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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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과 영향
르네상스에서 완성된 고전주의 예술 이후를 이어받아 거의 1520년경부터 17세기초두에 걸친 주로 회화를 중심으로 유럽전체를 풍미했던 예술 양식이다. 어원적으로 볼 때는 maniera(마니에라):수법(手法)에 유래한다. 이러한 매너리즘은 후기 르네상스에서 독립되어 나온 사조로 인정받은 탓에 매너리즘이라는 단어가 원래 미술사조라는 사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매너리즘 미술사조는 창의성보다는 손재주를 부리는, 지나치게 과장된 수법의 인위적인 미술적 특성을 가지는 사조로 생각되어 그 당시 바로크 시대 사람들은 매너리즘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매너리즘 회화들은 기존의 회화들과는 매우 이질적인 특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6세기말 대가들의 소묘실력은 정점에 달해 있었고 그 이상의 발전에 대한 의문으로 반고전주의를 지향하기 시작한다. 완벽한 기법의 숙달로 16세기말 사람들은 미술의 발전이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정신적 혼란 속에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은 르네상스의 “조화와 균형”을 거부하고 반고전주의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또 성숙기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이어주는 교량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또한 전대의 거장들의 기법을 모방했다고 간주되어 창조성에서 의심을 받았다. 한편 그자체로 완결된, 유럽에서 성행했던 실재의 미술양식이라는 상반된 주장도 있다.
이러한 매너리즘이라는 용어가 예술사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20세기 초의 미술 비평가들에 의해서이다. 이들은 그 용어를 르네상스 후반에 유향한 특정한 미술양식에 적용했다. 예술 창작이나 발상면에서 독창성을 잃고 평범한 경향으로 흘러 표현수단의 고정과 상식성으로 인하여 예술의 신선미와 생기를 잃는 일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현상유지 경향이나 자세를 가리켜 흔히 매너리즘에 빠졌다고도 말한다. 즉 개성적 양식이 아닌 모방이나 아류 ‘퇴보에 도달한 전통주의’ 혹은 ‘정신적인 위기의 시대에 두각을 나타낸 죽어가는 양식의 마지막 표현’ 등으로 매도된다. 옥스퍼드 사전에서는 ‘독특한 방식에의 과도한 또는 부자연스러운 탐익’ 이라고 정의한다. 신플라톤주의의 교리와 함께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 보다는 예술가들의 마음속의 이상을 재현하는데 관심이 있었으며 더 큰 미적 효과를 추구하기 위해서 예술가의 독창성과 상상력이 강조되었다.
학자들에 따라 매너리즘에 대한 견해가 다르기는 하지만 공통된 특징을 살펴보면 16세기중반부터 후반까지 하나의 예술양식으로 자리를 잡아 본질에 따른 5가지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과도기의 예술양식
두 번째, 고전주의 양식의 완성에 표현에 대한 하나의 반발로서 특히 이탈리아에서 행해진 반고전주의적 양식으로 고전주의가 너무 정적이고 완벽한 것에 대한 반발로 긍정적으로 보기도 함
세 번째, 넓게는 16세기 유럽전체의 정신적 위기를 반영하는 양식
네 번째, 르네상스 문화의 계속된 발전으로서 그 고차적 미의 단계
다섯 번째, 인간 의식 깊숙이 숨은 비합리적인 것에로의 충동의 표현
2. 주제
매너리즘의 시대는 모든 면에서 긴장관계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봉건주의적인 중세 경제구조의 붕괴, 세계관의 혁명을 요구하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이외에도 정치를 종교, 정치세계에서 분리시킨 마키아벨리즘의 대두, 전쟁으로 인한 로마의 약탈 등은 15세기말 이래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종말론적인 기분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여러 가지 시대상황으로 인해 고전주의 예술의 긴장감 없는 균형의 공식은 더 이상 사람들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매너리즘은 고전주의의 너무 단순한 규칙성과 조화를 해체하고, 고전주의 예술의 초인격적 규범성을 더욱 주관적이고 더욱 암시적인 특징으로 해체 시키려한 노력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르네상스 예술 활동의 근원이었던 자연에서 벗어나서, 다음과 같은 미술의 양식적 기준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3. 양식과 기법
매너리즘은 르네상스 후기의 양식으로 바로크로 향한 과도기의 인식한다. 그 표현은 극도로 세련되고 곡선을 많이 사용한 복잡한 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왜곡된 원근법 등을 인용한 생각 밖의 구도와 명암의 콘트라스트와 깊숙이 짜여진 깊이에로의 표현에 의한 강렬한 효과, 환상적인 세부와 특히 부자연스러운 형태와 현실을 떠난 이상한 색채가 보인다. 불안정한 동감으로 풍부한 구도가 보이며 자주 등장하는 우의적(寓意的), 추상적 내용, 르네상스 이래의 본래의 고전적 성격과 대조가 작품에 보인다. 즉 왜곡되고 늘어진 구불거리는 형상, 인체를 길게 늘이는 과장된 표현, 차갑고 선명한 색조, 표면처리의 매끈함, 비논리적인 공간배치, 양식적인 속임수와 기괴한 효과, 몽상적인 분위기, 기괴한 배경에서 시대정신의 한 면의 표출로 보기도 한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후기작을 이 경향의 일부에 포함시키는 견해가 있으나 매너리즘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자연미가 아닌 세련미와 예술적 기교, 신비한 관념들을 추구하고 있다.
4. 주요 화가와 작품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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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코레조(Correggio)
코레조는 섬세한 명암 구사를 통해 윤곽을 부드럽게 하고 분위기를 자아내는 효과를 살렸다. 파르마 대성당의 돔에 그려진 프레스코〈성모승천 Assumption of the Virgin〉은 절정기에 이른 코레조의 화풍을 보여준다. 이 프레스코는 또한 극적으로 환상적인 바로크 양식의 천장화를 예고하고 있는데, 돔의 표면 전체가 조화로운 하나의 거대한 회화 단위로 처리되어 있어 마치 하늘의 궁륭 같은 느낌을 준다. 구름 속의 인물들이 관객들이 서 있는 실제 공간 속으로 튀어나올 듯이 그린 사실적 묘사 방식은 당시로서는 놀랍고도 대담한 단축법 표현이었다.
나. 로쏘 피오렌티노(Rosso Fiorentino: 1494-1540)
초기 작품에는 근본적인 매너리즘에로의 전향이 나타나진 않았지만 거의 원색에 가까운 강렬한 색채와 쌓아놓은 것같이 빽빽이 들어선 인물들에 의해 공간을 구성하고, 인물들을 길게 늘여서 표현하여 전체적인 구도는 수직구조를 나타내는 등, 그가 고전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에의 탐구를 한 것으로 보여 진다.
다. 틴토레토(Tintoretto; 1518-94)
틴토레토는 아름다운 색체와 형태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는 성서의 이야기를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그려놓은 사건의 긴장감과 극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자 하였다. 성서적인 내용의 상징성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주변의 다양한 모습들을 배경에 넣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는 천사 뿐 아니라 하인들 심지어 가축과 그릇들까지도 배경에 집어넣어 전체적으로 동적이도 산만하다 못해 어지럽기까지 하다. 여기서 다빈치 그림의 통일성과 안정감, 평정 등의 개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틴토렌토는 이러한 매너리즘적인 특성을 이용하여 자연적인 것을 초자연적인 것과 극적으로 대조시키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라. 파르미지아니노 ( Parmigianino : 1503.1.11~1540.8.24)
파르미지아니노는 전성기 르네상스 이후의 세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 우아하고 세련된 매너리즘 양식을 개발했다. 파르미지아니노의 성모화는 목이 길어서 ‘긴 목의 성모’라고 일컬어지는데 이것은 매너리즘(manierisme:기교주의) 특유의 포름으로 코레조풍의 섬세한 명암법을 살리고 빛의 효과를 구사하여 우아하고 세련된 화풍을 이룩하였다.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
매너리즘의 최대의 화가는 베네치아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스페인에서 작품 제작을 한 엘 그레코라고 할 수 있다. 엘 그레코는 크레타섬에서 태어나 거기서 고대 비잔틴 양식, 말하자면 실제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엄숙하고 딱딱한 양식으로 그려진 성상들에 친숙하게 되어 인습적인 형식을 즐기고 현실에 대한 탐색을 멀리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다가 그는 크레타섬에서 베니스로 옮겨가 그곳에서 티치아노로부터 빛과 색채에 관한 가장 진보된 지식을 배웠다. 베니스에서 다시 로마로 간 그는 미켈란젤로의 장대한 양식에서 고취된 유형적 형식들을 사용하는,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매너리즘을 알게 되었다. 또 베네치아로 자리를 옮긴, 원래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던 엘 그레코는 틴토레토의 그림을 보고 성서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표현하고자하는 충동을 느꼈다. 베네치아에서 그림 공부를 한 후에 그는 스페인의 톨레토에 정착했다. 그 곳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미술에 대해서는 중세적인 관념이 남아있는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반종교개혁의 정신적인 풍토가 그의 고양된 감정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엘 그레코의 작품은 많은 근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모더니즘의 초석이 된 작품들 중 하나인 피카소의 대표작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은 엘 그레코의 비범한 작품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에서 큰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섯 번째 봉인」