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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집트 : 시나이 반도

작성자Lee Andrea|작성시간21.10.17|조회수132 목록 댓글 0

■ 시나이(SINAI)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잇는 연결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성서상으로 구세사의 시작부터 하느님의 구체적인 역사(役事)하심이 드러난 현장이다.

아브라함(창세 12,10-13,1)을 비롯하여 요셉과 그 형제들(창세 37장 : 42-43장), 모세(출애 2,16-4,23), 출애급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출애 13,17 이하 :민수기와 신명기), 예언자 엘리야(1열왕 19,4-19)가 이 시나이 반도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의 뜻을 받았다.

수에즈만과 아카바만 사이의 삼각형 모양의 반도로써 남부는 험한 산악지대이고 북부는 황량한 광야이다.

넓이 6만1천 평방 Km 의 시나이 반도는 낮에는 작열하는 햇빛이 내리 쬐고 밤에는 기온이 급강하 한다.

계곡이 거의 없어서 물을 구하기 힘들고 대표적인 오아시스로는 파이란 오아시스가 있다.

 

모세가 애굽에서 팔레스틴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통과한 곳이 이곳이고 아라비아의 유목민인 아말렉족과

싸움을 벌인 곳이며, 이스라엘 자손들이 40년동안 유랑하며 하나님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받던 곳도 이곳이다.

모세에 의한 이스라엘 민족과 출애굽 사건은 가장 큰 사건이며, 또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되겠다.

시나이 반도는 6만2천 ㎢ 크기의 대륙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지리학적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남은 홍해, 동은 아카바만 (평균 깊이 1,850 ㎞). 서는 수에즈만 (평균 깊이 110 m), 북은 지중해로 둘러 쌓인 곳이다.

북부는 기후가 온화하며 평균 강우량 150㎜에 이르고, 비옥한 계곡과 오아시스가 많이 있는 남부는 평균 강우량이 60㎜ 정도이다.

현재 시나이 반도에는 25만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중 약 60%가 아랍계열의 유목민인 베두윈 족이다.

이들 베두윈들은 전통적인 방식을 좇아 물과 꼴을 찾아서 광야를 이동하고 있으며, 대추야자, 올리브, 귀리등을 재배하여,

식량과 가축들의 사료로 쓰기도 한다.

이들을 규제하는 법은 이집트 국법이라기 보다, 그들만의 부족법이다. 이들은 정착을 위한 농경이나 집을 짓지 않으며,

임시 거주처는 야자수잎 등으로 만들어 지는데 물론 지붕없는 구조로 지어진다.

엘 아이리쉬 지역이나 바란 오아시스 지역의 유목민들은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반 유목민 형태를 지니고 있다.

시나이 반도의 여기저기에서 중동전의 전흔을 찾아볼 수 있는데, 수에즈 운하 근처의 높은 모래 둔덕들은 군용 참호를 만들었던 자리들이다.

이 지역의 관할권을 두고 제 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집트와 터키가 다투었고, 중동전 과정에서는 이스라엘에 점령되기도 했다.

1982년 이후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반환하였고, 1988년 이후로 이집트가 직접 관리하고 있다.

 

타바의 힐튼 호텔은 이스라엘이 1970년대 후반에 세운 것으로 지금은 이집트 영역 안에 있다.

시나이 반도의 개발은 1967년 3차 중동전 이후에 이스라엘이 점령하면서 구체화되어, 다합, 누에바, 샤름 엘 쉐이크 들에

정착촌을 건설하였고, 홍해변에 고속도로를 1971년에 완성 시켰다.

◆ 북부 시나이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시나이 반도 북단의 지중해 연안을 따라가는 길로서,

이 길을 팔레스타인 길, 블레셋 길, 또는 바닷길 (Via Maris)이라고 한다.

또한 이길을 고대 이집트에서는 'Way of Horus'라고 하여 군용도로로 활용하였다.

이 길을 통하여 사람들의 이동, 사상의 전파, 생산물의 교환이 주로 이루어졌다.

고대에는 이집트와 동방의 나라들간에 긴밀한 접촉과 교류가 있었으며 시나이 반도가 그들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북부 시나이는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오가는 용병들의 중요한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 군대와 함께 페니키아 인들도 함께 이동하였다.

◆ 중부 시나이  
메마른 자갈과 석회석의 고원 지대로, 기암괴석의 기묘한 절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폭넓은 건조하천 (와디)이 발달해 있으며, 대표적인 것이 '와디 알아리쉬'로서 남북 길이가 200㎞를 넘는다.

기원전 16세기에 이집트 왕은 수르 광야 길 (성경 상의 '술 길' : 창 16:7)을 통해 현재의 이스마일리아 지역을 지나

브엘쉐바 지역으로 이동하기도 했는데, 이 길의 이름을 'Kings Highway'라고 불렀다.

또한 현재의 아흐마디 함디 터널을 지나서 타바(에일랏)을 지나가는 '미디안 길' 또는 '순례자의 길'이 있는데

무슬림들은 일평생에 한 번 이상은 성지 메카를 순례하도록 율법으로 규정되어 있어서 북부 아프리카의 무슬림 들이

이곳을 통하여 사우디 아라비아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창 16:7)

◆ 남부 시나이  
남부 시나이는 깊게 깍인 높은 화강암 산악을 이루고 있고, 와디 (건조천)의 경우는 통상 건조한 상태에 있으면서

간간이 내리는 빗물에 의하여 점점 더 패이고 있는 상태이다.

해발고도가 750 ~ 2500m 에 이르고 있다. 거대했던 화산 활동을 실감하게 해준다.

짙은 푸른색의 구리 탄소엽, 분홍색과 노랑, 회색의 화강암, 석회석, 남동관, 흑갈색의 점토 퇴적물, 이회암 등이 띠 모양을 이루고 있는 산악들을 보게 된다.

많은 골짜기들이 간간이 울창한 초목을 이루고 있기도 한다.

샘들과 자연 우물들이 야자수와 위성류로 이루어져 있는데 산, 곡을 지나면서 압력이 가중되면서 급류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지역에는 로마의 박해를 피하여 온 수도사들의 은둔 생활이 이미 4세기 중엽에 시작되기도 하였다.

◆ 역사 속의 시나이  

불모의 땅이면서도 인류 역사상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은 드믈다.

고대 이집트 제국이나 알렉산더의 아프리카 원정도, 이슬람의 아프리카 확산도, 이 시나이 반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시나이 반도의 통로는 50개 군단이 진군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은 폭을 지니고 있다.

이집트 역사 속에서 시나이는 19왕조 시기부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요르단의 페트라 문명을 만들어낸

나바트인들이 그들의 왕국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 (기원전 2세기 ~ 기원 후 1세기)에 이 시나이에 거주하였다.

시나이 반도와 성경의 관계는 아브라함의 가나안 및 애굽 여행과 관계된 창세기 12장 이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가데스와 술(Shur) 사이에 거주하였는데 이것은 현재의 수에즈 운하를 중심으로 한 남북 지역을 말한다.

요셉이 미디안 상인을 통하여 애굽으로 팔려 갔었고, 야곱이 그 가족들과 이집트로 들어왔던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세의 도주처로서 (출 2:15, 미디안 땅), 하나님의 출애굽 소명을 받은 시내산 사건 (출 3~4장) 으로,

아합왕의 박해를 피해 도망왔던 엘리야의 은신처 (왕상 19:1 ~14 :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로서,

예수님과 마리아, 요셉이 헤롯의 박해를 피해 피난오던 길목이기도 하다. 사도바울의 10년 간의 성경연구 장소 (갈 1:17, 아라비아. 갈 4:24 ~25)로서도 언급되고 있다.

시나이 반도는 코멜리우스 팔마 (Conelius Palma) 때 로마 제국에 병합되었다.

이것은 나바트 왕국과 페트라가 로마에 굴복되던 AD 107년의 일이다. 이후 3세기 로마의 데오도시우스 황제 (249 ~251)때의 대대적인 박해를 피해

수천의 망명자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출애굽 경로를 쫒아 하나님의 산에 도달하였다.

그들은 출애굽 전통을 되살리고 수도원 운동을 재개하였다.

이 결과물들은 현재의 바란 오아시스 지역과 해안 지역에 흩어져 있다.

오마르(Omar)에 의하여 팔레스타인과 이집트가 점령 당하던 636년에, 아랍 무슬림들은 바란오아시스 지역에

많은 수의 건축물들을 지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였고 다른 이들은 삶의 흔적들만 남기고 이곳을 떠나갔다.

 

성캐더린 수도원의 수백 명의 수도사들만이 시나이 반도의 기독교 중심지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십자군 전쟁 시기에 이곳은 다시 회복되었으나, 이 십자군은 살라딘에 의해 패퇴하였고, 살라딘은 파라오의 섬 (현 타바국경 근처)에 성채를 쌓아 올렸다.

16세기에 술탄 셀림 무라드(Sultan Selim Murad)는 수에즈와 아카바를 연결하는 '순례지의 길' 중간의 Tur 지역에 또다른 성을 쌓았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1948년 ~ 1949년 에 1차 , 1956년에 2차 , 1967년에 3차 , 1973년 10월 4차에 걸친 전쟁의 격전지로서도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은 이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고 있다가 1979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조인한 이후에 이집트에 반환하였다.

반환은 일시에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1982년 4월에 타바를 제외한 다른 지역이 반환되었고, 1989년에는 타바도 반환되었다.

현재 타바 국경지역에는 일부의 유엔 평화 유지군이 주둔하고 있다.

◆ 시나이 반도의 길
오늘날 시나이 반도 지역이나 시내산으로 가는 일반적인 코스는 크게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수에즈 운하 (아흐마드 함디 터널) 밑을 통과하여 시나이 반도 서편 홍해 변을 좇아서 가는 길과 시나이 반도를 가로질러

'누웨바' 길을 지나서 시내산으로 가는 길이 그것이다.

시나이 반도 북단으로 가는 길은 'El Shallufa' 지역에서 배로 건너는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출애굽 여정은 '이스마일리아' 부근에서 수에즈 운하를 배로 건너 이곳에서 남쪽으로 홍해를 끼고 내려오는 코스이다.

그러나 시간상 많은 제약을 받고 있기에 현재의 순례여정에서는 활용하고 있지 않다.

     술 길 (창 16:7 : 수르로 가는 길)
     에돔길 (왕하 3 : 에돔광야 길)
     홍해길 (신 1:40)
     아모리 족속의 산지 길 (신 1:19)

◆ 해변길
Via Maris 라고도 불린다. 역사상의 모든 시대에 사용되었다.

이 길을 따라 가나안 고대 성읍들이 형성되었다.

외국의 사신들과 대상, 원정군들이 통행하였다.

길르앗, 므깃도 등은 대표적인 도시이다. 이사야 9장 1절 에는 '해변 길'로, 출애굽 13장 17절 에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로

언급되고 있다.

 

이집트 서기관 호리의 편지에는 '호루스의 길'로 언급되고 있다.

이 길은 해변길의 남쪽 부분으로 이집트 군대의 북진로였다. 전략적 요충지, 요새들이 줄지어 수축되어 있었고,

대상들과 군대의 통행로였으며, 중간역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우물들이 건설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요새도시로는 '라피아'와 '라반' , '사루헨', '벧 에글라임', '가자'등이 있다.

◆ 왕의대로
요단강을 남북으로 달리고 있는 길 (민 20:17, 21:22) '대로'로 언급되기도 한다.

이 길의 북부는 '바산 길' (민 21:33)로 국제적 교역로였고, 유목민의 대상들이 사용하던 길로 가장 고대의 원정은

창세기 14장의 아브라함이다.

이 길의 요지로는 '바산', '길르앗', '모압 고원', '세일', '에돔'과 아카바 만의 '엘랏' (민 20:19) 등이다.

■ 출애굽

현대의 시나이 반도 내의 아스팔트 길과 전통적으로 말하는 출애굽의 길은 꼭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으나 시나이 반도와

나일 계곡 (아라비아 사막)을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의 해저 터널을 지나서 15Km 정도 남행하면 대추 야자나무가 무성한

조그만 오아시스가 하나 나오는데 이곳을 아랍어로 오윤 무사(OYUON MUSA), 성서상의 마라의 샘 (출 15:23)이다.

수에즈만 (홍해)를 따라 남행하여 와디 파이란 (WADI FAIRAN) 계곡을 계속 따라 가면 성가타리나 수도원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라스 사라팁에서 우측길로 60 Km 정도 더 가면 엘드어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가 엘림(출 15:27)으로 간주되는 장소로

종려나무 70여 주와12개의 샘이 있고 4세기 때 건립 된 조그만 교회가 하나 남아 있다.

 

다시 와디 파이란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파이란 오아시스(FAIRNA)에 도착한다. 이 오아시스가 성서의 르비딤 인데

이곳이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처음으로 아말렉족와 여호수아가 전쟁을 치룬 곳이다.(출 17:8-16)

이 계곡을 와디 히브린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히브리(유태)가 지나 갔다는 뜻이다.

파이란 오아시스는 길이가 4 Km 정도인데 시나이 반도 내에서는 가장 큰 오아시스이다.

그리고 와디 엘세이크로 들어가 50 Km 정도 가면 성 가타리나 수도원이 나온다.

이 수도원 자리가 시나이산 아래인데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난 장소이다.(출 3:1) 모세의 출애굽 600년 후에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야도

정상에서 하느님과 대화 하였던 성산이다.

시나이산 정상에는 기원 4세기경에 세워졌던 조그만 교회 자리에 1934년에 다시 세운 성 삼위일체 교회가 있다.

◆ 시나이 산(Mt. Sinai)
파이란 오아시스를 지나면 표고 2,285m의 시나이산이 있고 그 옆에 가타리나 산이 보인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가

오늘날 시나이 산으로 추측되고 있는 호렙산에서 가시나무 떨기 속의 불꽃을 보고 다가가다가 야훼의 음성을 들었다.

모세는 여기서 출애굽의 사명을 받았고 또 여기서 십계명을 받았으므로 그리스도교와 유다교에서는 이를 '거룩한 산(The Holy Mountain)'으로 여긴다.

출애급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곳으로 하느님의 발현이 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십

계명을 받은 산.
성서에서 시나이 산과 관련하여 맨처음 등장하는 사람은 모세이다.

모세는 하느님의 지시대로 이집트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동족을 이끌고 시나이 산에 이르렀다.

모세는 하느님과 말씀을 나누기 위해 시나이 산으로 올라가(출애 19,3 : 24,9) 그곳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십계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 계명을 전하려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고(출애 19,14), 시나이 산에서 40일을 보내기도 하였다.(출애 24,18).

또한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바알 우상을 섬기자 호된 질책을 하였는데(1열왕 16,29-18,46), 이에 이세벨 왕비가

자기를 해치려고 하자 시나이 산으로 도망을 갔다(1열왕 19,9-15).


오늘날 시나이 산을 찾는 순례자들은 해발 1,500m 지점에 위치한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서부터 오르기 때문에

실제로 걷는 거리는 약 800m정도이다. 마지막 750여 개의 돌 계단을 올라 정상에 오르면 성 삼위 일체 성당과

이슬람교 사원이 있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에 속한다.

◆ 마라의 샘 (Well of Marah)

모세가 마라에서 쓴 물을 단 물로 만들다. “ … 그들은 사흘 동안 가면서도 물을 만나지 못하다가 마라에 다다랐으나

그 곳은 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고장을 마라라고 불렀다. …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자 야훼께서 나무 한 그루를 보여주셨다.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 단물이 되었다….(출애굽15,22-27)

◆ 르비딤 (REPHIDIM)
시나이산 북쪽 이드로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이 수도원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시나이산을 순례하고서

기념경당을 하나 짓도록 하여 342년에 세워진 것이 그 모체가 되었다.

성가타리나는 알렉산드리아 귀족 출신 도로테아가 받은 세례명으로 307년 순교했으나 시신은 행방이 묘연했다.

 

그런데 3세기 후반 어느날 시나이산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수도자가 두명의 천사들이 그녀의 시신을 가타리나산에 옮겨다 놓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리하여 수도자들이 그 시신을 수도원의 성당 제대 옆으로 모셨고 이때부터 수도원의 명칭을 가타리나로 개명했다고 한다.

가타리나 도서관으로서는 로마 바티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되어 귀중한 성경사본과 희귀본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이 있다.

◆ 모세 기념교회

그리스 정교회 소속으로 모세가 시나이산 정상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서 있었다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으며

시나이산 순례에서는 빠뜨릴 수 없는 성지이다.

하절기 등산은 밤 12시부터 2시 사이에 시작되며 가타리나 수도원에서 3시간쯤 걸린다.


■ 가타리나 수도원
시나이산 북쪽 이드로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이 수도원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시나이산을 순례하고서

기념경당을 하나 짓도록 하여 342년에 세워진 것이 그 모체가 되었다.

 

성가타리나는 알렉산드리아 귀족 출신 도로테아가 받은 세례명으로 307년 순교했으나 시신은 행방이 묘연했다.

 

그런데 3세기 후반 어느날 시나이산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수도자가 두명의 천사들이 그녀의 시신을 가타리나산에 옮겨다 놓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리하여 수도자들이 그 시신을 수도원의 성당 제대 옆으로 모셨고 이때부터 수도원의 명칭을 가타리나로 개명했다고 한다.

가타리나 도서관으로서는 로마 바티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되어 귀중한 성경사본과 희귀본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이 있다.

현재 수도원은 548∼565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것이다.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해발 2,642m의 산봉우리를 '가타리나 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1000년경 이곳에서

가타리나 성녀의 유해가 발견되면서부터였다.

콥트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250년경에 태어난 가타리나는 알렉산드리아의 귀족 출신으로 본명은 도로테아였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가타리나라는 세례명을 받았는데, 수도자 생활을 하다가 막시미아누스 황제(286∼305)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몇 세기 후 시나이 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이 꿈에 두 명의 천사가 성녀의 시신을 알렉산드리아에서

가타리나 산으로 옮기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리고 수도자들이 성녀의 유해를 성당의 제대 옆으로 모신 뒤부터 성 가타리나 수도원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세기 초 이집트의 막시미누스 황제 당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였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캐더린은 용모와 학식이 출중했다.

그녀는 예수님을 받아 들이면서 세례를 받고 황제의 우상 숭배를 비난했다. 황제는 여러 학자들을 보내 회유하려 했으나

그들마저 예수를 믿게 되었다.

결국 캐더린은 고문을 받고 되고 순교를 하게 된다. 그녀의 시신은 천사에 의해 시나이 반도 제일 높은 곳으로 옮겨진다.

이 사건 이후 시내산 수도원이 성 캐더린 수도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 수도원의 역사적 배경은 3세기 중엽부터 수도사들이 찾기 시작했고, A.D. 330년에 헬레나 모후가 불붙는 떨기나무 자리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납하는 교회를 짓는다.

4세기 경부터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게 되고 5세기 중엽에는 시나이 교구가 성립되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요새화된 장방형의 수도원을 건설 하였다. 이 수도원이 완성 된 것은 A.D. 557년 이다.

7세기 때 아랍인들이 점령을 해서 수도사들이 30명 까지 줄어들었다가 수도원장이 모하메드에게 수도원에 대한 보호를

요청하였고 모하메드는 그것을 받아 들였다.

11세기에 접어 들면서 십자군들이 등장함에 따라 수도원은 서방세계의 기독교와 아랍 지역의 모슬렘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해야만 했다.

197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점령 했을 때도 수도원은 보호 되었다.

이곳은 또한 이콘이라고 불리우는 목판 성화의 보고이며 2000여 개가 넘는 이콘들이 보관 되어 있다.

성 캐더린 수도원 내에 있는 교회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주후 6세기 중엽에 건설 되었다.

이 교회로 들어가는 나무 장식 문은 건립 당시 만든 문으로써 1400년 이상 된 문이다.

교회 안에는 12 기둥이 있으며 이것은 12 달을 의미한다. 기둥 위에는 그 달의 성자 이콘이 있다.

이 교회 제단 뒤에는 불붙는 떨기나무의 기념 에배당이 있고 이곳은 지금도 반드시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변화산에서의 예수님 모습을 나타낸 교회 전단 중앙에 있는 모자이크는 왼쪽부터 엘리야, 요한, 예수님, 베드로, 야고보,

모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이 둘레에는 12 제자, 12 예언자, 건축 당시의 수도원장 롱지너스, 집사 요한등 모두 26명의 모습이 둘러져 있다.
이 교회 근처의 떨기나무는 시나이 반도에서만 자라나는 특수한 종류로써 소중하게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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