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스크랩] 연중 29주간 금요일 / 민경덕 베드로 신부, 손태성 다미아노 신부, 이재영 요셉 신부

작성자Lee Andrea|작성시간21.10.22|조회수35 목록 댓글 0

 

민경덕 베드로 신부

 

연중 29주간 금요일

루카 12,54-59

 

찬미예수님,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따라 가슴 깊이 저에게 박히는 듯 싶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학교 전체가 긴장감으로 휘감깁니다.

시험 시작 전 교수신부님께서 문제를 내주시기 전 긴장해 있는 저희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랫동안 당신은 신학교에서 생활하셨고, 많은 신학생들을 보아왔노라고 하셨지요.

신부님께서는, 우리 신학생들은 분명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다가오면 어찌 될지 잘 알면서도

수업시간엔 절대 긴장하지 않는다고.

평소에 조금은 더 긴장하고 정신 차리면 이러한 분위기는 조금은 편한 분위기가 될텐데...

 

그리고나서 저희 모두에게 다시 말씀 하셨지요. “너희는 내가 어떤 문제를 낼 줄 아니?”

아무도 교수신부님께서 어떠한 시험문제를 내실지 알 수 없었기에 대답할 수 없었고,

공부한 것이 잊혀지지 않기를 희망하면서 빨리 시험을 보길 희망했습니다.

 

그 때 그 신부님께서는 저희를 향해서 환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학생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시험문제도 아니고, 시험결과는 더더욱 아니고,

바로 시험을 보기까지의 과정이야”라고 하셨습니다.

 

순간 저희 모든 반은 의심이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가장 힘든 과목중 하나인 이 시간에 시험이 없어지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희망과 알 수 없는 두려움들이 뒤섞였습니다. 그 순간 신부님께서는

“지혜로운 신학생들이 아직까지도 내 말을 듣고도 징표를 읽어내지 못함이 이스라엘 군중과 같네”

라고 하셨고, 저희 모두는 큰 소리로 환호를 했고, 대학원 2학년 마지막 시험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땅과 하늘의 징표를 풀이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표를 풀이할 줄 모르는 것에 대해 조금은 답답해 하십니다.

 

용서와 화해.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또다른 이름들인 것이였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리석은 실수를 많이 저지르고 맙니다.

중요한 일을 두고서는 용하다는 점장이를 찾고, 젊은 이들은 타로카드나 인터넷 점을 치기도 합니다.

 

본당에서 사제가 점장이나, 운세를 보지 말라고 하면, 신자분들은 말씀하십니다.

“신부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두고 아무것도 알 수 없고, 말씀해주시지도 않는다”고.

 

사제는 정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거 하나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점장이와 운세보기가 가까워지면 분명 하느님과 거리가 멀어지고, 그러한 것은 곧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는 이들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과, 정작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그 일들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바람결에 흩날리는 재와도 같음”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아합왕은 자신이 병이 나자, 하느님께 여쭙지 않고, 이방신의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의 병을 문의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느님도 없고, 하느님의 사람이 없어서 헛된 것에 자신의 명을 맡기고,

하느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가?”하고 말입니다.

 

점을 보는 것이 사제에게 미안한 것이라서 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점을 보는 것이 봉헌금 보다 많아서 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바쳐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가슴에 날카롭고도, 푸르게 날이 선

비수를 꼽는 행위이기에 죄라고 부르는 것이며,

정작 중요한 것이 하늘의 것이 아닌 세상의 것이라고 하기에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느님 사랑의 징표를 읽어내야 합니다.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신 하느님 사랑의 징표를.

 

“주님 제 가슴은 지금 당신의 사랑열정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아멘

 

 

인천교구 민경덕 베드로 신부

 

************

 

손태성 다미아노 신부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루카 12,54-59

 

오늘은 제가 존경하는 한 분에 대해 말하면서 묵상을 시작하려 합니다.

여러분들도 다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지율스님입니다. 저는 지율스님을 통해 너무나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잘 알다시피 스님께서는 천성산 구간 고속철도 관통반대를 위해 목숨을 거셨던 분입니다.

저는 스님의 고행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자 그 분을 옆에서 조금 도왔던 경험이 있습니다.

 

스님께서 투쟁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가녀린 비구니 한 분이 세상과 맞서 싸우며

온몸으로 받으시는 고통을 보았습니다. 실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통해서 세상의 악의 세력을 보았고 그 악의 세력에 짓밟히는 선하고 약한 존재들의

아우성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이 시대의 징표를 온몸으로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또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날씨가 몹시 덥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저의 삶을 반성해봅니다. 저는 사제로서 비가 오겠다, 날씨가 몹시 덥겠다 같은 말들은 많이 하지만

이 시대의 뜻을 잘 알지 못합니다.  

구체적인 목표를 향한 목숨을 건 투신이 없다면 사이비 점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은 시대의 문제에 민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자기와 관련된 일들은 그토록 빌면서 왜 다른 이들의 아픔에는 그토록 둔한 것입니까?

 

오늘날 세계화라는 구호아래 경제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더 연결되어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환경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인간성은 더욱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버티기가 어려운 노동자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고,

농업과 농촌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은 아쉬움을 더해갑니다.

 

사람이 자연을 훼손하고 자연이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과 자연 사이의 악순환은

가속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분열되어 있습니다. 가진 자들은 자기만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만물의 질서아래 같이 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힘있는 나라, 힘있는 사람들은 그런 창조질서를 무시하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가 이 시대의 문제를 올바로 읽어내고 스스로 판단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는

우리 모두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종교는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고 스스로 판단하여 세상을 밝히고 짜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종교도 세상의 물결에 따라 흘러가고 세상의 논리에 젖어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신앙인 각자는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습니까?

 

저는 종교인들이 지율스님을 욕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덥고 바람이 부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왜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냐고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위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경제논리를 위해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과연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다른 것들을 죽여가며 자기 배를 불리는 사람들의 행복이 과연 계속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더 좋고 고귀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덜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그 선택을 위해 더 귀한 것을 죽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래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시는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부산교구 손태성 다미아노 신부

 

*************

 

이재영 요셉 신부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루카 12,54-59

 

불러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날씨에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부가 그러합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기에 그 날 그 날의 기후 조건이 그들에게는 아주 중요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날의 기후에 따라 목숨도 잃을 수 있기에 특별히 날씨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어부뿐만 아니라 농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가 많이 오면 많이 온다고 걱정,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작물이 타 들어간다고 걱정,

태풍이 올라오면 잘 가꾸어진 논과 밭이 피해를 입을까 걱정합니다.

 

이렇게 농부와 어부들이 농사 또는 고기잡이에 관계가 있는 날씨에 관하여 관심이 깊다보니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니 곧 비가 오겠구나,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는 것을 보내 날씨가 몹시 덥겠구나,

아침 하늘이 붉고 흐린 게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할 정도로 환히 압니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특히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이런 사람들을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시대의 뜻은 알지 못하는 위선자들”이라고 비난하십니다.

과연 이들은 그런 비난을 받아 마땅했던 것일까요?

 

예수님이 그들을 그렇게 비난한 까닭은 그들이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가면서 엉뚱한 데 관심을 쏟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장 먹고 목숨을 이어가야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도사가 되어 있었지만

그들이 지금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한 시대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는지

그리하여 오늘을 어떤 자세로 맞이하여 내일을 어떻게 희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백지 상태에 가까웠고 또 알고자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역사 한 복판에 있으면서도 사실은 이미 역사를 외면 또는 이탈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오늘 예수님은 시대의 뜻을 잘 알라고 하십니다.

 

그럼 예수께서 사람들이 우선 알아야 할 시대의 뜻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하시면서 줄곧 외치시고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기적까지도 행하신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 나라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그토록 강조하신 하느님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이며,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먼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란 하느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나라를 말합니다.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사는 나라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었으며,

현세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도 통치영역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우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믿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느님의 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죄를 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늘 사람들이 죄 짓지 않고 설령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빨리 회개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산상설교 첫마디부터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입니까?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미래를 향해 열려진 마음을 말합니다.

 

미래 개방성이란 이웃을 향해, 그리고 하느님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소망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지만,

오직 현재만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바로 이들 즉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현실에만 매달려 사는 사람들이 시대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오늘 예수님은 심한 질타와 더불어 안타까워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그 옛날 예수님으로부터 질타 당했던 사람들처럼

현실에만 매달려 허둥지둥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이 시대의 뜻을 알아들으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현실에만 매달리지 말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그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실 중심의 삶에서 돌아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간절한 호소였던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의 말을 귀담아 들으면서 오늘 하루도 하느님 나라의 시민답게 잘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아멘.

 

 

대구대교구 이재영 요셉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가톨릭 사랑방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