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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게 추운 겨울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나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이십 리 길,
세 개의 산모퉁이를 지나야 하는 나의 차림새는 너무도 처절했습니다.
양말도 없이 검은 고무신을 신고,
내복도 없이 기운 자국 선명한 헑바지와 셔츠만 입은 채 칼바람을 맞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커먼 보리밥마저 제대로 먹지 못해 배에서는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고,
다리는 휘청거렸습니다.
마지막 산모퉁이 언덕,
눈앞이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지며 의식이 몽롱해졌습니다.
힘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육신은 이미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친구들과 추위를 피하던 작은 바람막이 틈으로 쓰러지듯 들어갔고,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눈을 감았습니다.
가물가물한 의식 저편에서 나는 환한 미소를 띠고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언덕에 쓰러진 나의 육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습니다.
아홉 살 소년의 삶이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생각하던 찰나,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백마선 도련님!
정신 좀 차리세요."
지금껏 본 적 없는 묘령의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내 몸이 싸늘하다며 나를 품에 안아주었습니다.
그 품은 너무도 따뜻했습니다.
다시 의식이 사라진 내 눈앞에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나는 눈부시게 하얀 백마의 잔등에 할아버지와 함께 앉아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문중의 장손이었으나 1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셨고,
문중의 압박에 어머니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늘이 알아서 자식을 보내 주실 것이니,
너무 억지로 하려 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매년 겨울 깊은 설산을 찾아가 천지신명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차가운 눈으로 몸을 씻고 칼바람을 견디며 정성을 다할 때,
거대한 호랑이가 나타나 아버지를 지켜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호랑이를 하늘이 보낸 수호신이라 믿었습니다.
어머니 또한 이른 새벽 정화수를 떠놓고 장독대에서 치성을 드렸습니다.
매서운 바람에 눈물이 고드름이 될 정도의 지성이 십 년을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하늘이 응답하여 내가 잉태되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는 백마를 탄 선인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셨고,
내게 '백마선'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습니다.
내가 태어난 날은 온 고을의 축제였고,
우리 집안의 행복은 영원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요.
정직하고 건강하던 아버지는 서른아홉의 나이에 이름 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나의 삶은 급격히 몰락했습니다.
굶주린 이웃에게 베풀던 아버지의 음덕을 뒤로하고,
어머니는 재혼하여 떠나셨으며 할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남은 것은 할머니와 나,
그리고 갓난 남동생뿐이었습니다.
쌀독은 비었고 겨울 땔감조차 부족한 고단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희미하게 누군가 나의 눈물을 닦아준다는 느낌에 눈을 떴습니다.
백옥같이 하얀 얼굴을 한 여인, 마치 동화 속 천사나 선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녀의 품 안에서 나는 따뜻한 온기를 느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온 '연화'라고 소개했습니다.
연화는 내게 들장미 향기를 풍기며 세상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음식을 건넸습니다.
입안에 넣자마자 눈 녹듯이 사르르 녹아버리는 그 맛은 형용할 수 없이 감미로웠습니다.
그때 저만치 동네 친구들과 어른들이 지나갔습니다.
나는 반가워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은 마치 우리가 없는 것처럼 뚜벅뚜벅 갈 길만 갔습니다.
연화는 말했습니다.
"도련님, 지금 저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기운이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죠."
그녀는 내가 하늘의 거룩한 나라에서 온 귀한 존재이며,
잠시 여행을 온 것이라 일러주었습니다.
또한 아무리 힘들더라도 꿋꿋하게 살아야 하며,
오직 '아름다운 영혼' 하나만을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다음 날도 연화는 언덕에서 나를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귀한 과일과 음식을 내주었고,
나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연화는 나에게 자연과 소통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풀, 나무, 꽃, 벌레 등 모든 생명체가 자기들만의 언어로 말을 하니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라 했습니다.
그녀가 준 옷은 마치 햇볕을 몸에 감싸고 있는 듯 따뜻했고,
그 옷을 입은 우리 형제의 화색 도는 모습에 동네 사람들은 신기해했습니다.
겨울이 깊어가던 어느 날,
연화는 나를 '토성산'의 소나무 숲으로 초대했습니다.
그곳에는 눈 덮인 바깥세상과 달리 따뜻한 햇살과 꽃들이 가득한 신비로운 마을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전망루에 올라 바라본 그곳은 연꽃 호수가 거울처럼 맑고,
날개 달린 짐승이 이끄는 마차가 달리는 별천지였습니다.
연화는 보이는 세상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세상은 영원하다고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영혼의 눈을 가져야만 이 진실한 세상을 볼 수 있으며,
양심이 싫어하는 일을 하면 그 눈을 가질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연화와 보낸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달랐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러 달을 보낸 듯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내가 장차 겪어야 할 시련들을 예고하면서도 그림자처럼 곁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소나무 숲을 빠져나오자 그 신비로운 마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할머니는 나의 이야기를 재미있는 이야기꾼의 상상이라 여기셨습니다.
봄이 오고 버들가지에 싹이 돋을 무렵,
나의 귀에 가냘픈 비명이 들렸습니다.
"아, 목말라... 나 좀 살려줘요."
소리를 따라가 보니 담 너머에 뿌리째 말라가는 봉숭아 꽃나무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개울물에 담가주었고, 꽃나무는 기적처럼 되살아났습니다.
그 꽃나무는 나를 볼 때마다 "사랑해"라는 파장을 보내왔습니다.
그 체험 이후 나는 작은 생명 하나도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모든 존재는 우주와 연결된 사랑의 유기체임을 깨달았습니다.
가을바람에 살랑이는 코스모스 꽃물결 속에서도 연화는 나타나 말했습니다.
"화초들의 귀여운 몸짓이 바로 그들의 언어이며 우주의 메시지입니다.
소리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전해오는 소리를 들으려 노력하세요."
연화는 내게 인생에 대한 조숙한 관념을 심어준 스승이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밤낚시를 나갔다가 전설 속 물귀신들이 산다는 '도깨비 섬'에 올랐습니다.
그곳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가 다시 한번 이차원 세상을 체험했습니다.
물질 구조가 다른 그곳에서 나는 붉은 의상을 입은 노인을 만났고,
다시 나타난 연화의 도움으로 무사히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주는 다차원의 세상들이 겹쳐 있는 곳입니다.
인간의 눈과 귀가 감지할 수 있는 한계 때문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생각은 곧 에너지이며,
식물과 동물도 본능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텔레파시를 통해 의사를 교환합니다.
불신의 고정관념이 퇴화시킨 이 본능적인 감각을 회복해야 합니다.
연화는 내 나이 열세 살 이후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인생의 영원한 그리움이자 대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꽃향기와 따스한 기운은 지금도 나의 곁에 머물며 위로를 건넵니다.
나는 오늘도 묻습니다.
"나는 왜 이 진흙탕 같은 세상을 선택해 왔는가.
그리고 돌아갈 그곳은 정말 슬픔이 없는 나라일까.“
4차원 문명세계의 메세지 1 권 - 우주의 목소리
[桃仙堂 朴天洙 (도선당 박천수)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