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범 신부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마태오 23,1-12
겸손
강론을 준비하다 보면 오늘과 같은 복음을 만나게 되면
복음을 묵상하고 강론 준비하는 것이 힘이 듭니다.
언젠가 우스개 소리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제들은 죽으면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이 죽으면 귀만 천당 간다.”
처음에는 이 이야기를 듣고 웃어 넘겼지만,
이 말을 생각하면 할수록 저 역시 그렇게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마도 이 말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사제들이나 수도자들이 당시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들처럼 좋은 말을 많이 하고,
좋은 말을 많이 들으면서도 그것을 삶으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신은 1900년 전에만 십자가를 졌던 것이 아니고,
오늘도 지고 있고 또 날마다 죽으면서 부활한다.
2천년 전에 죽은 역사상의 신에게만 의지해야 한다면 그것은 덧없는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역사상의 신을 말하기보다는 오늘 살아 있는 인간을 통해서
신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간디가 한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정말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에게 제일 어렵고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제자리에 멈춰 어떻게 할지 몰라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수만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어렵다고 포기하거나 그 삶을 다른 사람에게 대신 살아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부딪히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입니다.
최대한으로 노력해야 하는 삶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삶의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십니다.
먼저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어제 복음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첫째 계명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둘째 계명을 실천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일부러 남에게 드러내는 그런 신앙의 삶을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는 것,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앉는 것,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
스승으로 불러 주는 이런 것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 기간 중에 서쪽 벽에서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특히 서쪽 벽의 남자 구역에 들어가 유대인들 중에서도 유대 종교 지도자라고 하는
하시딤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그 당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은 배워야 하겠지만
눈에 보이게 기도하는 모습이나 하시딤이라고 대접 받는 모습은 좋게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모습이 저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돌아보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자칫 방심하면 우리가 쉽게 빠질 수 있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말씀을 꼭 기억하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과, 자신을 낮추는 삶을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삶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지키며 땀을 흘리고 노력할 때
우리는 2천년 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삶을 재현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고
우리도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대구 대교구 박재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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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 신부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마태오 23,1-12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가네.”
스승의 날이면 수업시간마다 불렀던 노래입니다.
이처럼 가르침을 주는 모든 분들은 삶의 스승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 선생님은 많은데 스승이 없다고 합니다.
스승의 첫째 덕목은 어떤 가르침에 있어서 스스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삶을 가르치기보다는 지식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는 왜소해지는 반면 학원은 나날이 번창하고 있음을 보기도 합니다.
성직자들은 같은 지식을 가르치지만 삶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삶의 지혜를 가르친다는 것은 그 가르침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어야 하는데
사제에게 가장 큰 어려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르친 삶의 지혜를 스스로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나누지 못할 때가 있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말로만 떠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저 역시 행실이 따르지 않는 언행불일치의 삶을 살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바담풍’ 하더라도 자식은 ‘바람풍’ 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사제가 설사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실천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어쩌면 이 희망이 간절한 기도가 되는 이유도 제 삶이 부족한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전주교구 최종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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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마태오 23,1-12
말과 행동이 하나되어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23,1-2)
율법 학자들은 회당의 ‘모세의 자리’에서 율법을 해석했습니다.
그 자리는 모세 율법의 권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해석하는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셨지만 그들의 언행불일치를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에 해박하였고 종교의 순수성을 열성을 다해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습니다(21,3).
그들은 율법에 권위를 두려고 사람들에게 무겁고 힘겨운 짐을 지우면서도
그들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23,4).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좋은 뜻에서 다른 이들에게 모범을 보이려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심을 과시하려고 겉모양을 꾸몄을 뿐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23,5)
그들은 하느님이 아닌 자신을 첫 자리에 두었던 것이지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눈이 아니라 인간의 시선을 의식한 그들은
교만에 빠져 사회적 명예에 집착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드러내기 좋아하고, 윗자리 높은 자리를 좋아하며,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스승으로 인정받기를 좋아했습니다(23,6-7).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23,11-12)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직무는 섬김이며(23,11),
서로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이야말로 제자다운 몸짓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돌아봅니다.
우리는 언행일치의 중요성을 잘 알면서도 입이 발을 앞서갑니다.
자신을 내놓기보다는 지키려 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말은 적게 하고 사랑으로 경청하며,
말의 무게를 행동으로 옮기도록 힘써야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들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2신자 편지 52-52)
다음으로 무엇을 하든, 또 어떤 자리에서든 늘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해야겠습니다.
드러나야 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정받아야 할 것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으로 하느님을 드러내려면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작아져야만 할 것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될 때 하느님의 자리는 사라져버림을 잊지 말아야겠지요.
우리 모두 위선과 교만에서 벗어나,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를 추구하며
서로를 섬기는 수평적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하루가 되도록 헌신하였으면 합니다.
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