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발레리(Paul Valery)
(1871.10.30~1945.7.20)
프랑스의 시인
1. 인 간
발레리의 놀랍고도 단순한 생애와 그가 가장 많이 연상케 하는 위대한 작가, 즉 데카르트의 생애 사이에 닮은 점이 너무나 많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둘이 다 시와 과학의 겹친 길을 지나 산문으로 왔다.
발레리처럼 데카르트도 시에 반했다.
발레리는 20년을 고독한 사색 속에 보내었고 데카르트처럼 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탐구들이 한 부분으로 고표하는 데 동의 했다.
사상의 건물을 기초부터 다시 세운다는 그 정신이 용기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을 아울러 생각해 본다면 이 두사람이 닮았다고 보아도 억지는 아니며 또 발레리 자신이 그 재료들을 우리에게 대주고 있는 만큼 발레리의 방법론을 살펴볼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2. 생활
폴 발레리는 1871년 지중해 연안의 작은 항구도시 세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 항구의 세관관리였다. 그는 세트국민학교와 몽플리 중고등학교에서 공부했고, 몽플리에서 법률을 공부하는 한편 시와 건축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내성적인 편이어서 친구가 별로 없었는데, 이 시기에 사귄 몇 명 되지 않는 친구로는 후에 철학교수가 된 귀스타브 푸르망, 작가인 피에르 루이, 앙드레 지드 등이 있다.
그가 초기에 우상으로 삼은 작가는 에드거 앨런 포와 J.-K. 위스망스, 스테판 말라르메였다. 그는 1891년에 말라르메를 소개받았고, 말라르메를 중심으로 한 예술가들의 모임에 꾸준히 참가했다.
자신의 회상은 이렇다. '공포로 지배하는 선생들이다. 그들의 문학에 대한 생각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미련함과 무감각이 커리큘럼에 적혀 있는 것만 같다.
반의 우등생들의 넋의 시시함과 상상력의 전무. 이것이 학교생활의 성공의 조건임을 나는 안다. 반발 가르침에 대한 일률적인 반대 같은 불행한 정신 상태가 여기서 말미암는다'
이러한 가르침에 대한 반발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 때문에 생겨나는 불만감에 의해 재건의 욕구는 나게 해준다. 첫째 선생들로부터 이미 씹은 음식을 받아 먹는 아이이기가 일수다. 그가 만일 선생들 중에서 기성품인 진리를 가르치기를 거부하는 소크라테스나 알랭 같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다면 어려서 잠이 들어 죽은자들의 무리 속에 끼어들 위험이 크다.
틀에 박힌 진리에 만족하지 못해 거역하는 학생들은 자신의 구원을 다른 길에서 찾게 되며 또 찾아내는 수가 있다. 발레리는 공부했지만 몽플리에 선생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공부했다.
겉으로는 법과대학 강의를 듣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선원이 되기를 원했고 새로운 시인들을 발견했다.
보들레르와 베를레느를 나중에는 랭보와 말라르메를 이미 예술만이 그에게는 확고한 것으로 여겨졌고,형이상학은 헛튼짓으로, 과학은 지나치게 특수한 힘으로 그리고 실제 활동은 '걱정많은 생활로 이끄는 하나의 타락 하나의 치욕'으로 여겨졌었다.
그는 몇사람의 문인을 알고 있었다. 몽플리에에서 만난 피에르 루이스와 그가 소개한 앙드레지드를 지이드는 앙드레 왈떼르의 노우트를 발레리에게 읽어주었고 발레리는 몹시 놀랐다. 발레리는 글을 쓸 생각은 없었다.
시 몇편을 썼는데 젊은 잡지들에 금방 발표되어 전문가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직업적인 작가가 된다는 것이 그에게는 자기 힘보다 높기도 하고 낮기도한 일로만 여겨졌다. 그는 도달하지 못할 하나의 목표를 스스로 정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괴에테의 소망이기도 한 또 그 형태도 거의 같은 소망을 말이다.
1년간의 병역 그 규율의 양식에 그는 감탄한다. 낱말과 구절의 수효를 최소한으로 줄이려 들면 애매하지 않고 분명할 수는 없다. 일요일이면 나는 운문을 만들어 내 넋을 살린다. 21살에 그는 파리로 떠난다. 생활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방안도 없다. 지적 절망을 더하는 감정적 절망의 위기를 마악 겪는 참이다.
그는 20살에 사상의 힘을 믿고 있었다. 존재와 비존재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때로는 무한한 힘을 스스로 느끼는 수도 있었으나 문제들에 부닥치면 그 힘이 꺾이고 말아 자신의 적극적인 능력이 박약한 데 실망하곤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침울하고 가볍고 싹싹하면서도 속으로는 끈질겨 경멸에는 극단적이고 감탄에는 절대적이었으며 인상은 쉽사리 주어도 설득은 불가능했었다.
운문 짓기는 이미 그만두었고 독서도 거의 하지 않게 되고 말았다. 서정적인 것이 되기에는 너무나 명석한 이 낭만주의와는 어떻게 싸울 것인가 에드가 포우를 일고는 온전한 자아의식 속에서 구원을 찾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가 시달리는 고통은 정신의 고통이다, 이 고통을 낳는 메카니즘을 극도의 정확성을 가지고 분석해 봄으로써 이 고통을 없앨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발레리도 지이드처럼 청년기의 비극적 위기를 거쳐 해방을 찾게 되지만 지이드처럼 관능에 의해서도 바이런처럼 시에 의해서도 거의 모든 사람들처럼 행동에 의해서도 아니고 데카르트처럼 단념과 자아 향상에 의해서다. 그는 파리의 게뤼사크가에 있는 오구스트 콩트가 젊은 날을 보낸 방에 거처를 정한다. 거기서 그는 무수한 노우트들을 시간 꿈 주의력 과학들 속의 진리에 관한 더 넓게는 인간 정신의 기능에 관한 메모들로 메우나게된 것 이다.
그는 물론 자기기 경애하는 말레르메를 찾아가고 위스망스나 마르셀 슈오브도 만나지만 이미 문학을 하는 상태에 있지는 않다. 말라르메의 예술마저도 특히 그 논리적이고 마학적인 면만이 그의 관심을 끈다. 이러한 시편들은 어떻게 해서 지어내는가? 나는 도지사가 집시들을 쫓아내듯이 애매한 것과 임의적인 것을 내쫓는다.
떼스뜨 씨는 이러한 자기 의식에 도취된 시기에 태어났다. 르 상또르 라는 잡지가 원고를 부탁해 왔다. 그는 뒤뺑의 회상록을 써보려고 한 시작하다 만 원고를 다시 꺼냈다. 그것은 바로"어리석음은 나의 능사가 아니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원고였다. 그는 자기 자신에 관해 적어둔 메모들을 이용하면서 계속해 나갔다.
그는 정확성이라는 급성병에 걸려 있었다. 이해하겠다는 엉뚱한 욕망의 극단을 지향하고 있었다. 손쉬은 것은 상관없는 것이고 거의 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문학을 시의 꽤 정밀한 작업들 까지도 수상쩍은 것으로 여겼다. 문학 뿐이 아니라 거의 철학전체도 내가 한사코 거부하던 애매한 것들과 불순한 것들 속에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태들에 대한 생생한 기억에서 어느날 떼스뜨 씨가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나를 닮았다.
어떤 남자가 자기 존재의 심한 감동의 순간에 씨뿌린 아이가 그 흥분된 아버지를 닮은 만큼은 요컨데 떼스뜨는 바로 절대적이고 극단적인 청년이던 발레리의 하나의 그림자다. 아직은 인간의 규약들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또 임의적인 것이 필연성의 유일한 진짜 형태임을 발견하지 못해 모든 행동을 예술적인 행동마저도 거부하던 그런 청년의. '사람들이 뛰어난 존재라고 부르는 자는 잘못된 존재다. 그에 놀라려면 그를 보아야 하고 -보여지려면 그는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자기 이름에 대한 어리석은 집착을 스스로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은 저마다가 하나의 잘못으로 얼룩져 있다. 유력하다고 인정받는 정신은 저마다가 자기를 유명하게 만드는 실수부터 저지르기 시작한다.'
위인은 다 가짜 위인이기 때문에 발레리는 가장 강한 머리들은 알려지지 않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즐긴다. 그는 천재적인한 운둔ㅇ자를 위해 당시 자기 자신이 하는 생활과도 비슷한 생활을 제자들도 시도 없는 말라르메나 명성을 얻기 전의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의 생활과도 비슷한 생활을 상상해 보기를 좋아한다.
3. 영광
떼스뜨씨와의 저녁 이 씌어졌을 때 발레리는 24살밖에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미 그는 발레리었던 것이다. 떼스뜨의 특징들은 발레리의 본질적인 특징들이다. 즉 엄밀에의 욕구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으로 만족하고 마는 그 거죽만의 명확성이나 애매한 것에 대한 혐오 그리고 이 엄밀에의 욕구의 결과로서 언어를 재검토하여 낱말들에 정확한 내용을 요구하려는 욕구.
엄밀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그때 그로 하여금 자기처럼 그것을 겪은 한 이름 높은 사람에게 흥미를 갖게 만든다. 그것은 레오나르도 다 비치이다. 여기서도 또한 우연한 청탁이 그를 침묵에서 벗어나게 했다. 어느 날 마르셀 슈오브 집에서 그는 레오나르도에 대해 하도 훌륭하게 말했기 때문에 참석 자 중에 당시 잡지 라 누벨 르뷔를 맡아보던 레옹 도데가 아당 부인을 통해 이 테에마에 관한 글을 그에게 청탁해 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방법 서론이었다.
실상 다빈치는 이 글에서는 오히려 구실이고 이 이름을 빌러 발레리는 자신의 개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1895년 이후 그는 자기가 택한 칩거생활 속에서 자신의 정신과 자신의 언어 표현을 개혁하는 것만이 목적인 탐구를 밀고 나간다. 살기 위해서 그는 일자를 찾는다. 세실 로오즈와 함께 차터드 컴패니의 출판부에서 일하다가 육군성으로 옮겨 포병 군수국에서 오래 근무했고 끝으로 아바스 통신사로 옮겼다. 언제까지나 무명인사로 있을 작정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천재가 가는 길은 불가사의한 것이어서 그는 자기가 생각하던 만큼 완전히 무명이지는 않았다. 작은 잡지들에 발표된 그 몇 시편들이나 떼스뜨 씨와의 저녁을 베끼는 젊은이들이 고등학교나 대학에는 있었다. 그의 시를 외는 사람들도 있어 호우머의 시편들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구전의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에세이들은 자기 혼자밖에는 모르는 것이었다.
마치 저 하나의 두뇌 속에 있는 원고 발표되지 않았고 발표되지 않을 원고처럼 '세상에서 잊어져서 혼자 사는 일. 종이 상자들 속에 쌓인 메모들. 결혼. 생활. 자식들.....이렇게 20년이 지나간다.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분주한 국민의 사막' 에서. 쌓인 메모들을 정리한다면 몇권의 큰 책의 자료가 될 것이다. 한권은 "거룩한 것들에관한 대화" 가 될 것이다. 또 하나는 훈련의 본질과 뛰어난 솜씨에 관한 에세이인 글라디 오토르가 될 것이고, 사랑,에로티시즘 괴로움 가족에 관한 메모들도 있다.
모두가 재미있고 더러는 썩 훌륭하다. 그것들이 분류되어 모아진다면 프랑스인들은 새로운 고전의 보석을 갖게된 것을 알고 어리둥절 할 것이다. 그는 자기 힘을 자신도 모른다. 그러나 그 힘은 크다.
전쟁직전에 잡지 누벨 르뷔 프랑세즈를 몇 친구와 창간한 앙드레 지이드가 발레리의 옛시들을 한 권으로 모아 내겠다고 청해왔다. 거절했으나 친구들은 버티었다. 그들은 그 시들이 발표된 잡지를 다 찾아내고 타이프 원고를 만들어 작자 손에 넘겼다. "나의 괴물들과의 접촉 불쾌감 그것들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괴물들을 음악과 충실을 생각하며 고치다가 이 일에 맛을 들이자 시와의 작별이 될 사오십행의 단시를 보충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일을 그는 1913년에 시작했다. 전쟁이 돌발했을 때도 계속되고 있었다. 여러 번의 적의 침입 동안에도 라틴어 육각시를 짓던 6세기의 어느 수도사와도 같은 정신 상태에서 한 문명과 한 언어의 유언을 쓴다고 자부하는 한 인간의 그 무한한 정성을 가지고 그는 계속했다 마침내 1917년에 이 시편은 마무리되었다. 이것이 "젊은 빠르끄"였다.
성공은 대단했다. 그 양 때문이 아니고 질 때문에 이 무렵에 옛시들도 다시 간행되었고 이어 그 메모 상자들이 열려졌으며 그래서 프랑스인들은 아니 적어도 그들 중의 가장 현명한 사람들은 한 위대한 시인과 위대한 산문가를 자기들이 한꺼번에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파묻혀 살기를 택한 사람에게는 가장 눈부신 조명이 비춰졌다.
발레리의 생애의 이 부분은 그것이 덜 훌륭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한 겸손과 솔직함과 점잔과 아이러니를 가지고 영광을 받아들일 수도 없지만 영웅적인 시기는 역시 떼스뜨 씨와 젊은 빠르끄의 시기다. 발레리 말마따나 "나머지는 야단법석이다".
4. 평 론
그의 가장 훌륭한 시는 〈젊은 파르크 La Jeune Parque〉(1917)로 여겨지며, 이 작품에 뒤이어 〈구시첩(舊詩帖) 1890~1900 Album de vers anciens 1890~1900〉(1920)과 〈해변의 묘지 Le Cimetière marin〉가 들어 있는 시집 〈매혹 Charmes ou poèmes〉(1922)이 발표되었다.
발레리는 1888~91년에 걸쳐 많은 시를 썼고, 그 중 몇 편은 상징파를 표방하는 잡지에 발표해 호평을 받았지만, 예술적 좌절감과 짝사랑에서 오는 절망감 때문에 1892년에는 감정에 몰두하기를 거부하고 '지성의 우상'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는 갖고 있던 책을 거의 다 처분해버렸고, 1894년부터 죽을 때까지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몇 시간 동안 과학적 방법론과 의식 및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묵상에 잠겼으며, 자신의 단상(斷想)과 잠언들을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나중에 유명한 〈노트 Cahiers〉로 출판되었다.
발레리가 새로 발견한 이상형은 만능 인간의 표본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법에 관한 서설 Introduction à la méthode de Léonard de Vinci〉, 1895)와 그가 〈테스트 씨와의 저녁시간 La Soirée avec Monsieur Teste〉(1896)에서 스스로 창조한 '테스트 씨'(프랑스어로 '머리')였다. 테스트 씨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라는 2가지 가치밖에 모르는 비육신적인 지성인이다.
1912년 앙드레 지드가 그의 초기 작품들을 손질해 출판할 것을 채근하자 발레리는 고별시를 1편 쓰기로 마음먹고 새로운 작품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작품이 〈젊은 파르크〉이다. 이 시는 고대 로마 신화에 나오는 '파르카'들, 즉 인생의 3단계를 상징하는 운명의 세 여신 가운데 가장 젊은 여신이 의식에 눈뜨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발레리는 이 작품이 제기하는 기법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몰두했기 때문에, 이 길고 상징적인 작품을 완성하는 데 5년이 걸렸다. 1917년에 출판된 이 작품으로 그는 즉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당대의 가장 뛰어난 프랑스 시인이라는 평판은 〈구시첩 1890~1900〉·〈매혹〉으로 확고해졌다. <매혹>에는 그가 묻혀 있는 세트의 묘지를 배경으로 죽음에 대한 그의 유명한 명상을 펼친 시 〈해변의 묘지〉가 들어 있다.
발레리의 특이한 작품들은 모두 인간의 의식 속에서 명상하고자 하는 욕망과 행동하려는 의지가 빚어내는 갈등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법에 관한 서설〉·〈노트〉에서 정신의 무한한 잠재력과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행동의 결함을 되풀이해 대비시키고 있으며, 〈젊은 파르크〉에서는 젊은 운명의 여신이 새벽녘에 바닷가에서 평온한 불멸의 존재로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인간생활의 고통과 쾌락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해변의 묘지〉에서는 한낮에 바닷가에서 존재와 비존재,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에 대해 골몰히 생각한다. 그의 수많은 편지들은 그 자신의 생활 속에서 공적 생활의 의무와 고독에 대한 욕망이 빚어내는 갈등을 되풀이해 호소하고 있다.
그의 산문과 시의 뚜렷한 특징은 관능이다. 가장 추상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을 때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산문은 경구적이고 우아하며, 그의 시에는 자연스러운 상징과 비유가 풍부하고, 형식은 항상 고전적이다. 그의 시는 위대한 극작가 장 라신이나 상징파 시인인 폴 베를렌의 훌륭한 운문만큼 힘차고 미묘하게 운율적이며 음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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