이면서 주체를 서서히 무너뜨린다. 庚이 한 방에 쪼개는 것이라면, 辛은 매일 조금씩 깎아낸다. 칼자국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왜 지쳐 있는지 모른다. 밀레가 옮긴 말처럼, 쾌락원칙 너머에서 우리는 반복강박을 만난다(밀레, 2008: 243).
사주 안에 있을 때. 갑일간의 사주에 辛이 있으면, 서서히 잠식당하는 것이 이 사람의 체질이다. 큰 사건 하나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모욕들이 반복되면서 사람을 무너뜨린다. 이 사람은 자기 삶이 왜 심각한지 설명하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큰 사건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에서는 매일 도려내지고 있다.
세운·대운에서 올 때. 세운으로 신(辛)의 해가 오면, 그해 작은 상처들이 일제히 시작된다. 직장에서 매일 조금씩 소외되거나, 관계에서 미세한 균열이 쌓인다. 대운으로 오면 십 년을 그 도려냄 속에 산다. 칼자국이 십 년에 걸쳐 깊어진다. 그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아, 그때부터 심각했구나 하고 깨닫는다.


甲이 壬을 만나다 — 키워주되 낯선 관계


壬水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땅에 스며든 물이다. 모든 생명체는 壬水를 즐겨 먹는다. 甲木이 壬水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이다(설진관, 2023: 326). 그런데 설진관은 흥미로운 관찰을 덧붙인다. 甲木은 편인(偏印) 공부를 잘한다. 종교, 역학, 의사, 한의사다. 반면 정인(正印) 공부가 되지 않는다. 건성으로 한다. 집에 있는 엄마에게는 별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밖에 있는 친구 엄마한테 정을 느낀다(설진관, 2023: 327).
정신분석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분리(分離, séparation)의 구조다. 라캉은 세미나 11에서 소외와 분리를 주체 형성의 두 축으로 놓았다. 소외가 기표 안에 들어가면서 자기를 잃는 것이라면, 분리는 타자의 기표에서 빠져나와 자기만의 자리를 찾는 것이다. 甲이 정인(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못 느끼고 편인(타자의 어머니)에게서 정을 느끼는 것이 정확히 이 분리의 운동이다. 가장 가까운 기표에서 떨어져 나와 낯선 기표에서 성장한다. 분리는 고통이지만 주체가 태어나는 조건이다.
사주 안에 있을 때. 갑일간의 사주에 壬이 있으면, 낯선 기표에서 성장의 자양분을 얻는 것이 이 사람의 구조다. 가장 가까운 사람(어머니, 정인)에게서는 의미를 못 끌어내고, 타자의 언어에서 오히려 자라는 체질이다. 이 사람의 공부, 배움, 성장은 항상 예상 밖의 경로를 통해 온다.
세운·대운에서 올 때. 세운으로 임(壬)의 해가 오면, 그해 성장의 물줄기가 한 번 열린다. 마른 나무에 물이 스며드는 사건이다. S₂가 적절한 위치에서 도래한 것이다. 대운으로 오면 십 년을 그 물 속에서 자란다. 그런데 과잉 성장의 위험도 있다. 나무가 물을 너무 빨아 먹으면 배가 망망대해로 떠나는 형국이 된다(설진관, 2023: 326). 방황이 시작될 수 있다.


甲이 癸를 만나다 — 닿지 않는 관계


癸水 빗물은 지표면에 닿기 전의 물이다. 나무가 있는데 비가 쫙쫙 내리고 있다. 축 처져 있는 모습이다. 내리는 빗물은 나무가 받아먹을 수 없고 성장이 멈춘다. 오히려 木에게 병충해가 생기게 한다. 壬, 癸 모두 印星이지만 癸水는 정인(正印)이라 모친의 덕(德)을 못 본다(설진관, 2023: 327). 같은 물인데 壬과 癸가 전혀 다르다. 壬은 뿌리까지 닿는 물이고, 癸는 표면에서 머무는 물이다. 형태는 비슷한데 질이 다르다.
정신분석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결여(缺如, manque)의 구조다. 라캉은 대상 a(objet petit a)를 욕망의 원인이자 대상으로 정의했다. 대상 a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 상실된 것의 자리다. 甲에게 癸는 있지만 닿지 않는 사랑이다. 어머니의 사랑(정인)이 비처럼 내리고 있지만, 그 비가 뿌리까지 스며들지 못한다. 사랑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사랑의 형식이 주체에게 맞지 않았다. 빗물은 충분했다. 그런데 나무가 필요한 것은 빗물이 아니라 땅에 스민 물(壬)이었다.
사주 안에 있을 때. 갑일간의 사주에 癸가 있으면, 닿지 않는 사랑이 이 사람의 구조다. 주변에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있는데 형태가 맞지 않는다. 어머니가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 방식이 이 나무에게 병충해를 일으키는 종류였다. 이 사람은 평생 사랑을 받으면서도 목마르다.
세운·대운에서 올 때. 세운으로 계(癸)의 해가 오면, 그해 닿지 않는 사랑을 한 번 경험한다. 누군가 잘해주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맞지 않는 사건이다. 대운으로 오면 십 년을 그 목마름 속에 산다. 壬이 와야 할 자리에 癸가 온 것이다. 그 차이를 놓치면 나무가 죽는다.


설진관의 네 가지 예시를 정신분석으로 읽다


설진관은 甲論 끝에 네 개의 사주 예시를 제시했다. 회화론의 핵심은 천간의 글자만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월지(月支)의 계절 위에 천간의 글자를 겹쳐 놓는 것이다. 나무가 봄에 서 있는 것과 겨울에 서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장면이다. 설진관이 조후(調候)를 강조한 이유가 여기 있다. 계절이라는 바탕 위에 글자들이 올라설 때 비로소 회화가 완성된다. 그 완성된 회화를 하나의 기표로 압축하면, 그것이 그 사주의 은유다.


예시 1. 마른 숲 — 봄인데 물이 없는 나무


乙  甲  甲  ○
亥   ○  寅  ○


월지 寅. 봄이다. 甲의 조후에 따르면 봄의 甲은 급속도로 성장한다. 이때 壬水가 필요하다(설진관, 2023: 328). 천간을 보라. 乙, 甲, 甲. 나무와 나무와 새다. 물이 없다. 壬이 천간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봄에 급속도로 자라려는 나무인데, 표면에 물이 없다. 시지(時支)에 亥가 앉아 있다. 亥 속에 壬水가 숨어 있다. 물은 있다. 다만 지지 아래에 묻혀 있다. 천간의 표면에는 나무와 새만 보인다. 물은 땅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
봄에 나무 두 그루가 숲(雙木成林)을 이루었다. 새(乙)까지 모여들었다. 사람이 모여든다. 인기는 올라간다. 복잡한 일이 많이 생긴다(설진관, 2023: 327). 그런데 정작 이 나무를 키워줄 물은 표면에 없다. 봄이라 급속도로 자라야 하는데, 자라게 해줄 것은 오지 않고, 기생하는 것만 달라붙는다.
이 사주의 은유는 마른 숲이다. 번잡한데 목마르다. 인기 있는데 성장하지 못한다. 간호사에게 돌다리가 은유였듯이, 이 사람에게는 마른 숲이 은유다. 인기와 복잡함과 갑갑함이 수평으로 나열되다가 마른 숲이라는 하나의 기표로 관통된다. 정신분석적으로 읽으면 이렇다. 천간(표면)은 환유의 사슬이다. 乙에서 甲으로, 甲으로 기표가 수평으로 미끄러지고 있다. 지지(심층)는 억압된 기표다. 亥 속에 壬水가 묻혀 있다. 이 사람에게 진짜 필요한 것(壬)은 무의식(지지) 속에 숨어 있다. 의식의 표면(천간)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이 몰려들고 복잡한 일이 생기는 것만 보인다. 정작 자기를 키워줄 물이 발밑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 사람이 상담실에서 사람들이 자꾸 모여드는데 정작 저는 목이 마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목마름이 S₂로서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순간이다.


예시 2. 겨울에 봄을 품은 나무 — 자식이 태양이 된 사주


丙  甲  壬  ○
寅  ○   子  ○


월지 子. 겨울이다. 甲의 조후에 따르면 겨울의 甲은 성장을 멈춘다. 이때 丙火가 필요하다. 겨울에 丙火가 보이면 아주 감사해한다(설진관, 2023: 328). 천간을 보라. 丙, 甲, 壬. 태양, 나무, 물이다. 겨울인데 태양이 떠 있다. 물(壬)도 있다. 조후가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그런데 丙이 어디에 앉아 있는가. 시간(時干)이다. 시주는 자녀의 자리다. 태양이 자녀의 자리에서 뜬 것이다. 설진관의 기록대로, 甲 일간 여성이 자식 丙을 낳고 나서 크게 발전하여 직장에서 성공하였다(설진관, 2023: 327).
이 사주의 은유는 겨울에 봄을 품은 나무다. 겨울이다. 성장이 멈춰야 할 계절이다. 그런데 자녀 자리에 태양(丙)이 앉아 있다. 아이를 낳는 순간 겨울에 봄이 앞당겨졌다. 壬水는 원래 겨울에 얼어붙어야 하는데, 丙이 그 얼음을 녹여 甲이 빨아 먹을 수 있는 물로 바꿔준다. 자식이 어머니를 살린 것이다.
정신분석의 사후작용(事後作用, Nachträglichkeit) 구조와 정확히 겹친다. 맹정현이 프로이트의 엠마 사례를 통해 이 구조를 벗겨놓았다. 엠마는 상점에 혼자 들어가지 못하는 여성이다. 열두 살 때 상점에 들어갔다가 점원에게서 성적인 조롱을 당한 것(장면 2)을 기억해낸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그 사건만으로는 증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추정한다. 그다음 세션에서 엠마는 더 오래된 장면을 기억해낸다. 어렸을 때 사탕을 사려 상점에 들어갔는데 상점 주인이 그녀의 성기를 만졌다는 것(장면 1)이다. 맹정현은 하나의 사건이 사후적으로 그 의미가 결정된다고 풀이한다. 맹정현은 애초의 장면 1도 무의미했고 장면 2도 그 자체로는 그리 불쾌한 일이 아니었는데, 장면 2가 장면 1을 성적인 사건으로 결정하면서 장면 1이 정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갈등을 일으킨다고 본다(맹정현, 2015: 42-43).
이 사주에서 벌어진 일이 정확히 이것이다. 장면 1은 겨울의 甲이다. 성장이 멈추어 있었다. 그 자체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냥 겨울이었다. 장면 2는 자식(丙)의 탄생이다. 그 자체로는 출산이라는 사건일 뿐이다. 그런데 장면 2(丙의 탄생)가 장면 1(겨울의 甲)을 소급적으로 결정했다. 자식을 낳고 나서야, 이 여성은 자기가 겨울에 멈춰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멈춰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사후적으로 의미를 얻은 것이다. 오행의 木生火(나무가 불을 낳는다)가 아니라 火育甲木(불이 나무를 키운다)이다. 자식이 어머니를 가르치고 보살피는 인연법(因緣法)이다. 맹정현의 말처럼, 우리의 삶이 우리가 의식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을 초과하는 연상의 논리에 의해 결정된다(맹정현, 2015: 45). 은유가 오행의 논리를 뒤집었다.


예시 3. 거울 앞의 나무 — 어떤 계절에도 조후가 풀리지 않는 사주


甲  甲  ○  ○
○     ○  ○  ○
지지가 전부 비어 있다. 계절을 알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이 사주의 본질을 드러낸다. 천간에 甲과 甲만 있다. 다른 기표가 없다. 봄이라면 壬水가 필요한데 없다. 여름이라면 壬水가 필요한데 없다. 가을이라면 丙火가 필요한데 없다. 겨울이라면 丙火가 필요한데 없다. 어떤 계절이든 조후가 해결되지 않는 구조다. 설진관은 기록했다. 하는 일이 갑갑하다. 경쟁한다. 재물 손실을 일으킨다. 자식이 답답하다(설진관, 2023: 327).
이 사주의 은유는 거울 앞의 나무다. 나무가 자기 그림자만 보고 있다. 옆에 서 있는 것이 다른 기표(S₂)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반복(S₁)이다. 라캉의 거울 단계(le stade du miroir)에서 유아가 거울 속 이미지를 자기라고 착각하듯이, 이 甲은 옆의 甲을 타자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반영으로만 만난다. 환유도 은유도 발생하지 않는다. 기표가 기표 위에 겹쳐지지 않고 옆에 나란히 서 있기만 한다.
상담실에서 이 구조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50분이 흘러도 핵심이 잡히지 않는다. 말이 말로 이어지기만 할 뿐 어디에도 못을 박지 못한다. 같은 이야기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 나무가 거울 속의 나무를 보면서 저게 나인가 묻고 있지만, 거울은 대답하지 않는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거울이 아닌 기표의 도래다. 壬이든, 丙이든, 戊든, 전혀 다른 질감의 기표가 와서 수직으로 겹쳐야 한다. 그래야 거울이 깨지고 은유가 터진다.


예시 4. 뿌리에 도끼가 박힌 나무 — 부모의 자리에서 날아온 기표


○  甲  庚  ○
○  ○  ○     ○
비궁파벌(飛宮破伐). 부모덕이 없다. 부모에게 박살 난다(설진관, 2023: 327). 월간(月干)에 庚이 앉아 있다. 월주는 부모의 자리다. 여기서도 지지가 비어 있다. 그런데 핵심은 庚이 월간, 곧 부모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甲의 조후에서 庚은 어떤 계절에서도 필요한 글자가 아니다. 봄에는 壬이 필요하고 겨울에는 丙이 필요하다. 甲에게 庚은 조후의 해결책이 아니라 구조적 충격이다. 도끼가 어디서 날아왔는가. 부모의 자리에서 날아왔다. 이 사람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도끼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주의 은유는 뿌리에 도끼가 박힌 나무다. 나무가 서 있다. 그런데 뿌리 깊은 곳에 도끼가 박혀 있다. 겉으로는 서 있지만 안으로는 쪼개져 있다. 자라려 해도 뿌리가 갈라져 있어서 물을 빨아올리지 못한다. 이 사람에게 부모는 뿌리가 아니라 뿌리에 박힌 도끼다.
정신분석에서 이 구조는 알베르트의 구조와 정확히 겹친다. 아버지의 말이 자녀를 향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기표는 새겨졌다. 부모의 자리에서 날아온 庚이라는 기표가 甲의 존재를 쪼갰다. 그런데 여기에 주이상스의 역설이 있다. 박살이 나는 것이 고통스러운데도 그 구조를 반복한다. 왜 그런가. 뿌리에 도끼가 박혀 있는 것이 이 사람이 부모와 연결되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도끼를 빼면 뿌리가 아예 없어질 것 같다. 고통이지만 연결이다. 박살이지만 관계다. 도끼가 박혀 있어야 부모가 있다. 그것이 이 사주의 주이상스다.


전치와 행동화 — 사주가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못하는 것


사주가 보여주는 것은 구조도(構造圖)다. 어떤 기표가 어떤 기표를 만나는가. 甲+庚이면 박살이고, 甲+丁이면 연소이고, 甲+壬이면 성장이다. 구조도는 정확하다. 설진관의 회화론이 강력한 까닭은 이 구조도를 눈에 보이는 장면으로 펼쳐놓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조도에는 한 가지가 빠져 있다. 충격이 발생한 뒤 그 에너지가 어디로 흘러가는가. 사주는 甲이 庚을 만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살이 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박살의 에너지가 어디로 갔는지는 보여주지 못한다. 정신분석이 추적하는 것이 바로 이 경로(經路)다. 사주가 구조도라면 정신분석은 경로도다.


전치(轉置, déplacement)는 기표의 에너지가 원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작업(Traumarbeit)에서 이 전치를 발견했다. 꿈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사소하게 나타나고, 사소한 것이 강렬하게 나타난다. 에너지가 자리를 옮긴 것이다. 상담실에서 이것을 본다. 甲+庚 구조를 가진 사람이 있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박살이 났다. 도끼가 날아왔다. 그런데 이 사람은 상사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집에 와서 배우자에게 화를 낸다. 배우자가 사소한 말을 했을 뿐인데 폭발한다. 배우자는 영문을 모른다. 사주는 이 장면을 설명하지 못한다. 사주에는 甲+庚만 있다. 그 충격이 배우자에게로 흘러갔다는 것은 사주에 적혀 있지 않다.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곳으로 옮겨갈 뿐이다. 직장에서 맞은 도끼가 가정에서 터진다. 가정에서 터진 에너지가 아이에게로 흘러간다.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에게 화를 낸다. 기표의 에너지가 기표의 사슬을 타고 이동한다. 사주는 甲+庚이라는 최초의 충격만 보여준다. 그 뒤의 흐름은 정신분석만이 추적할 수 있다.


행동화(行動化, acting out)는 전치와 다른 차원이다. 전치가 에너지의 이동이라면, 행동화는 기표화(記標化)되지 못한 것이 몸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말할 수 없었던 것, 기표로 포착되지 못한 것이 행동으로 나온다. 甲+丁 구조를 가진 사람을 상담실에서 만난다. 일을 엄청나게 하지만 자기는 온데간데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표를 낸다. 이직이 아니다. 모든 관계를 태워버리고 떠난다. 주변에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왜 갑자기. 사주를 보면 甲+丁이 있다. 나무가 타서 재가 되는 구조. 그런데 사주는 이 사람이 왜 하필 이 시점에, 왜 하필 이 방식으로 태워버렸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 기표가 의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터져 나온 것이 사표다. 말로 할 수 있었다면 사표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말이 막혀서 몸이 대신 말한 것이다.
라캉은 행동화와 행위로의 전환(passage à l'acte)을 구분했다. 행동화는 무대 위에서 벌어진다. 타자를 향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다. 행위로의 전환은 무대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타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甲+丁의 사람이 사표를 내는 것이 행동화라면, 甲+庚의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야반도주하는 것은 행위로의 전환에 가깝다. 도피(逃避)라고 설진관이 기록한 것(설진관, 2023: 324)이 정확히 이 자리다.


왜 고통을 멈추지 못하는가 — 주이상스와 욕동의 회로


고통인데 멈추지 못한다. 사람들은 의지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런데 상담실은 교과서가 아니다. 그 고통 안에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것을 주이상스(jouissance, 향락)라고 불렀다.
주이상스는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한 갈증을 유발한다. 마실수록 더 마시고 싶어진다.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멈추지 못한다. 늦은 밤에 스마트폰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내려놓지 못하는 것. 영상 하나만 더, 스크롤 한 번만 더. 그것이 쾌락인가. 아니다. 이미 피곤하고,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고, 눈이 아프다. 그런데 멈추지 못한다. 주이상스의 가장 일상적인 얼굴이다. 라캉은 주이상스를 즐거움이나 쾌락으로 옮기면 거기 깃든 죽음의 이미지가 사라진다고 보아, 원어를 그대로 쓰게 했다.
밀레가 옮긴 라캉의 말처럼, 욕동은 대상 주위를 돌아다니며, 그 목적은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원을 그리며 돌아오는 것에 있다(밀레, 2008: 218). 욕동에게 대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경유지다. 경유지에 도달해도 다시 출발한다. 甲甲 구조를 가진 사람이 갑갑하다고 호소한다. 그런데 갑갑한 상황을 벗어날 기회가 오면 스스로 그 기회를 밀어낸다. 갑갑함 속에 주이상스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갑갑함이 없으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공포가 밀려온다. 증상은 주체의 존재 방식이다.
임진수는 쾌락원칙이 작은 진폭의 리듬으로 작게 즐기는 것이라면, 향락은 큰 진폭의 리듬으로 크게 즐기는 것이라고 적는다(임진수, 2016: 144). 명리학은 이 구조를 알고 조심하라고 말한다. 정신분석은 이 구조와 당신의 관계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주이상스의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방향으로 흐를 뿐이다.


S₂의 도착 — 의미가 발생하는 순간


사주를 읽는 일과 사람을 만나는 일은 닮아 있다. 둘 다 기표의 사슬 앞에서 S₂의 도착을 기다리는 작업이다. 간호사가 50분 동안 이직 이야기를 수평으로 늘어놓았을 때, 기표들이 줄줄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아직 의미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돌다리라는 기표가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S₂가 도착한 것이다. 환유가 은유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권택영의 말처럼, 기표들의 강물 위에 던진 주체라는 그물은 그 순간의 의미를 건질 수 있을 뿐이다(권택영, 2003: 71). 사주명리학에서 이 순간은 용신(用神)을 찾았을 때에 해당한다. 甲이라는 S₁ 홀로는 갑갑할 뿐이었던 존재가, 壬이라는 S₂를 만나는 순간 의미의 물줄기가 터진다.


곧게 서려는 기표에게


이 에세이는 설진관의 甲論을 라캉 정신분석의 기표 이론과 주이상스 개념으로 다시 읽는 시도였다. 甲이라는 한 글자가 열 개의 다른 글자를 만나며 그리는 풍경들, 그 풍경 속에 숨어 있는 기표의 운동과 욕동의 회로와 주체의 운명을 추적했다. 甲은 곧게 서려는 기표다. 그 욕망은 사주에 새겨져 있다.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곧게 서려는 욕망이 어떤 다른 기표와 만나느냐에 따라, 그 나무는 숲이 되기도 하고, 재가 되기도 하고, 영험한 고목이 되기도 하고, 쪼개진 잔해가 되기도 한다.
명리학은 이 구조를 읽는다. 정신분석은 이 구조 안에서 주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읽는다. 구조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구조와 자기 사이의 관계를 바꾸는 것, 그것이 분석의 작업이고 상담의 핵심이다.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 남자에게 나는 甲이라는 글자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 나무가 당신입니다. 갑갑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곧게 서려는 것이 당신의 본성이니까요. 문제는 당신이 만나고 있는 기표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그러면 저는…… 어떤 기표를 만나야 하는 건가요. 그 질문이 이미 S₂의 도착이었다. 환유가 은유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나무가 물을 만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강물은 계속 흐른다. 그런데 이제 그는 강물이 흐른다는 것을 안다. 그 앎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시작이다.


참고문헌

권택영(2003). 『라캉·장자·태극기』. 민음사.

맹정현(2013). 『리비톨로지』. 문학과지성사.

맹정현(2015). 『트라우마 이후의 삶』. 책담.

백상현(2017). 『라캉의 인간학』. 위고.

브루스 핑크 / 이성민 역(2010). 『라캉의 주체: 언어와 향유 사이에서』. 도서출판b.

설진관(2023). 『야단법석 명리학 실무대강 2권』. 창조명리.

임진수(2016). 『전이와 반복』. 파워북.

자크-알랭 밀레 / 맹정현·이수련 역(2008). 『자크 라캉 세미나 11』. 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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