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247번길 102 (동일리 12)
증거자로서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의 묘
대정(大靜) 성지는 남편 황사영의 백서(帛書) 사건으로 제주목(濟州牧) 관비로 정배되어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 내고,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켜 노비
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37년 동안 증거자로서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丁蘭珠, 命連, 1773~1838, 마리아)를 안장한 곳이다.
정난주는 1773년 마재의 정약현(丁若鉉, 1758~1816)의 딸로 출생하여,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전교에 힘썼던
당대 최고의 실학자 약전(丁若銓, 자 天全, 1758~1816), 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
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 형제가 그녀의 숙부들이었고 어머니는 이 나라 신앙의 성조인 이벽(李檗, 1754~1785, 세례자 요한)의 누이였다.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과 혼인한 그녀는 1800년에 옥동자 경한(黃景漢, 보명 敬憲, 1800~?)을 출산하였다.
남편인 황사영이 《백서》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으로 순교하고, 그 결과 시어머니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로, 정난주 마리아는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관비로 유배되었다.
정 마리아는 1801년 11월 21일(음) 두 살 난 아들을 품에 안고 귀양길에 올랐으며 추자도에 이르러 어린 아들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추자도에 격리된 아들은 어부 오씨에 의해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키워졌으며 그 후손은 현재 추자도에서 살고 있다.
제주목 관비로 정배된 정 마리아는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 냈으며,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켜
관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서울 할머니’라 불리우며 이웃들의 칭송 가운데 살아갔다.
따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정 고을의 유지 김석구(金錫九, 1780~1870) 집에서는 그녀를 침모로써 일하게 하고
불편없이 생활하게끔 별채까지 마련해 주었다.
신앙만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37년 동안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다가 1838년 2월 1일(음) 66세를 일기로 병환으로
타계하자 김석구의 아들 김상집의 배려로 김씨 선산에 묻힐 수 있었다.
김상집은 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에게도 모친의 부고를 알리고 ‘한굴 밭’에 있는 후손들에게 정 마리아의 묘를 돌봐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겨 그 유언에 따라 그 후손들이 묘를 정성껏 돌보고 있다.
비록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삶 전체가 순교자의 생애를 방불케 하는 굳건한 신앙의 증거로
가득했기에 후손들은 그를 무혈의 순교자, 즉 증거자의 반열에 올리고 있다. 1994년 9월 5일 순교자 현양 대회 강론에서
김창렬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의 탓으로 이 고장에 유배된 유일한 증거자인 정 마리아 난주님을 순교자라고 말씀드리는 것에 대해 놀라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보편교회도 피 흘려 순교하지 않은 이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노비(奴婢)
한국 전근대 사회의 최하층 신분인 천민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신분제는 크게 귀족·양인·천민으로 구분되는데, 노비는 사내 종[奴]과 계집 종[婢]을 일컫는다.
조선 초의 노비 수는 성종 때 전국의 호구가 100만 호에 340만 명이며, 노비도 총 150만에 이른 것으로 추산되므로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려 이래로 노비의 소생은 부모 중에 하나가 노비이면 노비가 되게 하였기 때문에 숫자가 늘어났다.
그러나 태종, 영조과 같은 국왕들은 아버지 신분을 따르는 종부법(從父法)이나 어머니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從母法) 등을
적용하면서 노비 수를 줄이고 국가재정의 근간이 되는 양역(良役, 평민들이 국가에 부담하는 역)을 확충하려고 하였다.
그 후 정조의 주도 면밀한 준비하에 순조 1년(1801년)에 공노비가 전면적으로 해방되고, 사노비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886년(고종 23년) 노비 세습제를 폐지하고 노비 소생의 매매를 금지하고 그들이 양인이 될 수 있도록
규정하였으며, 1894년 최종적으로 사실상 노비제를 폐지하였다
▒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신앙의 자유를 강구하기 위해당시 베이징[北京] 주교에게 보내고자 했던 청원서다.
두 자가량 되는 명주천에 썼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하는데, 깨알같이 작은1만 3311자나 되는 방대한 내용의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먼저 당시의 천주교 교세와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활동, 신유박해 사실과 이때 죽은 순교자들의 약전을 기록하고,
다음에는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처형 사실, 끝으로 당시조선 국내의 실정과 이후 포교하는 데 필요한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황사영백서》는 민족 감정에서 나오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한편 교회의 평등주의라는 원칙과 근대적 인권운동의 선구자로서 당시 조선 사회에 미친 혁명적인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일부 사가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황사영은 이 백서가 관변측에 압수됨으로써 1801년 대역 죄인이 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원본은 현재 로마 교황청 민속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황청에서는 이를 200부 영인(影印)하여 세계 주요 가톨릭국에 배포하였다고 한다.
▒ 가장 눈물겨운 노래는 (정난주 묘소에서) <김영수> ▒
남편과 젖먹이 빼앗기고
멀리 이곳으로 귀양 오던 날은
캄캄한 밤이어서 슬펐을 것입니다
환한 낮이어서 슬펐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온 사람은
늘 하늘을 말하는 법입니까
천길 절벽 앞에서도
기도로 눈 뜨며 하늘 보는 법입니까
가장 눈물겨운 노래는
가장 깊은 바다로 가라앉고
나는 시리게 밀려 오는 바다소리 들으며
가슴에다 촛불 하나 켭니다
멀리로 멀리로 돌아오는 바닷바람
나는 작은 풀잎에 기대고
깨끗한 눈물 한 방울로
설레며 설레며 서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