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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수원교구 손골성지

작성자Lee Andrea|작성시간19.04.16|조회수142 목록 댓글 0



성 도리 헨리코 신부님이 체포된 곳

주 소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734

 

 

 

 

 손골성지

 

손골성지는 수원시와 용인시에 걸쳐 있는 광교산(光橋山, 582m) 기슭,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734번지에 있다.


원래 손골성지에는 교우촌(敎友村)이 있었다.

교우촌은 천주교 박해시기 박해를 피해 신자들만이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을 말한다.


손골 교우촌은 현재 ‘손골성지’라고 불리는데 이곳에서는 프랑스 선교사로

병인박해(1866) 때 순교한 도리(Dorie, 金, 헨리코) 성인과

오매트르(Aumaitre, 吳, 베드로) 성인을 기념한다.

아울러 박해시대 손골 교우촌에서 살았던 순교자들과 신앙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손골 교우촌의 형성
 
우리나라에 교우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이미 신해박해(1791) 때부터였다.
하지만 손골에 교우촌이 언제 이루어졌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단지 교회사의 흐름에 따라 기해박해(1839) 이전이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초기 교회 가장 큰 박해였던 신유박해(1801) 이후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서울이나 경기도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나 충청도 등으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지방에서도 박해가 일어나 이번에는 지방에 살던 신자들도
이주해야 했다.
어떤 신자들은 서울에서 더 멀리 떨어진 경상도나 전라도로 피신하기도 하였지만
어떤 신자들은 서울 가까이로 이동하여 교우촌을 이루며 살기도 하였다.

서울 가까이 가서 살아야 신자들 상호간 연락도 되고 서로 도우며
신앙생활을 더 원활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해박해 이전에 이미 서울 가까이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의 가족들이 충청도 솔뫼를 떠나
경기도 양지의 골배마실 교우촌으로 이주한 것이나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 가족들이 충청도 청양을 떠나
경기도 안양 수리산 뒷듬이(담배촌) 교우촌으로 이주한 것이 좋은 사례이다.
 

손골에도 이즈음에 교우촌이 생긴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병인박해 이전에 이미 손골 교우촌은 안정적이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아니라면 기해박해 직후에 생긴 것 같다.
1831년 조선대리감목구(朝鮮代理監牧區)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서울 근교에는 교우촌이 많이 형성되었다.

선교사들이 자연스레 서울 중심으로 사목을 하게 되자 신부들 가까이 있어야
성사나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으므로
서울 근교에 교우촌이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박해시기 손골 교우촌의 규모
 
병인박해 때 손골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한 도리 신부의 편지에 따르면,
도리 신부가 손골에 체류할 당시 손골에는 신자들만 살고 있었고 모두 12가구였다고 한다.

그리고 박해가 끝난 다음 1900년 하우현에 본당이 생겼을 때
그 소속 공소(公所)로 편입된 손골 교우촌의 신자가 47명이었다.
 
이렇게 볼 때 손골에는 적어도 45-50명 정도의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던 것 같다.

도리 신부의 말에 따르면, 손골의 교우들은 주로 담배 농사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려갔고,
논이 조금 있기는 하였지만 홍수로 폐허가 되어 먹을 것조차 구하기 어려운 생활을 하며 살았다.
 

손골 교우촌의 중요성

 

 
박해시대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되면 안전한 곳에서 우리나라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선교사들이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와 풍습을 익혀야 했고
조선에 살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안전하게 머물면서 이러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신자들만 모여 사는 적합한 교우촌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이런 교우촌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그곳에 사는 신자들이
열심하고 믿을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손골 교우촌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어떤 교우촌보다 선교사들의 신뢰를 받았던 것 같다.
박해시기인 1857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5명의 선교사가 손골에 묵으면서
신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적응기간을 거쳤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도 신자들을 방문하며 사목하는 것을
잠시 쉬는 여름철이 되면 손골을 찾아와 피정도 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만큼 손골 교우촌의 신자들이 신앙적으로 견고하고 믿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손골 교우촌은 신자들을 사목하는데도 중요한 장소였다.
손골 교우촌이 박해시대 신자 사목의 중요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그 예는 오매트르 신부의 사목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오매트르 신부는 1863년 7월말 손골에 와서 다른 선교사들처럼 언어를 배우며
적응기간을 갖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 언어와 풍습을 익힌 오매트르 신부는 다음해인 1864년 성령강림대축일에
당시 조선교구장(대목구장)이었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를 찾아
서울로 올라갔다.
이때 베르뇌 주교는 오매트르 신부에게
“손골과 가까운 고을” 네 곳을 사목하라고 인사발령을 하였다.
 
발령을 받은 오매트르 신부는 손골로 돌아와 1864년 10월 말까지 머물며
신자들을 사목하였다.
이때 손골 인근의 묘루니 교우촌이나 신봉리 교우촌 등 아주 가까운 곳의 신자들도
사목하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11월 1일 모든 성인의 축일에 다른 고을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해 손골을 떠났다.
그 후 오매트르 신부의 편지를 통해 확인되는 오매트르 신부의 방문지는
미리내, 무량골, 소내실 등이다.

이렇게 볼 때 오매트르 신부에게 사목하라고 맡긴 손골과 가까운 네 고을은
손골과 아주 가까운 곳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아마도 경기도 일원인 것 같다.

이러한 추정은 병인박해가 처음 일어났을 때 오매트르 신부가 수원 지방 새암골에 있었다는
기록을 보아도 가능하다.
 
이렇듯 손골은 경기도 지역을 사목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축이었다.
손골을 중심으로 가까운 곳을 사목하다가 자리를 옮겨 미리내를 중심으로 사목하고
또다시 자리를 옮겨 옮겨간 곳을 중심으로 신자들을 찾아보며 사목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선교사들의 손골에서의 생활


 
성지 표지석.
도리 신부의 편지를 보면, 도리 신부는 손골에 먼저 왔던 다른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바로 그 집에 묵었다.

더욱이 그 집에서 다른 선교사들을 모셨던 이군옥(李君玉, 요셉)의 가족들이
또다시 도리 신부를 돌보았다.
 
그런데 다른 선교사들이 그 집을 찾아와 함께 자면서 쉬어갔다는 사실을 보면,
이군옥은 다른 선교사들이 편안히 쉬다 갈 수 있도록 그 뒷바라지까지도 성실하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군옥은 단순히 선교사들의 뒷바라지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쳐주는 스승 역할까지 하였다.
도리 신부는 자신도 이군옥에게서 조선어를 배웠는데,
이군옥이 매우 용감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 때 손골의 교우인 이군옥과 그의 가족은
지적 수준도 상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심이 깊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사람이었으며,
선교사들을 최선을 다해 모시려고 노력한 충직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손골 교우들은 물론 선교사들에게서 큰 신뢰를 받아
계속해서 선교사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던 것 같다.

이군옥이 음식과 풍습이 다른 선교사들을 위해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은
그가 도리 신부를 위해 서툰 솜씨로 빵을 만들어 대접하였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귀한 개고기를 마련하여 도리 신부에게 대접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도리 신부 등 선교사들은 손골에 머무는 동안 하루 종일 작고 좁은 방에서
조선의 말과 풍습을 익히기 위해 노력하였다.
도리 신부는 신자들이 만들어준 집 앞의 작은 산책길을 어쩌다 잠시 거니는 일도 있었지만
행여나 비신자들의 눈에 뜨일까봐 얼른 방으로 되돌아가곤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도리 신부는 이런 생활을 답답하게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생활을 마음의 평정과 하느님과의 만남을 얻을 수 있는 시간으로 활용하였다.
 
손골에서 생활하는 선교사들에게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방이 곧 경당이었다. 그 방에 널빤지로 제대를 만들어 흙벽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매일 이곳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도리 신부의 편지를 보면 도리 신부는 손골과 가까운 묘루니 교우촌에 머물던 친구
볼리외(Beaulieu, 徐, 루도비코) 신부를 찾아가기도 하고
또 볼리외 신부가 도리 신부를 찾아오기도 하였다.

모처럼 만난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이들은 즐겁게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침묵과 단식을 하며 함께 피정을 하기도 하였다.
 
 

손골 교우촌의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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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리아 사랑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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