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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아직도 <난쏘공>이 읽히는 현상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나..
http://blog.naver.com/mimic0909/30005045312
블로그 > 方郞 夏記
http://blog.naver.com/007bih/60020911402
내게 있는 판본은 1987년 8월 15일에 나온 10쇄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겉장에 “모르는 말이 아는 말보다 많지만 좋은 책 같다”라고 적혀 있다. 그 전까지는 교과서에 나와 있는 작품들과 문학전집으로만 문학을 접해왔었다. <난쏘공>에서 내가 접한 ‘문학’은 그런 공식적인 정전의 문학과는 달랐다. 비록 소설이 쓰여진 전후 사정 같은 건 전혀 몰랐지만, 문학이 현실 속에 깊이 뿌리 박고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폐수 가에서 끊어진 기타를 치는 장면 같은 독특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은 공식적인 문학과는 좀 다른 문학의 힘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거듭 읽을수록 아름답고 슬픈 장면과 의미를 새로 발견하게 된다.
서영인(문학평론가)
대학시절 읽고는, ‘다시 한 번 읽어야 되는데…’라고 생각만 하면서 여태 못 읽고 있다. 당시만 해도 이렇게 베스트셀러로 오래 갈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억눌린 사람들과 민중의 삶을 우화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잘 나타낸 것 같다.
그때는 우리 모두가 ‘난장이’였고 그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보다 지금의 우리 모습은 더 왜소해진 것 같다. 민중이 어느 정도 의사결정 과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지를 살펴본다면 사실 큰 변화가 없다. 가시적인 폭력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기만 당하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지금이 그때보다 오히려 더 슬프다.
이광모(영화감독)
나는 이 연작소설이 처음 문예지들에 한 편씩 발표될 때부터 읽었다. 책으로 묶여 나왔을 때 다시 읽으며 그 눈부심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금욕주의적인 문체가 실어 나르는 시대의 우울한 초상은 이전의 소설들과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한낮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시대에 던진 눈부신 빛이 있었다. 리얼리즘적 주제와 방법적 모더니즘의 결합은 매우 낯설었다. 이를테면 형상화의 명료성, 플롯의 낯섦, 동화적인 상상력, 시대를 표상하는 기호들! <난쏘공>은 당대의 첨예한 문제들을 심미성의 구조로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실증적 사례였다. 그 <난쏘공>이 200쇄를 찍었다. 지난 30년간 이 작품은 세대를 달리 해서 계속 읽히고 있다. 이 작품이 수신한 시대의 전언들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증거다. 아울러 낯선 재능의 출현이 마침내 고전으로 자리매김 되기까지의 시간이 30년 정도 소요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석주(시인, 문학평론가)
읽은 지 20년이 넘은 책이라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 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학 시절 읽었을 때 매우 파격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굉장히 비일상적인 난장이 가족의 캐릭터를 통해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이 있었다. 어떤 이론서보다도 <난쏘공>을 통해 한국 사회를 가슴 아프게 느낄 수 있었다.
권지예(소설가)
문학을 공부할 때도, 후에 문학을 가르칠 때도 어떤 분위기 때문에 꼭 읽어야, 혹은 읽혀야 하는 책이었다. 물론 한 문학작품이 오랫동안 여러 사람에게 읽히고 이야기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난쏘공>이 그렇게 된 건 한국 문학의 특수성에 기댄 측면이 강하다. <난쏘공>이 각광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하층민의 삶’이라는 소재로 정통 리얼리즘 기법으로 풀어나갔던 이전의 소설들과는 달리 같은 소재를 새로운, 모더니즘적인 기법으로 풀어나갔다는 데 있다. 소재는 민중문학 쪽에서 환영을 받았고 소재를 표현하는 기법은 그 반대편에서 지지를 받았다. 양 진영으로부터 고루 환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소위 ‘창비파’라고 불리는 참여문학 쪽에서는 그런 부분에 불만을 갖기도 했다. 리얼리즘적으로 치열하게 다뤄야 할 소재를 너무 나이브하고 환상적인, 혹은 동화적인 방식으로 다루었다고 말했다. 그를 통해 사회적인 문제 의식이 희석되었다는 비판이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에 줄곧 나타나는 계몽주의적인 훈계 탓에 소설을 읽으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한 작품이 어떤 도덕적인 당위성을 가진 메시지로 독자를 설득하고 훈계하려 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박혜경(문학평론가)
이원세 감독의 연출로 1981년에 <난쏘공>이 영화화된 적이 있다. 당시엔 검열과 여러 사회적인 문제로 제대로 상영이 되지 않았다. 게다 원작과 영화가 많이 달랐기 때문에 원작을 본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엔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요새 와서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널리 읽히고, 많이 이야기된 만큼 여러 가지로 의미가 달라진 원작 소설보다 오히려 영화가 현재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게다 <난쏘공>은 한국영화 사상 가장 아름답고 서정적인 장면을 가진 영화 중 하나다. 이원세 감독은 미국으로 이민 간 후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소설의 200쇄 소식은 참 반가운 소식이다. 원작과 함께, 영화도 함께 재평가받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김홍준(영화감독)
<난쏘공>이 지금까지 계속 읽히는 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여전히 현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감명 깊게 읽었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세계를 그리는 방식이 좋았다. <난쏘공>의 환상적인 기법은 작품이 가지고 있는 주제의식을 보다 보편적으로 전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김경욱(소설가)
81학번인데 당시에 <난쏘공>은 세상을 읽는 첫 번째 창문, 내지는 관문 같은 것이었다. 대학 신입생이라면 의무적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기도 했다. 책의 감상? ‘인생은 어둡다’라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강헌(음악평론가)
최근에도 조세희 선생이 비정규직 집회나 농민 집회장 등에서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삶과 문학이 함께 가는 모범적인 경우로 볼 수 있다. 문학을 이야기하며 문장을 다듬고, 이야기를 빚어내는 데 온 정신을 다 쏟는다지만 정작 글과 삶이 다른 문인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글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30년 전 작품으로 드러낸 세상을 보는 시각을 조세희 선생은 아직도 견지하고 있다. 근본적인 세계관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난쏘공>을 200쇄가 넘게 아직도 계속 찍어내고 있고, 아직도 널리 읽히고 있다는 건 <난쏘공>에서 그리고 있는 현실이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설이 쓰여질 당시와 현재의 유사성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해석하고 읽어내야 할 여지가 많은 작품이다.
홍기돈(문학평론가)
<난쏘공>은 작품 자체로 굉장히 훌륭하기도 하지만, 한 작품이 200쇄가 찍히고 아직까지 널리 읽힌다는 것은 작품이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화한 것 같지만 사실 구조적인 모순 같은 것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쯤 읽었던 것 같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굉장히 재미있게, 충격을 받으며 읽었다.
정이현(소설가)
물론 옛날에는 감동 받으며 재미있게 본 작품이다. 하지만, <난쏘공>같이 시사성이 강한 작품은 시대적 좌표를 분명히 갖고 있기 때문에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감정이입하기가 쉽지 않다. 낡고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기 십상이다. 지금 다시 읽고 싶지는 않다. 조정래 선생의 소설도 그렇다. 대학 시절에는 그야말로 비분강개하며 읽었지만 다시 읽어보니 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수능, 논술 등의 영향으로 다양한 관계기관에서 수많은 필독도서 목록이 쏟아져 나오지 않나.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들도 게을러 학생들에게 뻔한 책들만 소개하는 거다. 학부형은 말할 것도 없다. 예전보다 문청의 규모도 줄어들어 책을 찾아보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뻔한 책만 보게 되는 거다.
한정수(북칼럼니스트)
처음 읽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이런저런 기회에 수차례 다시 읽게 된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재로 함께 읽곤 하는데, 학생들과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난쏘공>이 쓰여진 시대가 망각되는 느낌마저 든다. 그들과 나, 공히 충격을 받는다. 그런 현상을 보며 <난쏘공>이라는 작품의 구조가 한국 사회를 그대로 꿰뚫는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하다는 느낌이 든다. 2000년대에 새로운 소설을 발표하는 젊은 작가들에게도 조세희적인 시선이 보인다. 얼핏 전시대와 단절되어 있는 것 같고, 소재와 문체가 발랄하다고는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보는 조세희적인 관점이 보인다. 그런 현상을 보면, ‘<난쏘공>에서 보여준 조세희적인 시선이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핵심이구나, 세월이 지나도 갈수록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강상희(문학평론가)
200쇄의 대부분은 중고등학생용 교재 아니겠나? 해방 전의 작품들을 제외하고 6·70년대의 작품으로는 흔치 않게 정전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 작품들을 통해 국어를 교육하고, 독후감 교재로도 많이 팔린다. 정전으로 인정받고 제도권 교육에서 교재로 많이 쓰인다. <난쏘공>이라는 작품 자체가 정전으로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한다. 지극히 리얼리즘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 쓰인 기법들이 당시만 해도 굉장히 새로운 것들이 많았다. 클로즈업, 교차 편집 등 영화적 기법, 행복동, 난장이 등의 알레고리를 쓴다든지 그런 것들이 지금까지도 읽을 때 낡았다는 느낌보다는 세련된 텍스트로 다가오게 한다. 그리고 지금의 소설들보다는 표현에 있어 조금 극단적이지만 사실 빈부격차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있는 문제다. 그 문제의식과 전달방식은 충분히 정전이 될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난쏘공>을 세 번 정도 읽었다. 처음, 대학 시절 읽었을 때는 난쟁이가 검은 공을 쏘아 올리는 환상적인 장면, 뫼비우스의 띠라는 신선한 상징 등등에 그저 감탄하고 충격 받기 바빴다. 현학적인 내용도 있어 지적인 욕구도 자극되었다. 공장주와 노동자 간에 협상하는 과정들이 인과적인 장치 없이 교차 편집되는 장면도 놀라웠다. 어릴 때라 영희에게 감정이입하며 울분을 느끼기도 했다. 두 번째 봤을 때는 처음엔 보지 못했던 세세한 부분이 보여서 좋았다. 하지만 세 번째 읽었을 때는 좀 달랐다. 분명 잘 쓴, 훌륭한 소설이지만, 한 나라의 문학의 대표적인 정전으로 삼기에 과연 충분한 작품인가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한국 문학의 수준을 통감했다. 게다가, <난쏘공>을 뛰어넘어 더 좋은 작품들을 생산하고, 발굴해야 하는데, 반복적으로 과거의 작품에만 매달린다. 게으른 한국 문학계의 현실이다.
심진경(문학평론가)
<난쏘공>은 한국 모더니즘의 현실주의적인 접근을 성공적으로 실현한 작품이기 때문에 생명력이 길다. 잘 읽히는 소설이다. 이야기가 끊임없이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킨다. 현실적인 구조 자체가 <난쏘공>에서 재현하고 있는 당시의 모습과 지금까지도 유사하다.
노동자의 처우가 근본적으로는 별로 나아지지 않은 현실에서 작품을 읽는 독자가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 아직도 많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200쇄가 넘게 찍히고, 아직까지도 많이 읽히고, 이야기되는 것은 세계관이나 정치 의식을 넘어 무엇보다도 <난쏘공>이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명원(문학비평가)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강한 매력을 느낀 첫 작품이었다. 굉장한 감명을 받았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쓰는 입장에서, 인물, 시점, 각각의 소설이 연관되는 방식들이 그 당시에는 새로웠고 나름의 충격이 있었다. 소설쓰기의 교과서 같은 것이었다. 내용은 지금 읽어봐도 그런 세계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신세대 소설이 앞으로 20년 뒤에 읽힐까? <난쏘공>처럼 감동을 주면서 문학사에 큰 의미를 가지는 작품을 쓰는 건 소설가로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다.
천운영(소설가)
<난쏘공>은 내게 문학이 ‘감동적인 읽을 거리’를 넘어 말 그대로 칼이 되고 화살이 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준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은 후 심장을 날카로운 흉기로 찔린 듯 오래 아팠고, 한동안 먹고 자고 말하고 일하고 쉬는 모든 일상적 일들이 굴욕으로 느껴졌다. 처음으로, 내가 멀쩡하게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부모의 관심과 배려 아래 살아가는 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자체로 견딜 수 없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준 소설이었다. 언젠가 내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의 마음이 다칠까 아파하면서도 끝내 열일곱 살 생일선물로 주어야 할 책이 아닐까. 엄마의 열일곱을 검푸른 피멍으로 물들인 책인 동시에 엄마의 영혼을 가장 많이 성장하게 한 책이기도 하기에.
정여울(문학평론가)
십 몇 년 동안 집회장을 다녔다. 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생각을 바꾸기에는 늙었다.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하는데 그 생각이 틀렸다. 이러면 안 되겠다, 생각한 게 11월 15일이다. <난쏘공>은 이대로 가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쓴 거고, 그 못된 상상에 우리가 도착해 있다.
12월 7일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기자회견에서의 조세희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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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수 가에서 끊어진 기타를 치는 장면 같은 독특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은 공식적인 문학과는 좀 다른 문학의 힘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거듭 읽을수록 아름답고 슬픈 장면과 의미를 새로 발견하게 된다.
서영인(문학평론가)
대학시절 읽고는, ‘다시 한 번 읽어야 되는데…’라고 생각만 하면서 여태 못 읽고 있다. 당시만 해도 이렇게 베스트셀러로 오래 갈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억눌린 사람들과 민중의 삶을 우화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잘 나타낸 것 같다.
그때는 우리 모두가 ‘난장이’였고 그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보다 지금의 우리 모습은 더 왜소해진 것 같다. 민중이 어느 정도 의사결정 과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지를 살펴본다면 사실 큰 변화가 없다. 가시적인 폭력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기만 당하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지금이 그때보다 오히려 더 슬프다.
이광모(영화감독)
나는 이 연작소설이 처음 문예지들에 한 편씩 발표될 때부터 읽었다. 책으로 묶여 나왔을 때 다시 읽으며 그 눈부심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금욕주의적인 문체가 실어 나르는 시대의 우울한 초상은 이전의 소설들과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한낮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시대에 던진 눈부신 빛이 있었다. 리얼리즘적 주제와 방법적 모더니즘의 결합은 매우 낯설었다. 이를테면 형상화의 명료성, 플롯의 낯섦, 동화적인 상상력, 시대를 표상하는 기호들! <난쏘공>은 당대의 첨예한 문제들을 심미성의 구조로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실증적 사례였다. 그 <난쏘공>이 200쇄를 찍었다. 지난 30년간 이 작품은 세대를 달리 해서 계속 읽히고 있다. 이 작품이 수신한 시대의 전언들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증거다. 아울러 낯선 재능의 출현이 마침내 고전으로 자리매김 되기까지의 시간이 30년 정도 소요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석주(시인, 문학평론가)
읽은 지 20년이 넘은 책이라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 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학 시절 읽었을 때 매우 파격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굉장히 비일상적인 난장이 가족의 캐릭터를 통해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이 있었다. 어떤 이론서보다도 <난쏘공>을 통해 한국 사회를 가슴 아프게 느낄 수 있었다.
권지예(소설가)
문학을 공부할 때도, 후에 문학을 가르칠 때도 어떤 분위기 때문에 꼭 읽어야, 혹은 읽혀야 하는 책이었다. 물론 한 문학작품이 오랫동안 여러 사람에게 읽히고 이야기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난쏘공>이 그렇게 된 건 한국 문학의 특수성에 기댄 측면이 강하다. <난쏘공>이 각광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하층민의 삶’이라는 소재로 정통 리얼리즘 기법으로 풀어나갔던 이전의 소설들과는 달리 같은 소재를 새로운, 모더니즘적인 기법으로 풀어나갔다는 데 있다. 소재는 민중문학 쪽에서 환영을 받았고 소재를 표현하는 기법은 그 반대편에서 지지를 받았다. 양 진영으로부터 고루 환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소위 ‘창비파’라고 불리는 참여문학 쪽에서는 그런 부분에 불만을 갖기도 했다. 리얼리즘적으로 치열하게 다뤄야 할 소재를 너무 나이브하고 환상적인, 혹은 동화적인 방식으로 다루었다고 말했다. 그를 통해 사회적인 문제 의식이 희석되었다는 비판이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에 줄곧 나타나는 계몽주의적인 훈계 탓에 소설을 읽으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한 작품이 어떤 도덕적인 당위성을 가진 메시지로 독자를 설득하고 훈계하려 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박혜경(문학평론가)
이원세 감독의 연출로 1981년에 <난쏘공>이 영화화된 적이 있다. 당시엔 검열과 여러 사회적인 문제로 제대로 상영이 되지 않았다. 게다 원작과 영화가 많이 달랐기 때문에 원작을 본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엔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요새 와서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널리 읽히고, 많이 이야기된 만큼 여러 가지로 의미가 달라진 원작 소설보다 오히려 영화가 현재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게다 <난쏘공>은 한국영화 사상 가장 아름답고 서정적인 장면을 가진 영화 중 하나다. 이원세 감독은 미국으로 이민 간 후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소설의 200쇄 소식은 참 반가운 소식이다. 원작과 함께, 영화도 함께 재평가받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김홍준(영화감독)
<난쏘공>이 지금까지 계속 읽히는 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여전히 현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감명 깊게 읽었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세계를 그리는 방식이 좋았다. <난쏘공>의 환상적인 기법은 작품이 가지고 있는 주제의식을 보다 보편적으로 전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김경욱(소설가)
81학번인데 당시에 <난쏘공>은 세상을 읽는 첫 번째 창문, 내지는 관문 같은 것이었다. 대학 신입생이라면 의무적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기도 했다. 책의 감상? ‘인생은 어둡다’라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강헌(음악평론가)
최근에도 조세희 선생이 비정규직 집회나 농민 집회장 등에서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삶과 문학이 함께 가는 모범적인 경우로 볼 수 있다. 문학을 이야기하며 문장을 다듬고, 이야기를 빚어내는 데 온 정신을 다 쏟는다지만 정작 글과 삶이 다른 문인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글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30년 전 작품으로 드러낸 세상을 보는 시각을 조세희 선생은 아직도 견지하고 있다. 근본적인 세계관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난쏘공>을 200쇄가 넘게 아직도 계속 찍어내고 있고, 아직도 널리 읽히고 있다는 건 <난쏘공>에서 그리고 있는 현실이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설이 쓰여질 당시와 현재의 유사성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해석하고 읽어내야 할 여지가 많은 작품이다.
홍기돈(문학평론가)
<난쏘공>은 작품 자체로 굉장히 훌륭하기도 하지만, 한 작품이 200쇄가 찍히고 아직까지 널리 읽힌다는 것은 작품이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화한 것 같지만 사실 구조적인 모순 같은 것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쯤 읽었던 것 같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굉장히 재미있게, 충격을 받으며 읽었다.
정이현(소설가)
물론 옛날에는 감동 받으며 재미있게 본 작품이다. 하지만, <난쏘공>같이 시사성이 강한 작품은 시대적 좌표를 분명히 갖고 있기 때문에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감정이입하기가 쉽지 않다. 낡고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기 십상이다. 지금 다시 읽고 싶지는 않다. 조정래 선생의 소설도 그렇다. 대학 시절에는 그야말로 비분강개하며 읽었지만 다시 읽어보니 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수능, 논술 등의 영향으로 다양한 관계기관에서 수많은 필독도서 목록이 쏟아져 나오지 않나.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들도 게을러 학생들에게 뻔한 책들만 소개하는 거다. 학부형은 말할 것도 없다. 예전보다 문청의 규모도 줄어들어 책을 찾아보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뻔한 책만 보게 되는 거다.
한정수(북칼럼니스트)
처음 읽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이런저런 기회에 수차례 다시 읽게 된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재로 함께 읽곤 하는데, 학생들과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난쏘공>이 쓰여진 시대가 망각되는 느낌마저 든다. 그들과 나, 공히 충격을 받는다. 그런 현상을 보며 <난쏘공>이라는 작품의 구조가 한국 사회를 그대로 꿰뚫는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하다는 느낌이 든다. 2000년대에 새로운 소설을 발표하는 젊은 작가들에게도 조세희적인 시선이 보인다. 얼핏 전시대와 단절되어 있는 것 같고, 소재와 문체가 발랄하다고는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보는 조세희적인 관점이 보인다. 그런 현상을 보면, ‘<난쏘공>에서 보여준 조세희적인 시선이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핵심이구나, 세월이 지나도 갈수록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강상희(문학평론가)
200쇄의 대부분은 중고등학생용 교재 아니겠나? 해방 전의 작품들을 제외하고 6·70년대의 작품으로는 흔치 않게 정전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 작품들을 통해 국어를 교육하고, 독후감 교재로도 많이 팔린다. 정전으로 인정받고 제도권 교육에서 교재로 많이 쓰인다. <난쏘공>이라는 작품 자체가 정전으로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한다. 지극히 리얼리즘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 쓰인 기법들이 당시만 해도 굉장히 새로운 것들이 많았다. 클로즈업, 교차 편집 등 영화적 기법, 행복동, 난장이 등의 알레고리를 쓴다든지 그런 것들이 지금까지도 읽을 때 낡았다는 느낌보다는 세련된 텍스트로 다가오게 한다. 그리고 지금의 소설들보다는 표현에 있어 조금 극단적이지만 사실 빈부격차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있는 문제다. 그 문제의식과 전달방식은 충분히 정전이 될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난쏘공>을 세 번 정도 읽었다. 처음, 대학 시절 읽었을 때는 난쟁이가 검은 공을 쏘아 올리는 환상적인 장면, 뫼비우스의 띠라는 신선한 상징 등등에 그저 감탄하고 충격 받기 바빴다. 현학적인 내용도 있어 지적인 욕구도 자극되었다. 공장주와 노동자 간에 협상하는 과정들이 인과적인 장치 없이 교차 편집되는 장면도 놀라웠다. 어릴 때라 영희에게 감정이입하며 울분을 느끼기도 했다. 두 번째 봤을 때는 처음엔 보지 못했던 세세한 부분이 보여서 좋았다. 하지만 세 번째 읽었을 때는 좀 달랐다. 분명 잘 쓴, 훌륭한 소설이지만, 한 나라의 문학의 대표적인 정전으로 삼기에 과연 충분한 작품인가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한국 문학의 수준을 통감했다. 게다가, <난쏘공>을 뛰어넘어 더 좋은 작품들을 생산하고, 발굴해야 하는데, 반복적으로 과거의 작품에만 매달린다. 게으른 한국 문학계의 현실이다.
심진경(문학평론가)
<난쏘공>은 한국 모더니즘의 현실주의적인 접근을 성공적으로 실현한 작품이기 때문에 생명력이 길다. 잘 읽히는 소설이다. 이야기가 끊임없이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킨다. 현실적인 구조 자체가 <난쏘공>에서 재현하고 있는 당시의 모습과 지금까지도 유사하다.
노동자의 처우가 근본적으로는 별로 나아지지 않은 현실에서 작품을 읽는 독자가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 아직도 많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200쇄가 넘게 찍히고, 아직까지도 많이 읽히고, 이야기되는 것은 세계관이나 정치 의식을 넘어 무엇보다도 <난쏘공>이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명원(문학비평가)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강한 매력을 느낀 첫 작품이었다. 굉장한 감명을 받았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쓰는 입장에서, 인물, 시점, 각각의 소설이 연관되는 방식들이 그 당시에는 새로웠고 나름의 충격이 있었다. 소설쓰기의 교과서 같은 것이었다. 내용은 지금 읽어봐도 그런 세계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신세대 소설이 앞으로 20년 뒤에 읽힐까? <난쏘공>처럼 감동을 주면서 문학사에 큰 의미를 가지는 작품을 쓰는 건 소설가로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다.
천운영(소설가)
<난쏘공>은 내게 문학이 ‘감동적인 읽을 거리’를 넘어 말 그대로 칼이 되고 화살이 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준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은 후 심장을 날카로운 흉기로 찔린 듯 오래 아팠고, 한동안 먹고 자고 말하고 일하고 쉬는 모든 일상적 일들이 굴욕으로 느껴졌다. 처음으로, 내가 멀쩡하게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부모의 관심과 배려 아래 살아가는 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자체로 견딜 수 없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준 소설이었다. 언젠가 내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의 마음이 다칠까 아파하면서도 끝내 열일곱 살 생일선물로 주어야 할 책이 아닐까. 엄마의 열일곱을 검푸른 피멍으로 물들인 책인 동시에 엄마의 영혼을 가장 많이 성장하게 한 책이기도 하기에.
정여울(문학평론가)
십 몇 년 동안 집회장을 다녔다. 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생각을 바꾸기에는 늙었다.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하는데 그 생각이 틀렸다. 이러면 안 되겠다, 생각한 게 11월 15일이다. <난쏘공>은 이대로 가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쓴 거고, 그 못된 상상에 우리가 도착해 있다.
12월 7일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기자회견에서의 조세희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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