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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춘천교구 : 춘천 소양로 성당과 순교 터

작성자Lee Andrea|작성시간17.06.08|조회수74 목록 댓글 0
춘천교구 : 춘천 소양로 성당과 순교 터
테마 분류 :: 성지지역 분류 :: 춘천교구 > 춘천
6.25 때 순교한 고 안토니오 신부의 살신성인 기념 성당

소양로 성당은 1949년 1월 죽림동 본당으로부터 분리·설립되었으며, 초대 주임으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고 안토니오(Anthony Collier, 1913.6.20.∼1950.6.27)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콜리어 신부는 교구장 퀸란(T. Quinlan, 具仁蘭) 몬시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본당에 남아 신자들을 돌보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복사 김경호 가브리엘과 함께 생포되어 6월 27일 인민군에 의해 사살되고 말았다. 이로써 콜리어 신부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가운데 한국 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던 6월 25일은 주일이었고, 고 신부는 본당에서 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교우들과 저녁 기도를 바치고, 그 곳에 머물렀다. 적군이 코앞에 와 있었지만 고 신부는 6월 26일에도 미사를 봉헌했고, 위험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하여 우선 성체를 옮겨 놓았다. 폭격이 심해지자 방공호로 대피한 후, 고 신부는 함께 있던 복사와 신자들을 안전하게 피신하도록 권고하고, 자신은 성당을 지키겠다고 말하였다. 전황이 나빠지자 6월 27일 오후 고 신부는 복사였던 김경호 가브리엘과 함께 죽림동 성당으로 가던 중 우체국 근처 로터리 부근에서 인민군의 검문을 받았다.

인민군이 고 신부에게 스파이냐고 묻자 고 신부는 가톨릭 신부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고, 둘은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인민군 장교는 신부의 주머니를 수색하여 시계, 묵주, 돈과 개인 소지품을 다 가져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즉시 밧줄에 묶여 소양강변 부근(또는 공지천 방향)으로 끌려갔는데, 도중에 인민군은 고 신부를 먼저 쏘고 다시 두 발을 더 쏘았다. 총을 맞고 고 신부는 그 자리에서 선종하였다. 김 가브리엘은 고 신부가 총을 맞으면서 그를 끌어안았기 때문에 목과 어깨에 심한 총상만 입고 살아났다.
김 가브리엘과 밧줄에 묶여 끌려가던 콜리어 신부는 “가브리엘, 자네는 처자식이 있으니 꼭 살아야 하네. 저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 재빨리 쓰러지게. 내가 쓰러지면서 자네를 덮치겠네.”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인민군 병사는 경고 한 마디 없이 총을 난사했다. 그때 김 가브리엘은 목과 어깨에 총상을 입었지만 자신을 끌어안고 쓰러진 콜리어 신부 덕분에 목숨을 건져 훗날 그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1950년 6월 27일에 순교한 고 신부의 시신은 6월 29일 교우와 동네 사람들이 총살당한 그 자리에 묻었다.

현재 소양로 성당 건물은 3대 주임신부인 성 콜롬반 외방선교회 제임스 버클리(James Buckley) 신부가 순교한 콜리어(Anthony Collier) 신부를 기리고자 1956년 건립한 성당이다. 국내 최초로 근대적 양식을 도입한 교회 건축물인 이 성당의 평면은 당시에는 보기 드문 반원형을 기본으로 하여 중앙 제단을 중심으로 신자석을 부채꼴로 배열하고, 원주면 중앙에 현관과 고해소, 좌우 끝단에 제의실과 유아실을 덧붙인 형태이다. 아치창, 버팀벽 등은 교회 건축에서 흔히 쓰는 고전적 기법이지만 일체의 장식을 배제한 단순한 형태와 밝고 기능적인 내부 공간은 근대적인 건축 개념을 적용한 것으로 중세풍의 양식적 교회 건축에서 벗어난 선진적 형태로 평가받고 있다.  2005년 4월 15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소양로 성당은 2006년부터 원형 보존작업을 통해 말끔하게 단장하고 원형을 최대한 살려 2009년 5월 중창(重創) 축복식을 가졌다. 또한 춘천교구는 양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콜리어 신부의 순교혼을 기억하고자 소양로 성당을 살신성인 기념성당으로 명명하였다.

■ 고 안토니오 신부의 순교터
고 안토니오 신부의 순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자료를 통하여 그 정황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은 체포와 총살당한 시간과 장소 등 멎 가지 사실에 대하여서로 다르게 말하고 있다. 「소양로 본당사 1950-2012」를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고 신부의 순교에 관한 자료로는 김경호 가브리엘 증언 <골롬반 문서>8-17~20. 춘천-52, 「HOW FATHER COLLIER DIED」 「Articles on Korea in the Irish Far East Volume 2 1933-1952」. 「Fifty Years of Columban Outreach to the Korean People」, 「The Splendid Cause 1933-1983」, <소양로 1950-1960> (남 미카엘 신부 보고서), 그리고 김경호 가족들의 증언 등이 있다.

1. 김경호 가족들의 증언
여동생인 김영자 수산나(1937년 생), 김순자 세실리아 자매가 2011년 4월 5일 소양로 성당 사제관에서 소양로 성당 김주영 시몬 신부 및 관계자들과 행한 인터뷰이다.
「전황이 나빠지자 6월 27일 오후 고 신부는 복사였던 김경호 가브리엘과 함께 죽림동 성당으로 가던 중 우체국 근처 로터리 부근에서 인민군의 검문을 받았다. 인민군이 고 신부에게 스파이냐고 묻자 고 신부는 가톨릭 신부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고, 둘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두 사람이 체포된 시간은 14시 15분경이다. 인민군 장교는 신부의 주머니를 수색하여 시계, 묵주, 돈과 개인 소지품을 다 가져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즉시 밧줄에 묶여 소양강변 부근으로 끌려갔는데, 인민군은 이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인민군은 고 신부를 먼저 쏘고 다시 두 발을 더 쏘았다. 총을 맞고 고 신부는 그 자리에서 선종하였다. 인민군 중 한 명이 '더 쏠까' 하자, 나머지 한 명이 '죽은 것 같은데, 총알 아까운 데 가자'고 하였다고 한다. 김 가브리엘은 고 신부가 총을 맞으면서 그를 끌어안았기 때문에 목과 어깨에 심한 총상만 입고 살아났다. 그 날은 밤새도록 비가 내렸으며, 고 신부와 김 가브리엘의 손이 함께 묶여 있어서 새벽에 가브리엘이 정신을 차려보니 손이 퉁퉁 부어 뺄 수가 없을 정도로 부상이 심했다. 겨우 밧줄을 끊고 인민군을 피해 산을 넘어 돌아온 가브리엘은 신부의 죽음을 알렸다. 고 안토니오 신부가 순교한 날짜와 장소는 1950년 6월 27일 소양강변 부근 채소밭이다. 6월 29일 교우와 동네 사람들은 고 신부의 시신을 총살당한 그 자리에 묻었다.」

2. 「HOW FATHER COLLIER DIED」
고 안토니오 신부의 순교에 대하여 「HOW FATHER COLLIER DIED」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6월 26칠 월요일, 콜리어(안토니오) 신부는 주교를 만났고, 둘은 전쟁이 임박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그 날 밤 자기 본당으로 돌아갔다, 화요일 아침 이른 시간에 그는 수행원(김가브리엘, 사무장)과 함께 주교관으로 다시 출발했다. 하지만 멀리가지 못해 그들은 북한군이 도시의 일부를 점령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체국 바깥에서 주둔하던 북한군은 콜리어 신부를 보고 달려와 누구냐고 물었다. 미국인이냐고 물었고 그는 자신은 아일랜드인이라고 대답했다. 군인들은 그들을 그 구역을 책임지고 있는 장교에게 데려갔다. 장교는 신부의 주머니를 수색하여 시계, 묵주, 돈과 개인 소지품을 가져가며 같은 질문을 했다. 그는 신부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쏘겠다고 위협했지만, 신부는 자신은 오로지 교회에 속해 있으며 이 나라에 있는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신부의 어린 수행원(김가브리엘-인용자)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는데. 그는 자신은 신부님을 도와줄 뿐이며 이에 어떠한 정치적 행위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교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의 손은 등 뒤로 묶였고, 다시 서로에게 묶여 강(공지천)을 향해 걸어갔다. 보아하니 강으로 던질 요량인 듯했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 그들은 멈춰 다시 같은 질문을 했고 도시 내 그들의 위치와 그들이 행해온 군사적, 정치적 일들에 대해 물어왔다. 마치 진실을 이야기하면 그들의 생명이 남아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들은 전과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고, 행진은 계속되었다. 몇 발자국 가서, 소총의 첫 번째, 두 번째 발사가 콜리어 신부를 맞췄다. 그는 그의 수행원을 잡으며 쓰러졌고 세 번째, 네 번째 발사는 수행원을 맞췄다. 다섯 번째와 마지막 발사는 다시 신부를 맞췄다. 북한군은 다시 발사를 하려하는 것 같았으나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떠났다. 총격 이후 두 세 시간 뒤. 북한군은 쌀자루에 그들을 넣고 행인이 없는 곳에 놓았다. 김 가브리엘은 거기에서 하루 이틀 밤을 지냈고, 힘겹게 그의 손을 콜리어 신부에게서 풀어냈다.」

[정리] : 위 자료들과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여 볼 때 일단 고 안토니오 신부와 김 가브리엘은 중앙 로타리에서 체포되어 우체국 주변에 있던 인민군 부대로 압송되었다가 공지천(또는 소양강)변으로 끌려가다가 도중에 총살된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는 그 장소가 춘천초등학교 뒤와 새봄유치원 마당 앞 끝쪽으로 추정됨. 당시에는 현 성공회 춘천교회에서 춘천초등학교 뒤와 새봄유치원 마당 앞 끝쪽까지 산비탈이 끝나는 지점이었으며 그 주변이 학살터라고 증언함. (윤재봉 토마스 증언)

◆ 증언
● 증언자 : 윤재봉 토마스(1933년생, 효자동 본당 소속)
● 증언일 : 2015년 9월 10일 오전 9시부터 10시 30분까지
● 증언장소 : 춘천 효자동 성당과 학살터 현장
● 증언 청취 : paxkorea 홈 운영자 내외
「증언자 윤재봉 토마스는 양구 출신으로 월남하여 6.25 당시에는 춘천에 거주하였음. 40대에 강원도 거진 쪽에 있던 마달초등학교[1963년 설립, 1994년 대진초등학교와 통합]에 교사로서 약 1년반 근무하였는데 근무 당시 그 마달초등학교 교장이 바로 고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한 김경호 가브리엘이었음. 증언자 윤재봉은 그 당시 김경호 가브리엘 교장으로부터 6.25 당시의 고 안토니오 신부가 학살당한 곳은 춘천초등학교 뒤편(아래그림 참조)이었다는 진술을 확실하게 들었다고 증언함. 본인도 총을 맞고 나중에 깨어나서 보니 가마니 같은 것으로 덮혀 있었고, 지나가는 여인들 목소리가 나서 살려 달라하니 그들이 와서 보고 그를 데리고 그 여인들 집으로 가서 치료받고 집으로 왔다고 말하는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고 증언함. 그리고 윤재봉씨와 함께 그 학살 현장에 가서 지적하는 위치를 확인함」
[주] 춘천초등학교 : 1896년 9월 17일 공립 강원관찰부소학교로 개교하였다. 1939년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45년. 9월 춘천국민학교로 개칭, 1947년 12월 원인 불명으로 학교 건물이 전소한데 이어 1950년 한국전쟁 중 다시 전 교사가 파괴되어 전시 학교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여기서 고 신부 일행이 끌려간 우체국은  현재 중앙로타리에서 150m 거리에 있는 소양 우체국이 아니고, 약 300m 거리에 있었던 당시 춘천우체국(현 소양동 주민센터 주변)이다. 현재 효자동에 있는 춘천우체국은 6.25 당시에는 1946.10.18.부터 그곳(소양로 3가 93)에 있었다. 소양로우체국은 춘천우체국이 효자동으로 이전됨에 따라 춘천우체국 구청사(소양로3가 175-5)에서 1987.8.25. 개국하였으며, 1994.2.3. 현청사로 이전하였다.

■ 순교자

◆ 고 안토니오(Anthony Collier, 1913.6.20.∼1950.6.27) 신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고 안토니오(Peter Anthony Collier) 신부는 1913년 아일랜드 Clogherhead in county Louth에서 출생하였으며, 1938년 12월 21일 나반(Navan)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1939년 입국하여, 횡성 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하면서 한국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0년 강릉 임당동 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하였으며,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경에 체포되어 강릉 감옥에 투옥되었고, 이후 춘천으로 이송되어 오랜 기간 동안 억류되는 고초를 겪었다.
고 신부는 소양로 본당 설립이 논의되던 1949년부터 성당 부지 매입, 제반 시설 준비와 초기 신앙공동체 형성에 이르기까지 소양로 본당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 신부의 실질적인 부임 시기는 1949년 겨울로 추정되지만, 공식적인 일자는 본당 설립일인 1950년 1월 5일이다. 이때부터 소양로 성 파트리치오 본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고 안토니오 신부가 부임하여 사목활동을 하던 중,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였고, 공산군들이 침략했다는 소식과 포탄소리가 들렸다. 고 신부는 저녁에 성당 근처에 사는 몇몇 교우들과 저녁 기도를 바쳤으며, 이튿날인 26일 미사 후에는 포탄들이 성당 아주 가까이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나는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성체를 옮겨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또한 폭격이 시작되자 성당 뒷마당에 있는 방공호로 옮겨가면서, “이곳은 아주 위험합니다. 당신들은 피하십시오. 나는 성당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며 본당에 남아 신자들을 돌보았다.
본당에 남아 신자들을 돌보던 고 안토니오 신부는 6월 27일 그의 복사였던 김경호 가브리엘과 함께 체포되었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밧줄에 묶여 끌려가던 고 안토니오 신부는 한적한 춘천시 외곽 공지천변으로 가던 중 인민군들이 아무런 예고 없이 총을 쏘았고, 이때 콜리어 신부는 김 가브리엘의 몸을 끌어안고 쓰러졌고 김 가브리엘은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아 훗날 콜리어 신부의 최후의 순간을 증언할 수 있었다. 1951년 10월 교우들은 얼굴과 팔에 총상을 입고, 항상 차고 다니던 성패가 있는 신부의 유해를 수습하여 1951년 10월 거행된 장례미사와 함께 춘천교구 주교좌 죽림동 본당 뒤뜰에 안장되었다. 콜리어 신부의 희생적인 보살핌으로 목숨을 건진 김 가브리엘은 그 뒤 속초에 정착해 살다가 1989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 신부 묘지 좌우에는 뒤따라 순교한 동료 사제들인 삼척 본당 주임 마긴(陳) 신부와 묵호 본당 주임 레일리(羅) 신부의 묘가 나란히 서 있다. 그리고 세 순교 사제들 묘 앞에는 전쟁 당시 교구장으로 일하다가 공산군에 체포, ‘죽음의 행진’을 겪은 후 또다시 교구장을 역임한 퀸란 주교(55년 12월 주교로 서품되어 66년 교구장 은퇴 후 70년 선종함)의 묘가 서 있다.
고 안토니오 신부는 "한국 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추진 대상으로 현재 시복 추진중이다. 한국 천주교회가 시복을 추진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교황청 시성성은 이들 근ㆍ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의 시복 심사와 관련, ‘장애 없음’(Nihil obstat) 교령을 지난 2015년 7월 7일 자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위원장 안명옥 주교) 앞으로 보내왔다고 시복시성주교특위 관계자가 7월 23일 밝혔다.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에 대한 지역 교회 차원의 시복 심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Columban Fathers(S.S.C.)]    
성 골룸바노회는 1918년 아일랜드의 갤빈(E. Galvin)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갤빈 신부는 1909년부터 1912년까지의 중국 선교 활동을 통해 그 곳에서의 포교의 필요성을 절감, 외방전교부를 두게 되었는데 골룸바노회는 아일랜드의 성인인 골룸바노를 주보(主保)로 모시고 이어 1916년에 설립되었다.
한국진출 : 골룸바노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33년으로 이 해 10월 29일 그리스도왕 축일에 제1진 10명이 한국에 도착하였다. 맥폴린(McPolin, 林) 신부 등 이들 10명의 신부들은 우선 목포시 산정동(지금의 성 골룸반병원)에 본부를 두고 주로 전라도와 제주도의 서쪽을 담당하였다. 이 회는 1937년 설정된 광주교구와 1939년 설정된 춘천교구의 사목을 각각 맡아 역대 교구장직에도 동회 회원이 착좌하였다. 또한 1971년 분리 신설된 제주교구에서도 이 회 회원인 헨리(H. Henry, 玄)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에는 시련도 많았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른바 적성국인이었기 때문에 일본 당국으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았으며, 1950년의 한국전쟁 때는 공산당들에게 체포되어 학살까지 당하고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일본 당국은 2차 대전이 그들에게 패퇴를 강요하기 시작하자 1945년 5월 29일 목포에 연금 중이던 아일랜드 신부 11명을 강원도 홍천에 옮겨 가두었다. 이들은 2차 대전이 종료되자, 다시 선교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때의 고초는 그러나 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공산당에게 체포된 9명의 신부들 중 7명은 그들에게 살해되고 나머지 2명은 북한으로 납치돼 갖은 고초를 다 겪었던 것이다. 살해된 신부는 브레난 몬시뇰, 쿠색 신부, 오브라이언 신부, 콜리어 신부, 미긴 신부, 테일러 신부, 캐나반 신부 등 7명이며 납치되었던 퀸란 주교와 크로스비 신부는 유명한 ‘죽음의 행진’을 겪고 시베리아를 경유, 모스크바를 거쳐 기적적으로 고국에 생환할 수 있었다. 그 뒤 퀸란 주교는 1953년 10월 주한교황사절 서리직과 춘천 교구장직을 맡아보다가 1970년 12월 이 땅에서 선종하였으며 크로스비 신부는 당시 한국으로 돌아와 계속 사목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이 회는 현재 한국에 담당교구인 춘천교구를 위시하여 7개 교구 61개 본당에서 사목활동과 구호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성당신축의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현재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6-140에 외방전교부 한국지부가 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소양로성당] 강원도 춘천시 모수물길22번길 26 (소양로2가 78-1)
26, Mosumul-gil 22beon-gil, Chuncheon-si, Gangwon-do
[추정 순교터] 강원 춘천시 중앙로3가 40-1 (춘천초등학교 뒷편) 
지리좌표 북위 37°88′72.8″ 동경 127°72‘82.6″ 
연락처 소양로 성당 (033) 255-2117 FAX (033) 242-2117 
홈페이지 소양로 성당 http://cafe.daum.net/ccsoyangro 
미사시간 평일 : (월) 오전 6:30 (화목) 오후 7:30 (수) 오전 9:00 (금) 오전 10:00
주일 : 오전 7:00, 10:30 오흐 7:30 (토) 오전 10:00, 오후 7:30 
교통편 강원도청 앞에서 좌회전하여 소양2교 방향으로 약 350m 가서 우측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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