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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한국 관련 해외성지(중국) : 16-02 북경 선무문 천주당 : 남당

작성자Lee Andrea|작성시간23.07.02|조회수173 목록 댓글 0

선무문 천주당 宣武門 天主堂 : 남당 南堂  
Xuanwumen Catholic Church : Southern Church
남당 구베아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


위치 북경시 서성구 전문서대가 141호
北京市 西城區 前門西大街 141號전화 +86-10-66025638, 66037139

남당으로 알려진 선무문 천주당은 북경의 천주당 중 가장 먼저 건립된 천주당이다.

조선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과 가까웠기 때문에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이 빈번하여 서구 문명을 배우고 받아들이게 된 곳이다.

 

선무문 천주당은 지하철 2호선 선무문 역에서 하차하여 5분 거리에 있다.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玛窦, 1552~1610) 신부가 명 만력 33년(1605)년에 선무문 안(자금성 밖의 남서쪽)에 건립한 성당이다.

현존 건물 가운데는 가장 오래된 교당이다.

청 건륭제 40년(1775)에 불탔으나 다음 해 중건됐다.

1900년 의화단 운동 때 다시 훼손됐는데, 청 광서제 30년(1904년)에 다시 건축됐다.


홍대용과 박지원 등의 연행록에는 이들이 방문한 곳이 서당으로 소개되어 있으나, 실은 남당이다.

건륭 때에 통미가경당(通微佳境堂)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았다.

마테오 리치 신부가 활동했던 곳이며, 소현 세자와 교류하던 아담 샬 신부가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남당 천주당은 김창업의 《연행일기》(燕行日記) 이후 연경을 방문하는 사신들이 반드시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

홍대용은 1766년 1월 9일 남당을 방문하여 당시 남당의 선교사였던 할러슈타인(August von Hallerstein, 劉松齡)과 고가이슬(Anton Gogeisl, 鮑友官) 신부들을 만났다.


그는 모두 네 차례 천주당을 방문하였는데, 천주당에서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찰하고, 생전 처음 보는 파이프 오르간의 제도를 살피고 연주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실학자들은 남당을 찾아 서학을 접하면서 그 사유의 지평을 넓히게 되었다.


나중에 연행에 오른 박지원 역시 천주당을 찾은 감격을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술회하고 있다.

천주당 바람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 구름과 인물들은 “번개처럼 번쩍이면서 먼저 내 눈을 뽑을 듯하는 그 무엇이 있었고, 꼭 숨을 쉬고 꿈틀거리는 듯 음양의 향배가 서로 어울려 저절로 밝고 어두운 데를 나타내고 있었다.”고 하여 서양의 화법에 대해 감탄하기도 하였다.


남당은 중국의 불교 사원 건축 양식과 유럽의 건축 양식이 융합된 성당이다.

이 성당은 이탈리아의 대성당과 비슷한 반원 아치형의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고

전체적으로 암회색의 벽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고졸하고 소박함을 더해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당의 좌우에 비석이 남아 있으나 많이 훼손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사료에 의하면 동쪽 비는 청나라 순치 14년(1657년)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청 세조, 순치 황제가 친히 남당을 위해 내린 어제천주당비기(御制天主堂碑記)이다.


주요 내용은 순치 황제가 역법의 중시하며, 아담 샬의 공적을 치하하고 그 종교 신앙을 찬양하여 관직과 칭호를 주어

고무하였다는 내용이다.

서쪽 비의 비문은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의 사적과 성당 건립의 역사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 남당 구베아 주교와 성직자 파견 요청
북경교구는 1780년대 초부터 1830년대까지 약 50년 간 한국 천주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우선 1783년 말에는 한국 최초의 신자가 된 이승훈(베드로, 1756~1801)이 북경을 방문하여 그라몽 신부를 만났으며,

이듬해 초에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그해 말에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북경교구와 한국 천주교회의 관계는 1785년 초에 신임 교구장 구베아(Gouvea, Alexander de, 湯士選, 1571~1808) 주교가

북경에 도착하면서 더욱 밀접해지게 되었다.


1789년 말에 한국 교회에서는 윤유일(바오로)을 밀사로 선발하여 북경으로 보냈으며, 그는 북당의 선교단장

로(Raux, Nicolas Joseph, 羅旎閣, 1754∼1801) 신부와 남당의 구베아 주교를 만난 뒤 이듬해 2월 9일에 판지 수사를 대부로

하여 로 신부로부터 조건 세례를 받고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을 받아 귀국하였다.


1790년에 다시 북경으로 간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에게 이승훈과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편지를 전하면서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약속대로 1791년 2월에 마카오 교구 소속이던 레메디오스(Juan dos Remedios, 吳) 신부를 선발하여

조선으로 파견하였으나, 그는 조선의 밀사들을 만나지 못함으로써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다.


1793년에 조선 교회에서는 지황(사바)과 백 요한을 선발하여 다시 북경으로 보내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고,

구베아 주교는 첫 번째 북경교구 신학교 출신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1752∼1801) 신부를 선발하여

조선에 파견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1794년 12월 24일 조선에 입국한 이래 1801년 5월 31일 체포되어 순교할 때까지 조선 교회를 돌보았다.

■ 남당의 탄생과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남당은 명대에 최초로 세워졌는데, 명 만력 29년(1601년) 신종의 허락에 의해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신부가 북경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에 이 남당이 바로 그의 거주지였다.

1605년 마테오 리치는 북경에 거주하면서 선무문 내에 땅을 사서 집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종교 활동을 위해 집 부근의 수선서원(首善書院)을 사서 성당으로 개축하였다.


선교를 시작한 이후 신자 수가 많지 않았기에 처음의 성당의 규모 또한 매우 작았다.

당시 그는 성당 내에 서양에서 가져온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림을 안치하였으며 십자가를 성대 중앙에 놓았다.

당시 이 성당의 특이한 외관과 서양식 내부 장식은 중국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자아내어 잦은 외부인의 방문이 있었다.

 

그는 방문객을 거절하지 않고 환대하였으며 자주 담소를 나누었기에 많은 친구가 생겨 천주교의 전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마테오 리치는 1582년에 중국에 온 이후 중국 문화의 이해와 선교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으며 중문 이름 이마두(利瑪竇)도 얻었다.

심지어 중국인의 성당 방문을 쉽게 하기 위하여 성당을 사찰로 칭하기도 하였으며 교칙마저 중국 실정에 맞게 변통하였다.


또한 많은 사대부와 상층 인사와의 교류를 통해 서양의 문물과 과학 지식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하여 신자 모임인 천주모회(天主母會)도 창립하였으며 신자 수도 점점 증가하여 1610년에 다시 아름다운 성당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선무문 남당이다.


마테오 리치가 1610년 5월 11일 북경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1616년 남경교안(南京敎案)이 발생하였는데,

이로 인해 명 정부는 중국인 신자를 엄격히 금지하였고 북경에 거주하는 예수회 사람들을 마카오로 돌려보냈으며

남당을 관부로 귀속시켜 폐쇄하였다.

 

그러나 1629년 역법을 새로 고치면서 천문역법에 정통한 독일계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등을 참여케 하였는데,

이로 인해 남당은 다시금 선교사의 거주지가 되었으며 종교 활동도 가능케 되었다.


1650년 황제로부터 선무문 내 성당부근 땅 일부와 건립기금을 하사받아 새로이 성당을 중건하였다.

아담 샬은 직접 성당의 초도를 그리고 구체적 시공계획을 세웠으며 성당은 1652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남당 낙성 이후 순치 황제가 친필로 쓴 ‘흠숭천도’(欽崇天道) 편액을 하사하였으며 1657년에 다시 어필

‘통징가경’(通微佳境)이라는 문액과 천주당 비명을 내리며 아담 샬을 높이 평가하였다.


1690년 북경이 주교구로 설정되면서 강화지(康和之)를 주교로 임명하고 남당을 주교구당으로 하였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말미암아 남당은 다시 한차례의 비운을 맞게 되었으나 곧 신축조약으로 인해 다시 중건되었는데, 당시 개축된 건축물이 현재의 남당으로 남아 있다.

■ 옥하관(玉河館)
북경을 방문한 조선 사신들이 유숙하던 집이다.

연암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 옥하관은 옥하 언덕에 있었으며, 옥하는 자금성으로부터 동류하는 인공 하류로서

지금 장안동가(長安東街)와 남성장(南城墻)이 마주치는 옥하중교(中橋)의 서쪽을 가리킨다.

지금은 정의로(正義路)와 동교민항(東交民巷) 큰 길이 만나는 최고인민법원 일대가 바로 옥하관 옛터다.


북경, 남당 천주당이 조선 사신들이 묵었던 옥하관과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관계로 조선 사신들과

예수회 소속 서양 신부들과 잦은 접촉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조선에 서학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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