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경의 4 천주당 북경에는 대표적인 4개의 성당이 있다. 왕부정(王府井)의 동당(東堂). 서십고(西什庫)의 북당(北堂), 선무문(宣武門)의 남당(南堂), 서직문(西直門)의 서당(西堂)이 있다.
한국 천주교회와 첫 인연을 맺은 북당(北堂)은 명말 청초 북경에 건립된 4개의 성당 가운데서 본래의 형태가 남아 있는 유일한 천주당으로,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드 퐁타네(Jean de Fontaney, 洪若翰, 1643∼1710) 신부가 키니네를 사용하여 성조 강희제(康熙帝)의 학질을 고쳐준 공로로 하사받은 서안문(西安門) 밖의 부지에서 1701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703년 12월에 축성하였다. 이때 강희제는 칙건천주당(勅建天主堂)이라는 명문을 하사했다.
앞서 프랑스에서는 1684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중국 전교권을 인정받은 뒤 예수회 선교사 중에서 드 퐁타네를 비롯하여 모두 5명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보호권을 주장하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방해로 인해 마카오를 경유하지 못하고, 1687년 말에 영파(寧波)에 도착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천진을 경유하여 2월 8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중에서 부베(Bouvet, 白晉)와 제르비용(Gerbillon, 張誠) 신부는 북경에 남아 궁정에 봉사하였으며, 드 퐁타네와 르 콩트(Le Cormpte, 李明), 비델로(Visdelou, 劉?) 신부는 지방 전교에 착수햐였다. 그러다가 1703년에 강희제가 하사한 부지 위에서 북당을 완공 축성하여 전교의 본거지로 삼게 되었다.
당시 북경에는 예수회의 리치(M. Ricci, 利瑪竇) 신부가 1605년 선무문(宣武門) 안(자금성 밖의 남서쪽)에 건립한 남당(南堂)과 1653년 샬(A. Schall, 湯若望) 신부가 동안문(東安門) 밖에 건립한 동당(東堂)이 있었다. 한편 서당(西堂)은 라자리스트희[遣使會]의 페드리니(Pedrini, 德理格) 신부가 옹정제(雍正帝) 때인 1725년에 서직문(西直門) 대로에 있던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건립한 것이다. 남당은 1653년에 샬 신부에 의해 확장되면서 순치제(順治帝)로부터 흠숭천도(欽崇天道)라는 편액을 하사받기도 했고, 1675년에는 강희제로부터 만유진원(萬有眞原)이라는 편액을 하사받기도 했다. 그러나 1690년에 북경이 포르투갈의 보호 교구로 설정되면서 전교 단체들 사이에는 알력이 생겨나게 되었고, 1640년대부터 계속되어 온 의례 논쟁(儀禮論爭)의 결과로 옹정제(雍正帝) 때부터 박해가 시작되면서 각 성당의 선교 단체마다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1773년 7월에 예수회가 해산되면서 북경의 선교 단체들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남당과 동당은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북당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서당은 포교성 파견 선교사들이 관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83년에 프랑스 국왕과 포교성에 의해 중국 선교사로 임명된 라자리스트회의 로(N.J. Raux, 羅廣祥) 신부 등이 1785년 4월 29일 북경에 도착하여 5월 8일부터 북당에 거처하게 되었다. 당시까지 북당에는 아직 프랑스 예수회원인 드 그라몽(de Grammont, 梁東材) 신부 등 6명의 선교사가 남아 있었다. 그 후 가경제(嘉慶帝) 초기에는 남당과 동당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흠천감의 실권과 직예(直隸) ? 산동성의 포교권을 장악하려고 하면서 서당의 이탈리아 선교사들이나 북당의 프랑스 선교사들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1811년 이후의 박해는 북경의 성당들을 다시 한 번 변화시켰다. 먼저 서당 선교사들이 마카오로 추방되고 성당은 몰수되었으며, 동당은 가경제의 압류와 파괴로 인해 선교사들 모두가 남당으로 이전해야만 하였다. 남당은 1838년 이후 한때 러시아 교회의 수중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또 북당은 1819년에 프랑스 라자리스트 라미오(Lamiot, 南彌德) 신부가 마카오로 추방되면서 대신 포르투갈 라자리스트 세라(Serra, 高守謙) 신부가 관리하였으나, 1826년에는 세라 신부마저 마카오로 떠나면서 폐쇄되고 말았다.
이후 중국에서의 박해가 1844년의 황포조약(黃?條約)으로 종결되면서 라자리스트회에서는 북당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성당은 폐허된 채였으며, 그마저 1900년의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남당과 동당은 그 후 새로운 모습으로 재건되었다가 다시 파괴되었으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북당은 중국 공산화 이후인 1951년에 폐쇄되어 오랫동안 학교와 창고로 이용되었다.
● 동당 천주당(東堂 天主堂) [왕부정 천주당(王府井 天主堂)]

동당 천주당(東堂 天主堂)에 관한 기록은 홍대용의 <연기(燕記)>에 소상하다. 동당은 몽고관(蒙古館)에서 북옥하교(北玉河橋)를 지나 자금성(紫禁城)을 따라 가다가 보이는 기이한 기와 지붕을 인 서양식 집이다. 지금의 왕부정 대가(王府井大街) 74호에 있다. 북경 4대 천주교당 가운데 하나인 동당은 명말 2명의 선교사가 세웠으며, 청조가 북경에 들어올 때 훼손됐다가 순치(順治) 12년(1655)에 이 땅을 하사했다. 이때 남당과 같이 건립됐지만 가경(嘉慶) 12년(1807년)에 화재로 폐허가 됐는데, 1884년에 로마식으로 다시 건립됐다. 의화단의 난 때 다시 불 탔으나, 1904년 배상 형식으로 프랑스와 아일랜드가 공동으로 중건하였다.
천주당을 방문한 연행사들은 원근법을 이용한 서양 그림의 사실적인 화법에 감탄하곤 한다. 홍대용은 북쪽 벽에 그려진 천주의 화상(畵像)이 모발이 무성하여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여, 원근법을 사용한 서양 그림의 입체감에 탄복하였다. 동당 서쪽에는 자명종루(自鳴鐘樓)가 있고, 누각 아래에는 해시계[일귀석(日晷石)] 한 쌍이 있다. 서쪽으로 난 문밖으로 두어 길 되는 대(臺)가 있었는데, 이를 관성대(觀星臺)라 하였다. 대 위에는 집 셋을 세워 놓았고, 가운데 집에 혼의(渾儀)ㆍ망원경 등 여러 가지 의기들을 저장하여 두었다.
대 아래 넓이가 수십 묘(畝) 되는 뜰에는 벽돌을 쌓아 길이가 1장쯤 되는 기둥을 만들어 두었는데, 위에는 열십자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런 것이 무려 수백 개가 뜰에 널려 있었으니, 대개 봄 ?여름에는 위로 포도 덩굴이 올라가도록 횃대를 놓아 둔 것이다. 기둥 옆에 군데군데 무덤처럼 흙을 모아 둔 것은 포도를 저장하는 곳이다.
뜰 동쪽에 집이 두어 칸 서 있고 가운데에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 위에 두레박틀을 만들어 두었고, 옆에는 치목(齒木)을 가로질러서 톱니 바퀴가 맷돌처럼 고르게 돌아가게 하였다. 벽에는 버드나무 물통이 수십 개나 매달려 있었다. 또한 봄 ?여름에 물을 길어 포도에 대는데, 기계 바퀴가 한 번 돌면 수십 개의 두레박이 차례차례로 물을 끌어 올리기 때문에 사람이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물은 도랑에 고루 퍼져 뜰에 가득 차게 된다. 홍대용은 천주당에서 포도를 힘들여 가꾸는 것은 술을 빚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 서당 천주당(西堂 天主堂) [서직문 천주당(西直門 天主堂)]
서당 천주당(西堂 天主堂)은 라자리스트희[遣使會]의 페드리니(Pedrini, 德理格) 신부가 옹정제(雍正帝) 때인 1725년에 서직문(西直門) 대로에 있던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건립한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 속편>에서 “근대의 서양화는 언제 어떻게 조선으로 들어왔습니까”라는 제목으로 적었다.
서양화가 동양으로 처음 전해진 것은 중국 명 말에 예수회 신부가 북경에 들어가서 천주교를 선포하며 예수의 기적도와 성모상 그림을 내 보인데서 비롯하였다. 조선인이 서양의 화풍을 알게 된 것도 그로 인해서다. 기록을 빌리면, 병자호란(1636) 직후 인질로 청국에 연행되었던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서양인 신부 아담 샬(Adam Shall)과 친밀히 접촉하다가 1645년 초에 귀국하게 될 적에 그 신부에게서 천주교 교리책을 포함한 서학 서적과 함께 천주상 그림 한폭을 얻어 갖고 왔는데 아마 그것이 서양화가 조선에 들어온 처음일 듯하다.
또 당시 북경의 동서남북 네 곳에 세워져 있던 천주당 중의 서당은 특히 조선의 사신 일행이 즐겨 찾아가 서양식 창벽화(스테인드 글라스) 등의 신기함에 놀라곤 하였다. 그러한 그림은 진작부터 여러 관람자의 기행문을 통해 국내에 알려지다가 1780년에 북경에 다녀온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 ‘양화’ 항목으로 그 천주당에서 본 희한한 실상이 소상히 기술됨으로써 많은 사람이 양화를 관심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북경에서 전래된 양화의 실물을 보는 일도 있게 되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양화의 유채 재료와 사실적 색상을 설명한 항목까지 보게 되었다.
● 남당 천주당(南堂 天主堂) [선무문 천주당(宣武門 天主堂)]
남당 천주당(南堂 天主堂)은 예수회의 리치(M. Ricci, 利瑪竇) 신부가 명(明) 만력(萬歷) 33년(1605)년 선무문(宣武門) 안(자금성 밖의 남서쪽)에 건립한 성당이다.
홍대용과 박지원 등의 연행록에는 이들이 방문한 곳이 서당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남당이다. 남당은 곧 서양 사람의 관소로, 남서쪽에 위치한 선무문(宣武門) 내에 있다. 건륭(乾隆) 때에 통미가경당(通微佳境堂)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남당은 현존 건물 가운데는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청 건륭제 40년(1775)에 불탔으나 다음해 중건됐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신부가 활동했던 곳이며, 소현세자와 교류하였던 아담 샬(Adam Schall)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사신들이 묵었던 옥하관과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조선 사신들은 예수회 소속 서양 신부들과 접촉하기에 용이하였다. 이들 천주당 신부들과의 만남은 조선에 서학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천주당은 김창업의 <연행일기(燕行日記)> 이후 연경을 방문하는 사신들이 반드시 들리는 명소가 되었다. 홍대용은 1766년 1월 9일 남당을 방문하여 당시 남당의 선교사였던 할러슈타인(August von Hallerstein, 劉松齡)과 고가이슬(Anton Gogeisl, 鮑友官)을 만났다. 그는 모두 네 차례 천주당을 방문하였는데, 천주당에서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찰하고, 생전 처음 보는 파이프 오르간의 제도를 살피고 연주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연행에 오른 박지원 역시 천주당을 찾은 감격을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술회하고 있다. 천주당 바람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 구름과 인물들은 “번개처럼 번쩍이면서 먼저 내 눈을 뽑을 듯 하는 그 무엇이 있었고, 꼭 숨을 쉬고 꿈틀거리는 듯 음양의 향배가 서로 어울려 저절로 밝고 어두운 데를 나타내고 있었다.”고 하여 서양의 화법에 대해 감탄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실학자들은 남당을 찾아 서학을 접하면서 그 사유의 지평을 넓히게 되었다.
남당은 중국식 불교 사원과 유럽식의 건축 양식이 융합되어진 성당이다. 이 성당은 이탈리아의 대성당과 비슷한 반원 아치형의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고 전체적으로 암회색의 벽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고졸하고 소박함을 더해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북당 천주당(北堂 天主堂) [서십고 천주당(西什庫 天主堂)]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드 퐁타네(Jean de Fontaney, 洪若翰, 1643∼1710) 신부가 키니네를 사용하여 성조 강희제(康熙帝)의 학질을 고쳐준 공로로 하사받은 서안문(西安門) 밖의 부지에서 1701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703년 12월에 축성하였다.
북해공원에서 시쓰(西單의 북쪽)로 가다보면 서십고(西什庫)라는 곳이 있다. 이름에서 보다시피 10군데 여러 창고라는 의미 인데 이런 지명이 붙은 연유가 명대 궁정에서 사용되는 물품을 이곳에 저장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실제로 열군데의 창고가 있었는데 각각 곡류, 무기류, 천, 모피, 실크등등이 전국에서 공수되어 올라오면 이곳에 저장되어 졌다고 한다. 청대에 들어와서 이런 기능이 사라지고 각각의 창고는 민간주택이나 기타 용도로 변경되어 현재는 단 한곳도 제 기능을 하는 곳이 없이 지명만 남았다.
서성구 서안문 대가에 있는 북당(시스쿠 성당)은 원래는 중남해 근처에 있었는데 천주교를 별로 안 좋아한 서태후가 이전을 명해서 19세기 후반 이곳으로 이전하여 여러차례 중축되었다. 프랑스 예수회의 중국 선교 본부로 사용하다 1773년 7월 예수회가 해산할 때까지 동당·남당·서당 등 베이징의 다른 예수회 소속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포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1785년 중국 선교사로 임명된 프랑스 라자리스트회 로 신부 일행이 북당에 거처하면서 선교에 힘쓰던 중 흠천감의 실권과 산둥성의 포교권을 장악하려는 남당·동당의 포르투갈 선교사들로 인해 서당의 이탈리아와 북당의 프랑스 선교사들 간에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1819년에는 극심한 박해로 인해 프랑스 라자리스트 라미오(Lamiot) 신부가 마카오로 추방되고, 1826년 세라(Serra) 신부마저 마카오로 떠나면서 폐쇄되었던 북당은, 1844년 황포조약의 종결과 동시에 재건되었다가 1951년 중국 공산화 이후 다시 폐쇄되었다. 명말 청초 베이징에 건립된 4개의 성당 가운데 현재까지도 본래의 형태가 남아 있는 유일한 가톨릭 교회당으로서, 한국 최초의 신자인 이승훈(李承薰)이 예수회의 그랑몽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시스쿠성당은 일요일 아침과 저녁 4차례에 걸쳐 미사가 진행되고 신자외에 외국인들에게도 개방이 된다. 역사가 오래되어서 고색창연하고 건평 면적은 좁지만 성당 전면의 고딕양식이 눈길을 끈다.
■ 북경의 천주교 전래와 북경교구북경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원(元) 나라 때인 13세기 중엽이었다. 그에 앞서 당나라 멸망 후 쇠퇴했던 경교(景敎, Nestorianism)는 11세기 이래로 다시 몽고(蒙古) 사회에 널리 전파되었다. 한편 천주교회에서는 1264년 세조(世祖, 쿠빌라이)가 북경(당시의 이름은上都)으로 천도한 지 30년 만인 1294년에 교황 니콜라오 4세의 친서를 휴대한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의 몬테 코르비노(Giovanni de Monte Corvino, 孟高味諾) 신부가 세조를 알현하였다. 이후 코르비노 신부는 성당을 건립하면서 전교에 힘썼고, 교황 클레맨스 5세는 1307년 7월 21일에 북경대교구를 설정함과 동시에 코르비노 신부를 북경 대주교 겸 동양의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원이 쇠퇴하고 명이 흥기하면서 북경대교구는 많은 손실을 입은 채 14세기 말에 이르러 폐지되고 말았다.
북경 교회는 명(1368∼1614) 말기에 이르러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전교를 재개하면서 다시 설립되었다. 특히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신부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한지 8년 여 만인 1601년 1월 24일에 북경에 진출하여 새로 교회를 설립했으며, 1605년 8월에는 판토하(Pantoja, 龐迪我) 신부 등과 함께 남당을 축성함으로써 북경 전교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은 1616년의 남경 박해(南京迫害)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1644년 명이 멸망할 때까지 중국 각처로 천주교를 전파해 나갔다. 한편 1633년에는 스페인의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입국함으로써 예수회의 단독 선교가 끝나게 되었다.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의 진출은 선교 단체 사이에서 전교 방침이나 보호권(保護權, padroado) 문제를 놓고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청(淸)의 입관 이후에는 마침내 의례 논쟁(儀禮論爭, rites controversy)으로 비화되었다. 더욱이 1680년에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들이, 1684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전교권을 인정받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1687년에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게 되었다. 이어 포르투갈은 1576년 마카오를 보호 교구保護敎區)로 설정한 데이어 1690년 4월 10일에는 북경교구와 남경교구를 보호 교구로 설정하였다. 이로써 14세기 말에 북경대교구가 폐지된 지 300여 년 만에 북경교구가 부활되었다.
당시 북경에는 남당을 비롯하여 예수회의 샬(A. Schall, 湯若望) 신부가 1653년에 건립한 동당(東堂), 파리외방전교회 전교사들이 1703년에 건립한 북당(北堂) 등 세 개의 천주당이 있었다. 북경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는 절강(淅江)의 대목으로 있던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의 기에사(Chiesa, 伊大仁) 주교가 1690년에 임명되어 1701년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의례 논쟁의 종결을 위해 1715년 3월 19일에 교황 글레맨스 11세가 칙서
를 반포하여 중국 의례에 대한 금지령을 내리면서 청의 강희제(康熙帝)는 선교사 추방령과 선교 금지령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1705년에 신자수 30만 명에 이르던 중국 교회의 교세는 크게 감소하였다. 한편 1699년 포교성성(지금의 인류복음화성)에 의해 중국에 파견된 라자리스트회[遣使會]에서는 옹정제(雍正帝)의 허락을 얻어 1725년에 서당(西堂)을 건립할 수 있었는데, 이미 그 전해에 웅정제가 금교령을 반포함으로써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북경교구는 1696년에 산서(山西)와 섬서(陝西) 대목구가 분리된 이래 1831년에 조선(朝鮮) 대목구, 1838년에 요동(遼東) 대목구(1840년에 만주대목구로 개칭됨), 1839년에 산동교구(山東敎區)를 분리하는 등 1940년대까지 70개에 이르는 교구와 지목구를 분할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856년에는 북경교구가 북직예(北直隸) 대목구 등 3개의 대목구로 분리되었다. 당시 북경의 신자 수는 약 17,000명이었다. 그리고 1946년 4월 11일의 교령에 의해 중국 교회의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전국이 20개의 대교구 관구, 79개의 교구로 개편됨과 동시에 북경 대목구는 북경 관구를 관할하는 대교구로 승격되었다(차기진).
■ 한국 천주교회와의 관계
북경은 옛 연나라 때의 수도였으며, 금나라 때에는 연경(燕京), 원나라 때에는 대도(大都)라 불렸다. 명나라가 건국된 뒤에 수도가 남경(南京)에서 여기로 옮겨오면서 북경(北京)이라 불렸고, 청나라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수도였다. 황제가 살고 있다 하여 황경(皇京), 제경(帝京), 경사(京師)라고 불렸다. 조선 사신은 북경에 도착하여 황제를 알현하면서 공물을 바치고, 외교 관계를 맡고 있는 예부(禮部)를 비롯한 해당 관청에서 현안을 논의하는 등 공식 일정을 수행하였다.
북경 시내에 있는 4개의 성당은 북경을 방문하는 외국 사신들에게 훌륭한 관광 명소였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玉河館, 현 북경 공안부와 최고인민법원 부근) 즉 남소관(南小館) 가까이에 있는 남당과 동당은 조선 사신들이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서학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사신들은 공식 일정이 없는 날에는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에 머물거나 때에 따라서는 북경 시내를 구경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관리와 문인(文人), 시정의 상인(商人),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접하였다. 또한 중국 정부를 통해 받거나 유리창(遊離廠) 등의 서점에서 직접 구입한 서적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문명의 자양분을 이루었다. 사신을 수행한 역관과 상인들은 숙소에서 시장을 열어 국제 무역의 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1644년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예수회의 샬 신부를, 1720년에 이이명(李?明)이 쾨글러(I. Kogler, 戴進賢) 신부를, 1765년에 홍대용(洪大容)이 할러스타인(A. Hallerstein, 劉松齡) 신부를 만난 것은 모두 남당에서였다. 반면에 프랑스 선교사들의 전교 근거지였던 북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 직접 관계가 있었다. 우선 1783년 말에는 한국 최초의 신자가 된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이 북당을 방문하고 예수회의 그라몽 신부를 만났으며, 이듬해 초에는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그 해 말에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북당과 한국 천주교회와의 관계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784년 말에는 이승훈이 밀사를 선발하여 드 그라몽 신부에게 보냈는데, 이 밀사는 1785년 4월(음)에 귀국하다가 체포되어 교회 서적과 편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또 1789년 말에는 한국 교회의 밀사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이 북경으로 가서 북당의 선교 단장인 라자리스트회의 로 신부를 만나 조건 세례를 받고 이듬해 귀국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1785년 초에 프란치스코회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가 북경교구장에 임명되어 남당에 부임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북당보다 남당과 밀접해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관계가 1831년 조선교구 창설 때까지 지속되었다(차기진).
◆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중의 한 사람이다.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晩泉). 본관은 평창(平昌). 이가환(李家煥)의 생질이며 정약용(丁若鏞)의 매부. 서울에서 태어났다. 1780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만 전념하던 중 이벽(李檗)과 사귀게 되어 이벽으로부터 천주교를 배웠다. 1783년 말 이벽의 권유로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北京)에 가 그곳의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운 후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중국명 梁棟材, 1736~1812)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874년 초 교리서적, 십자고상, 상본(像本)을 갖고 귀국, 이벽, 정약전(丁若銓) · 정약용 형제, 권일신(權日身)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崔昌顯), 최인길(崔仁吉), 김종교(金宗敎)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이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갖던 중 형조(刑曹)의 관헌에게 적발되어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친척과 집안 식구들의 탄압으로 배교,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자신의 배교를 공언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 등 성사를 집전했고, 1787년에는 정약용과 함께 반촌(泮村, 현재의 惠化洞)에서 교리를 연구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平澤縣監)으로 등용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1790년 북경에 파견되었던 조선 교회의 밀사 윤유일(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지한 북경교구장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중국명 湯士選, ?~1808) 주교의 명령을 전하자 조상 제사문제로 교회를 떠났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어 평택현감 재직시 향교(鄕校)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787년 반촌에서 서학서(西學書)를 공부했던 사건[丁未泮會事件]이 문제되자 다시 배교, 관직을 삭탈당하고 석방되었다. 1794년 12월(음)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한 후 이듬해 6월(음) 최인길, 윤유일, 지황(池璜) 등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한 죄로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그러나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 이듬해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洪樂敏)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義禁府)의 국청(鞫廳)에서 배교했으나 4월 8일(음 2월 26일) 정약종(丁若鍾), 홍낙민, 홍교만 등 6명과 함께 참수되었다. 그 후 1856년 아들 이신규(李身逵)의 탄원으로 신원(伸寃)되었다.
이승훈은 비록 여러 번 배교하고 교회를 떠났던 인물이지만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주도했고 가성직제도를 주도했던 인물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장을 연 인물로 평가되며 그로부터 신앙을 찾은 아들 이신규와 손자 이재의(李在誼)는 1866년에, 증손 이연구(李蓮龜), 이균구(李筠龜)는 1871년에 각각 순교하였다. 이승훈의 유고문집으로 ≪만천유고≫(蔓川遺稿)가 있다.
■ 위치
동당 : 북경시 동성구 왕부정대가 74호(北京市 東城區 王府井大街 74號)
서당 : 북경시 서성구 서직문내대가 130호(北京市 西城區 西直門內大街 130號)
전화 : 86-10-66537629
남당 : 북경시 서성구 전문서대가 141호(北京市 西城區 前門西大街 141號)
전화 : 86-10-66025638, 66037139
북당 : 북경시 서성구 서십고대가 33호(北京市 西城區 西什庫 大街 33號)
전화 : 86-10-66175198, 66132240, 66132259, FAX 86-10-66132240
■ 찾아 가는 길
<북경 시내>
동당 : 지하철 1호선 왕푸징(王府井)역 하차 A 출구 나와서 도보 10분 거리
서당 : 지하철 4호선 신가구(新家口)역 하차하여 도보 약 10분 거리
남당 : 지하철 2호선 선무문(宣武門)역에서 하차하여 5분 거리
북당 : 지하철 4호선 서사(西四)역에서 하차하여 동쪽 북해(北海)쪽으로 약 20분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