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서울특별시 마포구 토정로 6 (합정동 96-1)
순교자들의 피로 잠두봉을 물들인 한강변에 우뚝 선 우리나라의 대표적 성지
절두산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수많은 천주교인이 순교한 신앙 선조들의 넋이 어린 성지다.
주변 경관이 뛰어난 이곳은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명나라의 칙사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 관례적으로 들렀던 국제적인 관광지였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병인박해 이후 수많은 천주교인이 참수형으로 목 잘려 죽은 곳이라는 의미로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절두산은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한강변에 우뚝 솟은 작은 암벽 봉우리로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이자 병선의 훈련장이며 처형, 제사,
진휼을 하던 곳으로 양화진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로 원래 가을두(加乙頭), 혹은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렀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李昰應, 호 石坡, 1820~1898)의 천주교 박해령으로 프랑스 선교사 리델(Ridel, 李福明, 1830~1884, 펠릭스) 신부가
조선을 탈출하여 청나라로 건너가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린 후 로즈 제독의 함대가 1866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입하였다.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와의 교전 후 1866년 10월 22일(음 9월 14일)부터 천주교 신자들을 새남터나 서소문 밖이 아닌
절두산에서 주로 처형하였는데 그 이유는 9월에 프랑스 함대가 침략하여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온 것이나
10월에 다시 강화도를 침략한 것은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천주교 신자들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의 책임을 확실히 묻고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백성들이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866년 10월 22일에 효수형을 받은 이의송(李義松, 1821~1866, 프란치스코), 김이쁜(1811~1866, 마리아) 부부와
아들 이붕익(李鵬翼, 1842~1866, 바오로), 10월 25일에 효수형(梟首刑, 군대가 죄수의 목을 벤 후 그 머리를 높이 매달아
군중의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형벌, 일명 ‘군문효수(軍門梟首)’로도 부른다)을 받은 황해도 출신의 회장 박영래(朴永來, ?~1866, 요한) 등이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효수형뿐만 아니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기도 하였다.
1997년 11월 절두산 순교 성지 일원을 ‘양화나루·잠두봉 유적’의 명칭으로 사적 제399호로 지정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더욱 소중한 사적지다.
◆ 절두산 야외 전시장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인물과 관련된 야외 전시물이 전시되어 있다.
우선 선조 신앙인들이 자신을 의탁하고 시련을 참아내고 순교로 신앙을 지킨 것을 높이 기리기 위해 루르드 마사비엘을 본딴 성모동굴을 조성했다.
성모 동상을 조성한 가장 중요한 뜻은 박해시대의 우리 신앙 선조들이 성모께 자신을 의탁하고 성모님의 보호하심으로
혹독한 시련을 참아 받고 마침내 순교하기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을 높이 기리는 데에 있었다.
1831년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난 뒤에 제2대 교구장이던 앵베르 주교가 조선의 주보를 마리아로 바꾸어 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는데 성인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던 1839년 교황은 조선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결정하였다.
절두산 성모 동굴은 1858년 3월 25일 성모님이 프랑스 남쪽 루르드의 동굴 마사비엘에서 발현하셔서
당신이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마사비엘을 본딴 동굴을 만들었다.
○ 형구돌
병인박해 때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으로 충청북도 연풍 공소에서 발굴되어 1974년에 이전해 왔다.
이 형구돌은 1886년 한불 조약으로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면서 땅 속에 묻혔던 것을 발굴 해 낸 것으로,
앞 구멍에 머리를 대고 목에 밧줄을 건 뒤에 뒷구멍에서 잡아당겨 질식시키는 교수형 집행 기구였다.
그밖에 순교자들을 고문했던 형구들은 성당 앞 형구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둘레 3m, 두께 30cm, 앞 구멍 지름 30cm, 뒷구멍지름 6cm.
○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절두산에서 처형된 첫 순교자 가족,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처 김예쁜(마리아), 아들 봉익을 형상화한 듯한
이 순교자상은 참수되어 떨어진 목을 몸통 위에 받쳐놓은 모습으로 처절한 순교광경을 연상시키고 있다.
1972년 최종태 교수가 제작하였다. 좌대 1.7m, 본상 2.2m
○ 김대건 신부 동상
성 김대건 신부의 성화를 의뢰하면서 고증 작업이 시작되었고, 과학적으로 실측 조사한 수치와 균형에 의하여 김대건 신부의 성화가 그려지게 되었다.
동상은 김대건 신부 탄생 150주년 맞아 기념 제작된 것으로, '애국선열조상 건립위원회‘가 건립한 것으로 홍익대 전뢰진 교수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1972년 김수환 추기경의 축성과 함께 제막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동상은 뒤에 가톨릭대학교로 이전되었으며, 그 자리에 지금의 동상이 자리하게 되었다. 좌대 높이 5.8m,
본상 높이 4.35m
○ 은언군 · 송 마리아 묘비
정조의 이복형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은언군이 강화도로 귀양가 있는 동안 강완숙과의 친분과 교류를 통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는 ‘왕족이면서 사학에 빠졌으며 주신부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순교하였다(1801년 3월).
이후 신자가 아닌 은언군도 죽음을 당하였는데, 송 마리아의 손자가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사면되었고, 은언군의 묘비도 세워졌다.
○ 박순집 일가 16위 순교자 현양비
박순집(베드로)은 순교자를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신앙의 증거자로 박순집의 아버지 박바오로는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치명한 범주교, 샤스탕, 모방 신부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노고산에 매장하였다가 4년 후에 자기 문중 산인
관악 삼성산에 안전하게 이장하기도 하였다.
박바오로는 10월 17일 이곳 절두산에서 순교하였다. 박순집은 아버지의 성업을 이어 부친 일가족 6명의 순교자는 물론
무명의 순교자 그리고 성인 베르뇌 장주교와 신부 4명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 왜고개에 안장, 순교자 모시는 일에 헌신하였다.
이후 박해가 잦아들자 선교에 앞장서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이후 1979년 9월 26일 박순집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부친 순교자 박바오로를 비롯한 “일가족 16위 순교자 현양비”를 제막하였다.
박순집에 의해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묻혔던 왜고개에는 현재 군종교구 국군중앙성당이 세워져 있다.
○ 성 남종삼 요한 흉동상
남상교는 남종삼 성인의 부친으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진사에 급제하여, 현풍 현감, 충청 목사를 역임하고 퇴관 후에는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남종삼은 남상교의 아들로 입양되어 양아버지의 영향아래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과거에 급제해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지속되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프랑스인 성직자를 통해 막아보려 하였으나 대원군이 급선회함에 따라
병인박해의 회오리 속에서 참수형을 받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 해운당 대사의 징지비(주어사)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 천진암 주어사를 순례하던 중 발견한 주어사 터 표지 비석으로, 海雲堂大師義澄之碑(해운당대사의징지비)라 새겨져 있다.
1960년 남종삼 성인의 후손인 남상철(프란치스코)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비가 새워진 연대는 1698년이며, 비신 높이는 91cm, 폭은 33cm이다.
○ 오성 바위와 문지방 돌
이 바위는 처음에는 복자 바위라 불렸다. 병인박해(1866)때 순교한 다블뤼 안주교, 오매트리 오신부, 위앵 민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요셉의 사연이 깃든 바위로 다섯 분의 성인을 기리는 뜻으로 오성 바위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될 때와 충남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려갈 때 쉬었다 간 바위로 이 다섯 성인들이
여기서 쉬는 동안 포졸들이 포승을 풀어 주어서 안 주교는 교우들을 만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한 후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고 한다.
그 앞의 돌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안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고 다니던 문지방돌이다.
○ 척화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이후 대원군은 1871년 4월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우게 되었다.
척화비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현재 절두산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
○ 성모 동굴
1858년 성모님이 프랑스 루르드 동굴(마사비엘)에서 발현하신 것을 기념하여 세계 각국에 마사비엘을 본딴 동굴이 만들어졌다. 절두산의 성모동굴은 1978년 만들어졌다
○ 순교자의 모후와 빨마
1973년 이순석 교수가 제작, 기증한 것으로, 순교자의 모후는 가로 22.5cm, 세로 125cm 크기의 성모상 부조이며,
빨마는 가로 23.5cm, 세로 154cm 크기로 빨마가지 밑쪽에 절두산이 새겨져 있다. 현재 박물관 왼쪽 벽면에 위치해 있다.
○ 안수 성모상과 성모상
성지에서 만나게 되는 성모상은 최종태 교수가 제작하였으며, 안수 성모상은 이남규 교수와 조영동이 공동으로 제작하였다.
○ 순교자 기념탑
순교자 기념탑은 절두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확인되는 이의송 가족을 비롯한 28위의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2000년 9월 20일 세워졌다.
순교기념비 주탑에는 형틀을 상징하는 조형물 아래 16명의 순교자들 모습이 새겨져 있고, 우측탑에는 절두된 머리가 올려져 있어
절두산의 지명을 암시하며, 주탑과 함께 33명의 순교자 모습이 새겨져 있다.
좌측탑은 일종의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제작되어 절두산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의 모습을 새겨놓았다.
○ 야외 십자가의 길
2001년 11월 1일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이 십자가의 길에는 교회에서 통용되는 기도문의 첫부분을 새겨넣었으며, 이곳에서 순교한 신앙의 선조들이 바쳤던
옛 기도문 '셩노션공'의 머리부분도 함께 제시되어 있다.
▒ 절두산 순교터는?
신자들을 처형한 장소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은 절두산 꼭대기다.
절두산 꼭대기에서 칼로 신자들의 목을 쳐서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리거나 한 오랏줄에 여러 명의 교우들을 결박하여
산 채로 낭떠러지 밑 강물로 밀어 버려 죽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절두산꼭대기에 순교자 기념탑을 세웠고, 뒤에 다시 그것을 헐고 기념관과 성당을 지었다.
그러나 옛 노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절두산 꼭대기를 신자들의 처형지로 보는 설은 옳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정부 측 자료에는 한결같이 “양화진두”에서 군민을 많이 모아 놓고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베어
머리를 달아 대중들을 경계시켰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진두’는 ‘나루터’를 뜻하므로, 사형 집행 장소는 양화 진두, 곧 양화 나루터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부 측 기록은 교회 측 자료에서 ‘양화진 진터’, ‘양화진 진’, ‘양화진’ 등으로 밝히고 있는 것과 일치한다.
아울러 군민을 많이 모아 놓고 목을 베었고 머리를 매달아 대중들을 경계시켰던 만큼 신자들의 순교 장소는
양화 나루터의 약간 언덕진 평지로 오늘날 절두산과 꾸르실료 건물 사이의 한 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 피 한 점 찍어 (절두산에서) <김영수> ▒
땅 기울며 하늘 뜨던
절두산 아래에는 강이 흐릅니다
벼랑에 부딪쳐서는 나의 뉘우침이 되고
벼랑과 헤어지면서는 나의 기도가 되는
긴 긴 가을강이 흐릅니라
피로써 씨 뿌려야 생명 거두는 것입니까
마침내 평화 흐르는 언덕
허무의 세상에서 모질게도 아파하는 사람들이
거기 그리움에다 손을 담그고
순결한 사랑 꿈꾸고 있습니다
나는 물무늬마다에 이는 하늘 바라보며
흰 구름마다에 이는 하늘 바라보며
일어나 모자를 벗습니다
손 들어 하늘 아는 이들의
피 한 점 찍어 이마에 그으면
나의 세상도 햇살 내리는 강가에서
가득히 설렘으로 깨어날까요
미소 푸른 아침으로 다가올까요
■ 순교자 < 절두산 순교 성지에 모셔진 27위 성인 명단과 1위의 무명 순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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