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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 임성환 요셉 신부, 박상대 마르코 신부,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작성자Lee Andrea|작성시간21.09.04|조회수164 목록 댓글 0

 

임성환 요셉 신부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루카 6,1-5

 

안식일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 중의 하나인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의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은 도둑질이기에

바리사이 몇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은 거룩한 휴식의 날이기 때문에 일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밀이삭을 잘라먹는 것도 일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을 가지고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사제들만 먹을 수 있는 빵인데...”

“배 고파 죽을 판인데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아무리 배 고파 죽을 판이지만 니는 하느님이 무섭지도 않느냐?”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는 성경 말씀도 모르느냐?

하느님은 그 크신 당신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 용서해 주실 것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 말일까요?

 

우리 신앙생활을 위해서 만들어진 규율을 그대로 지켜야 할까요?

아니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급한 상황을 해결해야 할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상황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종종 고민하고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나서 우리가 내린 결정을 다시 고민하기도 합니다.

어느 것이 더 옳을까요?

 

이 사람의 말이 맞을 수도 있고 저 사람의 말도 맞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서 이 사실을 다시 물어보고

뽀족한 대답을 얻기까지 두 사람의 말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고

한 사람만 맞고 나머지 한 사람은 틀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참으로 난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좀 더 명확한 규율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결국 모든 것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다 모여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게 맞느냐? 저게 맞느냐?를 따지기 전에 그렇게 따지는 나의 속마음에

내 욕심과 내 명예욕 때문에 따지느냐 아니면 진정으로 예수님 그분께로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해서 따지는지를 먼저 물어봐야 하겠습니다.

 

 

부산교구 임성환 요셉 신부

 

 

*************

 

 

박상대 마르코 신부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루카 6,1-5

 

인정도 사정도 없는 사람의 법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5,17)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에

이미 반감(反感)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의 눈앞에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때부터 그랬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일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고,

병의 뿌리로 간주되는 “죄를 용서한다.”는 말에 대하여 그들은 트집을 잡았다.(5,20-21)

 

이는 그들이 유대교의 지도자들이었고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이 다분히 종교적이었으며,

동시에 유대교의 기존 정서를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와 그 일행을 요주의 인물로 정하고 따라다니면서 감시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원래 감시자의 눈에는 좋은 것은 안 보이고 하자만 보이는 법이다.

 

어느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던 예수의 일행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던 일로

또 한바탕 논쟁이 벌어진다.

루카는 마르코의 같은 대목(2,23-28)을 그대로 베껴 쓰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27절)

는 구절은 의도적으로 삭제해버렸다.

 

남의 밭에 자라고 있는 곡식에 낫을 대지 않고 그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법적으로 허용된 일이다.(신명 2,26)

그런데 문제는 이 행위가 안식일에 행해졌다는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내야 함은 십계명의 제3계명이다.(탈출 20,8)

 

이 계명의 세부규정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쉬어야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렛날은 주님을 섬기는 거룩한 날이니 철저하게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탈출 31,15; 35,2; 레위 23,3)

 

여기서 ‘철저하게 쉬어야 하는 것’의 목적은 이 날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이다.

그런데 좀 애매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철저하게 쉬는 것인지 말이다.

따라서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39개의 세부지침을 만들게 된다.

(미슈나 샤바트; 예루살렘 탈무드 참조)

 

바로 이 39개의 금령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 즉 추수하는 작업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먹은 제자들의 행동은 추수로 간주되어 안식일 법을 위반한 셈이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분명히 유대교의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

 

예수께서는 사울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던 다윗의 일행이 몹시 굶주린 나머지

제단에 바쳐진 빵을 먹었다(1사무 21,1-10)는 이야기를 인용하여

법에도 예외규정을 있음을 환기시키신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 한해서는 예외규정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한낱 예외규정으로 제자들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는 것이다.

이제부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구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바로 안식일의 주인인 하느님이신 것이다.(느헤 9,14; 이사 56,4; 에제 23,38)

루카가 마르코복음을 베끼면서 27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을 삭제한 이유도 이점을 더 강조하기 위함이다.

 

루카는 예수께서 율사들에게 하신 답변의 인본주의적 법이념보다

그리스도론적 법이념에 역점을 두려했던 것이다.

 

오늘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계명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겠다.

통상 주일의 성화는 주일미사 참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주일미사 참례의무는 교회법이 명기하고 있듯이 모든 신자의 의무이다.(교회법 1246조)

 

그렇다고 주일미사 참례 하나만으로 주일성화의 계명을 완수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교의 주일의무가

유대교의 안식일 규정에서 유래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 교회의 주일의무는 안식일 다음 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인류의 죄를 씻고

세상에 구원을 선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주일은 분명 부활신비를 기념하고 경축하는 날이요 기쁨과 해방과 구원의 날인 셈이다.

따라서 주일성화의 의무는 교회가 만든 법을 수행하는 것에 있다기보다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신 신비를 묵상하는 데 있다.

 

사람의 법은 법 자체의 이유만으로도 존재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의 존재이유는 법 자체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만든 법은 그 정신이 비록 인본주의에 있다하더라도

결국 사람의 복종을 무차별적으로 요구하며,

때로는 인정사정도 없고 피도 눈물도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목적으로 한 것이기에

거기에는 인정도 있고 사정도 있고 눈물도 있다.

하느님이 그 법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기록된 것에서 벗어나지 마라.” 하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전하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코린토 신자들은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 있었지만 오만함과 허영심에 가득 차

공동체의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바오로 사도와 아폴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하느님의 종에 지나지 않으니

어느 가르침이 훌륭한지를 따질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을 지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 규정의 참뜻은 사람들의 구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메시아,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지 말라는

금지 규정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안식일에 율법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안식일 규정의 근본정신입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제사 빵을 먹은 행위는 율법을 어긴 행위로 볼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정신 곧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어야 할 정도로 배가 고팠습니다.

제자들은 가난했지만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따르려고 애썼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부자가 되려는 허영심을 버리고

죄의 용서와 화해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힘썼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몫은 하느님의 뜻과 사랑,

영적인 자유 안에 머무는 삶입니다.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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